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텁석에쿠] 석양볕

2016. 12. 5. 09:54










스산한 공기가 기분 나쁠 정도로 무겁다. 게다가 몸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작은 촛불 따위를 끄려 후 하고 불면 그 작은 입김만으로 영원히 소멸할 것 같았다. 시게오에게 영소의 대부분이 날아갔고, 그 후에 그것도 모자라서 왠 금발의 꼬맹이에게는 소멸당할 뻔도 하였다. 최악의 상황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게오와 그 금발 꼬맹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에쿠보는 티끌만 한 크기로나마 간신히 영체를 유지하고서는 길을 걸었다.


순탄치 않았다. 가는 도중 돼지, 개, 심지어 작은 쥐의 영에게도 도망쳐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고 잔뜩 지쳐있었다. 저보다 작은 생물의 움직임에 반응을 보이는 소동물들은 에쿠보가 도망치는 그 움직임에 호기심을 품고는 쫓아왔다. 저리 가! 따라오지 마! 살려줘! 하지만 뒤에 있는 거대한 생물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거대한 앞발로 그를 밟으려 내딛고, 에쿠보는 그 커다란 그림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쳐다보지도 않던 가축의 영들에게 쫓기는 처지라니.. 상급 악령으로 기세등등했던 자신의 모습이 마냥 그립기만 하였다.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이쪽으로 와! 하고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턱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벼룩을 타고 다닐 정도로 작은 영이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그 작은 손을 허겁지겁 잡고서 벼룩의 등에 올라탔다. 잔뜩 지친 에쿠보는 그제야 눈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았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작은 영은 그를 위로해주듯, 이제 괜찮을 거야 하고 어쭙잖은 위로까지 건네었다. 그 말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성기 때엔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들.. 지금은 이런 녀석에게 구해질 정도로 하찮아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애석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기에 그런 위로도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난 텁석부리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에쿠보"

"그렇구나 잘 부탁해"

"..그래"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돌았다. 조금은 불편한 듯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 텁석부리는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텁석부리가 워낙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에쿠보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살아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은 많지 않다. 텁석부리도 살아있는 시절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냥 사라지기 싫었을 뿐이고.. 이승에 무슨 원한이나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목적도 없이 세월만 훠이훠이 지나가더라..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난 죽어도 딱히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언제나 혼자 하루하루를 살고 나서 왜인지 영이 이렇게 작아졌어"


"아.."

"에쿠보 너도 그렇지?"

"음.. 글쎄.."

"같은 처지에 잘 지내자"


텁석부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무기력한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텁석부리는 오랜만에 본 에쿠보가 반갑고 좋았다.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신을 보며 귀찮은 듯이 바라보는 눈도, 초록색 빛을 발하는 영체의 빛과 양 볼에 귀엽게 자리한 빨간 반점도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만 말도 통하지 않는 벼룩 노치와 함께 작고 허름한 오두막에만 누워있는 것은 조금은 외로운 일이다. 사람이 정말로 죽을 때는 외로울 때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미 죽어서 영이 되어버린 텁석부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외로움을 덜어주는 상대를 만난 것은 그에게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되었다.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혹시 살아있을 때 꽤나 가까운 인연으로 닿아있었던 사람은 아닌가 하고 혼자서 상상하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조급해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서 텁석부리는 근처에 같이 산책이라도 가자면서 에쿠보에게 제안했다.


"웬 산책?"


반응이 조금은 떨떠름했다.


"음.. 아니 네가 조금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뭘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

"산책.. 그래 할까?"


텁석부리가 자신을 조금은 생각해준다고 생각한 에쿠보는 크게 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 의견에 순응했다.

그렇다고 해봤자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잡초 풀,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소동물의 영들, 조금 올라와 있는 황폐한 언덕, 척박한 자갈밭..


"저쪽으로 가면 호수도 있어. 작지만."


조금은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는 텁석부리를 보고 에쿠보는 조금은 그에 대한 경계가 풀어졌다. 

텁석부리의 안내에 따라서 함께 간 그 호수는 그렇게 맑고 깨끗한 곳도 아닌 데다가 근처의 풍경이라도 해봤자 드문드문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까맣게 문드러진 나무가 으스스하게 서있고 정리되지 않은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란 곳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서 청결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텁석부리가 이런 곳까지 찾아서 안내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텁석부리는 잡초가 별로 많지 않은 곳을 찾아서 안내하고서는 이곳에서 조금 기다리면 해가 진다며 그 광경이 꽤나 예쁘다고 했다.


"살아 있을 때에도 무기력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광경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한 후에 꼭 이렇게 해가 지는 이 광경을 보고 헤어졌을 거야. 나는 오늘 너와 영체가 되고 나서 첫 번째 데이트를 하는 거야. 사람의 영과는 온 적이 처음이거든!"


"데이트 같은 소리.."


에쿠보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덧 하늘이 비치어 파랗게 빛나던 호수가 붉은색 잉크를 떨어트린 것 마냥 점점 붉은빛으로 불붙었다. 잡초들도 나무도 붉은빛을 발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텁석부리는 옆에 앉아 있는 에쿠보를 바라보았다. 초록색의 영체에도 붉은빛이 반사하고, 눈동자 역시 붉은빛이 맺혀서 반짝이는 하나의 구슬 같았다. 늘 혼자 봐왔기에 몰랐던 눈동자에 맺힌 주홍빛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 텁석부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는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에쿠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커졌다. 가축들의 영에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이 되었을 때 그런 에쿠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텁석부리는 말했다.


"에쿠보.... 어쩐지 너 조금 커지지 않았어?"

"응, 하지만 아직 멀었어"

"어째서 커지려고 하는 거야? 우린 죽었어!"


텁석부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꽤나 흥분한 듯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조금은 화난 듯 보이기도 했다. 에쿠보는 그런 텁석부리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텁석부리가 그와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몹시 언짢았다. 그는 상급 악령이다. 그런 벼룩의 영과는 다른 차원의 악령인 것이다.


".. 텁석부리.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이 몸은 너와는 달라. 어째서 너는 너 자신을 나와 동일시하는 거야?"


"에쿠보.. 너나 나나.. 이미 죽었잖아.."


"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쿠보는 말했다. 이 몸은 신이 될 몸이야! 이런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돌아가서 시게오를 마음껏 이용하고 틈을 봐서 몸을 차지한 다음에 세상의 신이 될 거라고!


"신...?"


텁석부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니? 게다가 신이라니.. 그래서 에쿠보는 그렇게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텁석부리는 다시금 외로워졌다.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고, 충분히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상대가 신이라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니.


그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에쿠보는 조금씩 몸이 커져가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처음에 맞잡았던 에쿠보의 손을 이제 다시 맞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자신의 손은 이렇게나 작은 것일까?..





자꾸만 커지던 에쿠보는 어느 날 새벽 떠나겠다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텁석부리 지금까지 돌봐줘서 고마웠어"

"..."


점점 커지는 에쿠보를 보면서 언제 떠난다고 말할지 불안해 떨고 있었던 텁석부리였지만 예상을 한다고 해서 슬픈일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텁석부리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눈물을 가득 삼키고 있기도 했고, 돌아보면 다시 혼자가 되어버렸다는 외로움이 더더욱 실감이 나서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왜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험한 상황에 이 몸을 살려준 은인이잖아. 고마웠어. 잘 지내."


에쿠보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그대로 길을 떠났다. 그는 전혀 서운하다거나, 미련이 남은 듯한 한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이미 해는 지고 어두운 어둠이 무겁게 깔려있다. 조용한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고, 벼룩의 영인 노치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며 바스락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한참을 이불을 적시다가 결심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노치의 등을 탔다. 


노치! 어서 가자! 에쿠보에게 가야겠어!


노치는 마치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등을 내주었다. 노치가 그렇게 열심히 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잘은 몰라도 노치도 에쿠보에게 조금은 정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서 말갛게 빛나는 에쿠보의 초록색 영체가 보였다.


에쿠보!!!


텁석부리는 크게 외쳤다. 하지만 에쿠보는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커진 몸집 탓에 이제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에쿠보!!! 에쿠보!!


그는 다시금 힘차게 외쳤다. 그의 격정적인 외침이 들렸는지 에쿠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돌아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어째서 자신이 에쿠보를 필사적으로 쫓아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자신의 외침이었다. 아! 나는 에쿠보의 일부가 되고 싶었구나..! 에쿠보와 처음이자 마지막의 데이트에서 본 붉은 석양을 늘 함께 보고 싶다...! 핏빛 석양이 빛나는 그의 눈동자의 일부가 되고 싶다...!


에쿠보...! 나를 흡수해줘...! 나도 함께 데려가 줘....! 제발 부탁이야...!


텁석부리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어찌나 크게 외쳤는지 머리가 띠잉하고 울릴 정도였다.


에쿠보....! 제발!!! 나를 흡수해줘...!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난 너무 작아서 너에게 커다란 도움 같은 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 아냐, 그만둬. 돌아가...!


어째서 그러는 거야! 나를 흡수해줘...!제발...!


에쿠보는 맹렬히 쫓아오는 그가 무서웠다. 작은 그의 푹 패인 검은 눈에 이상하게 광기가 서려있었고 너무 크게 소리를 쳐서인지 목소리 조차 기괴하게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에쿠보는 자신이 커지기 전의 작은 상태에서 저런 광기어린 텁석부리를 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만둬.. 왜 그러는 거야...


에쿠보...! 나.. 난 너의 일부가 되고 싶어...! 나도 데려가 줘....!!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낀 에쿠보는 곧바로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흡사 쫓고 쫓기는 관계였다. 에쿠보도 텁석부리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텁석부리도 살면서 어떤 존재를 이렇게 필사적으로 쫓아본 적이 처음이었고, 에쿠보다 이렇게 작은 존재를 피하려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도 처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뒤를 돌아보니 텁석부리는 없었다. 에쿠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역시 무기력한 그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아오다가 그의 본 모습을 되찾고는 에라 모르겠다 싶었을 것이다. 











-

노치도 텁석부리도 커다란 에쿠보가 달리는 것을 쫓기엔 무리였다. 텁석부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흡수해달라는 그의 소원마저 매정하게 뿌리치고 간 에쿠보를 원망했다. 처음부터 그를 구해준 것이 잘못이었을까? 다시 혼자 남아버린 텁석부리는 자신을 동정했다.. 다른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는 이미 에쿠보를 만나기 전의 자신과는 또 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내일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서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텁석부리는 한켠의 허한 가슴을 움켜잡고 계속해서 울었다.. 눈물이 뜨겁게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왔다. 이제 그는 다시는 석양을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난 텁석부리는 조금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이상한 징조를 느꼈다. 왜인지 갑작스럽게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뭘까? 이 답답함. 텁석부리는 바람이라도 쐴 겸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선 노치를 불렀다. 


노치, 어딨니? 산책하러 가자


노치는 멀리서 달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노치를 탈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다가온 노치는 너무나 작아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노치를 바라보면서 노치가 맞느냐고 물었다. 노치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평소에 앉아 있던 머그컵 잔으로 달려가보았다. 항상 앉아 있던 그 머그컵. 평소엔 그 머그컵의 안을 내려다보려면 낑낑대며 기어올라가야 했던 그 머그컵을 이제는 발꿈치를 들면 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텁석부리는 깨달았다.


아...! 나도 살아있구나...! 


에쿠보와의 만남으로 그는 조금은 변화하고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는 점점 더 커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에쿠보가 어째서 그렇게 커지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쿠보가 신이 된다는 야망을 품었다면.. 그는 에쿠보와 석양을 볼 두 번째 데이트를 상상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텁석부리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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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쓴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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