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싸

[쇼우리츠] 햄스터 04

2017. 7. 10. 23:06



-











내가 본 엄마와 아빠의 끝이 이렇다고는 하지만 모든 사랑의 끝이 이렇게 더럽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만 보아도 평생을 사랑하는 둘의 이야기를 그려놓은 이야기들이 흔하지 않은가? 서로를 끝끝내 잊지 못하는 진실한 사랑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기적처럼 만나고,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은 사랑을 보여주며 정말이지..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어요...! 하고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을 보면 아.. 정말로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은 있구나..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기도 한다. 


그런 영화를 보고있자니 뜬금없이 의문이 생겼다. 엄마와 아버지는 왜 저런 진실한 사랑을 품은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는가? 어째서 저런 영화같은 사랑을 하지 못했는가?


세리자와는 아버지의 곁에 가장 오래 있는 사람이고 지금 현재로는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니 세리자와는 알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리자와에게 아버지는 왜 엄마를 떠나게 내버려 두었는지, 세계정복을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이유 말고 조금 더 제대로 된 이유를 듣고 싶었다. 그런 이상한 이유로도 헤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나로써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말 이유였다면 아버지가 엄마를 진심으로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묻는다면 세리자와는 분명 또다시 과도한 충성심을 불태우며 그 여자가 사장님의 커다란 뜻을 모르는 거야!라고 발끈하며 지루한 설교를 늘어놓을 것이 뻔하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질문을 돌려서 물었다.


"세리자와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있어?"

"응? 갑자기 그런 이야기는 왜?"

"갑자기 궁금해져서. 왜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이상할 정도로 깊은 사랑이 정말 있을까.. 하는 그런.."

"당연하지!"

"아.. 그래?"


너무 묻자마자 강력하게 대답하는 세리자와의 태도에 되려 당황해버렸다.


"원래 그렇잖아.. 내가 정말 죽을 정도로 힘든 때라던가.. 그럴때에 나를 변화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은 정말이지 평생을 가도 잊을 수 없게 되잖아... 물론 꼭 그런 특별한 이유가 아니어도 빠져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야.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람의 감정이기도 하니까. 뭐든지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 아.. 그렇구나"

"응 당연하지!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계산해야 해 쇼우군.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침착해야 한다? 무엇을 주더라도 다 주면 안 돼. 항상 계산해야 해. 그렇지 못하다면 그 순간 돌아설 거야. 절대로 상대방에게 커다란 믿음은 가지지 않는 게 좋아. 그 사람을 지나치게 믿어버린 다음의 이야기는 별로 아름답지 않아. 그 사람이 떠나는 일 밖엔 남지 않거든"

".... 음.. 일단 난 줄 것도 없는데?"


아버지는 돈이 많을 수도 있지만 아버지의 관심 밖인 나는 남들보다 조금 많은 용돈 외엔 별로 가진 게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엄마가 버려둔 고양이, 어항 속을 돌아다니는 햄스터... 외에 또 있나?


"무언가를 주지 말라는 이야기가 중점은 아니지만.... 뭐, 일단 뭐든 그렇거든. 다 주면 안 돼. 상대도 나에게 다 준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항상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는 세리자와의 단호한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조금은 우물쭈물하다가 물었다.


".... 엄마도 그랬을까?"


내 질문에 표정이 굳는 세리자와를 보며 실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었기 때문에 눈치를 살피며 다시 말을 했다.


"..그러니까, 큰 뜻은 없.."

"....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야?"


세리자와는 내가 입 밖으로 꺼낸 엄마라는 단어가 싫었는지 자리를 벌떡 일어나서는 화난 듯이 문을 콰앙 닫고는 자리를 떠났다. 세리자와는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이상하고 알 수 없는 말만을 혼자서 말했다. 조금 더 캐묻고 싶기도 했지만 이미 감정이 상해 나가버린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고,(사실은 붙잡고 싶지 않았고) 더 이야기해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리자와의 대화 후에 리츠에 대해 생각하다가, 리츠를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는 병동에 견학 차원의 의미로 데려가 주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거대하지 않다. 단순하게 리츠가 옥상에서 되려 나의 짐을 덜어주며 잡아주었던 손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이다. 다시 그 손을 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각이 자꾸 나를 웃게 만들었다는 것도 큰 이유 중에 하나다. 리츠라면 그런 병동을 보고 나를 더욱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얼마나 이런 거지 같은 아버지 밑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이런 상황을 이겨낼 가장 좋은 명답을 찾아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츠같이 완벽한 사람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확률이 얼마나 되며, 그런 사람이 나와 이렇게 가깝게 지낼 수 있을 것이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가를 지금의 리츠를 좋아하는 만큼 좋아할 수 있을까? 











-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이것에 대해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린 서로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연결해놓았다고 생각한다.


별이 총총 떠있는 밤이다. 우리는 리츠의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서 잠깐 만났다. 나는 사가지고 온 음료수를 건네주었고 리츠는 고맙다며 받아들었다. 그네에 앉아서 함께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사소한 이야기를 했다. 이상하게 꿈을 꾸고 있는 듯이 몽롱해서 서늘한 밤공기가 너무 달콤하게 느껴졌다.



뭐 했어?

음.. 형도 나가고 해서 그냥 집에서 집안일도 도와드리고.. 책도 보고..

와 재미없어

참나, 그러는 넌 뭘 했는데??

나는 집에서 고양이랑 같이 마하 파이터 후토시4를 봤어! 다시 봐도 정말 명작이야!

으 재미없어

아냐! 완전 감동적이야! 다음에 나랑 같이 보자! 우리 집에 놀러 오면 내가 다 준비를 해 놓을게!

집? 아 그래.. 뭐 다음에

그때 고양이도 보여줄게!

그래

리츠 넌 뭘 좋아해?

응? 내가 고양이를 안 좋아하는 것 같이 말했나? 아냐, 나 고양이 좋아해!

그래? 나는 네가 좋아


내 말에 리츠는 잠시 조금 놀란 듯이 말을 멈추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선 작게 말했다.


뭘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거든?

나는 다른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할 자신이 없어.

아.. 그만해

왜? 나는 지금 내 심정을 말하고 싶은데....


내 말에 리츠는 대답 없이 귀까지 빨개져서는 바닥만 쳐다보았다.


나는.. 너와 이렇게 학교가 아닌 집 앞의 놀이터에서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는 사이라는 게 너무 좋아.

...

나에게 이런 행운이 또다시 찾아올까?

...

리츠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나도 널 만난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 하고 말했다.


뽀뽀해주면 안 돼?

아.. 안돼

왜?!

집 근처잖아. 혹시 누군가 지나가기라도 하다가 보면 어쩌려고...

그럴 일 없을 것 같은데.. 아무도 없잖아

어쨌든 안돼!

음.. 그럼 손잡고 조금 걷자! 그건 괜찮지?


또다시 리츠가 안된다고 말할 것 같아서 바로 일어서서는 리츠의 손을 잡고 잡아끌었다. 리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반대쪽을 필사적으로 바라보았다. 잡고 있는 손이 긴장 탓에 옅은 땀이 살짝 베는 것도 같아서 괜히 나조차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저.. 리츠

..응

내일도 만날까?

... 내일?"

응. 오늘은 너희 집 근처에서 만났으니까 내일은 우리 집 근처로 와

너희 집?

우리 아버지의 연구소. 가고 싶어 했잖아. 같이 가자











-

리츠는 다음날 저녁 내가 본 모습 중에 가장 상기된 모습으로 나를 찾아왔다. 정말 행복해했다. 리츠가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본 것 같다. 아.. 아니지 리츠가 자신의 형 이야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 오늘이 처음이다. 항상 침착한 리츠가 나의 손을 덥석 먼저 잡고서, 스즈키 스즈키! 지금 가면 혹시 다른 직원분들도 계실까? 그럼 어떻게 하지? 나 인사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해? 하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음..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아마 없을 거야. 시간도 늦었고.."

"아.. 그런가? 어쩔 수 없네.. 가서 구경하고 다음에는 너희 아버지도 뵙고 싶어"

"응?"

"너희 아버지 말이야!"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대단한 사람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세리자와 밖엔 없었다. 세리자와의 광적인 반응은 좋아하지 않지만 리츠가 우리 아버지를 이렇게 대단한 것처럼 언급해주는 게 굉장히 신기하기도 하고 항상 멀게만 느껴지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나에게 조금은 큰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 그래 뭐..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 넌 정말 좋겠다. 이렇게 굉장한 아버지도 계시고 말이야"

"그 정도는 아닌데.."

"멋있잖아!"


그런가? 나는 멋쩍은 듯 웃었다. 이렇게 기대에 차있는 리츠를 보니 약간의 불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왜 리츠를 이곳으로 데려올 생각을 했을까? 정말 리츠는 이곳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까? 이것을 본 리츠가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만의 가장 큰 착각이었으면 어쩌나. 리츠의 손을 잡고서, 그 거대한 하얀 건물 가까이에 와서야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건물에 붙어있는 거무스름한 창문이 어쩐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음.. 근데 아무도 없으면 어떻게 들어가?"

"내 지문이 등록되어 있으니 상관없어"


지문을 찍으니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서 <스즈키 쇼우>라는 이름과 함께 어서 오십시오 하는 기계음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역시나 그곳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불을 켤까 하고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 불을 켤 수 있는지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정체 모를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파란 빛만이 우리의 시야를 도와주고 있었다.


"스즈키, 괜찮아. 혹시 몰라서 내가 손전등도 가지고 왔어. 그냥 올라가자"


리츠는 설렘에 가득 찬 모습으로 손전등을 꺼내어 스위치를 올렸다.


"뭔가 탐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가 뭔가 재밌어. 어릴 때 형이랑 같이 어두운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이런 식으로 돌아다닌 적이 있었거든. 형도 나도 어렸을 때 니까 둘 다 엄청 울면서 돌아다녔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어. 형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거든. 그러면서 본인도 울면서 나에게 울지 말라고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말하는 거야. 다행히 바로 부모님을 만났지만.. 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귀여워.. 그치?"

".. 기억력이 좋네"

"응! 나 일기 쓰는 것도 좋아해서 가끔 읽어보거든. 형이랑 있었던 일들이 대부분 일기장에 적혀있어"

"그 일기장에 내 이야기도 있어?"


내가 묻자 리츠는 아무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고서 아! 여기에 있네, 엘리베이터. 이거 타고 올라가자! 하고는 나에게 손짓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도 나는 계속 머뭇거렸다. 정말 데리고 가도 될까 고민이 되었기 때문에 층을 누르는 것을 자꾸만 고민했다. 리츠는 손전등으로 번호판을 비추어 보더니, 8층 옆에 <초능력 개발실>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판을 보고는 고민 없이 8층의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는 화살표를 바라보면서 내 옆에 기대에 찬 리츠에게 말했다.


"저기... 리츠."

"응?"

".. 네가 상상하는 것만큼 멋있는 곳이.. 아닐지도 몰라.."

"하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이곳에 데리고 오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

"..."


리츠는 내가 이해가지 않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놀랄지도 몰라"

"..."

"아니.. 아마 정말 놀랄 거야. 하지만 그만큼 내가 널 믿고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줬으면...."


말이 끝나기 전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리츠는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 나를 보다가,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의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전등으로 그곳을 비춰본 순간.. 그곳에 보인 유리관에 고문의 흔적이 보이는, 피를 뒤집어쓴 어떤 남자의 형상이 손전등의 빛을 받고서 환하게 보였다. 하얗게 뒤집어 까인 눈, 머리에 쓴 이상한 황동 빛의 헬멧, 그리고 희미해진 심박수를 힘겹게 체크하는 기계, 그 옆에 보이는 날 선 고문 도구들.. 리츠는 보자마자 손전등을 떨어트렸다. 굴러다니는 손전등의 빛을 받은 바닥에는 시체인지 뭔지 모르는 동물과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핏자국이 흥건한 바닥이 환한 빛을 받아서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리츠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로 하얗게 질려서는 손으로 입을 막고선 엘리베이터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 내가 왜 고민을 했는지 알겠지...?"

"... 아... 아... 아니 이게.... 뭐..... 뭐... 야....?"

"이래서 보여줄 수가 없었어.. 하지만 너는 분명히 모든 걸 알고도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을 했거든"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리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도망치듯이 그 건물을 뛰어나가려 했다. 나는 리츠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들고 말했다.


"... 진정해 리츠, 무섭지? 미안해. 천천히 가자. 같이 가면 되잖아"

"이.... 이거 놔!!!"


리츠는 내가 잡은 팔을 거세게 뿌리치면서 말했다.


"... 나.. 나... 집에 갈래"

"같이 자고 가자. 근처에 내가 아는 삼촌의 집이 있어. 오늘 아무도 없다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시간도 너무 늦었고..."

"아냐 됐어. 갈게"




리츠는 급히 그 어두운 골목에서 가로등을 가로질러서는 달려가다가 마침 비어있던 택시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택시를 타고서 사라져버렸다. 리츠가 많이 놀랐나 보다.

...물론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럴만하지. 그 어떤 누구라도 이런 장면을 갑자기 보게 된다면 놀랄 것이고.......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리츠에게 전화를 했다. 몇 번을 해도 리츠는 계속해서 통화 중이었다. 15분쯤 후에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길했지만 괜찮다고 혼자서 위로하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리츠의 집 앞으로 찾아가려 했다가,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왠지 이대로 집 앞으로 가도 리츠는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세리자와를 부를까 잠시 고민하다가 또 이곳에 내가 왔다는 걸 알면 또다시 차기 사장이 될 준비가 되었다며 난리를 칠 것을 생각하고서, 한숨을 쉬며 택시를 잡아서 탔다. 택시에서도 계속해서 전화를 했다. 핸드폰을 든 손에는 왜인지 땀이 흥건했다. 리츠가 전화를 받는다면 바로 차를 돌려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제발 전화를 받아달라는 간절한 생각을 하다가, 뜬금없이 리츠는 지금 샤워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핸드폰을 내려놓고 택시의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택시의 라디오에서는 데미안 라이스의 My Favourite Faded Fantasy라는 노래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노래는 예전에도 들었던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종종 틀어두었던 노래였던 것 같다. 이 노래는 가사가 정말 좋다. 다 좋지만 오늘따라 가장 구슬프게 들리는 마지막 구절, 

I’ve never loved loved loved like you. 

I’ve never loved.. 

I’ve never loved.. 

I’ve never loved..  

[누군가를 당신만큼 사랑한 적이 없다]




택시는 목적지를 변경할 일이 없었다. 우리 집 앞으로 올 때까지 리츠는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이곳에 내가 오늘 올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늦게 들어와도 단 한 번도 나와보지 않던 아버지는 오늘따라 내 발소리에 밖으로 나와서는, 약간 풀이 죽어서 들어오는 내 앞에 저벅저벅 다가왔다. 나는 자동으로 시선을 피한다.


"이상한 일이구나. 이 시간에 그곳엔 왜 간 거냐"

"... 그냥..."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구나"

".. 그건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지만... 그냥.. 조금 놀랐어.."

"그게 끝이냐?"


아버지는 실망한 기색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내 안에서 맴도는 말을 오늘은 꼭 묻고 싶었다. 살살 눈치를 살피다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충동적이라고는 하나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 엄마는...."

"네 엄마?"

"아버지를 사랑했어?"

"... 갑자기 그런 걸 왜"

"그냥 궁금해서. 엄마도 이런 아버지의 모든 모습을 보고서 나간 거잖아"

"물론 사랑했지. 우리 서로 정말 미친 듯이 사랑했다"

"..."

"그래서 아직도 너를 보면 네 엄마가 생각나는구나"


아버지는 처음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뺨을 가볍게 쓸어내려 주었다. 아버지의 손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굉장히 싫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생각보다 싫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와 내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색해서 빤히 눈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 턱을 부드럽게 잡고 입술을 부드럽게 가져다 대었다. 그 행위 자체로 나는 리츠밖엔 떠오르지 않았지만 이상한 기분이었다. 턱에 까칠한 수염이 리츠와는 다르게 거칠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의 향수 냄새가 조금 더 강하게 나를 감싸 안는 느낌이라는 것. 물컹한 혀에서는 리츠와는 다른 옅은 담배 냄새가 나는 것.. 리츠와의 입맞춤에서는 리츠의 머리카락이 내 이마를 살짝 간지럽혔었는데.. 


아버지와의 알 수 없는 입맞춤에 멍하니 뜨고 있는 눈, 그 눈의 시야에서 우리 집에 있는지도 몰랐던 세리자와가 벽 틈에서 나와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세리자와의 표정엔 너무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이상할 정도였다. 정말로 이상했다. 손에는 여전히 아버지가 사주었던 검은 우산을 부러질 정도로 꽉 붙들고서 시체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리자와를 보고서도 이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분명히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너무 더럽다. 이상하게 너무 더럽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누워서 한참을 뒹굴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통화 목록에는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는 리츠의 이름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찍혀있다. 시간도 보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아버지와 엄마가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 갈등하게 만들고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굳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휘잉 하고 내 뺨을 스친다.

급하게 커다란 어항을 열고서 햄스터를 급하게 한 마리 꺼내었다. 안녕? 나는 한마디 하고는 그대로 밖으로 던졌다. 내 손에 남아있던 온기가 곧바로 식어버린다. 깜깜한 밤이기에 어디로 떨어졌는지, 살았는지, 혹시나 아래의 나무에라도 걸렸는지 전혀 모른다. 서둘러 창문을 탁 소리 나게 닫고서 다시 돌아누웠다. 고양이는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서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뺨을 한번 쓸어내려 주고, 고양이의 입술에 쪽 하고 한번 뽀뽀를 해주었다. 귀엽다. 이쁘다. 햄스터 한 마리를 입에 물려주고는 거실로 나가게 했다. 내 방에서 햄스터가 찍찍대며 소리 지르는 걸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몹싸 > ing 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쇼우리츠] 햄스터 03  (0) 2017.05.21
[쇼우리츠] 햄스터 02  (0) 2017.03.26
[쇼우리츠] 햄스터 01  (0) 2017.02.27

[쇼우리츠] 햄스터 03

2017. 5. 21. 23:46












-

하굣길에 리츠는 이제 곧 시험기간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며 걱정을 했다. 너 같은 모범생도 시험기간에 걱정을 하는구나? 하고 묻자, 학생들이라면 모두가 걱정을 하지 않냐면서 새삼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성적이 어느 정도냐면서 초능력을 알려주는 보답으로 내가 공부라도 가르쳐줄까? 하고 웃으면서 묻는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니 나는 물론 좋다며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을 했다.


그럼 바로 갈까? 어디에서 하지? 하고 함께 잠시 고민을 하며 하굣길을 나설 때에 교문 앞에 서 있는 웬 거지 같은 여자를 발견했다. 전단지 따위를 나누어 주는 아줌마 인가보다 하고 지나치려 할 때에 그 여자는 갑자기 덥석 내 팔을 잡는 것이었다.


"쇼우...! 드디어 만났구나...! 잘 지냈니?"


누구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며 한참 쳐다보았고, 내 옆에 있는 리츠도 이상한 눈으로 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누구..."

"엄마란다...! 시간이 너무 흘렀니? 엄마가 많이 변했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주름살과 잡티 투성이의 늙은 피부와 더러운 거적 같은 옷 틈새로 엄마의 기운이 슬그머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심정은 정말이지 더럽고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어... 엄마?"


당황해서 입 틈새로 신음처럼 뱉은 소리에 리츠는 나와 눈앞의 허름한 꼴을 한 엄마를 번갈아 보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강 눈치를 챘는지 먼저 가볼게 내일 봐. 하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멀리 걸어가는 리츠를 보고서 엄마는 나에게 호소하듯이 너무 배가 고프다며 밥을 사달라고 했다. 알겠다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나를 잡아끌고는 대충 눈에 보이는 어느 허름한 분식집으로 들어가서는 최대한 빨리 나오는 음식을 달라며 허겁지겁 주문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엄마의 호들갑스러운 태도가 유난스러웠는지 정말로 앉자마자 바로 내어준 싸구려 분식들은 절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음식들을 보자마자 수저나 젓가락도 사용하지 않고서 양손으로 허겁지겁 집어서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걸신들린 듯이 먹는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에 쓰는 말이었다. 분식집의 주인들과 옆에 앉은 다른 손님들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눈길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한참을 게걸스럽게 주워 먹던 엄마는 그 와중에 앞에 앉은 나는 조금 신경이 쓰였는지 멀뚱히 눈을 뜨고 쳐다보는 나를 보고서 내 앞에도 음식이 담긴 싸구려 플라스틱 접시를 조금 밀어 주었다.


"쇼우도 먹으렴.."

"됐어요."


이런 걸 먹는 순간 식중독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실제 엄마가 입에 정신없이 쑤셔 넣는 그 음식들은 너무 마른 표면을 하고 있었고, 재료조차 신선해 보이지 않아서 집에서 세리자와가 가끔 해주는 계란 프라이가 훨씬 낫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내가 느끼는 그런 것들 따위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음식들을 정신없이 다 비운 엄마는 그제야 자신이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앞에 두고서 너무 급하고 추하게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잘 지내셨어요?"


덤덤하게 묻는 내 첫마디에 엄마는 슬그머니 내 표정을 잠깐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뭐..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여전해요. 오초도 여전하고요.. 엄마가 키우던 고양이도 아직 집에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쇼우.."

"네"

".....엄마가 원망스럽니?"

"......"


선뜻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 내가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싫어서 집을 나갈 거였으면 고양이와 함께 나도 데리고 갔어야 옳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지만, 다음의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절대로 엄마를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

 

"... 저.. 혹시... 미안한데... 돈 좀 있니? 엄마 좀 줄 수 없어...?"


그 말에 나는 왜인지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주머니에 있는 용돈을 전부 꺼내서(그래봤자 오만 원 안팎 되는 돈이었지만) 테이블에 놓고는 엄마에게 말했다.


".. 아버지에게 돌아오세요"


내 말에 엄마는 생각하는 듯한 잠깐의 침묵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가 테이블에 놓은 돈을 집어서 눈으로 대충 돈을 센 다음,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저.. 혹시 더 없니?"

".... 학교에 많은 돈을 들고 다니진 않아서요"


헤어지면서 엄마는 수 차례 나에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찝찝하고 답답한 이 짜증 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애꿎은 길가의 돌멩이만 발로 툭툭 찼다. 분명히 아버지는 미친 듯이 일만 하는 데다가 초능력으로 세계정복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말만 지껄이는 씨발놈이지만 나와 고양이를 모두 버리고 간 엄마도 다르지 않다. 그 주제에 낯짝도 뻔뻔하게 그 몰골로 버린 아들까지 찾아와? 게다가 그 얼마 안 되는 돈을 받으려 요구까지 해? 차라리 엄마가 자상하고 돈 많은 다른 남자를 만나서 우리 모두를 잊고 평생 내 앞에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으며 살고 있었다면 차라리 내 맘이 편했을까?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초라한 몰골로 와서 우리 함께 살자, 같이 가자 하고 그 꼬질꼬질한 손을 내밀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내 앞에서 울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했다면?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면? 차라리 나에게 아버지를 속 시원하게 욕하기라도 했다면? '내가 집을 나간 이유는'으로 시작하는 30분짜리 구차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았다면? 아... 아니다.. 다 아니다. 그 어떤 경우였어도 나는 내 눈앞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앞에 그런 추한 몰골로 나의 엄마라는 이름을 대며 초라하게 등장 한 것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에 옮길 수 없는 돌이라도 들어앉은 듯이 답답해서... 집으로 급하게 달음박질쳤다.


벌컥 열리는 문소리를 듣고서 나를 바라보는 노란 눈을 가진 고양이. 어항에서 우글우글하게 모여있는 햄스터. 투명한 어항. 뚜껑을 열자 밥을 준거라고 생각했는지 위를 바라보는 13쌍의 검은 눈, 작은 손, 그리고 그들 중 누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는 나.


그리고 이내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듯이 어항에서 잡히는 대로 집어서는 고양이 앞에 세 마리를 툭 툭 던져놓았다. 떨어져서 작은 경련을 일으키는 햄스터들과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에 호기심과 손톱을 세우며 다가가는 고양이를 관찰하다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침대에 풀썩 눕는다. 


엄마가 사랑하는 나와 고양이는 엄마와는 다르게 불행하지 않다. 

엄마는 나와 고양이를 두고 가면서 본인의 모든 운 마저 모두 내려놓고 갔기 때문이다.











-

리츠는 고맙게도 나에게 전에 만났던 엄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겠지만 차마 물을 수 없어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옆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리츠를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기"

"응"

"궁금하지 않아?"

"뭐가?"

"전에 만났던.. 우리 엄마"

"글쎄"


리츠는 펜을 내려놓고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

"근데 지금 네가 짓는 표정을 보니까.. 너 나에게 털어놓고 싶구나?"

리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자 몰랐던 나의 답답함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런 내 상황을 누군가 들어주고 내 이런 상황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해주기를 어렴풋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은근히 겁이 많았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겁이 많아질 것이다.


"... 분명히 그렇지만 네가 나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무서워"


학교에서의 내 이미지는 돈 많은 어느 집의 부잣집 아들이었고 리츠 역시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 확실 했기 때문에.


"내가 왜 너에게 실망을 해? 그럴 일 없어. 너도 나의 이상하고 바보 같은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준다며 나를 도와주고 있잖아"


그 말을 듣자 누구도 들어준 적 없는 내 고민을 조금은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환상이 들었다. 내가 리츠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없고, 리츠도 내 고민을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우리의 관계이기에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엄마가 집을 나간 일도, 쭉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그런 몰골로 학교에 찾아온 것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달라고 이야기했다는 것도... 더불어 어릴 적 기억의 엄마는 은은한 기품이 있었기에 절대 어제 본 것 같은 추한 몰골의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돈을 달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하지도 않았다는 것까지. 


내 말을 듣고 리츠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고마웠다.


"아버지가 왜? 어머니는 왜 아버지와는 살 수 없다고 하신거야?"

"우리 아버지는 초능력자라고 했었지? 본인이 초능력자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어. 실제로 지금도 그런 쪽에서 일하면서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기도 하고. 더불어 타인의 초능력의 잠재력에 대해서도 연구도 많이 하고 있.."

"초능력의 잠재력?"


아..


"초능력 개발? 뭐야? 연구하고 계신 거야? 그래서 성과는 .. 있으신 거야?"

"아니.. 어.. 그니까.."

"왜 말 안 했어? 아버지가 그런 쪽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내가 간절한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말 안 했어?"


리츠는 거의 울듯한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말했다.


"아니.. 리츠, 들어봐. 그게 아니라"

"나도...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될까? 나도.. 초능력자가.. 되고 싶은데.."

"하.. 하지만 성과는... 아직.."

"그래도..! 혹시나 내가 처음으로 초능력에 각성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잖아! 너도 말했잖아! 우리 형이 초능력자인 만큼 나에게도 잠재력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아니.. 그니까.."

"쇼우 제발...  부탁할게.. 응?"


리츠는 내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묻고 제발.. 제발 부탁이야 쇼우 제발.. 제발 부탁이야.. 하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 리츠는 아버지의 병동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집착 후에 병동을 찾아오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능력이라는 미지의 힘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1%의 가능성에 다가간다는 그 두근거림이 그를 더욱 증폭시킨 것이다. 리츠를 만나게 되면 리츠의 첫 마디는 항상 아버지께 물어봤어?로 시작해서 계속해서 자신을 아버지에게 데려가 주기를 희망했다. 절대로 들어줘서는 안되는 그 부탁이 부담으로 다가왔던 나는 리츠를 만나고 싶은 만큼 리츠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만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리츠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커져가고 있었다.


"리츠, 들어봐. 내가 아버지께 물어보긴 했어. 하지만 아직 많이 불안정하다고 하셔. 그러니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야"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리츠의 손을 잡고 말했다.


"불안정? 어떤 식으로? 시간? 얼마나? 난 초능력자인 가족이 있잖아. 그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수도 있잖아? 너도 그랬잖아.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나에게 잠재되어 있을 거라고 했잖아"

"...리츠"

"응"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내 말에 리츠는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잠시의 침묵 후에 말했다.


"...고집?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누구나 이런 상황이 오면 그렇지 않겠어? 아, 알겠다. 그런 것도 너 같이 잘난 집안의 사람들은 모르는 이야기지?"

"그런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에 대한 상황을 알고 있는 네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네 상황? 어떤 상황을 말하는거야? 학교의 선생님들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잘난 너희 집안?"

"....리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 내 상황 잘 알잖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라니. 너야말로 내가 얼마나 원하는지 알고 있잖아. 그걸 지금 고집이라고 말하는 거야?"

"리츠, 너 지금 상태 이상해. 다음에.. "

"... 뭐야,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너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근데 너는 아니잖아"

"리츠"

"응"

"...나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무슨 사정? 말해봐"


이미 리츠는 나의 입장에 서서 이해할 눈빛이 아니었다. 물론 막무가내로 원하는 리츠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정만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 줄 알아? 내가 어릴 적에 본 그곳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이 서식하는 듯한 이상한 병동 같았단 말이야. 그런 곳에 가서 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데 그런 곳에 널 데려가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말문이 막혀 침묵을 지키자 리츠는 나에게 말했다.


"됐어. 돌아가. 오늘은 너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혼자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와서 문을 열자 세리자와가 쇼우군! 돌아왔구나! 하고 두 팔을 벌리며 격하게 환영을 했다. 평소에도 싫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귀찮게 느껴져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없어"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학교의 일을 묻는 세리자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쭉 걸어들어간 거실에는 언제 왔는지 시마자키가 소파에 드러누워서는 특유의 빈정대는 말투로, 도련님 오셨네? 하고는 입꼬리를 실실 거리며 웃었다. 시마자키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좋지 않은 느낌에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시마자키는 소파에 눕혔던 몸을 일으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나 얼마 전에 지나가다가 사모님 만났는데"

".... 아 그러셔? 앞도 못 보는 새끼가 잘도 보네"

"안 보이니까 더 잘 아는 거지. 나 만나기 전에 사모님은 도련님 만나고 오는 길인 것 같던데"

"... "

"어쩐지, 사모님이 날 보자마자 너무나 화들짝 놀라시더라고. 사모님 많이 힘드신 것 같으시던데.. 도련님이 눈물의 위로라도 해드렸어?"


살살 긁는 시마자키의 이런 뱀 같은 말투를 듣고 있으면 아, 내가 첫 번째로 사람을 죽여서 뉴스에 난다면 그 대상은 저 새끼가 되겠구나.. 하고 새삼 생각하게 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도저히 모르겠는데? 그냥 본론만 이야기하지?"

"본론? 없는데. 하하, 도련님 화날 때 말투가 묘하게 바뀌는 게 재밌어서 그래"

"재밌어?"


시마자키는 시력이 없는 만큼 혀도 없었으면 훨씬 좋았을 뻔했다. 주먹을 쥔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꽈악 움켜쥐자 눈치챈 세리자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쇼우군 그만하고 이리 와, 하고는 나와 시마자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조금은 식혀주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그저 나 혼자 시마자키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것일 뿐이지만.


분이 덜 풀려 보이는 나에게 세리자와는 따뜻하게 데운 녹차를 한잔 내밀고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서는 그저 웃어 보이는 세리자와에게 괜한 투정을 부렸다.


"미친 새끼. 시마자키 저 새끼는 우리 집에 왜 온 거야? 저딴 개소리 지껄이러 온 거면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해. 재수 없게. 한 번만 더 저딴 소리 하면 혀를 뽑아버리겠다고 해"

"시마자키는 누구 나한테 그렇지 뭐. 우리한테도 똑같아. 사장님께 앞에서만 조용히 있지. 쇼우도 나중에 차기 사장이 되면 아마.."

"그만. 듣기 싫어. 나 지금 기분 안 좋은 거 안 보여? 차기 사장 이야기 좀 안 할 수 없어? 난 아버지를 따를 생각 따윈 눈꼽만큼도 없단 말이야! 세리자와는 가끔 마치 내 부모라도 된 듯이 구는데, 착각하지 마. 아버지의 비즈니스 와이프라고 조롱당하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방금 말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에 뱉어 놓고 나도 모르게 세리자와의 눈치를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방금 말은 미안. 내가 요즘 좀..... 하고 말했다.


"... 쇼우. 그 여자를 만났다는 게 진짜야?"

"그 여자라니? 그 여자가 누구야?"

"아까 시마자키가 그랬잖아. 만났다고"

".. 설마 엄마를 말하는 거야?"

"..역시 그래서 이상해졌구나 왜 만났어? 혹시 그립다거나 그런 거야?"

"이상해졌다니.. 엄마가 학교 앞에 찾아와서 만나게 된 거야."

"찾아왔다고? 그 여자는 이상한 사람이야. 사장님의 그 크신 포부조차 이해 못하고..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복받은 자리라는 것도 모르고.. 그 자리를 그렇게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그 자리를 그렇게 쉽게 박차고 나가는 거야"

"세리자와.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마자키에게 듣기로 쇼우 너에게 용돈까지 구걸해서 갔다며? 역시 쇼우는 착하구나.. 불쌍한 사람에게 적선도 할 줄 알고.. 역시 좋은 사장이 될 수 있겠어.. 사장님이 나를 구해주셨듯이 쇼우도 아마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마음씨 따스한 사장이 될 수 있을 거야. 쇼우가 말한 대로 나는 쇼우의 부모가 될 수는 없지만 이미 나에게 있어서 쇼우는 내가 키워야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이니 나도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쇼우도 그런 여자 따위 생각도 하지 말고.. 시마자키가 그 여자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던 전혀 화날 필요 없어. 그 여자는 이미 부모의 자격을 박탈당한 거야" 


세리자와의 말은 틀린 말은 없다. 실제로 내가 왜 시마자키의 같잖은 도발에 이렇게 열받아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납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리자와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면서, 쇼우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받으면서 살아야 해... 하며 두 눈 가득히 알 수 없는 눈물을 가득 보이며 눈시울을 붉히었다.  나는 이상하게 소름이 돋아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세리자와의 커다란 손은 내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리츠와의 사이가 서먹해진 것에 대해서 나는 그 어떤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리츠가 고집을 꺾고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었던 반면, 리츠는 내가 자신을 꼭 아버지의 병동에 데려가 주길 바랐던 것이다. 리츠는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으니 나 하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내기엔 아무런 영향이 없었겠지만 리츠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나는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리츠와 보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나가는 리츠를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엔 없었다.


물론, 다가갈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결론을 지을 수 있을 만한 대책도 없이 무작정 다가가서 이야기하기엔 너무나도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근처만 맴돌다가 한숨을 쉬고 집에 돌아오는 것을 반복할 수 밖엔 없었다. 리츠가 문자로 '오늘 학교 끝나고 옥상에서 잠깐 보자'라고 문자를 보내오기 전까지.


그 문자를 발견하고 나서 왜인지 모를 두려움과 함께 파란 하늘이 휑하게 뚫린 옥상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새삼스럽게 옥상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며 평소에는 있지도 않은 고소공포증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어서 스멀스멀 구역질이 올라왔다. 리츠는 이미 옥상에 와서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옥상 문의 소음을 신호로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죄지은 듯이 리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리츠의 시선에서 도망쳐 고개를 푹 숙였을 뿐이다. 리츠는 내 앞에 겁 없이 저벅저벅 다가와서는 내 턱을 치켜들어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왜 피해? 똑바로 봐야지 스즈키"


하고 평소보다 당돌하게 나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의 리츠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내 눈빛을 느꼈는지 리츠는 조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조금은 슬픈 듯이 말했다.


"스즈키, 나는 화해를 하고 싶어서 너를 이곳으로 부른 거야. 그런데 지금 너의 그런 태도는 나와 이야기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느껴지네"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

"... 내가 지나치게 너에게 선택을 강요했다면 미안해"

"아... 아니 나야말로..."

"아버지에게 그런 문제로 부탁하기가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런 건 됐고 혹시 가능하다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견학 정도는 하고 싶은데 그것도 불가능할까? 뭐.. 지금 당장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다음에 대답해줘도 괜찮아"


리츠는 자상한 말투로 말하고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우물쭈물하는 나의 손을 잡고서 내려가자! 하고 평소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맞잡은 손이 따스했다.











'몹싸 > ing 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쇼우리츠] 햄스터 04  (1) 2017.07.10
[쇼우리츠] 햄스터 02  (0) 2017.03.26
[쇼우리츠] 햄스터 01  (0) 2017.02.27

[쇼우리츠] 햄스터 02

2017. 3. 26. 17:50



02

-
학교를 투명인간처럼 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는 있었기에 아이들의 말소리는 조금 듣고 있었다. 내 앞에 앉는 여자아이들의 시끄러운 수다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들의 고민은 항상 연애 이야기였다. 고백을 할지 말지 고민이라는 이야기만 수백 번 들었다. 오늘 그 애랑 눈이 마주쳤는데 웃어주더라, 웃어준 거 보면 그래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는 게 아닐까? 카게야마군은 누구한테나 그렇게 웃어주던데? 아냐아냐, 혹시 몰라!... 얼마 전에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 줬더니 고맙다고 했단 말이야! 에이, 그거 누구한테나 그러는 거 아냐? 카게야마군이라면.. 잘은 모르겠지만 나한테 웃으면서 말해줬단 말이야!
 
그녀들이 말하는 카게야마 리츠는 옆 반의 조용한 학생부였다. 여자들이 이렇게 떠들썩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깔끔한 미소년 타입의 학생이었다. 복도를 오가다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을 뿐, 직접적으로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분명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타입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나도 그런 '모두'라는 그룹에 평범하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자상하면서도 그 이상은 다가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확실하게 치고 있어서 모두가 섣불리 다가가지는 못했다.

등교를 할 때에 한 번씩 마주친 적이 있다. 학생부인 그가 아침에 선생님을 도와서 서 있는 날이면 반의 여자아이들은 모두 바짝 긴장해서는 조금 상기된 표정을 하고 교실에 뛰어 들어와서 엄청난 일이라도 생긴 듯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어떡해 어떡해 오늘 나 어때? 상태 별로지 않아? 카게야마군이 날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흠 내가 보기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저 상태일 텐데.. 뭐, 여튼 좋겠다, 잘생긴 새끼는 저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한 학급 여자아이들의 이야기 소재를 간단히 바꿔버리는구나.

다음날은 일부러 지각을 했다. 전날 여자아이들의 시끄러운 수다를 듣고서 그날도 카게야마 리츠가 지각을 잡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각을 하면 그래도 그가 내 이름을 물어봐 주지 않을까? 그럼 서로 한마디라도 나누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각을 했는데,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홱 지나쳤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나는 그냥 통과였다.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나는 그에게 조금 화난 듯이 다가가서 말했다.

"저기, 나도 지각인데"
"...스즈키 쇼우지? 이름은 알고 있어. 다음부터 지각하지 마"

냉정하지만 조금은 친절했다. 그는 나에게 그렇게 딱 한마디 하고는 뒤돌아서 갔다. 선생님이 지각한 사람들에게 주는 벌을 나는 받지 않았다. 나 혼자서 교실로 돌아오면서 우리 반의 호들갑 떠는 여자애들처럼 나 역시 조금 들떠서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하고 기분 좋은 얼떨떨함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학생부에게도 선생님들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고 이내 시무룩해져서는 조용히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내 존재감을 각인시켜주고 싶었는지 그가 교문 앞에 설 때마다 지각을 했다. 그래도 그는 항상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음부터 지각하지 마. 표정도 늘 똑같았다. 조금은 기분이 좋지는 않은? 여유를 띄고 있는 기분 나쁠 정도로 은은한 미소가.


"쇼우군, 학교는 어때?"

세리자와는 돌아와서 가방을 내려놓는 나에게 물었다.

"음.. 학교.. 뭐... 똑같지 뭐"
"다행이다. 혹시나 또 싸우고 오거나 할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적당히 친해야 싸울 일도 있다는 걸 전직 히키코모리인 세리자와는 당연하게도 모르고 있다.

"네가 왜?"
"사장님이 걱정하시잖아"
"그 새끼가 걱정은 무슨"
"아버지에게 그런 말버릇을 쓰는 게 아냐! 게다가 사장님이 얼마나 걱정하시는데"

세리자와는 내 앞에 와서는 친구는 누가 있는지, 뭐 관심 있는 여자아이는 없는지 등등 이상한 이야기를 물었다.

"친구가 되고 싶은 녀석은 있어"
"정말? 어떤 아이야?"
"음.. 조금 냉정해 보이는..."
"쇼우군의 마음에 들었다면 분명히 좋은 아이겠지. 궁금하다"
"..."
"그래서, 말은 해봤니?"
"아니 ..말도 못해봤어"
"그럼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면 되겠네"
"너 같은 히키코모리에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사장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것처럼.."

세리자와는 또다시 나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마치 종교에 미쳐버린 지독한 신자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장님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내 방에 전혀 겁 없이 방 문을 열고 들어오셨었어.. 그리고는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이제 안심하라며.. 밖엔 비가 온다면서 우산을 내미시고는..... 아무도 믿지 못해서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하게 해주셨지.. 그때 봤던 사장님은 마치.....

"내 방에서 나가"

나는 그 덩치를 낑낑대며 밖으로 밀어내고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하굣길에 그를 기다렸다. 리츠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절대 세리자와가 말을 걸어보라고 조언한 것을 들은 것은 아니다. 세리자와가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할 계획이었다. 학생회 회의를 마치고 나서 정문을 나서는 그 녀석을 간신히 용기를 내어 붙잡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에 나도 모르게 완전히 쫄아버린 찌질이처럼, 저기.. 하고 말을 걸었다.
 
"그... 그니까 너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시간 좀 내 줄 수 있을까?"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생각보다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았다. 내가 느끼기로는 나의 이상한 행동들(허구한 날 지각에 잡혀서 풀려난다거나 하는) 때문에 리츠 본인도 내가 자신에게 언젠가는 이렇게 다가올 거라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카페에서 시킨 음료가 앞에 놓이고, 앞의 이 녀석이 잠자코 내 말을 기다리는 그 순간이 왜 이렇게 떨렸는지 모른다. 이상하게 초조해져서 실수로 주문해버린 맛없어 보이는 뜨거운 음료 컵을 만지작 만지작거리다가, 괜히 뒷머리를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니까 별 건 아니고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해. 들어줄게"
"음... 그니까.. 그냥 너랑 조금 치.. 친하게..."
"... 친하게?"
"... 어... 밥도 같이 먹고.. 사이좋게.. 지.. 지내고 싶은..."
"내가 너랑?"
"..... 응... 아, 조.. .조금 뜬금없지? 하하..."
"왜?"

어째서 자신이 나와 그렇게 지내야 하냐는 질문엔 마땅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정신이 나갔는지 이상한 대답을 했다.

"나 초능력자거든"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내 앞에 이 성실한 학생부 학생은 분명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그니까 방금 말은.."
"..... 저.... 정말?" 

"...응?"

"정말 초능력자야?"


방금 전까지 조금 까칠한 모습을 하고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로 앉아 있던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내 말에 급 화색을 띠며 나에게 적극적으로 물었다. 정말이야? 초능력자? 그럼 숟가락을 구부릴 수 있어? 한 개 말고 여러 개도 구부릴 수 있어? 물건을 띄울 수도 있어? 철봉을 구부린다거나 강아지를 띄우거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허공으로 띄울 수 있어? 늘 냉정한 이미지의 이 녀석이 이렇게 눈을 빛내면서 질문을 하는 건 학교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이야? 보여줄 수 있을까?.. 신기하다..! 우리 형도 초능력자야! 초능력자가 또 있었다니.. 너 신기하다.. 나도 초능력에 관심이 많아.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될까?"

초능력을 가르친다니. 아버지가 데려갔었던 그 이상한 병동 같은 곳이 잠깐 떠오르긴 했지만 이렇게 기대에 찬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알겠다고 대답해버렸다. 진짜지? 고마워! 하고 내 손을 덥석 잡고서는 감격에 가득 차서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도 늘어놓았다. 내 앞에서 활달해진 그의 태도에 나도 기분이 좋아서 잠자코 들었다.

"초능력자인 우리 형은.. 본인의 힘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자신이 초능력자라는 것을 싫어해. 쓸모없다고 하고.. 하지만 그런 힘이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거야...! 나는 지금까지 쭉 형을 존경하고 동경하고 있어. 저기, 스즈키, 나.. 나도... 될 수 있을까? 형과 같은 초능력자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될 수 있어. 내가 있잖아"

나는 웃으면서 내 앞에 있는 숟가락을 시험 삼아 휘어 보였다. 광택을 내며 얌전히 놓여있던 숟가락이 힘없이 허공에서 휘는 것을 보며 그는 나를 더욱 빛내며 쳐다보았다. 리츠가 말하는 리츠의 형과 같이 나 또한 아버지가 집착하는 초능력이라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지만 관심 있는 상대의 환심을 이렇게 간단히 산 것에 대해서는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초능력자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영향은 받고 있을 거야. 게다가 네 형이 초능력자라면 너도 약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잠재되어 있을지도 몰라"
"... 정말 그럴까?"
"뭐.. 유전적인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우리 아버지도 초능력자야. 나도 어릴 적부터 쓸 수 있었고.. 엄마는 초능력자가 아니었지만"
"그럼 나도 초능력자가 될 수 있을지 너희 아버지에게도 한 번 물어봐 주면 안 될까? 혹시 모르잖아! 너희 아버지는 알고 계실 수도"
"... 아버지? 아.. 뭐.. 그래 물어볼게"

그 이후로 내가 원하는 대로 리츠와 나는 친하게 지냈다. 반은 달랐지만 밥도 같이 먹고,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도 함께 했다. 주 대화는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계속 지켜봐도 안타깝게 그는 초능력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었다. 이런 말을 할 타이밍도 놓쳤을뿐더러,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한 희망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리츠는 초능력에 대한 자신의 소견이 아니면 형 이야기를 주로 했고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거나 세리자와를 삼촌이라고 칭하면서 세리자와 이야기만을 조금 하는 편이었다.


리츠의 형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리츠의 이야기만으로 나는 그의 형에게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리츠가 형의 이야기를 할 때는 세리자와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에 느껴지는 약간의 병적인 신앙심이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봤을 때 리츠가 이런 성격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항상 꺅꺅거리는 여자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보는 그의 이미지는 냉정하고 침착한 이미지였기에 이런 그의 모습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모습을 알고 있는 게 나뿐일 거라고 생각하면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네 형은 어디 학교에 다녀?"
"우리 옆 학교 있잖아. 작은.. 그곳에 다녀"
".. 응? 그 학교는..."
"응 너도 아는구나?"

리츠는 별생각 없는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지금껏 리츠의 이야기를 들은 나로서는 리츠의 형은 리츠와 닮아서 얼굴도 잘생기고(물론 리츠는 자신과 형은 전혀 닮지 않았고, 형은 앳된 외모에 자신보다 순한 인상이라고 말했었지만) 리츠와 비슷하게 조금은 냉랭한 분위기를 풍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도 잘하는 데다가 초능력도 쓰는, 그래서 초능력 같은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며 비웃는 엄청난 포스의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형이 다니고 있다는 그 학교는 성적이 최하위권의 학생들만이 들어가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모두가 기피하는 학교. 뭐, 나 역시 정말로 성적만을 두고 말한다면 리츠의 형과 함께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리츠에게 혹시나 형의 사진이 있냐고 물었다. 리츠는 웃으면서 사진은 많지만 모두 집에 있다고 말했다. 리츠에게 너의 형이 궁금하다고 말하자, 다시 웃으면서 형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하고 다시금 형의 대단함에 대해서 열거하는 것이었다. 우리 형은 어릴적 나를 지켜주기도 했고.. 화가 났을 때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만 나에 한정해서는 정말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야. 나는 우리 형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어...! 나는 세리자와와 겹쳐 보이는 리츠를 잠시 못마땅한듯이 바라보다가, 그렇구나 다음에 리츠의 형을 꼭 한번 보고 싶네. 하고 비꼬듯이 말했다. 비꼬는 듯한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리츠는 웃으면서 너도 아마 우리 형을 보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버릴껄? 하고 웃었을 뿐이다.











-
저녁식사는 아버지와 세리자와, 그리고 다른 오초 멤버들과 함께 했다. 엄청 어릴 적 외에는 딱히 와본 적이 없지만 여전히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세리자와가 나에게도 같이 가자면서 잡아끌었기도 했고, 리츠의 질문이 나도 조금은 궁금해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한 집에서 둘이 이야기를 별로 해본 적도 없어서 여럿이서 그나마 조금씩 이야기가 오갈 때에 슬쩍 끼어들어서 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식사에 참석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많지 않았다. 본인이 먹을 음식은 세리자와가 알아서 주문을 했고 오초에서 그나마 말이 많은 시마자키나 하토리가 간간이 저들끼리 이야기를 했다.

"그나저나 쇼우군은 여기에 웬일이래? 원래 절대 안 오잖아?"

숨을 죽이고 있는 나에게 시마자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 너무 어릴 적에 와서 여기가 이렇게 비싼 식당인지 몰랐어. 친구들 통해서 들으니까 되게 비싼 곳이더라. 그래서 오랜만에 이런 비싼 곳에서 밥이나 먹을까 해서. 집에서 대충 해 먹는 건 항상 비슷하잖아"
"이런 식당을 아는 친구가 있단 말이야?"

시마자키는 눈이 안 보이는 녀석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목소리 톤 만으로도 내 감정을 귀신같이 잘 체크했다. 시마자키는 약간 당황했을 내 표정을 예상한 듯이 웃다가 다시 말했다.

"비싼 거 먹으려고 이런 곳에 왔다는 핑계는 좀 흔하네. 차라리 어린애답게 오늘은 아빠랑 같이 밥 먹고 싶었어요! 이런 거 하지그래?"
"... 그 입 좀 닥칠래?"

내 말에 시마자키는 뭐가 우스운지 키득키득 웃었다. 시마자키는 항상 말을 저런 식으로 조금 짜증을 유발하는 말투다. 재수 없는 새끼.
곧 고급스러운 하얀 접시에 담겨 두껍게 썰려 몇 조각 담기지도 않은 회가 몇 접시 등장했다. 웨이터들은 항상 한 손엔 위생상태를 증명해 보이듯이 새하얀 천을 받들고서 마치 식탁에 소리라도 나게 접시를 두면 큰일이라도 나듯이 조심스레 접시를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 식당은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에 10팀도 받지 않는 고급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점이 커다란 장점이었다.

"세리자와가 맛있는 거 안 해주나 봐? 우리한텐 매일같이 와서 오늘 아침은 이거 해줬네 저거 해줬네, 하면서 자랑스러워하면서 이야기하던데"
"... 아, 뭐... 맛있지. 계란 프라이가 맛없는 거 봤어?"

내 말에 오초 모두 소리를 죽여서 웃어댔다. 옆에서 아버지도 조금 우습다는 듯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의 표정을 잠시 살피던 나는 아버지에게 묻는 게 아닌 척, 오초에게 물었다.

"근데, 나 좀 궁금한 거 있는데 초능력 실험 말이야. 혹시.. 성공 한 적 있어...?"
"이야, 이제야 조금 사장님의 뒤를 이을 생각이 들었구나 쇼우!"

내 질문에 가장 감격을 하며 좋아하는 사람은 세리자와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물론 우리와 함께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초능력 실험에서 성공한 곳은 우리 '손톱'밖에 없다고! 전에 왔던 본부에서 계속에서 초능력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어. 다음에 또 보러 올래? 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좋아졌어! 세리자와가 나에게 장황한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슬쩍 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아버지도 나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관심이 생겼는지 의문이구나"
"... 관심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궁금해서..."

그리고 대화는 끝이었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가 인간의 후천적인 초능력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리츠도 아버지의 병동에 가면 초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전에 그곳에서 봤던 그 이상한 광경들은 도대체 뭐였는데?










-
"성공한 사례가 있데. 후천적인 초능력 개발에 대한..! 어때 굉장하지?"

요즘 들어 계속 나와 다니면서 초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큰 기대에 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따라 리츠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리츠에게 조금이라도 활력을 불어넣어 줄 생각으로 어제 들은 내용에 대해서 일부러 더 활기차게 말했다.

".. 정말이야?"
"그럼!"
"어딘데? 그곳이"
"..."

그것까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오초가 칭한 그 '본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아직 나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했을뿐더러, 거기에 있던 이상해 보이는 상태의 사람들 때문에 초능력을 어떻게 발현시키는 지도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의 침묵 후에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곧 알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별것 아닌 곳에서 발현했다니까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몰라. 초능력의 발현 말이야. 게다가 너 같은 경우는 초능력자인 형도 있으니 더 쉬울 거야"
"정말 쉬울까?"

"... 그..그럼 당연하지!"

"그래... 그럼 우리 뭐라도 해볼까?"
"..? 뭘 해보고 싶은데?"
"예를 들면..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키스라던가"
"...응?"
"왜 기적처럼 일어나는 거 있잖아. 그런 거...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순진하다 너"
"가끔은 가장 순진한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잖아"

키스? 리츠가 초능력을 가지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어도 난 전부터 줄곧 리츠와 키스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리츠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 올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로써는 잘됐다 싶은 마음만이 훨씬 컸던 것이다. 해볼까? 하고 조심스럽게 떠보는 말을 꺼낼까 말까 하며 답지 않게 고민하는 나, 그리고 안전을 위해 세워져 있는 철조망 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리츠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한참 말이 없었다.

"리츠, 초능력을 가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
"음... 글쎄.. 하고 싶은 건... 딱히..."
"그런 것도 없는데 왜 초능력이 있었으면 하는 거야?"
"..."
"내가 봤을 때 이미 너는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잖아"
"스즈키 너, 사람들이 왜 꽃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예쁘니까?"
"왜 예쁜데?"
"음.. 어려운데.. 그냥 봤을 때 예쁘니까..."
"그런 이유야 나도"

리츠는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야 나도. 하고 조금 씁쓸하게 웃어 보이던 리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나에게 가만히 다가와서는 입을 맞추었다. 바로 입술을 떼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은 당황스러움 밖에는 없었지만 직후 얼굴에 잔뜩 몰리는 열이 지금 내 얼굴이 얼마나 가관인지를 알려주었다.

"아. 역시 이래도 아무 효과는 없네."

놀라움에 당황하는 나와는 다르게 한숨을 내쉬며 실망부터 하는 리츠를 보면서 나는 돌아가려는 리츠의 어깨를 잡고서 말했다.

"그건 키스가 아니니까"

나는 계속하자는 듯이 말했고 리츠도 싫지 않다는 듯이 나에게 다가왔다. 서서히 포개지는 우리 둘의 입술, 그리고 눈을 감는 찰나에 보이는 떨리는 리츠의 속눈썹과 검은 눈동자가... 장밋빛 태양의 빛이 침투해 빨간 빛이 파도처럼 울렁이는 그 눈동자가 너무나 예뻐서. 잔잔히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도, 서투르게 서로의 입안을 데우는 우리도.
내가 초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리츠와 가깝게 지낼 일은 없었을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다시금 초능력이 있는 나의 천부적인 속성에 감사할 수밖에..

자연스럽게 혀로 핥고 서로를 침범해가는 우리는 조금 이상하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내가 이상해져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때의 나는 정말로 순수하게 리츠의 모든 것을 빨아먹고 싶어했다. 하지만 리츠는 나의 초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만큼 나를 빨아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나도 리츠도 서로 좋아했다. 나는 리츠의 이런 면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다는 것을 왜 이 때는 몰랐을까?










-
리츠를 껴안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내 옷에 묻은 희미한 체취가 푹신한 침대와 더불어 나를 기쁘게 하였다. 리츠 냄새는 참 좋다. 재수 없는 시마자키가 뿌리는 스킨 향 향수처럼 독하지도 인위적이지도 않고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미네기시에게서 나는 소독약 냄새처럼 화학적이지도 않고.. 시바타에게 나는 땀 냄새처럼 지독하지도 않고 세리자와에게서 나는 아저씨 냄새처럼 거부감이 드는 것도 아니다. 같이 있으면 한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편하다, 하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창문 틀에 앉아서 마치 본인이 이 커다란 집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여유 있게 혼자서 돌아다니던 고양이는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마지막 지점으로 내 방을 선택했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내 방에 들어와서는 동그란 솜뭉치 같은 발로 펄쩍 뛰어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옆으로 폴짝 뛰어올라왔다. 따뜻한 곳을 찾아왔는지 내 옆에 와서는 배를 깔고 앉아서는 꼬리로 나를 가볍게 톡톡 건들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 좋다는 듯이 눈을 감는다. 그러고 보니 전에 리츠와 이야기하다가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고 하자 의외라면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 응? 고양이..... 이름..?"
"...?"

내 반응에 리츠도 함께 당황해했다.

"뭐야? 설마 이름이 없는 거야? 그럼 도대체 뭐라고 불러?"
"음..... 딱히 부를 일이.."
"보통은 키우려고 데려오자마자 이름부터 생각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엄마는 그 고양이를 뭐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그냥 고양이라고 불러 나는"
"그럼 이름이 고양이인 거네? 특이하다 마치 사람의 이름이 사람인 것과 똑같은 거잖아?"

리츠는 뭐가 웃긴지 우스워했고 나는 이상하게 멍한 기분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나도 함께 웃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웃고 있는 리츠와 함께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이기만 하였다.

벌떡 일어서서는 13마리가 담겨있는 햄스터 어항에 가서 한참 들여다보았다. 귀여운 햄스터들은 여전히 보드라운 허연 등을 동그랗게 말고서 조금씩 숨을 뱉으며 자고 있었다.
이 녀석들에게도 이름이 필요하려나....











'몹싸 > ing 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쇼우리츠] 햄스터 04  (1) 2017.07.10
[쇼우리츠] 햄스터 03  (0) 2017.05.21
[쇼우리츠] 햄스터 01  (0) 2017.02.27

[쇼우리츠] 햄스터 01

2017. 2. 27. 00:34



01












-

엄마와 아버지의 말다툼 소리는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들었다. 상냥한 엄마는 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고, 낮에는 애써 웃으면서 아버지를 대했지만 내가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문을 닫고 들어간 안방에서는 둘의 답 없는 말다툼 소리가 하루 종일 들리었다. 엄마는 내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고요한 밤의 소리는 꽤나 명확하게 들렸기 때문에 잠들기 직전까지 둘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에 들었다. 엄마는 왜 사람들에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하냐면서 따지고 들었고 아버지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신경 써서인지 낮춘 목소리로 소리를 뱉고 있었고 아버지는 덤덤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툼 소리는 무서우리만치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항상 조용한 밤을 꿈꾸었던 나였지만 항상 소음이 있던 밤이 조용해지자 째깍째깍하고 울리는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며 무언가 없어진 듯한 휑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엄마는 나에게 인사도 없이(자고 있을 때에 들어와서 인사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간단한 짐을 들고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그런 것 따위는 크게 신경 쓸 일 아니라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한 옷차림으로 밖을 나설 뿐이었고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 소음에 대해서 그 누구도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다. 누구라도 이렇게 만들어진 잔잔한 공기를 반가워할리 없다. 


집에는 엄마가 불쌍하다며 데리고 왔던 고양이 한 마리만이 자신의 털을 두어 번 핥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본인이 키우려 데려온 고양이마저 신경 쓰지 못했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지 그대로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집을 떠난 것이다. 늘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씨 따스한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으면서 정작 본인은 키우려 데려온 동물과 더불어 자식새끼마저 내던지고 도주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엄청난 허무함과 박탈감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나를 떠난 엄마를 마냥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긴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고 목소리도 사근사근하고... 아버지와 다르게 나에게 항상 다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엄마가 돌아왔을 때에 나를 보고 쇼우는 훌륭하게 자랐구나! 하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씨 따뜻한 아이로 자라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는 햄스터를 사기로 했다. 무작정 나가서 찾은 애완동물 숍에 가서는 무작정 햄스터 15마리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는 어항 중에 가장 큰 투명한 어항, 그리고 장난감처럼 작은 햄스터 먹이, 햄스터들이 놀기 위해서는 쳇바퀴 도 필요하다며 추천하길래 그것도 여러 개를 함께 샀다. 자고 있는지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햄스터들의 작은 등은 찹쌀떡처럼 부드러워 보여서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집에 있는 고양이도 똑같이 사랑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노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그 고양이에게 한 마리 던져주었다. 내가 던져준 햄스터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금세 잊고 있던 야생의 발톱을 세우는 이 녀석을 보니 엄마 역시 아무도 모르게 숨겨왔던 야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고양이가 입 주위를 시뻘겋게 물들이며 햄스터를 발톱으로, 이빨로 물어뜯어 차가운 고깃덩어리로 온도를 낮추는 광경을 구경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의 고양이는 쥐를 먹어본 적이 없는지 사냥은 했지만 시식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뻘건 생물을 앞에 두고 재미없다는 듯이 제 발톱에 묻은 더러운 피를 혀로 할짝할짝 핥으며 도도하게 꼬리를 세우고는 다른 장소로 자리를 옮겨갈 뿐이다. 나는 한참을 관찰하다가 죽어버린 햄스터의 작은 손을 슬쩍 잡아선 창문을 열고 던져서 버렸다.











-

시간이 흐르며 나는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목소리가 어땠는지, 점점 잊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당연한 일인 듯이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야 많았지만 엄마가 00있을 때에나 간단한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누었던 사이였던 우리였기 때문에 딱히 대화를 할 필요도 없었고 아버지는 계속 바빴다. 조금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부하 몇 명을 나에게 보내주며 나를 돌보게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꽤나 고파서 잘 따랐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조금씩 변하는 그들을 보며 내가 바라는 관심의 정도와, 돈을 조건으로 주는 이들의 관심은 형태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초능력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굉장히 사랑했던 아버지는 내가 본인과 똑같다고 믿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같이 갈 곳이 있다며 따라나선 곳은 조금은 신나게 뒤를 따른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초능력 발전소였다. 병동 같은.. 아니 병동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그 이상한 곳은 돈 많은 아버지의 건물이니 굉장히 크고 깔끔했지만 안에 있는 환자 비스무레한 사람들의 상태는 굉장히 이상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좀비같이 축 늘어진 데다 초점이 사라져 있었고, 누워있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사람들을 보자 실험의 흔적이 훤히 보이는 역겨움이 공기에 세세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 곳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를 이 평범한 재능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괴로워하면서도 그 특수능력을 굉장히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이미 그 재능이 있는 나로서는 분명히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기에 지루하게 쳐다보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이런 것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버릴 것이라는 것은 감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집회는 나가지 않았으니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최 측근들인 '오초' 정도였다. 그들과는 그래도 꽤 친하게 지냈다. 그들 중 세리자와는 다른 이들로부터 사장의 비즈니스 와이프가 아니냐며 놀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서는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룰이었는지 나는 그가 그렇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한참 동안이나 몰랐다. 한참 후, 내가 있을 때 눈치 없이 '야, 비즈니스 와이프!' 하고 하토리가 세리자와를 불렀을 때 알게 되었다. 물론, 나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동의했다. 뒤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불리고 있었을 것이지만 내 앞에서 그 말을 꺼낸 이후로는 다시는 내 앞에서 세리자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들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세리자와는 그렇게 불릴 법도 했던 게,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그만큼 잘 대해주었다. 나를 학교에 입학시켜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했던 것도 세리자와였다. 내가 혼자서 밥을 챙겨 먹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데다 정식으로 요리를 해주는 사람을 부르면 되는 간단한 문제를 갑자기 자기 혼자서 나에게 밥을 해준다며 한 번씩 오다가, 점점 횟수가 잦아지더니 이제 대다수의 시간을 우리 집에서 함께 했다.


"쇼우군 일어나! 학교 가야지!"


본인도 사회생활을 못해서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주제에 말은 잘했다. 나이를 먹으면 꼰대가 되는 것은 다들 똑같나 보다. 세리자와가 웃으면서 차려준 아침식사는 거창하게 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주었다. 오늘은 바싹 구운 토스트와 부서져서 지저분하게 접시에 담긴 계란 프라이였다. 계란 프라이의 모양이 지저분해도 일단 계란 프라이였으니 맛은 있었다.


"... 세리자와,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으.. 응 뭔데?"

"혹시 아버지에게도 요리해준 적 있어?"

"아니 없는데?"

"그래? 의외네. 다른 사람들이 와이프라고 부르는 이유가 뭔가 있겠지 싶었는데"

"하하... 쇼우군.. 그건 다른 애들이 말실수한 거야 그런 거 아냐.. 하하.. 그리고 사장님은 아침은 안 드시잖아. 나머지는 주로 밖에서 드시니까.. 사장님은 오늘 아침에도 엄청 일찍 나가셨어. 어제 늦게까지 힘드셨을 텐데... 나도 열심히 해서 사장님처럼 되어서 사장님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어."

"....... 이 정도면 종교네 종교"

"응?"

"아냐"


세리자와는 내가 봐도 많이 변했다. 사회에 나설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해준 사람이 아버지였으니 이렇게 고맙게 생각할 법도 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 아버지가 세리자와를 데리고 왔을 때의 첫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에 그는 아버지의 뒤를 바짝 쫓아오며 손에는 빗물에 젖은 우산을 꼬옥 쥐고서 마치 감옥에 10년쯤 갇혀있다가 나온 범죄자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잔뜩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방 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가 이렇게 나에게 말도 걸어주고, 자신의 주장도 이야기할 정도로 사회성이 좋아진 것에 대해서 아버지의 영향이 상당히 크게 끼쳤던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영향을 받고, 그 영향으로 나도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교가 귀찮게 느껴졌지만 별말 없이 따른 것이었다.



학교는 쵸미시에 있는 어느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초등학교는 엄마가 있을 적에 잠깐 다녔었는데, 3학년 때에 반에 있는 어떤 아이와 별것도 아닌 이야기로 심하게 다투다가 서로 코피를 흘렸다. 어린아이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싸우기도 한다는 게 아버지의 이상스러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됐었는지, 아니면 내가 피를 흘리면서 온 것이 패배자처럼 하찮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흰 티셔츠에 후두둑 묻어 있는 핏자국과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을 인상을 잔뜩 찡그린 얼굴로 한참 쳐다보고서 다음날부터 학교에 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이후로는 학교에 간 적이 없지만 어떻게 했는지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졸업장은 나왔다. 그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학교의 기억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고등학교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은 품었다. 그리고 항상 품는 막연한 기대는 역시 잘못되어 있었다. 그 학교는 모두가 거지새끼 같았다. 우선 이상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시끄러웠고, 장난이랍시고 하찮은 지우개를 훔쳐서 달아나는 것도, 그것을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쫓는 것도,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급하게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달라며 구걸을 하는 것도... 모두 다 꼴불견이었다. 


내가 있는 반의 반장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애는 나에게, 스즈키... 쇼우 군 이지?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걸 한 번도 못 들어봤어. 부 활동 같은 건 하고 있니? 하고 가식적으로 웃으며 묻기도 했는데, 그런 대답할 가치 없는 질문 역시 무시했다. 그 이후로 다른 아이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이 정도였다. 세리자와와는 다른 형태로 구석에 처박힌 곰팡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얼마 후,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학교의 규율을 전혀 지키지 않아도 나를 건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아버지가 누군가를 시켜서 행한 권력 탓에 선생님들도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혼내지 않고, 그렇다고 예뻐하지도 않았다. 보통 이런 곳에 찾아와서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것은 주로 시마자키였다. 그리고 분명 시마자키는 특유의 껄렁껄렁하고 재수 없는 말투로 협박에 가까운 부탁 아닌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의 태도에 선생님들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선생님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딱히 아이들과 말을 하지 않는 나였기 때문에 나도 조용히 숨을 죽이고 시간만을 지키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것 역시 묘한 기분이었다. 싸구려 집단 안에 속해 있는 투명인간.


그날도 돌아와서 고양이에게 햄스터 한 마리를 던져주었다.

고양이는 여전히 입가에 피를 묻히며 물어뜯고,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햄스터가 발톱 아래 깔려서 바둥대는 것까지 전과 비교했을 때에 다른 모습은 없었다.


고양이는 얌전히 죽은 햄스터를 물고 내 방 앞에 살포시 놓았다. 지난번에 만졌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피투성이 햄스터의 작은 손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만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일이 없으면 3일에 한번 오는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메세지를 남긴다.


[고양이가 햄스터를 물어 죽였어요. 바로 와서 치워주세요]











'몹싸 > ing 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쇼우리츠] 햄스터 04  (1) 2017.07.10
[쇼우리츠] 햄스터 03  (0) 2017.05.21
[쇼우리츠] 햄스터 02  (0) 2017.03.26



11











어째서 결혼을 하고 싶은가? 아니, 어째서 다른 여자가 아닌, 지금 사귀고 있는 이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싶은가? 수많은 고민들 중 그것부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퍼펙트 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여자친구의 장점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굳이 결혼하고 싶은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라는 답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내 능력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어떻게 하면 나와의 결혼에 대해서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줄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정말이지 온종일 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여자친구가 허락하더라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이라던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상황들이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힘들었다. 혼자서 이렇게 큰 고민을 앓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만난 친한 형님의 말로는 결혼이 뭐 별거냐며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자신과 결혼을 할 사람은 운명처럼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겠구나!' 하고 알아본다던데 그런 식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의 대부분은 슬슬 결혼을 할 때가 됐고, 마침 이 시기에 옆에 있는 '좋은' ('좋은'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사람과 하는 거라면서 얼굴이 예쁘다거나, 뭐 설렌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라며 나에게도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얼굴은 늙으면 다 똑같고, 설레는 마음도 얼마나 가겠냐는 것이 그 형님의 주장이었는데 그것은 나도 공감을 하고 있는 부분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결혼을 한 이 형님이야 당연히 결혼이 별거냐면서 쉽게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 형님도 처음에 프러포즈를 할 때엔 나와 같이 덜덜 떨었을 것이고, 지금의 형수님께 프러포즈를 하려고 고민하던 당시에는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별일이었을 것이다. 큰 도움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더욱 생각할수록 불안해서 미치겠고, 미치겠기에 더 생각하게 되는 이런 악순환에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았다. 


곧 만나기로 했는데 장난치듯이 한 번 떠볼까? 참, 만약에 프러포즈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꽃다발은 사야겠지? 얼마나 사야 하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나? 들고 가기 힘들 텐데.. 반지도 살까? 부담스러워한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아니, 이런 방식은 조금 구식인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고민을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을 하다가 겨우겨우 잠드는 것이 최근의 일상이었다.



오늘 만나면 말해야지, 아니다 내일 하자.. 아무래도 준비가 부족하니까 일주일 후에... 앗 벌써 일주일이 지나버렸어? 그럼 이틀 정도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자신감을 상실해서는 자꾸 날짜만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주말, 여자친구는 평소의 주말 때처럼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했다. 그 말에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릴 겸 나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조금 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면 내 결심이 조금은 더 확고해지고 조금은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몇 번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낯설다거나 어색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여자친구를 반기는 아이들이 나에게 왜 이렇게 안 왔었냐며 투정 섞인 애교를 부리면서 앞으로는 더 자주 오라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선 이제 자주 오겠다며 이야기를 했다. 


별난 중학생 녀석들에 비하면 이 녀석들은 지나치게 평범한 것 같았다. 하얀 도화지 같은 순수함이 내 마음을 밝게 만들고, 부담 같은 것도 없이 편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내가 이 아이들을 편하게 생각한 만큼 아이들도 나를 좋아했다. 우선 이곳은 봉사활동을 오는 남자도 많지 않았고, 말을 재미있게 해서 인지 아니면 나의 철없는 부분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친구에게 하듯이 나에게도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자 모브가 떠올랐다. 아, 갑자기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래, 모브 동생 녀석..... 공부도 잘하고 잘났다 이 새끼야. 잘난 건 알겠는데, 뭐? 조언이나 충고 같은 거 들을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뒷골땡겨.. 기껏 생각해서 연락했더니... 역시 그 새끼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싸가지없고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역시 잘난 새끼들은 다 그 모양 그 꼴이다. 

그래도 나는 한번 더 이야기를 해 볼 생각으로.. 혹시나.. 혹시 몰라서 다시 스즈키라는 녀석에게 전화를 했는데 이미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문만이 울렸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그와의 연락을 포기하게 되었다.


떠오른 김에 돌려줘야 할 것도 있고 해서 모브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을 할때애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려다 그만 옆에 있는 양동이에 핸드폰을 빠트려 버렸다. 아, 뒷골땡겨..




고장 나버린 핸드폰. 조금은 울적해하는 나를 풀어주려 여자친구는 옆에서 어차피 핸드폰도 새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면서 핸드폰이라도 구경하고 가지 않겠냐고 애교 섞인 말로 물었다. 핸드폰이야 정말 바꿀 때가 되긴 했지만 내가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바꾸는 것과 강제로 바꾸는 것은 명백하게 다르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나를 위로하려 이 말 저 말 하는 걸 보며 이만 기분을 풀어야겠다 싶어, 이 기회에 가장 좋은 걸로 바꿔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근처의 핸드폰 대리점에 들어가서는 반짝반짝한 신형 핸드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삼일 후, 나는 여자친구에게 드디어 프러포즈를 했다.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화려하다거나, 인터넷이나 라디오 사연에 채택될 만큼의 거창한 프러포즈는 아니었지만 나는 나와 어울리는 소소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가본 적 없는 고급 와인바에서 확 트인 야경과 함께 꽃다발과 반지를 주면서 결혼해달라고 청혼을 했다. 유창하게 말도 잘하는데 이상하게 그 상황에서는 입이 얼어붙은 듯이 꼼짝을 안 하고, 갑자기 손을 무릎에 놓아야 할지 테이블에 얹어야 할지,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몰라 안절부절하며 꼴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여자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불안해하는 내 손을 잡아주면서 '나도 레이겐씨와 결혼하고 싶어' 하고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프러포즈 하기 전에 샀던 최신 핸드폰을 열었다. 전 핸드폰이 먹통 상태가 되어 모든 데이터를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해서 또다시 절망하긴 했지만, 프러포즈를 성공한 지금은 아무 감각도 없이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에 꿈속을 걷는 것처럼 머엉하기만 하였다. 이제 막 개통이 되었는지 여자친구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잘 들어갔어? 핸드폰 개통하고 내가 처음 보내는 문자 맞지? 우리 새롭게 시작하자!]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보자마자 몰아치는 행복함이라는 것에 파묻혀 침대에 털썩 누워서는 베개를 와락 끌어안았다. 실감이 나면서도 실감 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척척 풀렸다. 상견례를 했을 때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예상외로 나를 굉장히 좋게 생각하셨고 나의 부모님 역시 말할 것도 없이 여자친구를 좋아했다. 그렇게 양가의 허락도 다 얻은 우리는 천천히 날을 잡고 결혼을 준비하자고 하며 손을 꼭 맞잡았다.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행복감에 만취해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혼은 1년 후에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결코 많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선 여자친구의 학교와 내 직장의 거리를 둘 다 만족시킬 신혼집을 찾아야 했고, 결혼식장도 최대한 예쁘고 깔끔한 곳으로 찾으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신혼여행, 청첩장,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와 턱시도, 등등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이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알아보고 비교하고 상담하고를 반복했다. 그런 과정에서 여자친구와 가끔 부딪치는 일은 있었지만 결혼 준비 중에 일어나는 일이니 좋게 생각하자고 이야기하며 풀어나갔다. 드디어 나에게도 생기는 가정의 무게가 서서히 묵직하게 느껴지면서 이제 나도 조금은 철이 드는 건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봉사활동도 항상 함께 갔다. 전에는 여자친구가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제는 함께 만나는 아이들이 되었기에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D가 고민이 있다는데.. 이런 부분이 조금 불안한가 봐~ 우리가 도와주자. 하는 식의 대화를 할 때가 많았다. 이렇게 공감대가 형성된 우리는 틈만 나면 애정 어린 걱정을 섞어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다. 더 이상 여자친구는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모브에 대해서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나 역시 새롭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스쳐지나가 결혼식을 세 달 정도 앞두고서야 이제 조금 하나씩 정리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슬슬 지인들에게 주소를 물어 청첩장을 보내고, 가까운 곳에 있는 지인들에게는 직접 만나서 청첩장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시골에 계신 할머님에게 직접 청첩장을 전해드릴 생각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원래는 여자친구도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그날 갑작스럽게 학교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오래간만에 찾아뵌 할머님은 드디어 결혼을 하냐며, 두 손을 꼭 잡으시면서 혹시 나 살아있을 때 결혼하는 거 못 보고 죽으면 어쩌나 진심으로 노심초사했다는 둥, 손주는 볼 수 있냐는 둥 전형적인 할머니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으셨고 나는 적당히 받아주며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자리를 떴다.


할머님이 이야기하시는 손주, 결혼 등등의 걱정 소리를 잔뜩 듣자니 다시 조금은 실감이 나기도 하고, 다시 느껴지는 책임감에 걱정 섞인 허탈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자친구 때문에 담배도 줄이고 있었지만 휑하고 허전한 속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담배를 한 대만 필 요량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마일드세븐 하나 주세요.


하고 지갑을 꺼내려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내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들었다. 뭔가 해서 뒤를 돌아보자,


어? 정말 맞았네? 레이겐 스승님?!


하고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활짝 웃는 학생. 아.. 이름이 뭐였더라...


스승님! 저 기억하시죠? 오랜만이에요. 카게야마군의 친구 하나자와 테루키예요!











-

넉살 좋게 웃으면서, 오랜만인데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사주세요! 하고 잡아끄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카페에 들어와서는 얼떨결에 주문도하고 계산도 마쳤다. 달달한 커피에 조각 케이크까지 뻔뻔하게 주문하고서 웃으면서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스승님! 하고 눈웃음을 짓는데, 전에 모브가 하나자와는 잘생겨서 지나가는 여학생들도 모두 설레는 눈동자로 서성이며 쳐다보고, 부모님도 저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었냐고 물었다는 편지의 문장이 떠오르면서 잘 생기긴 했네..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나저나 엄청난 우연이네?

아, 저는 이 근처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요. 오늘은 가족모임이라서 왔어요. 스승님은 이 근처에 살고 계신 거예요?

아니, 나도 청첩장 주러 우연히 왔어.

청첩장? 결혼하세요?


하나자와는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응,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할 때 됐지 뭐.


말하고 나니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놀라 하는 이 녀석의 눈빛에 민망하기도 해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랐어요... 어쨌든 축하드려요!

고마워. 올 수 있음 너도 올래? 멀어서 오긴 힘들겠지만.. 와서 밥이나 먹고 가


말을 꺼내놓고 초대를 안 하기도 뭐 해서 형식 상으로 하얀 청첩장을 내밀었다. 하나자와는 감사합니다 하고 청첩장을 받아들고는 물었다.


카게야마군도 가죠?

응?


하나자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조금은 당황해서 우물쭈물거리다가 말했다.


모브.. 는 요즘 연락을 통 안 해서..

스승님도 연락을 안 하시는 거예요?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나저나 넌 어떻게 지냈니?


모브의 이야기를 내가 하기에는 조금 거북한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아서 황급하게 화제를 돌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근황을 물었다.


저야 뭐.. 학교 가서 공부하고.. 그냥 그렇게 지내죠 뭐.


하나자와는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어 말했다.


역시 스승님도 어쩔 수 없으셨나 보네요..  하긴 뭐.. 당연하겠죠...

응? ... 아. 으응...


무엇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이 녀석이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곧바로, 내가 알고있는 모브가 아니라 이 녀석에게 모브 녀석의 근황을 듣고 싶어서 슬쩍 물었다. 


넌 모브랑 자주 만나니? 모브 녀석은 어떻게 지내?

저도 못 만난 지 꽤 됐어요. 저를 만나고 싶지 않은가 봐요. 연락을 해도 답도 없고.. 찾아가도 못 만났어요. 그렇게 텀 두고 몇 번 찾아가고, 연락하고 하다가 이제 저도 그만뒀어요. 뭐.. 사람이 너무 슬프면 위로도 받고 싶지 않을 거고.. 관련된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저랑 동생 군이랑 스승님이랑 에쿠보군까지 모여서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잖아요...

에쿠보?

? 왜요?

에쿠보가 살아있니?

...네?...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하나자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내 말에 짓는 황당한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동생 군의 일기를 받아서 본지 벌써 1년 즈음이 지났다. 꽤 지난 시간이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 아니다. 모브는 다른 사람 만나는 걸 서툴러 하니까.. 너무 상처받지 마..

상처 안 받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자와는 그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이 마지막에 만났을 때에 카게야마군은 어땠어요? 저는 못 봤지만 주변 사람들 말로는 조금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던데.. 어땠나요?

마지막?

그날.. 본 게 마지막 아니에요?

그날? 나 이사했던 날?

... 뭐야 지금 장난치시는 거예요?

아니, 나 지금 정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날이 언젠데? 


내 말에 하나자와는 조금의 뜸을 들이면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을 하듯이 천천히 입을 열고 말했다.


...장례식이요..

..장례식이라니?


내 물음에 다시 하나자와는 다시금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르시는 거예요? 설마?

장례식이라니. 좀 정확히 말해봐.



...카게야마군의 동생군이요...... 죽었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죽어? 하고 내가 반문하기까지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였다.


하나자와는 충격받은 나의 표정을 보고서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모르셨구나.. 저도 카게야마군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에요. 그래도 스승님은 알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저희 학교 애들이 수군대는 말을 우연히 듣고 알았어요. 시오중에서 전학 갔던 그 유명한 애 있잖아 카게야마 리츠인가? 그 애... 죽었데.. 하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시오중에 어떤 여자애 한 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어서 그렇지 않아도 다들 미세하게 떨고 있는 시점에서 전학 간 카게야마군의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겹치다 보니 시오중의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데요. 게다가 몰랐는데 그 실종된 여자애랑 동생 군이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살이 아니냐, 혹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니냐, 하는 소문이 많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고... 사고사래요.. 제가 알았을 때 장례식은 이미 끝나서 참석을 못했어요. 카게야마도 연락을 받지 않아서 뭘 물어볼 여유도 없었고요... 


얼빠진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헤어졌다. 헤어질 때에 하나자와는 나에게, 카게야마군은 스승님의 연락이라면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한번 해보세요. 괜찮아 보여야 할 텐데 말이에요. 하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미료시의 뉴스를 하루 종일 찾아보았다. 8~9달 전의 기사에 기이한 자연재해사고라고 쓰여있는 기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 동생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현장에서 발견한 학생은 3명, 1명은 사망, 1명은 중상, 1명은 가벼운 경상을 입었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학생은 결국 뇌사상태에 빠져 S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죽어? 갑자기? 사고? 무슨 사고? 

한참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모브의 연락처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핸드폰이 리셋된 이후로 모브의 번호는 이미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고, 모브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무섭다. 나 역시 편지를 받으면서 모브의 동생만큼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모브가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소식을 듣고도 모르는 척을 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큰 소식이었고, 모브가 얼마나 그 동생을 아끼고 좋아했는지를 알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이런 큰 일을 모르는 척을 하기엔 스승이기 전에 인간으로써 너무도 무책임한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는 동생 군의 일기장을 보면서 이제는 주인이 없는 유품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뒤에 연차를 쓰고 동생 군의 일기장을 챙겨서는 조미료시에 직접 찾아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재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그 학생을 찾아 S 병원을 찾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입원해 있었다. 그 병원에 뇌사상태인 학생은 그 학생 밖엔 없어서 찾기는 쉬웠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지 이름을 몰라도 그 뇌사상태의 환자..라고까지만 말해도 안내해주었다. 간호사의 말로는 내일이면 해외로 옮겨서 진료를 한다고 했다면서 내일 오셨으면 헛걸음할뻔하셨네요 하고 호실을 안내해주었다. 그 학생은 예상대로 스즈키라는 학생이 맞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고 유리창 너머로만 환자를 볼 수 있었는데, 동생의 일기와 모브의 편시에 쓰인 것과 동일하게 주황빛을 띄고 있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그가 모브의 동생을 도왔던 그 학생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누워 있는 모습은 차분하지만 이 병실에 누워 있기 전에는 꽤나 활발하고 건방진 녀석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바로 느껴졌다.. 그리고 드는 생각. 자연재해 같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구나.



하나자와의 말로는 모브를 만날 수가 없다고 했기에 나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혹여나 만나지 못하면 모브의 집 우체통에 일기장이라도 넣어두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모브의 집을 찾아갔다. ..사실 만나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져버린 것에 대한 아련함 때문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주변이 꽤나 바뀌었는데도 모브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집은 불이 다 꺼져있었고 항상 정돈이 되어 있던 작고 좁은 정원은 다 말라비틀어져 수척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눈에 띄게 보이는 우중충한 분위기가 모브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 역시 눈시울이 조금은 뜨거워 오는 것이었다.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도 없는지 바람소리와 함께 유난히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번 더 누르려 손가락을 초인종에 가져다 댔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모브가 헤어졌을 때 당시와 별로 다를 것 없이 내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 모브..

어쩐 일이세요?

.........


모브의 새삼 덤덤한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대답을 못 했다. 모브는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고, 갑자기 나타난 나의 등장에 놀라지도 않고서 말했다.


저 지금 짐 놓고 놀이공원 갈 건데.

...놀이공원?

같이 가실래요? 싫어하려나

아냐, 가자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이라는 것이 조금 뜬금없고, 이런 우중충한 날씨에 웬 놀이공원인가 싶었지만 군말 없이 모브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모브는 가는 버스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턱을 괴고는 창문을 바라보면서 혼자 피식피식 웃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하나자와가 '주변 사람들 말로는 조금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던데...'하고 끝을 흐리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갑자기 음음~ 하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뜬금없이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가 혹시나 해서 저.. 모브.. 하고 말을 걸면 그때에만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나에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도착한 놀이공원은 사람도 없는 한적한 놀이공원이었다. 스릴 있는 놀이기구도 없어서 주말이면 몇몇 어린아이들과 동반한 부모님 정도만 오는 그런 곳이었다. 시설이 그렇게 좋지 않은 만큼 입장권 역시 비싸진 않았다. 내가 사주겠다면서 입장권을 구입하자 모브는 가만히 날 쳐다보다가 솜사탕을 사야겠다면서 혼자 쪼르르 가서는 커다란 분홍빛 솜사탕을 사서 들고 왔다. 


놀이기구.. 탈 거니?

아뇨


모브는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고는 놀이공원의 한쪽 벤치에 앉아서는 솜사탕을 뜯어 먹었다. 나는 모브의 눈치를 보면서 옆에 목석처럼 굳어서는 앉아 있었다. 


저.. 모브.. 

... 잘 지냈니?

..소식 대충 들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

네가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

힘들었겠구나...... 그 시기에 함께 있어주지 못 해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스승님


모브는 덤덤한 목소리였다.


무시하셨잖아요.

...응?


무시라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편지도 안 받으셨잖아요. 근데 뭐..., 괜찮아요.


모브는 다시 솜사탕을 한 움큼 뜯어서 입안에 넣었다. 그 상황에서 '핸드폰이 고장 나버려서... 아마 그 시기에 네가 연락을 한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요즘 결혼 때문에 조금 바빠서......' 하고 받은 연락이 없다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너무나도 구차했다. 죄인이라도 된 마냥 입을 다물고 신발 끝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씨는 더 어둑어둑해지면서 곧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컴컴해졌다. 당연히 놀이공원에는 나와 모브 외에 표정없이 돌아다니는 경비원, 기계적으로 돌아다니는 몇몇의 환경미화원 외에는 없었다. 오래된 탓에 녹슬어버린 곳곳의 장비들탓에 마치 폐쇄된 공간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놀이기구에서 나오는 발랄한 음악소리도 그 순간엔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 구름 되게 많다, 비 오려나봐요 얼른 먹어야겠다 솜사탕은 비가 오면 녹아버리니까


모브는 그렇게 혼자 말하고는 솜사탕을 마구 뜯어서 제 입안에 넣었다. 나에게 드실래요? 하고 한번 묻고는, 안 드실 거죠? 하고 저 혼자 답하고는 꾸역꾸역 다 먹어치웠다. 하나자와의 말대로 모브는 정말로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부분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다행이다


모브는 뜬금없이 날 보고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스승님이 혹시나 저에게 제령을 하자고 하면 어쩌나 조금 고민했어요. 

무슨 소리야... 이제 그런 거 안 해.

이제 돌아갈래요. 솜사탕도 다 먹었으니까요. 


모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벤치에서 일어섰다. 모브는 정말로 뭔가 모르게 이상했다.


저.. 모브.. 이거 일기장 말인데.. 돌려주려고.. 유품이잖아..


나는 돌아가는 길에 타이밍을 봐서 모브에게 일기장을 건네었다. 혹시나 모브가 이 유품을 보고 발작적으로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면서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모브는 그 일기장을 보더니 나를 다시 쳐다보고는 웃으면서 일기장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품이라뇨?

이거 네 동생 거잖아?


모브가 덤덤하게 네 하고 대답을 하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안 보이세요?


모브는 뜬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뭐가? 하고 묻기도 전에 모브는 내 대답을 가로채듯이 말했다.


됐어요.


모브는 일기장을 받아들고는 가방에 넣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한마디도 없었다. 집 앞에 와서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다면서 나에게 잘 지내세요 하고 건조한 인사를 건네고는 집 문을 닫고는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브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열어본 핸드폰에는 여자친구에게 내일 봉사활동 일정에 대한 문자가 와 있었다. 그래, 내일 9시 반에 복지관에서 보자 하고 답장을 하고는 복잡해진 심정을 잡으려 눈을 감았다.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이 잔뜩 햇빛을 가리고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내 위를 막아서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와서 혹시 몰라 책상 서랍을 뒤져보니 내가 읽지 않은 모브의 편지 두어 통이 있었다. 아마 결혼 준비 탓에 내가 인식도 못하고는 서랍에 마구 쑤셔 넣은 것이 분명했다. 읽지 않은 그 편지들 중 마지막 편지를 뜯어서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부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스승님, 리츠의 옆에는 정말 이상한 친구가 있었어요.. 아마 저에게서 도망치듯이 행동했던 것도 아마 이 녀석이 리츠를 살살 꼬드긴 것이 분명해요. 제가 전에 말했던 그.. 스즈키라는 친구예요. 정말 웃기는 놈이에요. 제 앞에서 리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 있죠? 리츠 역시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했을 거예요... 저 역시 너무 화가 났어요.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리츠는 인기가 많아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내 옆에 있는 것을 리츠는 좋아할 거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거죠.

스승님은 전에 저에게 사람에겐 초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하셨었지만 가끔은 필요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스즈키라는 녀석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기괴한 경계선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형태로 멍하니 흐름을 타고 갈 거예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눈을 뜨더라도 행복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리츠는 제 옆에서 평생 행복할 거예요. 그렇죠? 제 옆에서 존재하는 현재를 가장 행복해하겠죠? 

엄마와 아빠는 저를 볼때마다 항상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울어요. 시게는 전혀 실감을 하지 못하는구나..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니? 그런 모습이 더 슬프다.. 하고요. 엄마는 제가 너무 큰 슬픔에 현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는 거래요. 하지만 저는 슬프지 않은걸요. 울어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음... 아! 딱 한가지 조금 아쉬운 건 있어요. 리츠가 에쿠보처럼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 같아요. 그건 조금... 슬퍼요.]





....


동생 녀석이 모브를 무서워 한 것은 괜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나와 모브가 만났던 그 순간에도 동생은 쭉 옆에서 영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이상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평생 모브의 옆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면.. 영체로써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편지의 이상한 구절을 읽고 나서, 그동안에 모브에게 받은 모든 편지를 다 모은 다음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품에 있는 라이터를 조심스레 켜서는 편지에 불을 붙였다.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어서 잘 붙지는 않았다. 한참을 바람과의 싸움 끝에 불을 붙이고 새빨간 혓바닥이 그 편지들을 개걸스럽게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빳빳했던 종이들이 까부러치듯이 불이 닿자마자 말려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고,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탁탁 소리를 내며 그렇게 타오르다가, 까만 잿가루로 변해버린 편지 쪼가리들은 멀리서 부는 바람을 타고 저 먼 구름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저 먼 곳의 뭉게구름은 생김새는 비슷해도 결코 솜사탕처럼 달콤하진 않을 것이다. 








[텁석에쿠] 석양볕

2016. 12. 5. 09:54










스산한 공기가 기분 나쁠 정도로 무겁다. 게다가 몸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작은 촛불 따위를 끄려 후 하고 불면 그 작은 입김만으로 영원히 소멸할 것 같았다. 시게오에게 영소의 대부분이 날아갔고, 그 후에 그것도 모자라서 왠 금발의 꼬맹이에게는 소멸당할 뻔도 하였다. 최악의 상황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게오와 그 금발 꼬맹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에쿠보는 티끌만 한 크기로나마 간신히 영체를 유지하고서는 길을 걸었다.


순탄치 않았다. 가는 도중 돼지, 개, 심지어 작은 쥐의 영에게도 도망쳐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고 잔뜩 지쳐있었다. 저보다 작은 생물의 움직임에 반응을 보이는 소동물들은 에쿠보가 도망치는 그 움직임에 호기심을 품고는 쫓아왔다. 저리 가! 따라오지 마! 살려줘! 하지만 뒤에 있는 거대한 생물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거대한 앞발로 그를 밟으려 내딛고, 에쿠보는 그 커다란 그림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쳐다보지도 않던 가축의 영들에게 쫓기는 처지라니.. 상급 악령으로 기세등등했던 자신의 모습이 마냥 그립기만 하였다.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이쪽으로 와! 하고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턱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벼룩을 타고 다닐 정도로 작은 영이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그 작은 손을 허겁지겁 잡고서 벼룩의 등에 올라탔다. 잔뜩 지친 에쿠보는 그제야 눈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았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작은 영은 그를 위로해주듯, 이제 괜찮을 거야 하고 어쭙잖은 위로까지 건네었다. 그 말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성기 때엔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들.. 지금은 이런 녀석에게 구해질 정도로 하찮아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애석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기에 그런 위로도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난 텁석부리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에쿠보"

"그렇구나 잘 부탁해"

"..그래"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돌았다. 조금은 불편한 듯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 텁석부리는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텁석부리가 워낙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에쿠보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살아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은 많지 않다. 텁석부리도 살아있는 시절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냥 사라지기 싫었을 뿐이고.. 이승에 무슨 원한이나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목적도 없이 세월만 훠이훠이 지나가더라..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난 죽어도 딱히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언제나 혼자 하루하루를 살고 나서 왜인지 영이 이렇게 작아졌어"


"아.."

"에쿠보 너도 그렇지?"

"음.. 글쎄.."

"같은 처지에 잘 지내자"


텁석부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무기력한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텁석부리는 오랜만에 본 에쿠보가 반갑고 좋았다.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신을 보며 귀찮은 듯이 바라보는 눈도, 초록색 빛을 발하는 영체의 빛과 양 볼에 귀엽게 자리한 빨간 반점도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만 말도 통하지 않는 벼룩 노치와 함께 작고 허름한 오두막에만 누워있는 것은 조금은 외로운 일이다. 사람이 정말로 죽을 때는 외로울 때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미 죽어서 영이 되어버린 텁석부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외로움을 덜어주는 상대를 만난 것은 그에게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되었다.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혹시 살아있을 때 꽤나 가까운 인연으로 닿아있었던 사람은 아닌가 하고 혼자서 상상하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조급해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서 텁석부리는 근처에 같이 산책이라도 가자면서 에쿠보에게 제안했다.


"웬 산책?"


반응이 조금은 떨떠름했다.


"음.. 아니 네가 조금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뭘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

"산책.. 그래 할까?"


텁석부리가 자신을 조금은 생각해준다고 생각한 에쿠보는 크게 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 의견에 순응했다.

그렇다고 해봤자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잡초 풀,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소동물의 영들, 조금 올라와 있는 황폐한 언덕, 척박한 자갈밭..


"저쪽으로 가면 호수도 있어. 작지만."


조금은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는 텁석부리를 보고 에쿠보는 조금은 그에 대한 경계가 풀어졌다. 

텁석부리의 안내에 따라서 함께 간 그 호수는 그렇게 맑고 깨끗한 곳도 아닌 데다가 근처의 풍경이라도 해봤자 드문드문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까맣게 문드러진 나무가 으스스하게 서있고 정리되지 않은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란 곳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서 청결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텁석부리가 이런 곳까지 찾아서 안내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텁석부리는 잡초가 별로 많지 않은 곳을 찾아서 안내하고서는 이곳에서 조금 기다리면 해가 진다며 그 광경이 꽤나 예쁘다고 했다.


"살아 있을 때에도 무기력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광경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한 후에 꼭 이렇게 해가 지는 이 광경을 보고 헤어졌을 거야. 나는 오늘 너와 영체가 되고 나서 첫 번째 데이트를 하는 거야. 사람의 영과는 온 적이 처음이거든!"


"데이트 같은 소리.."


에쿠보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덧 하늘이 비치어 파랗게 빛나던 호수가 붉은색 잉크를 떨어트린 것 마냥 점점 붉은빛으로 불붙었다. 잡초들도 나무도 붉은빛을 발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텁석부리는 옆에 앉아 있는 에쿠보를 바라보았다. 초록색의 영체에도 붉은빛이 반사하고, 눈동자 역시 붉은빛이 맺혀서 반짝이는 하나의 구슬 같았다. 늘 혼자 봐왔기에 몰랐던 눈동자에 맺힌 주홍빛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 텁석부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는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에쿠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커졌다. 가축들의 영에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이 되었을 때 그런 에쿠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텁석부리는 말했다.


"에쿠보.... 어쩐지 너 조금 커지지 않았어?"

"응, 하지만 아직 멀었어"

"어째서 커지려고 하는 거야? 우린 죽었어!"


텁석부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꽤나 흥분한 듯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조금은 화난 듯 보이기도 했다. 에쿠보는 그런 텁석부리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텁석부리가 그와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몹시 언짢았다. 그는 상급 악령이다. 그런 벼룩의 영과는 다른 차원의 악령인 것이다.


".. 텁석부리.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이 몸은 너와는 달라. 어째서 너는 너 자신을 나와 동일시하는 거야?"


"에쿠보.. 너나 나나.. 이미 죽었잖아.."


"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쿠보는 말했다. 이 몸은 신이 될 몸이야! 이런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돌아가서 시게오를 마음껏 이용하고 틈을 봐서 몸을 차지한 다음에 세상의 신이 될 거라고!


"신...?"


텁석부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니? 게다가 신이라니.. 그래서 에쿠보는 그렇게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텁석부리는 다시금 외로워졌다.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고, 충분히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상대가 신이라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니.


그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에쿠보는 조금씩 몸이 커져가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처음에 맞잡았던 에쿠보의 손을 이제 다시 맞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자신의 손은 이렇게나 작은 것일까?..





자꾸만 커지던 에쿠보는 어느 날 새벽 떠나겠다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텁석부리 지금까지 돌봐줘서 고마웠어"

"..."


점점 커지는 에쿠보를 보면서 언제 떠난다고 말할지 불안해 떨고 있었던 텁석부리였지만 예상을 한다고 해서 슬픈일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텁석부리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눈물을 가득 삼키고 있기도 했고, 돌아보면 다시 혼자가 되어버렸다는 외로움이 더더욱 실감이 나서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왜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험한 상황에 이 몸을 살려준 은인이잖아. 고마웠어. 잘 지내."


에쿠보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그대로 길을 떠났다. 그는 전혀 서운하다거나, 미련이 남은 듯한 한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이미 해는 지고 어두운 어둠이 무겁게 깔려있다. 조용한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고, 벼룩의 영인 노치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며 바스락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한참을 이불을 적시다가 결심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노치의 등을 탔다. 


노치! 어서 가자! 에쿠보에게 가야겠어!


노치는 마치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등을 내주었다. 노치가 그렇게 열심히 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잘은 몰라도 노치도 에쿠보에게 조금은 정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서 말갛게 빛나는 에쿠보의 초록색 영체가 보였다.


에쿠보!!!


텁석부리는 크게 외쳤다. 하지만 에쿠보는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커진 몸집 탓에 이제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에쿠보!!! 에쿠보!!


그는 다시금 힘차게 외쳤다. 그의 격정적인 외침이 들렸는지 에쿠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돌아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어째서 자신이 에쿠보를 필사적으로 쫓아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자신의 외침이었다. 아! 나는 에쿠보의 일부가 되고 싶었구나..! 에쿠보와 처음이자 마지막의 데이트에서 본 붉은 석양을 늘 함께 보고 싶다...! 핏빛 석양이 빛나는 그의 눈동자의 일부가 되고 싶다...!


에쿠보...! 나를 흡수해줘...! 나도 함께 데려가 줘....! 제발 부탁이야...!


텁석부리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어찌나 크게 외쳤는지 머리가 띠잉하고 울릴 정도였다.


에쿠보....! 제발!!! 나를 흡수해줘...!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난 너무 작아서 너에게 커다란 도움 같은 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 아냐, 그만둬. 돌아가...!


어째서 그러는 거야! 나를 흡수해줘...!제발...!


에쿠보는 맹렬히 쫓아오는 그가 무서웠다. 작은 그의 푹 패인 검은 눈에 이상하게 광기가 서려있었고 너무 크게 소리를 쳐서인지 목소리 조차 기괴하게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에쿠보는 자신이 커지기 전의 작은 상태에서 저런 광기어린 텁석부리를 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만둬.. 왜 그러는 거야...


에쿠보...! 나.. 난 너의 일부가 되고 싶어...! 나도 데려가 줘....!!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낀 에쿠보는 곧바로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흡사 쫓고 쫓기는 관계였다. 에쿠보도 텁석부리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텁석부리도 살면서 어떤 존재를 이렇게 필사적으로 쫓아본 적이 처음이었고, 에쿠보다 이렇게 작은 존재를 피하려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도 처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뒤를 돌아보니 텁석부리는 없었다. 에쿠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역시 무기력한 그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아오다가 그의 본 모습을 되찾고는 에라 모르겠다 싶었을 것이다. 











-

노치도 텁석부리도 커다란 에쿠보가 달리는 것을 쫓기엔 무리였다. 텁석부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흡수해달라는 그의 소원마저 매정하게 뿌리치고 간 에쿠보를 원망했다. 처음부터 그를 구해준 것이 잘못이었을까? 다시 혼자 남아버린 텁석부리는 자신을 동정했다.. 다른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는 이미 에쿠보를 만나기 전의 자신과는 또 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내일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서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텁석부리는 한켠의 허한 가슴을 움켜잡고 계속해서 울었다.. 눈물이 뜨겁게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왔다. 이제 그는 다시는 석양을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난 텁석부리는 조금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이상한 징조를 느꼈다. 왜인지 갑작스럽게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뭘까? 이 답답함. 텁석부리는 바람이라도 쐴 겸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선 노치를 불렀다. 


노치, 어딨니? 산책하러 가자


노치는 멀리서 달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노치를 탈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다가온 노치는 너무나 작아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노치를 바라보면서 노치가 맞느냐고 물었다. 노치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평소에 앉아 있던 머그컵 잔으로 달려가보았다. 항상 앉아 있던 그 머그컵. 평소엔 그 머그컵의 안을 내려다보려면 낑낑대며 기어올라가야 했던 그 머그컵을 이제는 발꿈치를 들면 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텁석부리는 깨달았다.


아...! 나도 살아있구나...! 


에쿠보와의 만남으로 그는 조금은 변화하고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는 점점 더 커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에쿠보가 어째서 그렇게 커지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쿠보가 신이 된다는 야망을 품었다면.. 그는 에쿠보와 석양을 볼 두 번째 데이트를 상상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텁석부리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

내가 뭘 쓴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몹싸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모브] 데이지  (0) 2016.11.24

10










-

A에게는 그만하자고 통보를 했다. 조금은 일방적일 수도 있으나 에쿠보의 억지스러운 행동과 나에게 속삭이는 말들 모두가 A에게는 정말로 소름 끼치는 일이 될 것이기에 나는 가장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

어제는 비를 많이 맞아서인지 감기에 걸렸다. 형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의 형의 반응을 보면 역시나 형은 나에게 조금의 의심도 하지 못한 채 나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며 조금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지만 에쿠보의 이름을 한번 언급한 걸 보면 에쿠보가 조금은 언지를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형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나는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편안했다. 조금 신경 쓰이는 형의 이상한 행동을 빼고는.


집착에 가까운 형의 행동은 정말로 이상하다. 감기에 걸린 내가 걱정된다며 갑자기 학교에서 조퇴까지 하고는 뜬금없이 나에게 달려온다거나, 자고 있는 나의 침대 옆에 바짝 붙어 멍하니 앉아 있다거나 .... 일어난 나와의 대화 이후에 갑작스럽게 입을 맞춰온다거나.......




-

며칠째 A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핸드폰에 형이 A와 문자를 나눈 것을 한참 후에 발견하고서야 A가 어쩐지 학교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큰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나는 귀찮은 일 하나를 덜어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며 하교를 할 때에 사복 차림의 수상한 한 명의 남자가 교문 앞을 서성이더니, 하교하는 내 앞에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안녕? 카게야마 리츠가 맞니? 경찰이란다. 뭐.. 너무 무서워하지는 말고.. 간단히 조사를 할 것이 있는데 잠깐 함께 가줄 수 있겠니?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기에 따라간 경찰서에는 분주한 다른 사람들과 고개를 푹 숙인 범죄자들, 그리고 대낮인데도 술에 잔뜩 취해서 뻗어있는 노숙자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어째서 경찰들이 나를 불렀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감이 잡히는 것이 없었다. 자리에 앉자 경찰이 부드럽게 나에게 A의 이야기를 꺼내며 A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다시 물었다. 


A가 며칠째 행방불명이란다. 알고 있었니?

...행방.. 불명이요..?

음.. 아직 몰랐구나? 마지막 연락을 한 사람이 너였어. 그래서 혹시나 뭐 아는 게 있나 해서..

제가.... 아는 거... 라면...

조사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문자 좀 보여줄 수 있니?


경찰은 내 핸드폰에 A와 나눈 문자를 한참이나 읽어보고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마지막 연락은 네가 아니구나?

저는 그날 아파서 자고 있었어요.

A랑 무슨 관계였니?

문자 보시면 대충 아시겠지만.. 음.. 잠깐 만났던..

네가 이 날 헤어지자고 해서 충격이 컸을까?

...아마도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이 문자를 주고받은 날 A를 만났니?

낮에는 학교에서 만났지만 저녁엔..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형은 이 A와 아는 사이니?

아니요 전혀요.. 같은 학교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그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거네?

네.

CCTV를 봤는데 너희 집으로 가는 길의 모습은 포착되어 있어. 하지만 돌아오는 길 쪽의 CCTV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는 게 없더라고. 뭐.. 그렇게 빡빡하게 촬영되고 있는 근처는 아니었으니까 찍히지 않는 곳으로 갔는지도 모르지만... 

....

그럼 이 여자애는 평소에 어떤 성격이었니? 아니면 혹시 원한을 살만한 누군가가 있었니?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것에는 실종, 납치, 혹은 자살의 가능성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그 질문에 나는 알고 있는 데로 대답했다. 얼굴도 예쁜 편인데다가 성격도 활발해서 여자들도 남자들도 모두가 좋아하는 인기 있는 사람이었고, 원한이라고 해봤자 학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여자들의 시기 어린 가벼운 질투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고. 


경찰은 순순히 나에게 알겠다고 말하며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혹시나 뭐든 생각나는 거라던가, 뭔가 A가 갔을 만한 장소라던가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연락 달라면서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

학교는 떠들썩했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두가 이 A의 실종사건에 대해서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모두가 무서워했다. 나에게 다들 A가 어떻게 된지 아냐며 슬쩍 묻기도 하고, 나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거라며 나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모두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A에 대해서 납치가 아니냐, 살인사건이 아니냐 하고 수군거리며 알 수 없는 범죄의 그림자에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

집에 돌아온 나에게 에쿠보가 내민 것은 한 쪽면이 이상하게 찌그러져버린 A의 플라스틱 명찰이었다. 


받아들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집 앞에 떨어져 있었다고 말하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집에 찾아왔었던 걸까?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에쿠보가 말했다. 아, 조금 안타깝네 이 여자애, 시게오에게 완전히 소멸당했다고. 우리가 이용하기도 전에 말이야.




-

.. 역시 형은 무서워.. 나 또한 이렇게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릴 거야.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형은 나 또한 이렇게 죽여버릴거야.




-

에쿠보는 나에게, 시게오가 너를 좋아해 하고 말을 꺼냈다.

 

레이겐에게 보내는 편지를 언뜻 훔쳐봤는데 네 이야기를 가장 많이 써서 보내고 있어. 너, 아팠을 때 너에게 입을 맞췄었다며? 봐, 너에게 조금 이상하고 유별난 감정이 있다니까? 너도 실은 알고 있잖아? 


뭘 알고 있다는 건지.. 그런 감정이 뭔데.. 우린 가족이자 형제인데. 모든 걸 떠나서 가족끼리는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반박하고 나서자 에쿠보는 안심하는 듯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다행이다 리츠, 혹시나 네가 시게오에게 정말로 마음이 있어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 가장 쉬운 길로 가자고 우리. 너도 널 지켜야 하잖아? 나는 너의 편이야 릿쨩




-

더러워. 이건 내가 행한 그 어떤 일보다 더럽고 추악했다. 동시에 나를 믿고 있는 부모님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죄책감과 형에게 느끼는 공포심이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조금 강하게 압박되어서 조금의 자극으로도 나는 터져버릴 듯한 상태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형은 학교에 자자한 A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나는 형에게 그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는 위치였다지만 형 역시 주위 사람들이 수군 거리는 이야깃거리에 정말이지 놀라울 만큼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요즘 학교에서 학생회가 실시하는 방과 후 학교의 보안에 대해서도 신기해했다. 어떻게 이렇게 떠들썩한 이런 분위기를 모를 정도로 무신경한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은 맞는지, 혹시 형은 일부러 A를 죽인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이상한 생각을 했다.


주머니 안에 넣어둔 경찰이 건네주었던 명함을 늦은 밤에 꺼내어 보면서 결론이 없는 고민을 했다.

결국은 찢어서 버렸다.




-

어쩔 수 없었다고 하기엔 너무.. 더럽다


형과의 관계가 더럽고, 나를 괴롭게 한다지만 그 육체적인 관계가 마냥 싫기만 하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 자신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형과의 이상한 관계에서 크진 않더라도 약간의 괘락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더러워서 형이 잠든 깊은 밤에 화장실에서 하루 종일 토했다. 이미 뱃속에 아무것도 없어 누런 위액만 캑캑대며 뱉어낸다고 해도 형과 나의 뒤섞인 비릿한 정액 냄새가 코 끝에 머물며 나를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형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 리츠! 하고 조금은 떨리는 듯이 부르는 그 목소리가 자꾸 귀에 들리기도 하고 뒤에서 껴안아오는 그 기분 나쁘리만치 따스한 가슴이 자꾸만 내 옆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적당히 괴롭게, 적당히 견딜만큼 내 목을 움켜잡고는 놓아주질 않는다.




-

형이 에쿠보를 나에게 소개했다. 악령이지만 내가 내 주위 사람들에게 이상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에쿠보와 나는 서로를 한참 쳐다보다가, 서로 이 상황에서 아는 척을 하면 안 될 거라는 강한 직감이 통했는지 우리 둘은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에쿠보도 나와 비슷했다. 에쿠보도 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형을 두려워하는 만큼.




-

레이겐씨가 형에게 사기를 치는 어른답지도 못하는 이상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어른은 어른인가 보다. 덕분에 나도 약간은 브레이크를 지그시 밟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다음부터의 일기는 모브가 편지에 썼던 스즈키라는 녀석의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보이는 불안함의 증폭 때문인지 글씨도 엉망이고, 문체조차 엉망으로 쓰여 있어서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대강의 내용을 보면 스즈키라는 녀석이 초능력 기운을 쫓다가 동생 녀석을 발견했고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년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모브에게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자세히는 쓰여있지 않지만 동생 녀석의 공포심을 조금은 달래주는 녀석이 이 스즈키라는 녀석이 아니었나 싶다. 답지 않게 스즈키라는 소년에게 모브와 있었던 일들과 자신의 일들, 그리고 에쿠보에게 있는 두려움까지 모두 다 털어놓았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본인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런 녀석을 어떻게 믿고서 다 털어놓을 수 있는지 조금은 의아해했고 스즈키를 더 빨리 만났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고 쓰여있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약간은 편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일기에 쓰여있는 스즈키의 성격은 모브와는 완전히 다르게 외향적이고, 동생 녀석에게 남다른 호감을 표하면서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런 과정이나 이 녀석의 조언을 듣고서 움직여왔다는 것을 보아 동생 녀석이 모브에게로부터 숨어야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도 스즈키라는 녀석의 도움과 조언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놀랐던 사실은 에쿠보의 이야기였다. 에쿠보의 존재에 대해 스즈키는 동생 녀석에게 에쿠보를 유인해서 함께 자신에게 오게 한 뒤에, 동생 녀석의 동의나, 생각조차 들어보지 않고 없애버렸다고 쓰여있었다. 이러한 제멋대로의 행동에 놀라고 당황해서 크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스즈키는 '왜 화를 내는 거야? 이 녀석이 두렵다며? 네 옆에서 사라지면 다 해결되는 문제잖아.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하고 덤덤하고 침착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모브의 친구이기에 에쿠보가 사라졌을 때에 시게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섭다며 일기에 또다시 느끼는 두려움을 잔뜩 써놓기도 했지만, 그 다음 장의 일기장에는 또 아무렇지 않게 스즈키와의 일상에서 조금은 안정된 모습을 찾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에쿠보가 정말로 사라진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살아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정말로 소멸해버렸을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동생 녀석의 일기를 봐서는 에쿠보라는 령이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일기는 [스즈키는 나에게 '리츠, 나와 함께 있으면 걱정할 거 없어.' 하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이 녀석이 형보다 더 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 말에 안심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녀석 특유의 확신에 찬 말투에 안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라는 문장으로 끝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것을 알아버린 나의 심정은.. 한때 모브의 스승이었다고는 하나, 나도 모브의 동생 녀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에 모브가 나에게 화를 냈던 때에도 느꼈던 공포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모브가 무서워지고 두려워졌다. 모브는 나에게 이런 것을 알려줘서 무얼 하려는 걸까. 나는 이런 것에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하나? 의미 없이 일기장의 남은 공백부분을 휘리릭 넘기다가 뜬금없는 중간에 '스즈키 xx-xxxx-xx' 하고 번호로 보이는 낙서수준의 글씨를 하나 발견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이 이상으로 나는 모브에게 직접적으로 연락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동생 녀석이나 여기에 적어져 있는 스즈키라는 소년에게 무어라고 말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오지랖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모브에게 이런 내용을 전해 듣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해결하는 데에 약간의 힘을 보태었다는 정신적 안도감을 얻어야 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번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면 그 동생 녀석이 다닌다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봐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며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어? 저기... 여,여보세요?

[...]

응? 안 받았나? 아, 아닌데? 받은 것 같은데..? 저.. 스즈키.. 군? 아닌가?

[누구?] 

아, 역시 받았구나. 안녕? 난 세기의 영능력자...

[...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까칠하네.. 카게야마 리츠와 이야기를 하고 싶..

[... 리츠의 형?]

아냐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고.. 음... 뭐랄까... 그.. 동생 군에게 레이겐 아라타카..라고 하면 알 텐데...


내가 이름을 말하자 한참을 말이 없더니 본인에게 물어보고는 답을 주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요즘 꼬맹이들은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버릇이 없어?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말이야. 











-

기다리는 연락은 항상 늦게 온다고 하였던가? 다음날 저녁에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을 발작적으로 받아 들었을 때는 생각지도 못 했던 어릴 적 고향 친구가 야!! 레이겐!! 오랜만이다야!! 하고는 핸드폰 너머로 빼액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간만에 맥주 한잔하자며 호탕하게 웃으며 친구들도 모두 온다고 했으니 보자면서 친근하게 말했다. 뭐, 할 일도 없고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전화를 멍하니 기다리느니, 친구들이나 만날까 하는 생각에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하게 변한 놈은 없었다. 다 거기서 거기였다. 뭐 어떻게 지냈냐, 우리 만난 지가 벌써 15년 만이다, 여자친구는 있냐 등등 수많은 질문 세례를 던지며 나를 맞아주었다. 맨날 중학생 어린 새끼들만 보다가 다들 커버린 사회 안의 현실적인 친구들을 만나서 그렇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나누었지만 조금은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미 결혼을 했고 결혼을 안한 친구는 나와 어떤 한 친구뿐이었다. 다들 나에게 여자친구도 있다면서 왜 결혼을 안 하냐면서, 우리 나이는 이제 슬슬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야! 하고 다들 나에게 장황한 설교를 시작했다. 내가 모브에게 어쭙잖게 설교를 할 때의 모습이 이런 꼴이었을까?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레이겐. 여자친구 선생님이라면서? 프러포즈는 했어?

프러포즈? 아니 그게.. 아직...

그래? 그럼 우리가 도와줄게. 차일까 봐 못하는 거야?

그런 것도 없진 않지만.. 사실 아직 프러포즈까지는 생각도 못했어.

그럼 이제 생각해봐. 우리가 도와줄게. 역시 프러포즈는 평범하게 하는 것보다는...


그러더니 다들 본인이 했던 이벤트의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뭐, 차 트렁크에 풍선이랑 케이크, 그리고 반지를 넣어서 세팅을 해 놓은 다음에 뭐 좀 꺼내달라고 하며 유도했더니 여자친구가 보고 깜짝 놀라 하며 좋아했다는 녀석도 있고, 어느 장소로 오라고 한 다음에 촛불을 하트 모양으로 켜 놓은 다음에 세레나데를 불러주며 프러포즈를 했더니 여자친구가 울어버렸다는 녀석도 있고.. 아 정말 다들 왜 이렇게 하나같이 오그라드는 짓들만...


재미도 없고, 프러포즈라는 것을 해도 절대로 이 녀석들이 말하는 것 같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은 하기도 않을 것이기에 맥주를 반 잔 정도 마시다가 취했다는 핑계로 집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멋드러진 프러포즈에도 다 주인공이 있는 법이다. 나같은 사람이 저런 겉만 번쩍번쩍한 이벤트 같은 것을 하면 정말이지 우스운 꼴로 보일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서 청혼을 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프러포즈.. 그러고 보니 요즘 어머니도 나에게 슬슬 결혼을 물어보시기도 하고.. 나도 이제 정말 결혼을 해야 할 때가 되기도 했는데.. 하지만 지금 내 여자친구는 정말이지 나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여자가 아닌가...!


취기가 살짝 올라오는지 조금은 알딸딸해지는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서 정말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해도 괜찮을까, 혹여나 여자친구는 나를 그렇게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생판 처음 보는 전화번호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웬 스팸전화인가 싶어 수상쩍은 생각을 하며 받아드는 동시에, 아..! 그 동생 녀석이 전화를 했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모브 동생이니?

[... 네]

와 정말 전화해줬구나. 하하 이렇게 연락을 하는 건 처음이지? 잘 지냈어? 정말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어. 이 번호는 뭐야? 처음 보는 번호..

[다른 사람 핸드폰이에요]

아 그렇구나 전학 갔다던데 여전히 공부는 잘하고 있어? 요즘 날씨가..

[저와 연락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뭐죠? 스즈키의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용건만 간단히 하세요]

어.. 그니까... 대충 짐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새벽에 핸드폰 너머로 듣는 동생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도 건조하고 불안함과 초조함을 최대한 감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여서 최대한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지금까지의 사정을 대충 이야기했다. 


모브가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알고 있지? 내가 모브에게 너희 관계에 대해서 조언한 것도 말이야. 모브가 네 일기를 보내줬어.. 훔쳐본 것은 미안해.. 아, 일단 화내지 말고 들어봐. 우선 스즈키라는 친구의 번호도 그 일기장에서 우연히 본 거고.. 모브는 이 번호까지는 보지 못한 것 같아. 내가 너와 연락을 하고자 한 이유는 모브가 너를 무척이나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렇게 마냥 피하지만은 말고 연락이라도 취해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연락을 했어.

[형에게요?]

그래, 나에게도 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수차례 이야기했었어. 네가 다닌다는 학교에 전화도 하고 말이야. 너에게 그 학교 담당이 전해주진 않은 것 같지만.. 너의 심정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넌 가족이잖니? 평생 안 보고 살 거야? 너 지금 너무 극단적이야.

[레이겐씨]

응 이야기 하렴

[전 형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

[그러니 레이겐씨도 같잖은 스승 행세 같은 거 그만두세요. 제가 레이겐씨에게 조언이나 충고 같은 거 들을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용건이 이게 전부라면 끊을게요]








[레이모브] 데이지

2016. 11. 24. 01:30











초능력자라도 하더라도 중학생은 어쩔 수 없는 중학생이었다. 시게오는 손님이 없는 영등등사무소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어 놓고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어른이라는 면모를 조금은 과시해볼까 하는 생각에 레이겐은 시게오의 머리를 살짝 톡 치면서 물었다.


"뭐 풀리지 않는 거라도 있니?"


"음... 이 책을 읽고 생각해보라고 하셔서요..  근데요, 너무 어려워요. 스승님이라면 해결해주실 것 같아요!....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 보셨나요?"


"완전히 명작이잖아. 봤지"


"데이지가 어째서 개츠비를 버리고 떠났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는데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시게오는 평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했다. 이럴 때일수록 어른답게 설명을 술술 해준다면 좋았겠지만 레이겐은 그런 복잡한 문제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고 너무 오래전에 읽은 탓에 내용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음... 숙제니?"


"숙제는 아닌데요. 그냥 생각해보라고 하시고 수업을 끝내셨어요. 근데 저도 궁금해져서요."


"그건 말이야 개개인마다 느끼는 게 답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이런 건 나에게 묻지 말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볼 것! 알겠니?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해줄래? 정답인지 아닌지 내가 평가해 줄 테니까"


"...네.."











*


"28살 레이겐 아라타카...... 15살 어린아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원래부터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알바라는 명목으로 어린애를 사무실에 들인 겁니까?"

"레이겐씨?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터뷰하시죠"


파란만장한 28살. 지금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집 앞에 모인 수많은 무리의 방송 기자들은 각자 신나서 플래시를 터트리면서 사무실 겉을 찍어대면서 그를 관찰하고,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앞에서 수 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레이겐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집어 들고는 손을 떠는 탓에 담배 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해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붙여서는 한입 깊게 빨아들이고는 내뱉었다. 담배연기마저 아련하게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시게오를 만나게 된 이후로는 손에 잘 대지 않았었던 담배였지만 지금은 결국 그 녀석 때문에 다시 손을 댄 것이다. 레이겐은 다시금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아, 내가 이래서 처음부터 싫다고 한 거였는데...




처음 시게오와의 만남은 몇 년 전, '저기요 고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하는 앳된 목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 손잡이를 낑낑대며 열고 들어온 것부터 시작되었다. 첫인상은 정말로 엉뚱했다.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이상한 말과 함께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얼굴을 한 괴짜 초등학생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만남의 순간부터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몰랐다. 초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에 눈을 빛내면서 쳐다보는 그 순진함을 이용하려 한 나쁜 어른.. 처음부터 단호하게 그런 힘 같은 건 모른다며 솔직하게 거절하고서 돌아가라고 했어야 했다는 것을 지금 깨달으면 무엇을 할 것이란 말인가?


그 이후로도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시게오는 중학교 2학년으로 항상 검은 가쿠란을 입고서 들락 나락 거리게 되었다. 키도 많이 컸고,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 얼굴의 젖살도 많이 빠졌다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이 벗겨지지 않은 완전한 애기였다. 일방적으로 레이겐이 연락을 해서 불러낸 적도 많고, 그래서 불만을 표시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런 자잘한 일에도 친구하나 없는 레이겐의 옆에 이렇게 오랜 시간 곁을 지켜주는 것을 레이겐은 참 고마워하고 있었던 것도 맞다. 담배를 피우며 옛날 일을 회상을 하며 밖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플래시와 기자의 외침에 구석에 몰린 레이겐은 소리치고 싶었다. 


이 레이겐은 결코 먼저, 결단코 먼저 아이를 꼬여낸 것도 아니며, 수 없이 거절했었고, 분명히 수차례 거리를 두려 했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이 서로를 사랑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피해자의 신분은 감추어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했는지 시게오의 이름이나 행적은 나오지 않았다. 레이겐은 잠시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내 본인이 약간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언론에서 공개되고 있는 내용은 무서웠다. 뉴스에는 중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기꾼 영능력자라는 이름으로 언제 찍혔는지 모를 희미한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뉴스에 보도되고 있었다. 아마도 레이겐을 아는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 사진을 보고 레이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처음에 마음을 고백한 것은 시게오였다. 한 겨울, 제령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매섭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시려워, 조금의 미안한 마음으로 레이겐은 본인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 목도리가 지나치게 따뜻했을까? 인적이 없는 새까만 하늘 아래의 새하얀 눈길에서 시게오는 말했다.


"저...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스승님은 정말 좋으신 분 같아요"

"하하, 물론 맞는 말이지만 또 마냥 좋은 사람만은 아니다?"

"그럼 나쁜 사람인가요?"

"음.. 그것도 아니지만.. 네가 그렇게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고 나에게 좋으신 분 같아요, 하고 말하면 뭔가 부담된다고"

"부담이요?"

"어른들은 어린애들이 모르는 그런 복잡한 사정들이 많은 법이니까"

"...음.. 저 스승님, 뜬금없이 질문해서 죄송한데요. 혹시 연애 같은 거.. 하고 계세요?"

"연애하고 있으면 이런 추운 겨울에 제령 하러 나왔겠니?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을 거다"


추우니 사무실에서 몸이나 녹이고 가라면서 그 저녁에 사무실에 붙잡아 놓은 것도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저 이렇게 추운 날 데워지지 않은 방구석으로 들어가서 혼자 외롭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있기는 싫었을 뿐이었다. 난로를 틀고서 추우니까 데운 우유나 한잔하고 가라면서 우유를 데워주고, 자신은 몸을 덮인다며 미량의 알콜이 들은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옆에 붙어 앉아서는 티브이의 삼류 영화 따위를 봤다. 정말이지 더럽게 재미가 없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배우가 나왔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영화였다. 별 감흥 없이 멍하니 티브이를 보다가 시간이 늦었으니 데려다주겠다며 이만 나가자는 레이겐의 말에 시게오는 정말로 엉뚱하게, 분위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어붙은 퀴퀴한 겨울의 사무실에서 조금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스승님, 저... 그니까.... 스승님이 좋아요. 음.. 이 말은요, 좋은 사람이어도 호.. 혹시나.. 그.. 그럴 리는 없겠지만, 스승님이 나쁜 사람이어도.. 같이 옆에 있고 싶다..라는 뜻이에요. 음.. 그니까 스승님이 추운 겨울에 제령을 제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자친구.. 의 역할을 제가 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전 여자는 아니지만 말이에요.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대놓고 엄청나게 비웃으며 조금 더 크고 와라~ 하고 농담을 받아주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시게오의 그런 고백이 아예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레이겐은 그 이후에 자신이 시게오를 보는 시선이 조금은 변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머릿속으로는 전화도 해선 안되고 불러내어도 안되고, 함께 다니는 것조차 조절했어야 했다는 것을 그저 300엔의 값싼 몸값으로 부릴 수 있다는 이유로 애써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시게오는 그 전과는 달리 불평도 불만도 없이 전화가 오면 네 스승님! 하고 몹시 들뜬 목소리로 달려왔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일하기도 수월했다는 점이 꽤나 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스승님 스승님 하고 따르는 그가 꽤나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을 때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그때의 그는 '늦었다', '혹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곤두박질 쳐버린 것이다. 


시게오가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도 저 좋아하시는 거예요? 아니. 내가 미쳤냐? 거짓말. 안 좋아해. 거짓말이잖아요. 나 너랑 그러면 안 돼. 왜요? 너 너무 어리고... 저 하나도 어리지 않아요! 저도 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 정도는 저도 파악할 줄 알아요. 


시게오는 그렇게 말하고서 웃었다. 레이겐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부터...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고 믿는다. 이 녀석이 강력한 초능력으로 자신의 사고까지 바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죽어도 안된다고 하고 거절을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레이겐은 그 순간에 마냥 시게오가 좋았고, 심지어 입술을 맞대는 그 순간에는 '잘못됐다'라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취해버려 마냥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하고 허겁지겁 파고들며 품에 안기는 것도, 옅게 풍기는 달콤한 우유 냄새, 그리고 특유의 아이의 맑은 눈동자도..... 이미 썩어버린 제 나이 또래의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그 순수함..! 바로 그 순수함이 레이겐의 발목을 잡고 끌어내린 것이다. 


똑같이 순수했다면 정말로 좋았을 터인데... 이미 욕정의 맛을 알고 있는 28살의 욕정은 너무나 더러운 것이었다. 시게오의 맑은 눈동자의 옆에 있으면 그 악취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추악했다. 





"그.. 오늘 같이 자.. 자고 갈래?"


그 말을 꺼낸 것은 시게오와 처음 입을 맞춘 이후 2달이 조금 넘었을 즈음이었다. 레이겐의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하면 시게오를 안을 수 있을까 하는 조급함,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안에 들어가서 겁에 질리지 않은 상태로 부드럽게 옷을 벗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통의 또래 여자들이라면 자고 가자는 말에서부터 다 알아채고선 뭐야, 벌써 이러는 거야?라던가, 단호하게 지금은 별로야,라고 하던가, 아니면 눈동자를 굴리며 재빠르게 모든 행동을 계산을 할 터인데 시게오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어떤 것조차도 생각하지 못 했다. 

시게오와 같이 외박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시게오는 전화로, 엄마 오늘 스승님댁에서 자고 갈게요 하고 말하자 오늘은 바쁜 거니? 레이겐씨와 함께 있는 거야? 하고 간단한 것을 묻고는 곧바로 허락했다. 아무래도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레이겐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근처의 싸구려 모텔, 아니 그보다 더 싼 허름한 구식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여관은 밖에서 자기엔 돈이 나름 넉넉한 노숙자 정도가 와서 잘 법한 정도의 공간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싸구려 공간에서의 섹스라니, 장난하냐면서 단호하게 뺨을 한대 때렸을 정도로 허름했다.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구식 노란 장판은 이음새도 제대로 맞질 않아서 드문 드문 떨어져 있고, 보일러의 열 때문에 울어버려 중간중간은 부풀어있는데다가 침대 시트나 배게, 이불에는 빨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얼룩이 약간 묻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위생적이지 않았다. 

섹스가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시게오는 왜 스승님의 집으로는 가지 않는 거예요? 굳이 이런 숙박업소를 이용하는 이유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나는 집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참을성이 좋지 않거든!이라고 말하려던 것을 입안으로 삼키며, 우리 집이 지금 좀 많이 더러워. 하고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레이겐은 이미 아무도 볼 수 없는 한 공간 안에 둘이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욕정이 부풀어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있었다. 화장대로 보이는 거울 앞에는 구식 여관이지만 신경 써준답시고 콘돔이 두어 개 놓여있었다.


시게오는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비싼 여관이라면 반 투명 유리로 언뜻 언뜻 실루엣을 비추도록 해놓는 서비스도 있었지만 이런 싸구려 모텔은 묵직한 나무 문이 멋이라곤 하나 없이 닫혀 있을 뿐이다. 시게오가 샤워를 시작하려는지 쏴아아 하는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은 상상했다. 시게오의 작은 어깨, 하얀 피부에 더 하얀 거품을 묻히는 모습, 머리카락이 물이 젖어서 흘러내리는 모습, 솟아 있을 젖꼭지, 목덜미, 허벅지.. 상상만으로도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는 문을 두드렸다.


"저, 모브"

"네 스승님, 저 좀 늦죠? 빨리할게요"

"아, 아니 내가 좀 도와줄까 해서"

"네엣? 아.. 아니 저.. 괜찮은데.."

"왜 그래? 도와줄게"


시게오는 문을 잠그는 정도의 치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문은 당연히 열려 있었다. 손잡이를 비틀어 열고서 들어가자 하얀 욕조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겐은 웃으면서 왜 그래? 내가 씻겨줄게, 하고 능글맞게 말하면서 다가갔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모르나 홍조 띤 얼굴에 다시 한번 아랫배에 뭉친 욕정이 확 끓어오른다. 하지만 시게오는 죽어도 싫다면서 웅크린 몸을 절대로 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달래도 싫다면서 도리질을 쳤다. 이 상태라면 오늘 밤은 무리인가..? 하는 불안감도 잠시 들었다가, 그래 그렇게 부끄러우면 혼자 씻고 나와, 하고는 침대에서 앉아서 여유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시게오는 옷까지 다 입고서 욕실에서 나왔다. 역시 어린아이는 아이라고나 해야할까? 레이겐 역시 샤워를 마친 후에 나가자 시게오는 불을 끄고서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는지 티브이를 틀어놓은 채로 침구를 꺼내어 다 펼쳐 놓고는 얌전히 누워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난 것이다. 샤워 가운을 걸친 채로 옆에 털썩 누웠다. 시게오는 웃으면서 스승님, 춥지 않아요? 하고 물으며 먼저 가슴팍에 안겨왔다. 이렇게 먼저 안겨왔다면 다음은 쉬웠다. 천천히 입을 맞추어 나가고, 목덜미를 핥으면서 깨물고, 분위기에 맞추어서 가슴의 돌기를 살살 문질러 주면서 티셔츠를 벗겨나가는 것이다. 레이겐의 행동은 이미 성나 있는 아랫도리만큼이나 성급했고, 시게오는 갑작스러운 스승의 행동에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처음 느끼는 이상한 쾌락에 저.. 스... 스승님 저.. 자.. 잠시만요 하고 작은 손을 뻗었다. 왜? 싫어? 나는 모브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온몸에 키스해주고 싶어. 아뇨, 저 시... 싫은 건 아닌데.... 저 좀.. 이.. 이상해서.. 스승님과 함께잖아? 무서워? 아.. 조.. 조금.. 괜찮아. 천천히 할게 응? 조금은 무서운지 품에서 미세하게 떠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안심시켜 주듯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다음의 기억을 레이겐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음날 생각 나는 것은 시게오가 아아.. 스.. 스승님, 아.. 아파요.. 하고 덜 자란 아이의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는 것이 흥분되어서 그도 모르게 입을 막는 시게오에게 더 해줘, 소리 듣고 싶어. 하고 귀에 속삭였던 것, 그리고 좁은 시게오의 안에 저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난폭하게 휘저어버린 것, 그만해달라는 그의 말이 또렷이 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어서 조금만, 조금만 참자, 응? 조금만... 하고 설득했던 것이 생각났다. 마지막에 그의 뽀얀 배에 하얀 액을 잔뜩 토정해 버린 것 또한. 끝에 닿는 시게오의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끝나고서 시게오는 레이겐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스승님, 사랑해요.. 하고 중얼거리면서. 


관계 후에는 모든 게 쉬웠다. 설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의 두근거림보다는 안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 더 앞서서 시간이 될 때마다 영등등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지퍼를 열었다. 시게오는 그런 레이겐을 보고서 작게 웃어주며 저항하지 않았다. 레이겐은 문득, 혹시나 자신과의 관계를 다른 누구에게라도 말할까 봐 무서워 시게오에게 종종,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털어놓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시게오는 항상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둘의 관계는 사랑에 두근거리는 관계보다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범죄를 들킬까 봐 무서워 조마조마하기만 한 관계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레이겐은 잠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게오와 자신이 서로 사랑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게오가 어린 것이 조금 문제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무책임한 심정으로 그저 한순간의 불장난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게오를 건드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었다. 


레이겐은 다시금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보세요, 나는 결백하건데... 절대로 강제적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유혹도 제가 아닌 그 아이가 먼저였으며 관계 후에 사랑한다는 말까지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강제성을 띠지 않았습니다. 저와 시게오는 분명히 사랑했습니다.











*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면서 평소에 하지도 않던 문자로 아프니 당분간 사무실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서 2주 정도가 지났을 때에 레이겐은 잠결에 경찰에게 전화를 받았다. 주차 문제나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 정도일 거라는 생각으로 적당히 네네 하고 전화를 끊은 후, 뒤통수를 긁다가 무심코 컴퓨터를 켰을 때 인터넷 메인에 뜬 자신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고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아니겠지, 그저 비슷한 사람일 거야, 하고 애써 위로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 오는 불길한 기운에 시게오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조사를 해야 하니 경찰서로 오라는 경찰의 말에 레이겐은 창밖을 한번 내다보았다. 여전히 기자들은 징그럽게 우글 우글대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레이겐은 한숨을 푹 쉬고서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쓴 다음 경찰서에 가려 집을 나섰다. 나가자마자 잔뜩 몰리는 기자들과 마을 사람들의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겐씨!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정말로 13살이나 어린 중학생을 사랑하신 겁니까?"

"레이겐씨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기자들은 서로가 앞다투어 사진을 찍고 기사를 내려고 다들 바쁘다.


"... 미친 새끼"

"세상에 13살이나 어린 중학생이랑 도대체 뭘...."

"세상 흉흉해서 참.. 저딴 새끼는 볼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여야 되는데"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욕설과, 끈질긴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경찰서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분주한 경찰서의 경찰들은 그가 도착하자 모두 경멸의 시선으로 잠시 침묵했다. 경찰은 레이겐을 앉혀 놓고선 피해자의 인터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 들어볼 것도 없어요. 저흰 명백하게...."

"... 이 사람이 진짜... 한번 들어보세요"


경찰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시게오 특유의 나른하고 앳된 목소리의 인터뷰 목소리가 나왔다.


-성폭행.. 을 당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니? 

-네..

-그 사람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레이겐씨와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어요... 저에게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관계를 계속.. 유지했었고요... 그런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얼마 안 됐어요. 

-지금 가해자는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사랑이요?... 아.. 아니에요.

-힘들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조금만 말해줄 수 있을까?

-... 처음으로 당한 여관은요. s 여관이에요. 조금 허름한... 샤워를 한 후에 오.. 옷을 벗고.. 제 옷 속에 손을 넣어서... 아... 저... 저 자.. 자세한 건 말 못하겠어요... 하....... 저 너무.....

-그래. 그럼 그다음에도 쭉 성폭행을 당한 거니?

-... 흐윽... 네 이후에 장소는.. 주로.. 영등등사무소였고요.


여기까지가 피해자, 즉 시게오와의 인터뷰였다고 한다. 레이겐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경찰 내부에서도 수군대며 저 쓰레기 새끼, 나이 처먹었으면 그 나이 또래 여자들이나 만날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을 꼬셔? 단단히 미쳤어, 하고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저기..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증거라면 또 있어요"


경찰은 핸드폰 문자 내용이라면서 종이에 출력을 해 주었다.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시게오와 주고받은 문자였다.


-모브, 오늘 올 때 콘돔 좀 사가지고 올래? 너 콘돔 안 하고 하는 거 싫다며 내가 깜빡했어

-콘돔이요? 

-안에다 하면 배 아프다며? 옷에 묻는 것도 싫고.. 은근 까다롭다니까?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뭐 할 말 있으신가요?"

"...."


완전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순수함이라는 덫에 걸려서 맑은 눈을 한 사냥꾼을 알아보지 못 했던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던 모브가 어째서 이렇게 돌변해서 행동을 한 것인지 레이겐은 몰랐다. 레이겐은 경찰에게 물었다. 저.. 혹시.. 만날 수 있나요? 누굴요? 그.. 피해..자..라는 이 인물 만날 수 있나요? 연락을 안 받아서....... 이쪽이 만나려고 하겠어요? 재판장에서라면 모를까. 경찰은 완전하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겐에게 말했다.











*

변호사는 레이겐에게 정말 사랑했다는 증거가 있냐고 물었지만 문자를 자주 하지도 않았던 둘 사이에서 그런 증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전화가 아닌 문자로는 사랑한다,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것도 레이겐이었기에.. 그의 말에 변호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볼펜을 탁 놓으면서, 그럼 콘돔을 사 오라는 말은 왜 문자로 남겼습니까? 하고 비꼬듯이 물었다. 그거야.. 점점 사이를 숨기는 것이 너무 느슨해지기도 했고.. 평소에 문자도 안하던 놈이 전화는 받을 상황이 아니어서 묻는구나 싶었습니다.. 하고 레이겐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를 보며 변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만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변호사는 핸드폰을 들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변호사의 자리에 놓인 두꺼운 법전과 유사 사례 모음집 등등이 책상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것을 보고는 레이겐은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본인도 담배가 급 땡겨와선 담배를 들고 나섰다. 


밖에서 그 변호사는 줄 담배를 피우는지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 씨발 내가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아동 성범죄자를 변호하려고 변호사가 됐냐고... 생긴 거? 생긴 건 멀쩡해. 이런 새끼들이 더한다니까? 내가 죄를 짓는 기분이야. 내가 왜 이런 놈들을 ... 아 모르겠다. 맘 같아선 그냥 최고 형량 받게 해버리고 싶어."


레이겐은 그대로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서 앉았다. 한참 후 돌아온 변호사는 레이겐에게, 설령 사랑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완전하게 뒤집어지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하고 절망적인 척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그 피해자가 사랑이 아닌 강제성을 띤 성폭행이고, 강력한 처벌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데까지 해보겠지만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레이겐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형량을 받던 어쨌든 본인은 이제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동 성범죄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변호사 책상의 낡은 거울에 얼굴이 비치었다. 그 거울에는 28살의 레이겐 아라타카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 왜 그랬니. 왜 그랬어. 그 어린애 상대로 왜 그랬어 이 미친 새끼야.. 물론.. 당연히 들킬 줄 몰랐고 이런 식으로 신고할 줄은 몰랐지.. 


집으로 돌아오니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지 집 문에는 날계란과 쓰레기를 잔뜩 던져 놓아서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로 '사기꾼 새끼'. '미친 아동 성범죄자'라고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한참 그 글귀를 멍하니 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꺼둔 핸드폰을 켜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음성메세지를 남겼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떻게 된거니? 정말 네가 그런 거 맞니? 아니지? 하고 우는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레이겐. 그래도 극단적인 선택은 안된다. 나는 그래도 언제나 아들 편이야' 하고 다시 울음을 참으며 제발 연락 좀 달라며 울고 있었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누나도 소식을 들었는지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미친 새끼. 영능력사무실인가 뭔가 하는 웬 이상한 사기꾼 같은 일을 하더니 이제는 아동 성폭행이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 너랑 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정말 끔찍해. 앞으로 내 얼굴 마주 볼 생각하지 마.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야.' 


그 와중에 사무실 건물의 건물주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의 건물주에게도 연락이 왔다. 둘 다 동일한 내용이었다. 

[아동 성범죄자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주민들의 공포가 극심하고, 집값 하락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이사를 가주시길 바랍니다]





재판 당일. 법정에서 시게오를 만났다. 시게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엇이 복잡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옆에는 동생이 시게오를 토닥이고 있었고, 또 다른 옆에는 시게오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시게오의 작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레이겐은 멍하니 시게오를 불렀다.


"저... 모브.."

"... 저 새끼가 지금 무슨 낯짝으로 시게오를 불러?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시게오의 어머니는 레이겐의 입에서 나오는 모브라는 단어에 참았던 이성을 잃고서 흥분해서는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이 개새끼! 그런 이상한 곳의 수상한 알바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 죽일 놈! 찢어질듯한 소리가 재판장을 가득 매웠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게 퉁퉁 부은 시게오 어머니의 눈물 범벅이 된 모습을 보니 레이겐은 갑자기 본인이 잘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옆의 사람들은 우선 진정하라면서 달려들어서 금방이라도 죽일 듯한 눈빛을 한 시게오의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말리는 사람들조차도 레이겐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정했고 싸늘했다. 


재판의 결과는 떠들썩한 사회의 이슈가 된 것치고는 가벼웠다. 초범인데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것으로 형량 9년에 출소 후에도 평생을 넷상에 모든 신상을 공개하고 사는 것이었다. 레이겐의 변호사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자리를 떴다. 저런 새끼는 평생 감옥에서 썩어도 모자란데... 우리 시게오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시게오의 어머니는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시게오는 동생인 리츠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얼굴 한 번을 들지 않고 가족과 함께 자리를 떴다. 레이겐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경찰들과 함께 이동을 했다.












 *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교도소의 삶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처음의 답답함을 느끼던 고통과, 사랑을 한 것도 죄가 되는 것인가 하는 허탈함과 원망은 무뎌졌다. 재판소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달라들려 하던 시게오의 어머니의 얼굴이 잠깐은 떠올랐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교도소가 과하게 억압적이지만 천성이 악하다거나 거칠지 않았던 레이겐은 다른 수감자에 비해서 고분고분하게 규칙을 잘 따랐기에 교도관들도 레이겐을 과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려한 말빨로 교도관들과도 꽤나 친분을 쌓아서 이젠 서로 농담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야, 어때? 어린애랑 하면? 좋았냐?"

"... 아, 그런 농담 좀 그만하세요. 뭐.. 저 이제 거의 포기했지만 저 진짜 생각할수록 조금은 억울하다고요"

"뭐가 억울해? 이 새끼야, 여기 들어온 사람치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새끼 한 명도 없어!"

"아니.. 전 정말로... 아 아닙니다 다 됐어요 이제..."

"좋았냐고 물어보잖아~ 좋았어?"

"당연히 좋았죠~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거부하는 건데. 하는 생각은 아직도 계속 드네요"

"거부는 무슨, 범죄자 새끼가. 성범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지금 네가 하는 말이야. 상대 쪽이 먼저 유혹했습니다! "


교도관은 피식 웃으면서 피던 담배를 깊숙이 빨고선 반절 정도 남은 담배를 끄지 않은 채로 내려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겐은 교도관이 내려놓은 그 담배를 허겁지겁 주워들어서는 깊숙이 빨아들였다.



레이겐의 어머니는 한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한참을 나가지도 못하고, 방 구석에서 하염없이 울며 지내다가 요즘에는 조금 마음을 고쳤는지 성당에 다니시면서 항상 기도를 한다고 했다. 거기에 참회의 뜻으로 시게오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아들의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시게오의 어머니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한 번만 더 찾아온다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면서 무릎까지 꿇은 어머니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수차례를 찾아갔었는데 최근에는 이사를 가서 그 장소에 없었다고 했다. 레이겐에게 어머니는 항상 편지에 괜찮아, 벌 다 받고 나와서는 착실하게 다시 시작하자. 하고 긍정적인 말들을 위주로 써서 보내주었다. 면회도 가끔 와주었는데, 그때마다 레이겐의 얼굴만 보면 어찌나 눈물을 흘리는지, 그 모습이 너무 찡해서 레이겐은 앞으로는 이럴 거면 오지 말라는 말이 입안에서 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가 없이 어머니와 자신의 사이에 있는 유리에 가만히 손끝을 대고 죄송합니다..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98714, 면회다"


얼마 전에도 면회를 오셨던 어머니인데, 또 오신 것일까? 레이겐은 대충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고는 면회 장소로 향했다.


끼이익-하고 신음하는 철문이 열리고 유리 벽 사이에 작은 체구와 검은 머리카락이 언뜻 보였다. 어머니의 실루엣이 아님을 눈치챈 레이겐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금 면회 온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침착하게 다가갔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시게오였다. 레이겐은 시게오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순간 잘못 본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하였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시게오가 면회를 직접 와줄 거라고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천천히 투명한 유리 앞에 앉은 레이겐은 헛웃음 만을 허탈하게 내뱉고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 잘 지냈니? 모ㅂ.. 아니, 시..시게오?"

"..네"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주변도 조용했다.


"...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잘 지냈니?"

"스승님은 잘 지내셨나요?"

"뭐.. 덕분에"


한참 눈앞의 이 어린아이를 바라보던 레이겐은 시게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먼저 물을 용기가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니? 하고 마음속으로만 몇 번이나 질문을 했다. 그 마음속의 질문을 들었는지 시게오는 묵묵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돌이켜보니.. 그래도 스승님을 사랑했어요"

".. 그렇구나"

"...."

"...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니 지금 와서"

"... 스승님도 저를 사랑하셨나요?"

"... 하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지금 와서..."

"한동안 스승님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무서웠는데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떠올랐어요. 아, 그래도 역시 나는 스승님을 사랑했었구나. 하고요"


레이겐 앞의 모브는 그 말을 하면서 조금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한다거나, 혹은 슬프다거나, 그렇다고 속이 후련해하면서 기쁘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으로 보이지 않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약간의 존경, 이상한 우러러봄이 느껴지기까지 하여 레이겐은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 나를 신고한 이유는 뭐였니?"


레이겐은 마음속에 수없는 질문 끝에 결국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냈다. 시게오는 레이겐의 말에 갑자기 이유 없이 눈을 빛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스승님! 스승님이 그러셨잖아요. 힘들면 도망쳐도 된다고.. 어른에게 모두 맡기라고 하셨잖아요...!"











*

카게야마 리츠에게 형인 시게오는 항상 남들에게 이용당하면서도 그런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답답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이 형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영등등사무실의 레이겐은 처음 시게오가 알바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부터 항상 주시하고 있었고, 시게오에게 수차례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조언에 시게오의 대답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리츠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잘 알겠어. 항상 고마워! 하지만 스승님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을 주고 계시는 좋은 분이야. 좋은 사람은 무슨, 형에게 나쁜 사람의 기준은 뭐야? 실제로 형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 있지! 티브이나 뉴스를 보면 자주 나오잖아 범죄자들이라던가.. 내 주위에 없을 뿐이야. 난 운이 정말 좋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리츠는 그런 시게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순수함을 내보이면 그 순간부터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여린 마을을  어떻게 이용할지 눈알을 굴리며 다가오리라는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시게오가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밤중에 불려나갈 때에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시게오가 레이겐씨와 오늘 함께 자고 온다고 했어, 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리츠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무엇인지 몰랐다.


고민이 있다면 들어줄게. 하고 말을 건네어 봐도,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것도 아냐 리츠 하고 웃어 보이는 그 웃음에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 무력함이 조금은 지쳐갈 무렵, 핸드폰이 고장이 난 그는 시게오의 핸드폰을 빌렸다. 누군가에게 급한 연락이 오지 않는 한 별일이 없다고 생각한 시게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선뜻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크게 누구에게 연락이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침 그때에 딱 맞추어 전화를 걸어온 것이 레이겐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가 왔고, 그가 말하는 이상한 단어. 콘돔?.. 콘돔 없이 하는 건 네가 싫어하잖아. 사가지고 와. 리츠는 몇 번이나 제 눈을 의심하면서 문자를 다시 읽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그날 저녁 밤새 레이겐이 부들부들 떠는 그의 형을 상대로 더러운 아랫도리를 꺼내어놓고는 사정을 하는 상상, 사람의 인적이 그리 많지 않은 영등등 사무실에서 형에게 옷을 벗게 한 후 자신의 몸을 핥으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협박하려고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었는지도 모른다, 등등 온갖 추잡한 그 모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끊이지 않는 불안함과 화가 치밀어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게오는 다음날 아침 웃으면서 리츠, 잘 잤어?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망울을 하고 물었다.



그는 그대로 포착한 증거를 가지고 경찰에 신고했다. 리츠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한치의 망설임이나 혹시나 하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시게오에게 이 문자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시게오가 그런 짓을 당했다는 것은 정말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레이겐이 그런 짓을 행했다는 것은 의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츠에게 레이겐이라는 사람은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경찰에 증거와 함께 신고를 한 후에도 가시지 않는 분노 때문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더불어 지금까지 고작 300엔이라는 소정의 금액을 받으면서 제령을 하는 일과 더불어 레이겐이라는 사기꾼 새끼에게 몸까지 굴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후에 시게오를 데리고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리츠가 갈 곳이 있다는 말에 따라간 시게오는 경찰서에서 레이겐과의 관계를 묻는 경찰의 물음에 처음엔 단순한 스승님이라고 대답하다가, 리츠가 증거로 제출한 문자 내용을 보여주며 추궁해오자 그제야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을 더듬으면 답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눈치가 보였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경찰도 리츠도 시게오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리츠는 그 대답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사기꾼 새끼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을리가 있는가? 


형이.. 성격도 조금 서투르고.. 레이겐 이라는 사람이 형이 어릴 때부터 사기를 워낙 많이 쳐서 쉽사리 인정을 못하는 것 같아요.. 레이겐이라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기꾼이거든요.


경찰은 리츠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 영등등사무소를 조사했을 때에 수상한 흔적도 많았고 무얼 하는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데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글도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시게오가 정신적으로 아직 다 털어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서, 천천히 조금씩 털어놓으라고 말했다.


리츠는 모브에게 말했다.

"형.. 나는 너무 슬퍼.. 형이 이런 일까지 당하고 있을 때 나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구나.. 내가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미안해... 힘들었지...? 이제 다 괜찮으니까..."


리츠는 시게오를 안고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모브는 리츠가 어째서 우는질 몰랐지만 본인이 무언갈 잘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챘다. 이후에 부모님이 아셨을 때도 엄마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한참 소리 내어 울고, 당장 그 레이겐이라는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걸 리츠와 아버지가 일단은 진정하라면서 겨우겨우 말리는 것을 보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이겐과 저의 관계가 미치는 영향력이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나 슬프게 만들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몇 번이나 슬퍼하는 리츠에게도 조사하는 경찰에게도 '사랑'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한참 시게오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오늘도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네.. 그 사기꾼이 그저 사랑이라고 말하니까 그냥 그대로 믿어버리는가 보구나.. 불쌍하게도...




"리츠, 나는.. 정말로 스승님과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런 게 아니었던 거야?"


"형.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그 사람은 그냥 그렇게 말하면 형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행위에 순순히 응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한 거야. 형을 속인 거라고"


"... 그런 건가.."


경찰도, 리츠도, 엄마도 레이겐이 시게오를 속였다고 말했다. 레이겐이라는 놈은 정말로 사기꾼이었던 거야! 시급 300엔도, 힘이 없으면서 힘이 있는 척했던 것도... 침착하게 생각해봐! 모두가 외쳤다. 그런 말들을 계속해서 듣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시게오에게 있던 레이겐과의 하얗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한순간에 거뭇하게 썩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시게오는 이런 모두의 말들과 압박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해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찰, 옆에서 더불어 정신을 차리라며 한없이 슬퍼하는 리츠.. 모두가 시게오를 향해서 레이겐 아라타카가 저를 강간했습니다! 라고 외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어, 아냐 하지만 리츠가 슬퍼하잖아,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지? 정말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시게오는 문득 레이겐의 말이 떠올랐다.


'힘이 들때는 어른에게 맡기고 도망가도 된다'




경찰이 드디어 시게오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이니?

-.. 네...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시게오는 반복되는 모두의 말들에 완벽하게 세뇌되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는 정말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피해 증상마저 비슷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괜히 밤에 무섭다며 리츠에게 같이 잠을 자자면서 침대 옆에 기어들어와서는 꼬옥 붙어서 잠을 잤고, 레이겐에 대한 소문들이라던가, 이야기만 나와도 갑작스럽게 덜덜 떨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리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뭔가 안심이 되는 듯한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본인에게 생기는 이상한 안정감이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시게오를 보면서 본인이 지켜주겠다며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시게오는 리츠.. 하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품에 파고드는 것이다. 시게오는 리츠의 체온에 비로소 안심하며 잠에 든다. 시게오의 밤은 리츠와 함께한 침대 안에서야 조용히 흘러간다.











*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도망이라니...."

".. 그렇지만, 힘이 들 때는 도망쳐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레이겐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기력도 없거니와 무언가 조금 이상한 낌새에 이런 것을 캐내더라도 자신의 처지가 쉽사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망이라는 단어에서 레이겐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킨 시게오가 쉽게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다는 것을. 


"그래... 무슨 말인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자. 근데... 왜 찾아왔니?"

"심리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스승님이 궁금해졌어요. 잘 지내고 계시려나.. 하는 막연한 호기심 있잖아요. 게다가 저, 스승님이 전에 내주셨던 숙제를 했어요. 그래서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숙제?"

"네! 데이지가 어째서 개츠비를 배신하고 떠났을까.. 이후에도 계속 생각했거든요.."

"...."

"이제야 알았어요 스승님! 데이지가 개츠비를 배신한 이유요. 그건... 데이지도 어린이였기 때문이에요.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어린이요!"


칭찬을 바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는 유리창 너머의 옛 제자. 자신을 배신하고 벼랑으로 몰아넣은... 데이지와 다름없는 눈앞의 한 어린이를 보고 레이겐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정답일지도 모르겠구나"


시게오는 레이겐이 듣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시게오의 동네 사람들은 시게오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감히 상상하지 못하고, 어떤 여학생이 당했다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게오에게 그 여자애가 누구냐고 종종 물었다고 했다. '레이겐'이라는 이름에 덜덜 떠는 모브를 보고 모두 다 '믿었던 스승님이 그런 일을 행했다는 게 충격이었구나..' 하고 모두 동정했다고 했다. 피해자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도 지쳐서 결국은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갔다고 말했다. 스승님 제 동생 기억하시죠? 리츠는 여전히 똑똑하고 성실해요! 하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사이가 엄청 좋은지 잠도 같이 자고 밥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떠서 먹여주기도 한다며 꺄르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제가 힘이 들 때 리츠가 절 많이 도와줬거든요.. 리츠는 제 부탁이면 무리한 부탁이라도 잘 들어주니까... 오늘도 제가 졸라서 같이 왔어요.. 지금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 갑작스레 불안한 듯 울적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레이겐을 향해 두려운 표정을 짓고는 이만 돌아가겠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잘 지내라는 이상한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이 돌아갔다. 



레이겐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기 그저 돌아가는 시게오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린아이의 책임이란 그런 것이었다. 

본인이 그렇게 도망쳐도 된다면서 짐을 덜어주려 했던 말이 이렇게 제 발목을 옭아매올 줄은 잡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시게오는 어린아이였고... 레이겐 본인이 말한 대로 책임을 져야 할 필요도 없으며, 나머지는 어른인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해버린 책임의 무게가 이렇게 크고 고통스러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면회 시간 끝났다.


교도관의 목소리가 텅 빈 면회장소에 울렸다. 레이겐은 그 말을 듣고서야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겐은 마지막에 자신을 쳐다보는 시게오의 두려운 표정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아마 그 위대한 개츠비도 마지막에 눈을 감으면서 데이지를 조금은 원망했을 것이다.

 












-

저 레이겐 좋아합니당...



'몹싸 >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텁석에쿠] 석양볕  (0) 2016.12.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