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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결혼을 하고 싶은가? 아니, 어째서 다른 여자가 아닌, 지금 사귀고 있는 이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싶은가? 수많은 고민들 중 그것부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퍼펙트 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여자친구의 장점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굳이 결혼하고 싶은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라는 답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내 능력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어떻게 하면 나와의 결혼에 대해서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줄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정말이지 온종일 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여자친구가 허락하더라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이라던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상황들이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힘들었다. 혼자서 이렇게 큰 고민을 앓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만난 친한 형님의 말로는 결혼이 뭐 별거냐며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자신과 결혼을 할 사람은 운명처럼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겠구나!' 하고 알아본다던데 그런 식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의 대부분은 슬슬 결혼을 할 때가 됐고, 마침 이 시기에 옆에 있는 '좋은' ('좋은'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사람과 하는 거라면서 얼굴이 예쁘다거나, 뭐 설렌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라며 나에게도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얼굴은 늙으면 다 똑같고, 설레는 마음도 얼마나 가겠냐는 것이 그 형님의 주장이었는데 그것은 나도 공감을 하고 있는 부분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결혼을 한 이 형님이야 당연히 결혼이 별거냐면서 쉽게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 형님도 처음에 프러포즈를 할 때엔 나와 같이 덜덜 떨었을 것이고, 지금의 형수님께 프러포즈를 하려고 고민하던 당시에는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별일이었을 것이다. 큰 도움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더욱 생각할수록 불안해서 미치겠고, 미치겠기에 더 생각하게 되는 이런 악순환에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았다. 


곧 만나기로 했는데 장난치듯이 한 번 떠볼까? 참, 만약에 프러포즈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꽃다발은 사야겠지? 얼마나 사야 하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나? 들고 가기 힘들 텐데.. 반지도 살까? 부담스러워한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아니, 이런 방식은 조금 구식인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고민을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을 하다가 겨우겨우 잠드는 것이 최근의 일상이었다.



오늘 만나면 말해야지, 아니다 내일 하자.. 아무래도 준비가 부족하니까 일주일 후에... 앗 벌써 일주일이 지나버렸어? 그럼 이틀 정도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자신감을 상실해서는 자꾸 날짜만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주말, 여자친구는 평소의 주말 때처럼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했다. 그 말에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릴 겸 나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조금 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면 내 결심이 조금은 더 확고해지고 조금은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몇 번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낯설다거나 어색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여자친구를 반기는 아이들이 나에게 왜 이렇게 안 왔었냐며 투정 섞인 애교를 부리면서 앞으로는 더 자주 오라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선 이제 자주 오겠다며 이야기를 했다. 


별난 중학생 녀석들에 비하면 이 녀석들은 지나치게 평범한 것 같았다. 하얀 도화지 같은 순수함이 내 마음을 밝게 만들고, 부담 같은 것도 없이 편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내가 이 아이들을 편하게 생각한 만큼 아이들도 나를 좋아했다. 우선 이곳은 봉사활동을 오는 남자도 많지 않았고, 말을 재미있게 해서 인지 아니면 나의 철없는 부분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친구에게 하듯이 나에게도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자 모브가 떠올랐다. 아, 갑자기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래, 모브 동생 녀석..... 공부도 잘하고 잘났다 이 새끼야. 잘난 건 알겠는데, 뭐? 조언이나 충고 같은 거 들을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뒷골땡겨.. 기껏 생각해서 연락했더니... 역시 그 새끼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싸가지없고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역시 잘난 새끼들은 다 그 모양 그 꼴이다. 

그래도 나는 한번 더 이야기를 해 볼 생각으로.. 혹시나.. 혹시 몰라서 다시 스즈키라는 녀석에게 전화를 했는데 이미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문만이 울렸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그와의 연락을 포기하게 되었다.


떠오른 김에 돌려줘야 할 것도 있고 해서 모브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을 할때애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려다 그만 옆에 있는 양동이에 핸드폰을 빠트려 버렸다. 아, 뒷골땡겨..




고장 나버린 핸드폰. 조금은 울적해하는 나를 풀어주려 여자친구는 옆에서 어차피 핸드폰도 새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면서 핸드폰이라도 구경하고 가지 않겠냐고 애교 섞인 말로 물었다. 핸드폰이야 정말 바꿀 때가 되긴 했지만 내가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바꾸는 것과 강제로 바꾸는 것은 명백하게 다르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나를 위로하려 이 말 저 말 하는 걸 보며 이만 기분을 풀어야겠다 싶어, 이 기회에 가장 좋은 걸로 바꿔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근처의 핸드폰 대리점에 들어가서는 반짝반짝한 신형 핸드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삼일 후, 나는 여자친구에게 드디어 프러포즈를 했다.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화려하다거나, 인터넷이나 라디오 사연에 채택될 만큼의 거창한 프러포즈는 아니었지만 나는 나와 어울리는 소소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가본 적 없는 고급 와인바에서 확 트인 야경과 함께 꽃다발과 반지를 주면서 결혼해달라고 청혼을 했다. 유창하게 말도 잘하는데 이상하게 그 상황에서는 입이 얼어붙은 듯이 꼼짝을 안 하고, 갑자기 손을 무릎에 놓아야 할지 테이블에 얹어야 할지,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몰라 안절부절하며 꼴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여자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불안해하는 내 손을 잡아주면서 '나도 레이겐씨와 결혼하고 싶어' 하고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프러포즈 하기 전에 샀던 최신 핸드폰을 열었다. 전 핸드폰이 먹통 상태가 되어 모든 데이터를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해서 또다시 절망하긴 했지만, 프러포즈를 성공한 지금은 아무 감각도 없이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에 꿈속을 걷는 것처럼 머엉하기만 하였다. 이제 막 개통이 되었는지 여자친구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잘 들어갔어? 핸드폰 개통하고 내가 처음 보내는 문자 맞지? 우리 새롭게 시작하자!]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보자마자 몰아치는 행복함이라는 것에 파묻혀 침대에 털썩 누워서는 베개를 와락 끌어안았다. 실감이 나면서도 실감 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척척 풀렸다. 상견례를 했을 때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예상외로 나를 굉장히 좋게 생각하셨고 나의 부모님 역시 말할 것도 없이 여자친구를 좋아했다. 그렇게 양가의 허락도 다 얻은 우리는 천천히 날을 잡고 결혼을 준비하자고 하며 손을 꼭 맞잡았다.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행복감에 만취해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혼은 1년 후에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결코 많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선 여자친구의 학교와 내 직장의 거리를 둘 다 만족시킬 신혼집을 찾아야 했고, 결혼식장도 최대한 예쁘고 깔끔한 곳으로 찾으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신혼여행, 청첩장,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와 턱시도, 등등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이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알아보고 비교하고 상담하고를 반복했다. 그런 과정에서 여자친구와 가끔 부딪치는 일은 있었지만 결혼 준비 중에 일어나는 일이니 좋게 생각하자고 이야기하며 풀어나갔다. 드디어 나에게도 생기는 가정의 무게가 서서히 묵직하게 느껴지면서 이제 나도 조금은 철이 드는 건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봉사활동도 항상 함께 갔다. 전에는 여자친구가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제는 함께 만나는 아이들이 되었기에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D가 고민이 있다는데.. 이런 부분이 조금 불안한가 봐~ 우리가 도와주자. 하는 식의 대화를 할 때가 많았다. 이렇게 공감대가 형성된 우리는 틈만 나면 애정 어린 걱정을 섞어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다. 더 이상 여자친구는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모브에 대해서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나 역시 새롭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스쳐지나가 결혼식을 세 달 정도 앞두고서야 이제 조금 하나씩 정리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슬슬 지인들에게 주소를 물어 청첩장을 보내고, 가까운 곳에 있는 지인들에게는 직접 만나서 청첩장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시골에 계신 할머님에게 직접 청첩장을 전해드릴 생각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원래는 여자친구도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그날 갑작스럽게 학교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오래간만에 찾아뵌 할머님은 드디어 결혼을 하냐며, 두 손을 꼭 잡으시면서 혹시 나 살아있을 때 결혼하는 거 못 보고 죽으면 어쩌나 진심으로 노심초사했다는 둥, 손주는 볼 수 있냐는 둥 전형적인 할머니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으셨고 나는 적당히 받아주며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자리를 떴다.


할머님이 이야기하시는 손주, 결혼 등등의 걱정 소리를 잔뜩 듣자니 다시 조금은 실감이 나기도 하고, 다시 느껴지는 책임감에 걱정 섞인 허탈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자친구 때문에 담배도 줄이고 있었지만 휑하고 허전한 속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담배를 한 대만 필 요량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마일드세븐 하나 주세요.


하고 지갑을 꺼내려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내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들었다. 뭔가 해서 뒤를 돌아보자,


어? 정말 맞았네? 레이겐 스승님?!


하고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활짝 웃는 학생. 아.. 이름이 뭐였더라...


스승님! 저 기억하시죠? 오랜만이에요. 카게야마군의 친구 하나자와 테루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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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살 좋게 웃으면서, 오랜만인데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사주세요! 하고 잡아끄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카페에 들어와서는 얼떨결에 주문도하고 계산도 마쳤다. 달달한 커피에 조각 케이크까지 뻔뻔하게 주문하고서 웃으면서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스승님! 하고 눈웃음을 짓는데, 전에 모브가 하나자와는 잘생겨서 지나가는 여학생들도 모두 설레는 눈동자로 서성이며 쳐다보고, 부모님도 저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었냐고 물었다는 편지의 문장이 떠오르면서 잘 생기긴 했네..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나저나 엄청난 우연이네?

아, 저는 이 근처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요. 오늘은 가족모임이라서 왔어요. 스승님은 이 근처에 살고 계신 거예요?

아니, 나도 청첩장 주러 우연히 왔어.

청첩장? 결혼하세요?


하나자와는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응,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할 때 됐지 뭐.


말하고 나니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놀라 하는 이 녀석의 눈빛에 민망하기도 해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랐어요... 어쨌든 축하드려요!

고마워. 올 수 있음 너도 올래? 멀어서 오긴 힘들겠지만.. 와서 밥이나 먹고 가


말을 꺼내놓고 초대를 안 하기도 뭐 해서 형식 상으로 하얀 청첩장을 내밀었다. 하나자와는 감사합니다 하고 청첩장을 받아들고는 물었다.


카게야마군도 가죠?

응?


하나자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조금은 당황해서 우물쭈물거리다가 말했다.


모브.. 는 요즘 연락을 통 안 해서..

스승님도 연락을 안 하시는 거예요?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나저나 넌 어떻게 지냈니?


모브의 이야기를 내가 하기에는 조금 거북한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아서 황급하게 화제를 돌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근황을 물었다.


저야 뭐.. 학교 가서 공부하고.. 그냥 그렇게 지내죠 뭐.


하나자와는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어 말했다.


역시 스승님도 어쩔 수 없으셨나 보네요..  하긴 뭐.. 당연하겠죠...

응? ... 아. 으응...


무엇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이 녀석이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곧바로, 내가 알고있는 모브가 아니라 이 녀석에게 모브 녀석의 근황을 듣고 싶어서 슬쩍 물었다. 


넌 모브랑 자주 만나니? 모브 녀석은 어떻게 지내?

저도 못 만난 지 꽤 됐어요. 저를 만나고 싶지 않은가 봐요. 연락을 해도 답도 없고.. 찾아가도 못 만났어요. 그렇게 텀 두고 몇 번 찾아가고, 연락하고 하다가 이제 저도 그만뒀어요. 뭐.. 사람이 너무 슬프면 위로도 받고 싶지 않을 거고.. 관련된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저랑 동생 군이랑 스승님이랑 에쿠보군까지 모여서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잖아요...

에쿠보?

? 왜요?

에쿠보가 살아있니?

...네?...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하나자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내 말에 짓는 황당한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동생 군의 일기를 받아서 본지 벌써 1년 즈음이 지났다. 꽤 지난 시간이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 아니다. 모브는 다른 사람 만나는 걸 서툴러 하니까.. 너무 상처받지 마..

상처 안 받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자와는 그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이 마지막에 만났을 때에 카게야마군은 어땠어요? 저는 못 봤지만 주변 사람들 말로는 조금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던데.. 어땠나요?

마지막?

그날.. 본 게 마지막 아니에요?

그날? 나 이사했던 날?

... 뭐야 지금 장난치시는 거예요?

아니, 나 지금 정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날이 언젠데? 


내 말에 하나자와는 조금의 뜸을 들이면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을 하듯이 천천히 입을 열고 말했다.


...장례식이요..

..장례식이라니?


내 물음에 다시 하나자와는 다시금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르시는 거예요? 설마?

장례식이라니. 좀 정확히 말해봐.



...카게야마군의 동생군이요...... 죽었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죽어? 하고 내가 반문하기까지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였다.


하나자와는 충격받은 나의 표정을 보고서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모르셨구나.. 저도 카게야마군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에요. 그래도 스승님은 알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저희 학교 애들이 수군대는 말을 우연히 듣고 알았어요. 시오중에서 전학 갔던 그 유명한 애 있잖아 카게야마 리츠인가? 그 애... 죽었데.. 하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시오중에 어떤 여자애 한 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어서 그렇지 않아도 다들 미세하게 떨고 있는 시점에서 전학 간 카게야마군의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겹치다 보니 시오중의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데요. 게다가 몰랐는데 그 실종된 여자애랑 동생 군이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살이 아니냐, 혹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니냐, 하는 소문이 많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고... 사고사래요.. 제가 알았을 때 장례식은 이미 끝나서 참석을 못했어요. 카게야마도 연락을 받지 않아서 뭘 물어볼 여유도 없었고요... 


얼빠진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헤어졌다. 헤어질 때에 하나자와는 나에게, 카게야마군은 스승님의 연락이라면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한번 해보세요. 괜찮아 보여야 할 텐데 말이에요. 하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미료시의 뉴스를 하루 종일 찾아보았다. 8~9달 전의 기사에 기이한 자연재해사고라고 쓰여있는 기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 동생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현장에서 발견한 학생은 3명, 1명은 사망, 1명은 중상, 1명은 가벼운 경상을 입었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학생은 결국 뇌사상태에 빠져 S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죽어? 갑자기? 사고? 무슨 사고? 

한참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모브의 연락처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핸드폰이 리셋된 이후로 모브의 번호는 이미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고, 모브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무섭다. 나 역시 편지를 받으면서 모브의 동생만큼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모브가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소식을 듣고도 모르는 척을 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큰 소식이었고, 모브가 얼마나 그 동생을 아끼고 좋아했는지를 알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이런 큰 일을 모르는 척을 하기엔 스승이기 전에 인간으로써 너무도 무책임한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는 동생 군의 일기장을 보면서 이제는 주인이 없는 유품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뒤에 연차를 쓰고 동생 군의 일기장을 챙겨서는 조미료시에 직접 찾아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재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그 학생을 찾아 S 병원을 찾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입원해 있었다. 그 병원에 뇌사상태인 학생은 그 학생 밖엔 없어서 찾기는 쉬웠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지 이름을 몰라도 그 뇌사상태의 환자..라고까지만 말해도 안내해주었다. 간호사의 말로는 내일이면 해외로 옮겨서 진료를 한다고 했다면서 내일 오셨으면 헛걸음할뻔하셨네요 하고 호실을 안내해주었다. 그 학생은 예상대로 스즈키라는 학생이 맞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고 유리창 너머로만 환자를 볼 수 있었는데, 동생의 일기와 모브의 편시에 쓰인 것과 동일하게 주황빛을 띄고 있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그가 모브의 동생을 도왔던 그 학생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누워 있는 모습은 차분하지만 이 병실에 누워 있기 전에는 꽤나 활발하고 건방진 녀석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바로 느껴졌다.. 그리고 드는 생각. 자연재해 같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구나.



하나자와의 말로는 모브를 만날 수가 없다고 했기에 나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혹여나 만나지 못하면 모브의 집 우체통에 일기장이라도 넣어두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모브의 집을 찾아갔다. ..사실 만나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져버린 것에 대한 아련함 때문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주변이 꽤나 바뀌었는데도 모브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집은 불이 다 꺼져있었고 항상 정돈이 되어 있던 작고 좁은 정원은 다 말라비틀어져 수척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눈에 띄게 보이는 우중충한 분위기가 모브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 역시 눈시울이 조금은 뜨거워 오는 것이었다.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도 없는지 바람소리와 함께 유난히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번 더 누르려 손가락을 초인종에 가져다 댔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모브가 헤어졌을 때 당시와 별로 다를 것 없이 내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 모브..

어쩐 일이세요?

.........


모브의 새삼 덤덤한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대답을 못 했다. 모브는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고, 갑자기 나타난 나의 등장에 놀라지도 않고서 말했다.


저 지금 짐 놓고 놀이공원 갈 건데.

...놀이공원?

같이 가실래요? 싫어하려나

아냐, 가자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이라는 것이 조금 뜬금없고, 이런 우중충한 날씨에 웬 놀이공원인가 싶었지만 군말 없이 모브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모브는 가는 버스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턱을 괴고는 창문을 바라보면서 혼자 피식피식 웃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하나자와가 '주변 사람들 말로는 조금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던데...'하고 끝을 흐리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갑자기 음음~ 하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뜬금없이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가 혹시나 해서 저.. 모브.. 하고 말을 걸면 그때에만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나에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도착한 놀이공원은 사람도 없는 한적한 놀이공원이었다. 스릴 있는 놀이기구도 없어서 주말이면 몇몇 어린아이들과 동반한 부모님 정도만 오는 그런 곳이었다. 시설이 그렇게 좋지 않은 만큼 입장권 역시 비싸진 않았다. 내가 사주겠다면서 입장권을 구입하자 모브는 가만히 날 쳐다보다가 솜사탕을 사야겠다면서 혼자 쪼르르 가서는 커다란 분홍빛 솜사탕을 사서 들고 왔다. 


놀이기구.. 탈 거니?

아뇨


모브는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고는 놀이공원의 한쪽 벤치에 앉아서는 솜사탕을 뜯어 먹었다. 나는 모브의 눈치를 보면서 옆에 목석처럼 굳어서는 앉아 있었다. 


저.. 모브.. 

... 잘 지냈니?

..소식 대충 들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

네가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

힘들었겠구나...... 그 시기에 함께 있어주지 못 해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스승님


모브는 덤덤한 목소리였다.


무시하셨잖아요.

...응?


무시라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편지도 안 받으셨잖아요. 근데 뭐..., 괜찮아요.


모브는 다시 솜사탕을 한 움큼 뜯어서 입안에 넣었다. 그 상황에서 '핸드폰이 고장 나버려서... 아마 그 시기에 네가 연락을 한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요즘 결혼 때문에 조금 바빠서......' 하고 받은 연락이 없다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너무나도 구차했다. 죄인이라도 된 마냥 입을 다물고 신발 끝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씨는 더 어둑어둑해지면서 곧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컴컴해졌다. 당연히 놀이공원에는 나와 모브 외에 표정없이 돌아다니는 경비원, 기계적으로 돌아다니는 몇몇의 환경미화원 외에는 없었다. 오래된 탓에 녹슬어버린 곳곳의 장비들탓에 마치 폐쇄된 공간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놀이기구에서 나오는 발랄한 음악소리도 그 순간엔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 구름 되게 많다, 비 오려나봐요 얼른 먹어야겠다 솜사탕은 비가 오면 녹아버리니까


모브는 그렇게 혼자 말하고는 솜사탕을 마구 뜯어서 제 입안에 넣었다. 나에게 드실래요? 하고 한번 묻고는, 안 드실 거죠? 하고 저 혼자 답하고는 꾸역꾸역 다 먹어치웠다. 하나자와의 말대로 모브는 정말로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부분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다행이다


모브는 뜬금없이 날 보고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스승님이 혹시나 저에게 제령을 하자고 하면 어쩌나 조금 고민했어요. 

무슨 소리야... 이제 그런 거 안 해.

이제 돌아갈래요. 솜사탕도 다 먹었으니까요. 


모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벤치에서 일어섰다. 모브는 정말로 뭔가 모르게 이상했다.


저.. 모브.. 이거 일기장 말인데.. 돌려주려고.. 유품이잖아..


나는 돌아가는 길에 타이밍을 봐서 모브에게 일기장을 건네었다. 혹시나 모브가 이 유품을 보고 발작적으로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면서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모브는 그 일기장을 보더니 나를 다시 쳐다보고는 웃으면서 일기장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품이라뇨?

이거 네 동생 거잖아?


모브가 덤덤하게 네 하고 대답을 하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안 보이세요?


모브는 뜬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뭐가? 하고 묻기도 전에 모브는 내 대답을 가로채듯이 말했다.


됐어요.


모브는 일기장을 받아들고는 가방에 넣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한마디도 없었다. 집 앞에 와서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다면서 나에게 잘 지내세요 하고 건조한 인사를 건네고는 집 문을 닫고는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브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열어본 핸드폰에는 여자친구에게 내일 봉사활동 일정에 대한 문자가 와 있었다. 그래, 내일 9시 반에 복지관에서 보자 하고 답장을 하고는 복잡해진 심정을 잡으려 눈을 감았다.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이 잔뜩 햇빛을 가리고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내 위를 막아서고 있었다. 











-

집으로 돌아와서 혹시 몰라 책상 서랍을 뒤져보니 내가 읽지 않은 모브의 편지 두어 통이 있었다. 아마 결혼 준비 탓에 내가 인식도 못하고는 서랍에 마구 쑤셔 넣은 것이 분명했다. 읽지 않은 그 편지들 중 마지막 편지를 뜯어서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부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스승님, 리츠의 옆에는 정말 이상한 친구가 있었어요.. 아마 저에게서 도망치듯이 행동했던 것도 아마 이 녀석이 리츠를 살살 꼬드긴 것이 분명해요. 제가 전에 말했던 그.. 스즈키라는 친구예요. 정말 웃기는 놈이에요. 제 앞에서 리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 있죠? 리츠 역시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했을 거예요... 저 역시 너무 화가 났어요.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리츠는 인기가 많아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내 옆에 있는 것을 리츠는 좋아할 거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거죠.

스승님은 전에 저에게 사람에겐 초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하셨었지만 가끔은 필요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스즈키라는 녀석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기괴한 경계선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형태로 멍하니 흐름을 타고 갈 거예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눈을 뜨더라도 행복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리츠는 제 옆에서 평생 행복할 거예요. 그렇죠? 제 옆에서 존재하는 현재를 가장 행복해하겠죠? 

엄마와 아빠는 저를 볼때마다 항상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울어요. 시게는 전혀 실감을 하지 못하는구나..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니? 그런 모습이 더 슬프다.. 하고요. 엄마는 제가 너무 큰 슬픔에 현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는 거래요. 하지만 저는 슬프지 않은걸요. 울어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음... 아! 딱 한가지 조금 아쉬운 건 있어요. 리츠가 에쿠보처럼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 같아요. 그건 조금... 슬퍼요.]





....


동생 녀석이 모브를 무서워 한 것은 괜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나와 모브가 만났던 그 순간에도 동생은 쭉 옆에서 영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이상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평생 모브의 옆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면.. 영체로써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편지의 이상한 구절을 읽고 나서, 그동안에 모브에게 받은 모든 편지를 다 모은 다음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품에 있는 라이터를 조심스레 켜서는 편지에 불을 붙였다.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어서 잘 붙지는 않았다. 한참을 바람과의 싸움 끝에 불을 붙이고 새빨간 혓바닥이 그 편지들을 개걸스럽게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빳빳했던 종이들이 까부러치듯이 불이 닿자마자 말려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고,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탁탁 소리를 내며 그렇게 타오르다가, 까만 잿가루로 변해버린 편지 쪼가리들은 멀리서 부는 바람을 타고 저 먼 구름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저 먼 곳의 뭉게구름은 생김새는 비슷해도 결코 솜사탕처럼 달콤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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