[카무오키] Jacob's ladder 1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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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이렇게 짧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히지카타의 결혼식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2주 동안 히지카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 했다. 잠깐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하루 종일 전화를 붙잡고 있거나 문서에 쌓여있었고 아니면 아예 자리에 없었다. 히지카타와 이렇게 오랫동안 말조차 하지 않고 지낸 적은 처음이었다. 대원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쿠리코가 드레스를 봐달라고 해서 드레스를 보러 다니고, 결혼 예식장도 함께 가보자고 졸라서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부장님도 안 그런척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고 계시나 봐요. 그런데 다 따라다니면서 봐주시는 거 보면. 절대 그런데 따라가실 것 같지 않은데"
"야야,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혼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뭐, 당연하긴 하지만.."
나는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자 빤히 귀 기울이는 나를 보고는 한 명이 물었다.
"전에 식당에서... 많이 혼나셨어요?"
"아니."
"와 역시 대장한테는 자비롭다니까요"
"자비는 무슨"
"그런 말을 우리가 했어 봐 아주 난리 났을걸요? 뭐.. 할 수 있는 깡이 있는 사람도 없겠지만"
하고는 나에게 부럽다 오키타 대장, 그런 용기. 역시 대장급은 다른가봐. 하고는 웃었다. 나는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피식 웃어 보였다.
다음날에 히지카타는 외근을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어쩐 일인지 쿠리코가 와 있었다. 나를 보고는 활짝 웃으면서, 오키타씨! 하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달려왔다. 그러고는 하얀 봉투에 은색의 고급스러운 스티커로 마감된 청첩장을 내밀었다. 봉투 앞에는 반듯한 글씨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청첩장이에요. 꼭 직접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좀처럼 오키타씨가 안 보여서 오늘은 직접 와버렸다구요! 제가 직접 드리는 거니까 꼭 오실 거죠?"
"아, 네 뭐.. 글쎄요"
"혹시 지금 안 바쁘시면 저랑 차 한잔 안 할래요? 저 지금 엄청 목마른데"
"아뇨 바빠서"
"그래도 잠깐 시간 내주시면 안되요? 저 오늘 오키타씨 때문에 일부러 여기 왔는데"
쿠리코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딱히 할 이야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구 뿌리치기에 이 여자는 뭔가 선이 너무 얇아서 격하게 뿌리치지 못 했다. 이런 모습이 히지카타는 좋았던 것일까? 그녀가 나를 끌고 간 카페는 핑크색으로 도배를 한 아주 여성스럽고 조용한 카페였다. 그녀는 커피를 주문했고 나에게도 물었지만 고르기가 귀찮아서 나도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얼마 전에 왔었는데 오키타씨만 못 만난 거 있죠? 그래서 계속 찾았는데 히지카타씨는 그냥 본인이 전해주겠다면서 달라는 거예요. 근데 뭔가 제가 꼬옥 전해주고 싶어서 절대 싫다고 했어요! 그래서 덕분에 오키타씨랑 커피도 마시고 좋네요"
"아, 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자 나에게 물었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요? 엄청 장난끼 넘치는 이미지로 봤었는데"
"어색한 사람하고는 말 잘 안 해요"
"그럼 이제 앞으로 저랑 친하게 지내면 되겠다"
이상한 말을 하고서 내 앞의 여자는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서는 마치 단짝 친구처럼 어떤 드레스가 예쁜 것 같냐며 제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음.. 이건 너무 많이 파인 거 같죠? 그럼 이건 어때요? 이게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이래요. 저는 이게 맘에 드는데 히지카타씨는 별론가.. 뭐가 예쁘냐고 물어봐도 딱히 속 시원한 대답이 없어요. 오키타씨는 뭐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딱히 무엇을 고를 생각은 없었지만 보여주는 사진의 이 여자도, 드레스도 예뻤다. 새하얀 드레스에 빛을 받아서 반짝반짝거리는 비즈 장식이라던가 작은 티아라라던가.. 여자들이 어째서 이런 것에 집착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전 잘 몰라서요."
혼자 잔뜩 들떠서 이건 이렇고 저렇고 하고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는 이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히지카타는 쿠리코씨의 어디가 좋데요?"
"음... 글쎄요? 물어본 적이 없는데"
"왜요? 궁금하지 않아요?"
"에이, 유치하게. 그냥 서로 좋다는 마음만 알면 되죠. 게다가 그런 걸 말해줄 것 같지도 않고. 저는 그냥 히지카타씨의 곁에 평생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행복해요."
생각만 해도 좋은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혐오스럽고 가증스럽기까지 해서 속이 뒤틀림을 느꼈다. 이성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이 여자가 마츠다이라 선생님의 딸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엑스트라급의 여자라면, 이 공간에 우리 둘 말곤 아무도 없었다면 당장 배를 걷어차고서 목을 졸라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에게 보여주던 핸드폰에 '애인'이라는 글씨가 팟 뜨더니 핸드폰에 요란한 밝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는 아, 전화 왔다! 하고는 잠시만요~ 하고 말하고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응~ 지금 오키타씨랑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어요~ 또 땡땡이친다고 혼내지 마요. 가기 싫다는데 내가 억지로 막 가자고 끌고 나왔다니까요? 청첩장도 줄 겸, 내가 입을 드레스도 보여주려구! 이게 다 히지카타씨가 속 시원하게 골라주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흥 나 정말 삐질 거야~ 나 그냥 오키타씨가 골라준 드레스 입을 거예요!
그러더니 조금 후에 전화를 끊고 나에게 말했다.
"히지카타씨는 내가 오키타씨 이야기만 하면 말을 자꾸 피해요. 왜일까요?"
".. 말하기 싫은가 보죠. 내 이야기"
"하지만 내가 봐도 히지카타씨에게 오키타씨는 가장 특별하던데요?"
쿠리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궁금한데.. 내 남자에게 특별한 사람이면 나에게도 특별하잖아요?"
'내 남자'라니, 나는 어이없음이 뒤섞인 비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에 이 여자는 본인이 한 말이 괜히 창피했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다가 쑥스러움에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아! 저... 이거 그냥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건데요.."
쿠리코는 약간 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히지카타씨 옛 애인이라던가, 알고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뭐, 알고 있다면 알고 있는 것만으로 더 화가 났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면 있긴 있었던 거 같긴 한데... 뭐, 사실 없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근데 말을 안 하니까 더 궁금한 거 있잖아요. 뭐... 오키타씨도 모르면 됐어요"
쿠리코는 내가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음.. 모르고 계셨구나. 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말 못할 법도 하죠. 그 새끼 완전히 빠져있었거든요. 아, 이런 이야기해도 되나?"
내가 운을 떼자 당황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조금 화난 것 같아 보였다. 하긴, 이 여자는 내 입에서 옛 애인이요? 에이, 히지카타는 지금까지 줄 곳 애인 같은 거 없이 일밖에 모르는 등신 새끼예요 하는 대답을 듣고 싶었겠지.
내 입으로 확인사살을 당한 이 여자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표정은 사뭇 진지했고 내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듯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히지카타에겐 비밀이에요. 그 새끼 전에 꽤 오래 만난 여자가 있었거든요. 저도 같이 자주 봤었는데 진짜 예쁜 사람이었어요. 엄청나게, 내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도 그 여자보다 예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게다가 실제로 그런 여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얼굴도 예쁜데 상냥하고 어떤 면에선 씩씩하기도 하고... 내가 여자였다면 신은 정말 불공평하다고 말하면서 완전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완벽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도 그렇고, 히지카타도 그렇고.. 그분 말이면 아무 말도 못했어요. 묘한 카리스마..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우리가 너무 좋아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 한마디면 우린 바로 설설 기었거든요. 히지카타도 그 여자 말이면 넙죽 엎드릴 정도였다니까요. 상상이 잘 안가죠?"
"아하.... 네에.. 그러네요"
"사실 분명히 그 여자랑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두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했었거든요. 내가 보기엔 여자 쪽이 백배천배 아까웠지만"
"...오키타씨도 많이 만나신 분인 건가요?"
"네, 뭐.. 히지카타랑 이렇게 악연을 이어온 것도 그분 때문이에요"
"저..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그럼 왜 헤어졌나요?"
...
".. 히지카타 그 새끼가 차였겠죠 뭐. 그래서 아직도 못 잊었잖아요"
이 여자에게 누나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히지카타는 누나의 남자임이 분명하고 영원히 너 따위의 저급한 여자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이며, 내가 잠시 너 같은 여자를 보면서 누나가 생각이 나서 멈칫했던 적이야 있지만 저급한 너 따위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야. 그러니 평생을 볼 수도 없고, 히지카타는 말도 해주지 않을 우리 누나의 존재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면서 치를 떨며 살아.
"못 잊었다뇨?"
내 말에는 갑자기 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아, 실수예요 그 말은 잊어버리세요."
당황한 듯이 손을 내저으면서 웃으면서 말했고 내 의도대로 이 여자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웃으면서 나에게 드레스 입은 사진을 보여주던 그 화사한 얼굴에 어둠이 옅게 드리워진 것을 보자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급 기분이 좋아진 나는 방금 전 그녀가 내밀었던 청첩장을 과격하게 뜯었다. 안에는 새하얀 청첩장이 얌전하게 들어있었다.
"신부, 마츠다이라 쿠리코. 신랑 히지카타 토시로... 축하해요. 갈 수 있으면 꼬옥 참석할게요"
나 역시 그녀처럼 '꼭'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그 말을 하고는 더 이상 놀아버리면 히지카타가 또 지랄할 테니 가야겠네요, 하고 간략하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쿠리코의 질투 어린 표정을 보면서 나는 꽤나 희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마냥 즐거웠다.
몇 일후, 아무 일 없이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곳에 참석을 해서 그 여자의 표정을 한 번은 더 봐두고 싶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 친하기로 유명한 내가 결혼식도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이상하게 비춰질 것을 감안해서 준비를 하고 나섰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나를 보곤 어서 오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쿠리코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며 손수 나를 데리고 그녀에게 안내했다. 아직도 조금은 질투심에 가득 찬 그 여자의 표정, 가장 행복해야 할 그 순간의 표정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웃으면서 뒤따라갔다.
쿠리코는 반짝이는 흰 드레스를 입고 하얀 장미와 분홍 장미가 적절하게 섞인 커다란 부케를 들고 웃으면서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서 저를 찾아온 지인들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나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누나가 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면 훨씬 더 눈이 부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되려 내가 우울해지고 갑자기 울컥해버려서 눈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어머, 오키타씨!"
그 여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어주었다. 내가 기대했던 어두움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와주셨네요? 저, 너무 기뻐요! 오키타씨가 오셔서 히지카타씨도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하하.. 아니에요, 당연히 와야죠"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식장 안으로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자 나를 알아본 대원들이 주위로 와서는 앉았다. 대장, 부장님 신혼여행은 이틀 정도 가신데요, 아, 아쉬워라. 왜 이렇게 짧게 가신담, 쉬실 거면 좀 푹 쉬시지.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이 상사면 아래가 피곤하다니까요. 쿠리코씨는 한 술 더 떠서, 이틀이나 가도 괜찮냐고 물어봤데요. 안 가도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고 그러셨다던데.. 끼리끼리인 건가.. 이렇게 바쁜 남자라는 걸 아는 여자라 그런 건가.. 뭐.. 이런 걸 다 배려해주는 여자기 때문에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겠죠? 부장님도.
미친 소리하네. 뭐, 처음이야 좋겠지. 저 여자는 명백하게 더럽고 치사한 거짓말을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했을까? 히지카타 정도라면 대충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파악도 잘 했을 텐데. 범죄자가 아니라서 몰랐던 걸까? 제 아빠가 경찰쪽 사람이라서 정말로 이해를 한 것일까? 역시... 싫어.
히지카타는 바빠 보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참 나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와도 그냥 소소한 대답 만을 하면서. 눈을 먼저 돌린 것은 나였다. 우리는 그날 그 혼잡한 결혼식장에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아니, 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리고 히지카타는 결혼식이 끝난 그 길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다른 대원들의 환호의 뒤에서 장식된 자동차가 떠나는 모습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다가 합숙소에 돌아와서는 핸드폰을 끄고 하루 종일 잤다. 안대를 하고 귀에 이어폰도 꽂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는 라디오의 잡음 같은 만담을 들으면서 서서히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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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카타가 없는 다음날은 너무나도 허전하고도 조용했다. 다른 대원들은 완전히 휴가라면서 부장님이 안 계시니 나가서 술을 미친 듯이 마시고 들어오자,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서 보자, 야한 영화를 밤새워서 보자는 둥 다들 시끌벅적했다. 나도 겉으로는 웃어 보이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히지카타의 부재는 우리 모두에겐 축제였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건조한 모래사막 위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자꾸만 타는 듯이 목이 말랐다. 어차피 하루 정도만 기다리면 되는 별일 아닌 일이었지만 그가 돌아온다고 한들, 나의 갈증은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이미 히지카타의 옆에는 누나와 나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그가 우리를 전처럼 생각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오기 몇 시간 전, 대략 1시간 정도를 남겨두고 잠시 순찰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갔다. 돌아온 히지카타에게 웃으면서 다녀왔냐고 물어볼 자신도 없고, 이제 합숙소가 아닌 자신의 신혼집으로 향할 그의 등을 바라보는 것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는 맥주를 한가득 샀다.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술을 사본적이 없었다. 낑낑대며 들고 와서는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엔 예전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버리지 못한 엄마, 아빠, 누나의 신발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문득, 히지카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물론 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혹시나 둔영에 와서는 소고녀석은 어딜 갔냐면서 묻다가 아무도 모르는 내 행방을 찾다가 찾다가 역시 이곳에 올 것 같았다면서 문을 두드려 온다면.. 만약 그런다면 여행을 갔다 왔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라고 욕해주고서 문을 쾅 닫아버려야지.
비밀번호를 바꾸고 사온 술들을 텅 비어있는 냉장고에 모조리 집어넣고 소파에 앉아서 한 캔을 홀짝홀짝 마셨다.. tv에서는 꽤나 유명한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중계되고 있어서 멍하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웃긴 이야기도 있고 슬픈 장면도 있었다.
Tv소리를 작게 줄여놓고 거실에 누워있다가 잠에 들었다. Tv소리조차 없다면 조용한 적막함이 내 목을 졸라올 것 같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 소리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래도 이번에는 비교적 편하게 꿈도 꾸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깨운 것은 쾅쾅 하고 다소 과격하게 울리는 발길질 소리였다. 자리에 일어나 앉아서 문쪽을 바라보았다. 비밀번호를 열으려 달그락하는 소리, 틀린 비밀번호를 눌러서 나오는 오류음.. 히지카타다. 휴.. 하고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와줬구나. 그리고 나는 문을 벌컥 열면서 반가움과 함께 짜증 섞인 말투로 소리쳤다.
"미친 새끼야 조용히 해! 동네 사람들 다 깨울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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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아부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털털하게 나에게 다가와 주었다. 나 역시 평소라면 잊고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이번엔 그저 내가 조금 찜찜해서 한마디 건넸다.
".. 요즘 내가 조금 예민한가 봐"
"응?"
"그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너 하는 짓에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어떻게 살아있겠냐? 이미 병 걸려서 병원 침대에 사형선고받고 누워있을 거다"
하고는 뭐가 웃긴지 하하, 하고 거창하게 웃었다. 하긴, 뭐. 그래서 나도 웃어 보였다.
내가 누굴 찾는지 궁금해? 하고 묻고 싶었지만.. 이런 건 나 스스로에게 독이 되는 말이 될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아마 저 새끼도 뒤로 나를 조사해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아마 나보다 먼저 찾아낼지도 모른다. 이미 내가 저에게 숨기고 있다는 것부터 내가 이상한 짓을 한다고 판단하고서 특기인 그 처세술로 대상에게 접근해서는 어떤 미친 새끼가 널 찾고 있으니 어서 도망치라며 도와주고 있을 수도 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놓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그렇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한다면 커다란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왜인지 아부토에게는 별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 요즘은 나와 관계가 조금 이상해진 바람에 극단적인 행동이야 힘들겠지만.
실제로 아부토는 내가 수상하다며 사람을 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 고아원 원장이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몇 번이나 귀찮게 연락을 해왔고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고 시큰둥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이라도 찾아와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절대로 찾아가지 않겠다는 완강한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왜 저렇게 나에게 와달라고 이야기를 하나 조금은 궁금해져서 한 번쯤은 가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나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그때 나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었는지, 내가 어디에 가는지 알려주지 않고 밖을 나서자 아부토는 그런 내가 분명히 이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는 사람을 붙였다. 분명히 잘하는 새끼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제일 뛰어난 새끼를 붙인 것이겠지만 그 새끼도 결국 그 정도의 급이었다. 들킨 그 새끼는 역으로 나에게 뒤를 밟히면서 나에게 목이 뜯겨 죽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과 옷 때문에 갈 수 없게 돼버리자 다시금 아, 내가 왜 가려고 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바닥엔 떨어진 내 핸드폰이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 잠겨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 하면서 청록색, 핑크색, 검정색, 흰색이 왔다 갔다 하면서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 새끼 머리를 들고 가면서도 화가 주체되지 않았다. 곧바로 아부토에게 찾아가서, '스토킹은 질색이니 다시는 이딴 헛짓거리 하지마.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하며 들고 온 축축한 머리를 앞에 툭 던졌다. 아부토는 잘려진 그 머리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이내 쿡쿡 웃으면서, 아이고- 설마 했지만 정말 들킬 줄은 몰랐네, 미안해 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그 이후론 두 번 다시 나에게 사람을 붙이진 않았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아부토가 나에게 있어서 나쁜 의도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뜬금없이 머릿속에 팟 하고 떠오르는 일이 있다.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일. 그런 일은 대체적으로 쓸데없고, 시간 낭비뿐인 일이 대부분인데 그걸 알면서도 꼭 실천하게 된다. 지금이 그렇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그 녀석과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곳. 2층 침대가 있고 천장엔 싸구려 야광 별들이 반짝이던 집. 지금 그곳엔 아마 다른 사람이 살고 있겠지만 그래도 뜬금없이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하고 나가자 아부토는 자신은 피곤하다며 먼저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보통은 기다려서 같이 가자고 하거나 아니면 뜬금없이 어딜 가냐며 꼬치꼬치 캐묻을 때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걸 묻지 않아서 좋았다. 나가는 뒤에 대고 아부토는 조용히 갔다 와 이 녀석아! 하고 외쳤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찾아간 집 근처는 많이 바뀌어 있지는 않았다. 나의 좋은 기억이 잔뜩 있었던 곳이라서 그런지 몸이 이상하게 후들후들 떨렸다. 분명 아무 흔적이 없을 것도 알고, 이미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한창 드나들던 때의 몽롱한 석양빛 기억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어머, 여기 살았었던..... 오키타씨네 아들 맞죠?"
"네?"
"아직 여기 살고 있었구나.. 그 가족이 아무도 안 보여서... 뭐 안 좋은 이야기도 있고 하긴 하던데 그렇다고 집을 판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도 드나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된 걸까 했는데..."
예전에 우리 가족을 종종 봤었던 근처의 사람인가 보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서 등을 돌렸다. 아직 집을 팔지 않았고 드나드는 사람도 못 봤다는 건 뭘까?
집 앞에 서자 닫힌 문이 조용하게 버티고 있었다. 집을 팔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하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오류음이 울리면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잘못 눌렀을까? 다시 눌렀다. 또다시 울리는 오류음. 또다시 또다시 눌러도 그 번호가 아니라는 경고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문을 부숴버릴까 했지만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아부토의 조용히 다녀오라는 말이 생각나서 홧김에 문을 여러 번 발로 걷어찼다. 씨발, 난 도대체 뭘 바라고 온 거야. 그렇게 애꿎은 문에 화풀이를 하고 돌아가려 등을 돌렸을 때,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짜증 섞인, 내 귀에 꽤나 익숙한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친 새끼야 조용히 해! 동네 사람들 다 깨울 일 있어?"
돌아보니 그 녀석이었다.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도 무엇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 어떤 말을 꺼내지도 못 했다.
".... 어...?"
오키타 녀석도 내가 올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는지 문을 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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