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깔끔하진 않았다. 중간중간에 노트를 뜯어낸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 조금은 거친 느낌을 주는 그런 일기장이었다. 조금은 그 동생 녀석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앞뒤로 한번 훑어보다가 맨 앞장부터 천천히 봤다. 대충 훑어봤을 때의 글씨는 남자아이의 글씨 치고는 깔끔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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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 없는 노력만큼이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언제나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은 딱히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조금씩 지쳐간다는 것은 요즘 조금 실감하고 있다.

기준점이란 각자 다를 수밖에 없기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 남들의 생각 따위 상관없이 내 기준점은 형이 가진 이상한 힘에 있다.

오늘도 내 손에 든 숟가락은 무슨 수를 써도 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몇 년 전부터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누구나 완전히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초능력..? 그런 거 영화에나 나오는 거잖아? 하고 말하겠지만 영화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이상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모두가 나를 이해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기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뿐.


트라우마로 인해서 놀이기구를 못 탄다거나, 무엇을 먹지 못한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이기 때문에 본인도 어째서 그런 것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 힘들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면 놀이동산에 가지 않으면 되고, 무언가를 먹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있다면 먹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 트라우마라는 덫에 걸려서 떨어질 수도 없는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는, 항상 목 옆에 닿을 듯 말 듯하게 있는 시퍼런 칼날을 바라보면서 침착하게 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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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의 시선에서의 형은 엄청나게 온순하고 존재감이 없는 데다가 감정 표현도 서툴러서 모두가 무시하기 딱 좋은.. 그래서 괴롭힘도 당하지 않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존재다. 형은 항상 조용하고 운동도 못하는 데다가 체력도 없고, 성적도 항상 바닥을 쳐서 엄마가 기대도 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지만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자신도 모르게 힘이 방출되어버려서 내 손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구부러지지 않는 숟가락이 형 손에서는 완전히 녹아버린 찰흙 점토처럼 추욱 구부러지고 만다. 그 능력을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는 엄마는 숟가락이 또 엉망이 되어버렸다며 형을 야단치고, 옆에서 얌전히 있는 나를 본받으라며 잔소리를 한다.
형은 곧바로 그러게, 리츠는 정말이지 대단하다니까.. 하고 말하며 나에게 리츠, 공부 좀 가르쳐줄래? 하고 말하는데, 그 목소리에 긍정적인 대답 밖엔 할 수 없는 나의 선택지는 항상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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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마음먹어서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나의 커다란 장점인 것인데.. 얼마 전에 엄마와 아빠는 나와 형이 잔다고 생각했는지 식탁에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리츠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시게는 어째서 그 모양인지.. 하지만 요즘 느끼기에 공부를 잘하는 것도, 운동을 잘하는 것도 무조건적인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모양이야, 그렇게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게도 그런 거겠지.. 시게는 다른 장점이 많으니까.. 뭐.... 시게도 동생인 리츠가 저렇게 뛰어나서 더 힘들어하고 있을 거야.. 하고 한탄 섞인 말투로 말했다.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벽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하고 있다. 어릴 적, 형의 폭주로 인해서 다쳤던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노력을 해도 그 어떤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그 캄캄한 막막함을 인정하기 싫은 나의 억지스러운 고집이 나를 채찍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쳐갈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가가지도 못할 힘을 어째서 내 옆에 두어서 탐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엄마와 아빠처럼 형의 이상함에 대해서 덤덤할 수 없을까?

초능력이 있다고 해서 내 생활이 지금에 비해서 나아진다거나, 없다고 내가 열등감과 비슷한 이상한 감정에 시달릴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지만.. 단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더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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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행동에는 원인도 없고 특별한 계기도 없다.



이 이다음에는 뭘 쓴지는 몰라도 일기장이 몇 장이 조심조심 뜯은 것도 아니고 심하게 잡아서 뜯은 듯이 거친 흔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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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보라는 초록색 영을 만났다. 형의 친구라고 해서 이야기를 조금 들어볼까 해서 대화를 했는데 역시나 생긴 것만큼이나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첫 만남부터 리츠, 하고 친한 척 부르는 것도 그렇고 이미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대서 날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당연히 시게오의 친구니까 잘 알고 있지! 이 몸은 시게오의 옆에서 딱 붙어 다니고 있는 친한 친구란 말씀이야! 관찰 결과 넌 정말 재수 없게 성실한 타입이더라고?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여서, 나를 볼 수 있는 건 초능력이 생긴 거야. 아직 서투르니까 나와 손을 잡는 건 어때? 시게오를 뛰어넘어보는 거야.

형에게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던 내가 에쿠보의 말에 솔깃했던 것은 사실이다. 쉽사리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이것저것 물어보니, 에쿠보는 나에게 지금의 생활에 거슬리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 나의 초능력 각성에 도움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학교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짓을 벌이고, 썼던 일기장을 찢어서 버리기까지 하면서 잊으려고 노력하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정말 에쿠보의 말이 사실일까?

나는 형과의 나란한 평행선에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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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내가 초능력자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알았다면 형의 성격으로는 나에게 와서 리츠! 축하해! 하고 나에게 바로 말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쿠보의 말에 의하면 다른 초능력자는 보자마자 알았다고 하던데.. 에쿠보는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 약해서 그럴 거야. 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시게오도 내가 악령이고, 내가 초능력으로 조금의 환각을 심어놓은 것을 몰랐어. 나에게 너무 약해서 몰랐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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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가르쳐 주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우습게도 나는 형을 가르쳐주면서 나만의 장점을 형이 빼앗아갈까 봐 두려웠다. 형이 육체개조부에서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그렇고, 하지도 못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그렇고.. 형은 정말 굉장하다, 하고 웃으면서 말하면서 내심 속으로는 형이 초능력을 평소에도 사용하지 않는 점이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이 초능력을 사용하며 모든 것을 이루고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더더욱 형을 우러러보면서 억누를 수 없는 열등감에 절대로 이렇게 웃고 있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멍청한 것은 참 다행이다.

나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절대로 형처럼 이렇게 아깝게 사용하지 않을 텐데.

공부를 가르쳐줄 때의 형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본적인 질문을 해올 때가 많다. 이런 것을 물어볼 때에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질문에 웃으면서 답해줄 때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형을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그런 나에게 스스럼없이 순수한 형의 모습 때문에 갑작스러운 죄책감이 들었다.

형이 하나 가진 그 재능이 부러워 발버둥 치는 나와 다르게 형은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웃으면서 가르쳐달라고 할 수 있구나..

그렇게 나 자신이 욕심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해서 잠시 뉘우쳐봐도 마지막의 나에게는 허무한 마음과 비참함, 그리고 그 어떤 말로도 녹아내리지 않는 열등감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속으로 형을 그렇게 무시하고 짓밟고 경멸하다가, 잠시 조금의 미안함을 느낀다고 해도 내면의 나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형의 존재에 덜덜 떨고, 겉으로는 형에게 그 어떤 심한 말조차도 꺼낼 수 없는 이 굴욕감과 패배의식에 잔뜩 젖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 나는 더더욱 형을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난도질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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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보는 나에게 강도를 올리자고 했다. 더 이상 학교 안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됐어. 너도 딱히 이 정도로는 괴로움 같은 거 느끼지 않잖아? 하고 물었는데, 정말로 어느 순간 그렇게 괴로워했던 학교 안에서의 일들이 어느새 당연해지고, 딱히 죄의식 같은 것조차 느끼지 못하며 편안해지고 있었다.

에쿠보는 나에게, 여자를 한번 사귀어보는 게 어때? 그럼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아. 너 좋다는 여자도 많잖아? 전에 보니까 집 앞에도 찾아오고 그러던데?

에쿠보의 비아냥 대는 말투는 항상 나를 거슬리게 만든다. 어쨌든 나는 그 제안에는 거절했다. 에쿠보는 내 거절을 무시하고서, 그렇다면 시게오가 좋아하고 있는 츠보미를 공략해보지 않을래? 하고 물었다. 그 말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에쿠보가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역시 시게오가 무섭구나? 하고 웃었다.
 

..이 새끼는 내가 힘을 다룰수 있게 되는 시점에 없애버려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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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보가 나에게 여자 이야기를 한 그 시점 전부터 나를 조금 이상하게 따라다니는 A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그 애는 실제로 인기도 많고 학교에서 유명한 여자애였는데 너무나 당당하게, 내가 감히 저를 거절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는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직설적으로 나에게 고백을 했다. 잠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거절을 했더니 구경하던 모두도, 그리고 A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알았는지 핸드폰으로 하루 종일 연락을 해대고, 교문 앞에서 기다린다거나 학생회 회의 앞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댔다. 너무 이상하고 귀찮아서 넌 자존심도 없어? 하고 묻자 정말로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는 그날은 그대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 책을 읽고 있던 시점에 갑자기 형의 노크에 거실로 나가자 그 A가 버젓이 소파에 앉아서는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정말로 자존심이 없는 여자애였다. 형은 옆에서 첫눈에 반한 듯한 발그레한 표정으로 뭔가 잔뜩 설레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A는 벌떡 일어나서는 카게야마군.. 저...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질 않길래.. 하고는 평소의 당돌한 모습이 아닌 조금은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색한 그 모습에 한숨을 크게 쉬고서 나가자고 팔을 잡아끌자, 형은 데이트하는 거냐면서 물었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는 끌고 나왔다.

나와서 A는 말했다. 형하고 너, 꽤나 다르네? 형은 너무 찌질해 의외다 하하
형 이야기 함부로 하지마 돌아가.
내가 집에 오는 게 싫다면 네가 연락을 잘 받아주면 되잖아?
하고 웃어 보였다.

늦었는데 나 저기까지는 데려다줄 거지? 하고 팔에 제 몸을 감아오는 그 감촉이 징그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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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에 가까운 수차례의 전화는 보지 않아도 A. 번호만 구역질이 난다. 문자로는 반협박과 취조에 가까운 듯한 질문 세례. 정말이지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는 엄청난 장점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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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함께 하교를 하던 길에 A를 만났다. 형은 부탁을 받은 것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얼간이처럼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를 본 A가 하는 말은,

착각하지 마, 내가 용건이 있는 건 네가 아니고 네 형이야.

모든 것이 다 상관없다지만 나를 앞에 두고 형을 찾는다는 점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유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더러운 그런... 열등감을 가진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형이 아닌 내 근처 다른 친구와 있을 때에 이렇게 말을 했어도 이 정도로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것 같다. 아니 그랬다면 피식 웃으면서 넘겼을 수도 있을 가벼운 농담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단순하게 A가, 아니 A가 아닌 누구였어도 형과 나를 두고 내가 아닌 형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내 열등감을 창으로 찌른 것 마냥 자극한 것이 되었다. 애써 알겠다, 고 대답하고 돌아가려는 나, 그와 동시에 나에게 제발 가지 말아달라는 형의 손과 내 눈치를 살피는 눈동자.. 그리고 형의 부탁에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형의 옆에 앉는 나.

 
나는 이렇게 열등감에 미칠 것 같은 상황에도 가지 말라는 형의 말에 화를 내지도 못하고 형의 앞에서 다시 또 터질듯한 열등감을 느끼며 웃음 짓는 것이다..

자기 전에 핸드폰을 보니 다행히 이 여자애에게 몇 통의 문자와 함께 이제 그만하겠다는 내용의 문자가 와 있었다. 이 문자들은 내가 보기도 전에 모두 읽음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형은 자꾸만 이상하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감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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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애는 나에게 문자로 웃기지도 않는 이상한 말을 문자로 보낸 이후에 옆 반의 어떤 남자애와 사귀고 있었다. 인기가 굉장히 좋은 애였으니 당연할 거라고도 생각하긴 했는데, 다른 남자애와 사귀고 있다고 하자 이상하게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애도 이 여자애도 한창 좋아 보이는 그 무렵에 이 여자애에게 다시 접근해서 이 둘을 헤어지게 만들고 결국 나와 사귀자는 말까지도 당당하게 했지만 결국 그 후엔 또다시 흥미를 잃어버렸다. 잠시 생겼던 흥미도 결국엔 도둑질로 인한 만족과 비슷하게 누군가에게 있는 무언가를 빼앗는 것에 대한 도취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에쿠보는 이 여자애와 사귀는 나를 보고는 웃으면서, 잘했어. 이제 내 조언을 들을 마음이 들었구나?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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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실한 이미지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운다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다거나 하는 짓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나는 초능력을 혼자서는 거의 다룰 수가 없었기에 남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부분은 에쿠보와 함께 행했다. 에쿠보는 이런 면모에선 은근히 쓸모가 있는 녀석이어서 나에게도 꽤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에쿠보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의 하나는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일방적으로 들러붙는 이 여자애에 관한 일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말이어서 웃음까지 나올 정도였다.

키스는 해 봤으려나? 하고 웃으면서 묻더니, 대답 없이 쳐다보는 내 표정을 본 다음은 섹스가 뭔지 알기는 알아?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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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빙의를 하는 것은 나의 허락과, 내 몸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지만 에쿠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을 가지고 노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쯤이었던 것 같다.

에쿠보가 얼마 전에 말하길, 가장 최악이자 최고의 죄책감은 강간이라고 생각해. 하고 말하며 나에게 어때? 하고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에쿠보는, 왜 무서워하는 거야? 이런 정도의 범죄면 확실해! 내가 보증하지! 하고 말했다. 아냐, 나는 그런 짓은 못하겠어. 하고 말하곤 그대로 뒤돌았다. 에쿠보는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을 반복한다. 에쿠보는 그런 나를 보고는 좀 있다가봐, 난 시게오에게 갔다가 올게! 하고는 사라졌다. 형은 저런 에쿠보와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 에쿠보는 형을 대할 때는 어떻게 행동할까?
 

후에 시작된 수업시간에 문득 바라본 밖의 하늘은 너무 파랗고 또 너무 깊어서 왜인지 모르게 그 순간 울컥 나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갑작스러운 허무함이 잔뜩 몰려왔다. 그만할까, 어차피 나는 그렇게 노력해도 형처럼은 될 수 없을 거야. 하고 멍하니 생각할 때에 내 생각을 깨우며 선생님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서 씨익 웃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릿쨩♡ 무슨 생각해? 조금 있다가 그 여자애를 만나러 갈 거지? 너무 걱정하지 마 이 몸이 함께 하잖아?

놀라서 홱 올려다 본 선생님은 조금은 비열한 듯한 눈빛을 하고선 나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에쿠보는 이렇게 자주 내 주위 사람들에게로 갑자기 들어가서는 제 말을 소곤소곤 전하곤 했다. 나는 형도 무섭지만 에쿠보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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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는 나를 미친 듯이 쫓아온 이 여자애는 나를 붙잡고 화를 냈다. 나랑 뭐 하는 거야? 왜 피해? 하고 거의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어. 하고 말할 때에 이 여자애의 눈빛은 갑작스럽게 홱 돌변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릿쨩?레파토리가 아니잖아. 이 몸이 설계해준 것은..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우린 파트너잖아?

그리고는 이 여자애에게 빙의된 상태로 나에게 안기면서, 자, 나라고 생각해. 이 애는 지금 의식이 없잖아? 끝나고 나서 이대로 버리고 가면 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이런 짓은 안 해
왜? 어째서? 리츠, 나 사랑하지 않는 거야?

하고 이 여자애처럼 몸을 배배 꼬아대며 제 웃옷에 손을 대며 단추를 풀으려 했다.

그 몸에서 나와. 더하면 진심으로 없애버리겠어.
우와 설마 그거 협박이야? 전혀 무섭지 않은데. 시게오라면 모를까 네가 이 몸을 어떻게 없애겠다고?

손을 뿌리치고 돌아가는 뒤에서 웃어대는 그 웃음소리가 너무 소름끼쳐서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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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에게는 재능의 한계라는 것이 있다. 형이 죽도록 노력해도 내가 가진 재능의 벽에 결국은 부딪칠 수밖에 없듯이, 내가 죽도록 노력해도 형의 재능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아버렸다. 다 털어놓고 그저 이 정도의 열등감과, 이 정도의 감정으로 형을 부러워하고, 이 정도의 힘에만 만족할 거야.
이것만으로도 나는 형과 나란히 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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