몹싸/단편

[텁석에쿠] 석양볕

2016. 12. 5. 09:54










스산한 공기가 기분 나쁠 정도로 무겁다. 게다가 몸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작은 촛불 따위를 끄려 후 하고 불면 그 작은 입김만으로 영원히 소멸할 것 같았다. 시게오에게 영소의 대부분이 날아갔고, 그 후에 그것도 모자라서 왠 금발의 꼬맹이에게는 소멸당할 뻔도 하였다. 최악의 상황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게오와 그 금발 꼬맹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에쿠보는 티끌만 한 크기로나마 간신히 영체를 유지하고서는 길을 걸었다.


순탄치 않았다. 가는 도중 돼지, 개, 심지어 작은 쥐의 영에게도 도망쳐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고 잔뜩 지쳐있었다. 저보다 작은 생물의 움직임에 반응을 보이는 소동물들은 에쿠보가 도망치는 그 움직임에 호기심을 품고는 쫓아왔다. 저리 가! 따라오지 마! 살려줘! 하지만 뒤에 있는 거대한 생물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거대한 앞발로 그를 밟으려 내딛고, 에쿠보는 그 커다란 그림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쳐다보지도 않던 가축의 영들에게 쫓기는 처지라니.. 상급 악령으로 기세등등했던 자신의 모습이 마냥 그립기만 하였다.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이쪽으로 와! 하고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턱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벼룩을 타고 다닐 정도로 작은 영이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그 작은 손을 허겁지겁 잡고서 벼룩의 등에 올라탔다. 잔뜩 지친 에쿠보는 그제야 눈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았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작은 영은 그를 위로해주듯, 이제 괜찮을 거야 하고 어쭙잖은 위로까지 건네었다. 그 말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성기 때엔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들.. 지금은 이런 녀석에게 구해질 정도로 하찮아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애석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기에 그런 위로도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난 텁석부리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에쿠보"

"그렇구나 잘 부탁해"

"..그래"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돌았다. 조금은 불편한 듯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 텁석부리는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텁석부리가 워낙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에쿠보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살아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은 많지 않다. 텁석부리도 살아있는 시절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냥 사라지기 싫었을 뿐이고.. 이승에 무슨 원한이나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목적도 없이 세월만 훠이훠이 지나가더라..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난 죽어도 딱히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언제나 혼자 하루하루를 살고 나서 왜인지 영이 이렇게 작아졌어"


"아.."

"에쿠보 너도 그렇지?"

"음.. 글쎄.."

"같은 처지에 잘 지내자"


텁석부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무기력한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텁석부리는 오랜만에 본 에쿠보가 반갑고 좋았다.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신을 보며 귀찮은 듯이 바라보는 눈도, 초록색 빛을 발하는 영체의 빛과 양 볼에 귀엽게 자리한 빨간 반점도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만 말도 통하지 않는 벼룩 노치와 함께 작고 허름한 오두막에만 누워있는 것은 조금은 외로운 일이다. 사람이 정말로 죽을 때는 외로울 때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미 죽어서 영이 되어버린 텁석부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외로움을 덜어주는 상대를 만난 것은 그에게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되었다.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혹시 살아있을 때 꽤나 가까운 인연으로 닿아있었던 사람은 아닌가 하고 혼자서 상상하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조급해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서 텁석부리는 근처에 같이 산책이라도 가자면서 에쿠보에게 제안했다.


"웬 산책?"


반응이 조금은 떨떠름했다.


"음.. 아니 네가 조금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뭘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

"산책.. 그래 할까?"


텁석부리가 자신을 조금은 생각해준다고 생각한 에쿠보는 크게 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 의견에 순응했다.

그렇다고 해봤자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잡초 풀,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소동물의 영들, 조금 올라와 있는 황폐한 언덕, 척박한 자갈밭..


"저쪽으로 가면 호수도 있어. 작지만."


조금은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는 텁석부리를 보고 에쿠보는 조금은 그에 대한 경계가 풀어졌다. 

텁석부리의 안내에 따라서 함께 간 그 호수는 그렇게 맑고 깨끗한 곳도 아닌 데다가 근처의 풍경이라도 해봤자 드문드문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까맣게 문드러진 나무가 으스스하게 서있고 정리되지 않은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란 곳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서 청결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텁석부리가 이런 곳까지 찾아서 안내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텁석부리는 잡초가 별로 많지 않은 곳을 찾아서 안내하고서는 이곳에서 조금 기다리면 해가 진다며 그 광경이 꽤나 예쁘다고 했다.


"살아 있을 때에도 무기력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광경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한 후에 꼭 이렇게 해가 지는 이 광경을 보고 헤어졌을 거야. 나는 오늘 너와 영체가 되고 나서 첫 번째 데이트를 하는 거야. 사람의 영과는 온 적이 처음이거든!"


"데이트 같은 소리.."


에쿠보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덧 하늘이 비치어 파랗게 빛나던 호수가 붉은색 잉크를 떨어트린 것 마냥 점점 붉은빛으로 불붙었다. 잡초들도 나무도 붉은빛을 발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텁석부리는 옆에 앉아 있는 에쿠보를 바라보았다. 초록색의 영체에도 붉은빛이 반사하고, 눈동자 역시 붉은빛이 맺혀서 반짝이는 하나의 구슬 같았다. 늘 혼자 봐왔기에 몰랐던 눈동자에 맺힌 주홍빛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 텁석부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는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에쿠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커졌다. 가축들의 영에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이 되었을 때 그런 에쿠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텁석부리는 말했다.


"에쿠보.... 어쩐지 너 조금 커지지 않았어?"

"응, 하지만 아직 멀었어"

"어째서 커지려고 하는 거야? 우린 죽었어!"


텁석부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꽤나 흥분한 듯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조금은 화난 듯 보이기도 했다. 에쿠보는 그런 텁석부리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텁석부리가 그와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몹시 언짢았다. 그는 상급 악령이다. 그런 벼룩의 영과는 다른 차원의 악령인 것이다.


".. 텁석부리.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이 몸은 너와는 달라. 어째서 너는 너 자신을 나와 동일시하는 거야?"


"에쿠보.. 너나 나나.. 이미 죽었잖아.."


"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쿠보는 말했다. 이 몸은 신이 될 몸이야! 이런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돌아가서 시게오를 마음껏 이용하고 틈을 봐서 몸을 차지한 다음에 세상의 신이 될 거라고!


"신...?"


텁석부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니? 게다가 신이라니.. 그래서 에쿠보는 그렇게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텁석부리는 다시금 외로워졌다.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고, 충분히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상대가 신이라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니.


그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에쿠보는 조금씩 몸이 커져가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처음에 맞잡았던 에쿠보의 손을 이제 다시 맞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자신의 손은 이렇게나 작은 것일까?..





자꾸만 커지던 에쿠보는 어느 날 새벽 떠나겠다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텁석부리 지금까지 돌봐줘서 고마웠어"

"..."


점점 커지는 에쿠보를 보면서 언제 떠난다고 말할지 불안해 떨고 있었던 텁석부리였지만 예상을 한다고 해서 슬픈일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텁석부리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눈물을 가득 삼키고 있기도 했고, 돌아보면 다시 혼자가 되어버렸다는 외로움이 더더욱 실감이 나서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왜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험한 상황에 이 몸을 살려준 은인이잖아. 고마웠어. 잘 지내."


에쿠보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그대로 길을 떠났다. 그는 전혀 서운하다거나, 미련이 남은 듯한 한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이미 해는 지고 어두운 어둠이 무겁게 깔려있다. 조용한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고, 벼룩의 영인 노치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며 바스락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한참을 이불을 적시다가 결심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노치의 등을 탔다. 


노치! 어서 가자! 에쿠보에게 가야겠어!


노치는 마치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등을 내주었다. 노치가 그렇게 열심히 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잘은 몰라도 노치도 에쿠보에게 조금은 정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서 말갛게 빛나는 에쿠보의 초록색 영체가 보였다.


에쿠보!!!


텁석부리는 크게 외쳤다. 하지만 에쿠보는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커진 몸집 탓에 이제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에쿠보!!! 에쿠보!!


그는 다시금 힘차게 외쳤다. 그의 격정적인 외침이 들렸는지 에쿠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돌아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어째서 자신이 에쿠보를 필사적으로 쫓아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자신의 외침이었다. 아! 나는 에쿠보의 일부가 되고 싶었구나..! 에쿠보와 처음이자 마지막의 데이트에서 본 붉은 석양을 늘 함께 보고 싶다...! 핏빛 석양이 빛나는 그의 눈동자의 일부가 되고 싶다...!


에쿠보...! 나를 흡수해줘...! 나도 함께 데려가 줘....! 제발 부탁이야...!


텁석부리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어찌나 크게 외쳤는지 머리가 띠잉하고 울릴 정도였다.


에쿠보....! 제발!!! 나를 흡수해줘...!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난 너무 작아서 너에게 커다란 도움 같은 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 아냐, 그만둬. 돌아가...!


어째서 그러는 거야! 나를 흡수해줘...!제발...!


에쿠보는 맹렬히 쫓아오는 그가 무서웠다. 작은 그의 푹 패인 검은 눈에 이상하게 광기가 서려있었고 너무 크게 소리를 쳐서인지 목소리 조차 기괴하게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에쿠보는 자신이 커지기 전의 작은 상태에서 저런 광기어린 텁석부리를 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만둬.. 왜 그러는 거야...


에쿠보...! 나.. 난 너의 일부가 되고 싶어...! 나도 데려가 줘....!!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낀 에쿠보는 곧바로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흡사 쫓고 쫓기는 관계였다. 에쿠보도 텁석부리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텁석부리도 살면서 어떤 존재를 이렇게 필사적으로 쫓아본 적이 처음이었고, 에쿠보다 이렇게 작은 존재를 피하려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도 처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뒤를 돌아보니 텁석부리는 없었다. 에쿠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역시 무기력한 그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아오다가 그의 본 모습을 되찾고는 에라 모르겠다 싶었을 것이다. 











-

노치도 텁석부리도 커다란 에쿠보가 달리는 것을 쫓기엔 무리였다. 텁석부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흡수해달라는 그의 소원마저 매정하게 뿌리치고 간 에쿠보를 원망했다. 처음부터 그를 구해준 것이 잘못이었을까? 다시 혼자 남아버린 텁석부리는 자신을 동정했다.. 다른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는 이미 에쿠보를 만나기 전의 자신과는 또 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내일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서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텁석부리는 한켠의 허한 가슴을 움켜잡고 계속해서 울었다.. 눈물이 뜨겁게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왔다. 이제 그는 다시는 석양을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난 텁석부리는 조금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이상한 징조를 느꼈다. 왜인지 갑작스럽게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뭘까? 이 답답함. 텁석부리는 바람이라도 쐴 겸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선 노치를 불렀다. 


노치, 어딨니? 산책하러 가자


노치는 멀리서 달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노치를 탈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다가온 노치는 너무나 작아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노치를 바라보면서 노치가 맞느냐고 물었다. 노치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평소에 앉아 있던 머그컵 잔으로 달려가보았다. 항상 앉아 있던 그 머그컵. 평소엔 그 머그컵의 안을 내려다보려면 낑낑대며 기어올라가야 했던 그 머그컵을 이제는 발꿈치를 들면 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텁석부리는 깨달았다.


아...! 나도 살아있구나...! 


에쿠보와의 만남으로 그는 조금은 변화하고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는 점점 더 커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에쿠보가 어째서 그렇게 커지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쿠보가 신이 된다는 야망을 품었다면.. 그는 에쿠보와 석양을 볼 두 번째 데이트를 상상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텁석부리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

내가 뭘 쓴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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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라도 하더라도 중학생은 어쩔 수 없는 중학생이었다. 시게오는 손님이 없는 영등등사무소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어 놓고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어른이라는 면모를 조금은 과시해볼까 하는 생각에 레이겐은 시게오의 머리를 살짝 톡 치면서 물었다.


"뭐 풀리지 않는 거라도 있니?"


"음... 이 책을 읽고 생각해보라고 하셔서요..  근데요, 너무 어려워요. 스승님이라면 해결해주실 것 같아요!....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 보셨나요?"


"완전히 명작이잖아. 봤지"


"데이지가 어째서 개츠비를 버리고 떠났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는데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시게오는 평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했다. 이럴 때일수록 어른답게 설명을 술술 해준다면 좋았겠지만 레이겐은 그런 복잡한 문제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고 너무 오래전에 읽은 탓에 내용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음... 숙제니?"


"숙제는 아닌데요. 그냥 생각해보라고 하시고 수업을 끝내셨어요. 근데 저도 궁금해져서요."


"그건 말이야 개개인마다 느끼는 게 답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이런 건 나에게 묻지 말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볼 것! 알겠니?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해줄래? 정답인지 아닌지 내가 평가해 줄 테니까"


"...네.."











*


"28살 레이겐 아라타카...... 15살 어린아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원래부터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알바라는 명목으로 어린애를 사무실에 들인 겁니까?"

"레이겐씨?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터뷰하시죠"


파란만장한 28살. 지금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집 앞에 모인 수많은 무리의 방송 기자들은 각자 신나서 플래시를 터트리면서 사무실 겉을 찍어대면서 그를 관찰하고,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앞에서 수 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레이겐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집어 들고는 손을 떠는 탓에 담배 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해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붙여서는 한입 깊게 빨아들이고는 내뱉었다. 담배연기마저 아련하게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시게오를 만나게 된 이후로는 손에 잘 대지 않았었던 담배였지만 지금은 결국 그 녀석 때문에 다시 손을 댄 것이다. 레이겐은 다시금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아, 내가 이래서 처음부터 싫다고 한 거였는데...




처음 시게오와의 만남은 몇 년 전, '저기요 고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하는 앳된 목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 손잡이를 낑낑대며 열고 들어온 것부터 시작되었다. 첫인상은 정말로 엉뚱했다.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이상한 말과 함께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얼굴을 한 괴짜 초등학생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만남의 순간부터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몰랐다. 초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에 눈을 빛내면서 쳐다보는 그 순진함을 이용하려 한 나쁜 어른.. 처음부터 단호하게 그런 힘 같은 건 모른다며 솔직하게 거절하고서 돌아가라고 했어야 했다는 것을 지금 깨달으면 무엇을 할 것이란 말인가?


그 이후로도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시게오는 중학교 2학년으로 항상 검은 가쿠란을 입고서 들락 나락 거리게 되었다. 키도 많이 컸고,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 얼굴의 젖살도 많이 빠졌다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이 벗겨지지 않은 완전한 애기였다. 일방적으로 레이겐이 연락을 해서 불러낸 적도 많고, 그래서 불만을 표시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런 자잘한 일에도 친구하나 없는 레이겐의 옆에 이렇게 오랜 시간 곁을 지켜주는 것을 레이겐은 참 고마워하고 있었던 것도 맞다. 담배를 피우며 옛날 일을 회상을 하며 밖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플래시와 기자의 외침에 구석에 몰린 레이겐은 소리치고 싶었다. 


이 레이겐은 결코 먼저, 결단코 먼저 아이를 꼬여낸 것도 아니며, 수 없이 거절했었고, 분명히 수차례 거리를 두려 했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이 서로를 사랑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피해자의 신분은 감추어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했는지 시게오의 이름이나 행적은 나오지 않았다. 레이겐은 잠시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내 본인이 약간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언론에서 공개되고 있는 내용은 무서웠다. 뉴스에는 중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기꾼 영능력자라는 이름으로 언제 찍혔는지 모를 희미한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뉴스에 보도되고 있었다. 아마도 레이겐을 아는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 사진을 보고 레이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처음에 마음을 고백한 것은 시게오였다. 한 겨울, 제령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매섭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시려워, 조금의 미안한 마음으로 레이겐은 본인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 목도리가 지나치게 따뜻했을까? 인적이 없는 새까만 하늘 아래의 새하얀 눈길에서 시게오는 말했다.


"저...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스승님은 정말 좋으신 분 같아요"

"하하, 물론 맞는 말이지만 또 마냥 좋은 사람만은 아니다?"

"그럼 나쁜 사람인가요?"

"음.. 그것도 아니지만.. 네가 그렇게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고 나에게 좋으신 분 같아요, 하고 말하면 뭔가 부담된다고"

"부담이요?"

"어른들은 어린애들이 모르는 그런 복잡한 사정들이 많은 법이니까"

"...음.. 저 스승님, 뜬금없이 질문해서 죄송한데요. 혹시 연애 같은 거.. 하고 계세요?"

"연애하고 있으면 이런 추운 겨울에 제령 하러 나왔겠니?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을 거다"


추우니 사무실에서 몸이나 녹이고 가라면서 그 저녁에 사무실에 붙잡아 놓은 것도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저 이렇게 추운 날 데워지지 않은 방구석으로 들어가서 혼자 외롭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있기는 싫었을 뿐이었다. 난로를 틀고서 추우니까 데운 우유나 한잔하고 가라면서 우유를 데워주고, 자신은 몸을 덮인다며 미량의 알콜이 들은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옆에 붙어 앉아서는 티브이의 삼류 영화 따위를 봤다. 정말이지 더럽게 재미가 없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배우가 나왔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영화였다. 별 감흥 없이 멍하니 티브이를 보다가 시간이 늦었으니 데려다주겠다며 이만 나가자는 레이겐의 말에 시게오는 정말로 엉뚱하게, 분위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어붙은 퀴퀴한 겨울의 사무실에서 조금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스승님, 저... 그니까.... 스승님이 좋아요. 음.. 이 말은요, 좋은 사람이어도 호.. 혹시나.. 그.. 그럴 리는 없겠지만, 스승님이 나쁜 사람이어도.. 같이 옆에 있고 싶다..라는 뜻이에요. 음.. 그니까 스승님이 추운 겨울에 제령을 제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자친구.. 의 역할을 제가 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전 여자는 아니지만 말이에요.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대놓고 엄청나게 비웃으며 조금 더 크고 와라~ 하고 농담을 받아주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시게오의 그런 고백이 아예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레이겐은 그 이후에 자신이 시게오를 보는 시선이 조금은 변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머릿속으로는 전화도 해선 안되고 불러내어도 안되고, 함께 다니는 것조차 조절했어야 했다는 것을 그저 300엔의 값싼 몸값으로 부릴 수 있다는 이유로 애써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시게오는 그 전과는 달리 불평도 불만도 없이 전화가 오면 네 스승님! 하고 몹시 들뜬 목소리로 달려왔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일하기도 수월했다는 점이 꽤나 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스승님 스승님 하고 따르는 그가 꽤나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을 때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그때의 그는 '늦었다', '혹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곤두박질 쳐버린 것이다. 


시게오가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도 저 좋아하시는 거예요? 아니. 내가 미쳤냐? 거짓말. 안 좋아해. 거짓말이잖아요. 나 너랑 그러면 안 돼. 왜요? 너 너무 어리고... 저 하나도 어리지 않아요! 저도 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 정도는 저도 파악할 줄 알아요. 


시게오는 그렇게 말하고서 웃었다. 레이겐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부터...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고 믿는다. 이 녀석이 강력한 초능력으로 자신의 사고까지 바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죽어도 안된다고 하고 거절을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레이겐은 그 순간에 마냥 시게오가 좋았고, 심지어 입술을 맞대는 그 순간에는 '잘못됐다'라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취해버려 마냥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하고 허겁지겁 파고들며 품에 안기는 것도, 옅게 풍기는 달콤한 우유 냄새, 그리고 특유의 아이의 맑은 눈동자도..... 이미 썩어버린 제 나이 또래의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그 순수함..! 바로 그 순수함이 레이겐의 발목을 잡고 끌어내린 것이다. 


똑같이 순수했다면 정말로 좋았을 터인데... 이미 욕정의 맛을 알고 있는 28살의 욕정은 너무나 더러운 것이었다. 시게오의 맑은 눈동자의 옆에 있으면 그 악취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추악했다. 





"그.. 오늘 같이 자.. 자고 갈래?"


그 말을 꺼낸 것은 시게오와 처음 입을 맞춘 이후 2달이 조금 넘었을 즈음이었다. 레이겐의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하면 시게오를 안을 수 있을까 하는 조급함,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안에 들어가서 겁에 질리지 않은 상태로 부드럽게 옷을 벗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통의 또래 여자들이라면 자고 가자는 말에서부터 다 알아채고선 뭐야, 벌써 이러는 거야?라던가, 단호하게 지금은 별로야,라고 하던가, 아니면 눈동자를 굴리며 재빠르게 모든 행동을 계산을 할 터인데 시게오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어떤 것조차도 생각하지 못 했다. 

시게오와 같이 외박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시게오는 전화로, 엄마 오늘 스승님댁에서 자고 갈게요 하고 말하자 오늘은 바쁜 거니? 레이겐씨와 함께 있는 거야? 하고 간단한 것을 묻고는 곧바로 허락했다. 아무래도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레이겐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근처의 싸구려 모텔, 아니 그보다 더 싼 허름한 구식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여관은 밖에서 자기엔 돈이 나름 넉넉한 노숙자 정도가 와서 잘 법한 정도의 공간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싸구려 공간에서의 섹스라니, 장난하냐면서 단호하게 뺨을 한대 때렸을 정도로 허름했다.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구식 노란 장판은 이음새도 제대로 맞질 않아서 드문 드문 떨어져 있고, 보일러의 열 때문에 울어버려 중간중간은 부풀어있는데다가 침대 시트나 배게, 이불에는 빨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얼룩이 약간 묻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위생적이지 않았다. 

섹스가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시게오는 왜 스승님의 집으로는 가지 않는 거예요? 굳이 이런 숙박업소를 이용하는 이유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나는 집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참을성이 좋지 않거든!이라고 말하려던 것을 입안으로 삼키며, 우리 집이 지금 좀 많이 더러워. 하고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레이겐은 이미 아무도 볼 수 없는 한 공간 안에 둘이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욕정이 부풀어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있었다. 화장대로 보이는 거울 앞에는 구식 여관이지만 신경 써준답시고 콘돔이 두어 개 놓여있었다.


시게오는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비싼 여관이라면 반 투명 유리로 언뜻 언뜻 실루엣을 비추도록 해놓는 서비스도 있었지만 이런 싸구려 모텔은 묵직한 나무 문이 멋이라곤 하나 없이 닫혀 있을 뿐이다. 시게오가 샤워를 시작하려는지 쏴아아 하는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은 상상했다. 시게오의 작은 어깨, 하얀 피부에 더 하얀 거품을 묻히는 모습, 머리카락이 물이 젖어서 흘러내리는 모습, 솟아 있을 젖꼭지, 목덜미, 허벅지.. 상상만으로도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는 문을 두드렸다.


"저, 모브"

"네 스승님, 저 좀 늦죠? 빨리할게요"

"아, 아니 내가 좀 도와줄까 해서"

"네엣? 아.. 아니 저.. 괜찮은데.."

"왜 그래? 도와줄게"


시게오는 문을 잠그는 정도의 치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문은 당연히 열려 있었다. 손잡이를 비틀어 열고서 들어가자 하얀 욕조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겐은 웃으면서 왜 그래? 내가 씻겨줄게, 하고 능글맞게 말하면서 다가갔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모르나 홍조 띤 얼굴에 다시 한번 아랫배에 뭉친 욕정이 확 끓어오른다. 하지만 시게오는 죽어도 싫다면서 웅크린 몸을 절대로 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달래도 싫다면서 도리질을 쳤다. 이 상태라면 오늘 밤은 무리인가..? 하는 불안감도 잠시 들었다가, 그래 그렇게 부끄러우면 혼자 씻고 나와, 하고는 침대에서 앉아서 여유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시게오는 옷까지 다 입고서 욕실에서 나왔다. 역시 어린아이는 아이라고나 해야할까? 레이겐 역시 샤워를 마친 후에 나가자 시게오는 불을 끄고서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는지 티브이를 틀어놓은 채로 침구를 꺼내어 다 펼쳐 놓고는 얌전히 누워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난 것이다. 샤워 가운을 걸친 채로 옆에 털썩 누웠다. 시게오는 웃으면서 스승님, 춥지 않아요? 하고 물으며 먼저 가슴팍에 안겨왔다. 이렇게 먼저 안겨왔다면 다음은 쉬웠다. 천천히 입을 맞추어 나가고, 목덜미를 핥으면서 깨물고, 분위기에 맞추어서 가슴의 돌기를 살살 문질러 주면서 티셔츠를 벗겨나가는 것이다. 레이겐의 행동은 이미 성나 있는 아랫도리만큼이나 성급했고, 시게오는 갑작스러운 스승의 행동에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처음 느끼는 이상한 쾌락에 저.. 스... 스승님 저.. 자.. 잠시만요 하고 작은 손을 뻗었다. 왜? 싫어? 나는 모브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온몸에 키스해주고 싶어. 아뇨, 저 시... 싫은 건 아닌데.... 저 좀.. 이.. 이상해서.. 스승님과 함께잖아? 무서워? 아.. 조.. 조금.. 괜찮아. 천천히 할게 응? 조금은 무서운지 품에서 미세하게 떠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안심시켜 주듯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다음의 기억을 레이겐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음날 생각 나는 것은 시게오가 아아.. 스.. 스승님, 아.. 아파요.. 하고 덜 자란 아이의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는 것이 흥분되어서 그도 모르게 입을 막는 시게오에게 더 해줘, 소리 듣고 싶어. 하고 귀에 속삭였던 것, 그리고 좁은 시게오의 안에 저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난폭하게 휘저어버린 것, 그만해달라는 그의 말이 또렷이 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어서 조금만, 조금만 참자, 응? 조금만... 하고 설득했던 것이 생각났다. 마지막에 그의 뽀얀 배에 하얀 액을 잔뜩 토정해 버린 것 또한. 끝에 닿는 시게오의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끝나고서 시게오는 레이겐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스승님, 사랑해요.. 하고 중얼거리면서. 


관계 후에는 모든 게 쉬웠다. 설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의 두근거림보다는 안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 더 앞서서 시간이 될 때마다 영등등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지퍼를 열었다. 시게오는 그런 레이겐을 보고서 작게 웃어주며 저항하지 않았다. 레이겐은 문득, 혹시나 자신과의 관계를 다른 누구에게라도 말할까 봐 무서워 시게오에게 종종,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털어놓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시게오는 항상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둘의 관계는 사랑에 두근거리는 관계보다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범죄를 들킬까 봐 무서워 조마조마하기만 한 관계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레이겐은 잠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게오와 자신이 서로 사랑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게오가 어린 것이 조금 문제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무책임한 심정으로 그저 한순간의 불장난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게오를 건드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었다. 


레이겐은 다시금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보세요, 나는 결백하건데... 절대로 강제적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유혹도 제가 아닌 그 아이가 먼저였으며 관계 후에 사랑한다는 말까지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강제성을 띠지 않았습니다. 저와 시게오는 분명히 사랑했습니다.











*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면서 평소에 하지도 않던 문자로 아프니 당분간 사무실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서 2주 정도가 지났을 때에 레이겐은 잠결에 경찰에게 전화를 받았다. 주차 문제나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 정도일 거라는 생각으로 적당히 네네 하고 전화를 끊은 후, 뒤통수를 긁다가 무심코 컴퓨터를 켰을 때 인터넷 메인에 뜬 자신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고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아니겠지, 그저 비슷한 사람일 거야, 하고 애써 위로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 오는 불길한 기운에 시게오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조사를 해야 하니 경찰서로 오라는 경찰의 말에 레이겐은 창밖을 한번 내다보았다. 여전히 기자들은 징그럽게 우글 우글대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레이겐은 한숨을 푹 쉬고서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쓴 다음 경찰서에 가려 집을 나섰다. 나가자마자 잔뜩 몰리는 기자들과 마을 사람들의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겐씨!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정말로 13살이나 어린 중학생을 사랑하신 겁니까?"

"레이겐씨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기자들은 서로가 앞다투어 사진을 찍고 기사를 내려고 다들 바쁘다.


"... 미친 새끼"

"세상에 13살이나 어린 중학생이랑 도대체 뭘...."

"세상 흉흉해서 참.. 저딴 새끼는 볼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여야 되는데"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욕설과, 끈질긴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경찰서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분주한 경찰서의 경찰들은 그가 도착하자 모두 경멸의 시선으로 잠시 침묵했다. 경찰은 레이겐을 앉혀 놓고선 피해자의 인터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 들어볼 것도 없어요. 저흰 명백하게...."

"... 이 사람이 진짜... 한번 들어보세요"


경찰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시게오 특유의 나른하고 앳된 목소리의 인터뷰 목소리가 나왔다.


-성폭행.. 을 당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니? 

-네..

-그 사람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레이겐씨와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어요... 저에게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관계를 계속.. 유지했었고요... 그런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얼마 안 됐어요. 

-지금 가해자는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사랑이요?... 아.. 아니에요.

-힘들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조금만 말해줄 수 있을까?

-... 처음으로 당한 여관은요. s 여관이에요. 조금 허름한... 샤워를 한 후에 오.. 옷을 벗고.. 제 옷 속에 손을 넣어서... 아... 저... 저 자.. 자세한 건 말 못하겠어요... 하....... 저 너무.....

-그래. 그럼 그다음에도 쭉 성폭행을 당한 거니?

-... 흐윽... 네 이후에 장소는.. 주로.. 영등등사무소였고요.


여기까지가 피해자, 즉 시게오와의 인터뷰였다고 한다. 레이겐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경찰 내부에서도 수군대며 저 쓰레기 새끼, 나이 처먹었으면 그 나이 또래 여자들이나 만날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을 꼬셔? 단단히 미쳤어, 하고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저기..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증거라면 또 있어요"


경찰은 핸드폰 문자 내용이라면서 종이에 출력을 해 주었다.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시게오와 주고받은 문자였다.


-모브, 오늘 올 때 콘돔 좀 사가지고 올래? 너 콘돔 안 하고 하는 거 싫다며 내가 깜빡했어

-콘돔이요? 

-안에다 하면 배 아프다며? 옷에 묻는 것도 싫고.. 은근 까다롭다니까?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뭐 할 말 있으신가요?"

"...."


완전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순수함이라는 덫에 걸려서 맑은 눈을 한 사냥꾼을 알아보지 못 했던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던 모브가 어째서 이렇게 돌변해서 행동을 한 것인지 레이겐은 몰랐다. 레이겐은 경찰에게 물었다. 저.. 혹시.. 만날 수 있나요? 누굴요? 그.. 피해..자..라는 이 인물 만날 수 있나요? 연락을 안 받아서....... 이쪽이 만나려고 하겠어요? 재판장에서라면 모를까. 경찰은 완전하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겐에게 말했다.











*

변호사는 레이겐에게 정말 사랑했다는 증거가 있냐고 물었지만 문자를 자주 하지도 않았던 둘 사이에서 그런 증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전화가 아닌 문자로는 사랑한다,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것도 레이겐이었기에.. 그의 말에 변호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볼펜을 탁 놓으면서, 그럼 콘돔을 사 오라는 말은 왜 문자로 남겼습니까? 하고 비꼬듯이 물었다. 그거야.. 점점 사이를 숨기는 것이 너무 느슨해지기도 했고.. 평소에 문자도 안하던 놈이 전화는 받을 상황이 아니어서 묻는구나 싶었습니다.. 하고 레이겐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를 보며 변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만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변호사는 핸드폰을 들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변호사의 자리에 놓인 두꺼운 법전과 유사 사례 모음집 등등이 책상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것을 보고는 레이겐은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본인도 담배가 급 땡겨와선 담배를 들고 나섰다. 


밖에서 그 변호사는 줄 담배를 피우는지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 씨발 내가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아동 성범죄자를 변호하려고 변호사가 됐냐고... 생긴 거? 생긴 건 멀쩡해. 이런 새끼들이 더한다니까? 내가 죄를 짓는 기분이야. 내가 왜 이런 놈들을 ... 아 모르겠다. 맘 같아선 그냥 최고 형량 받게 해버리고 싶어."


레이겐은 그대로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서 앉았다. 한참 후 돌아온 변호사는 레이겐에게, 설령 사랑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완전하게 뒤집어지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하고 절망적인 척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그 피해자가 사랑이 아닌 강제성을 띤 성폭행이고, 강력한 처벌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데까지 해보겠지만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레이겐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형량을 받던 어쨌든 본인은 이제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동 성범죄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변호사 책상의 낡은 거울에 얼굴이 비치었다. 그 거울에는 28살의 레이겐 아라타카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 왜 그랬니. 왜 그랬어. 그 어린애 상대로 왜 그랬어 이 미친 새끼야.. 물론.. 당연히 들킬 줄 몰랐고 이런 식으로 신고할 줄은 몰랐지.. 


집으로 돌아오니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지 집 문에는 날계란과 쓰레기를 잔뜩 던져 놓아서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로 '사기꾼 새끼'. '미친 아동 성범죄자'라고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한참 그 글귀를 멍하니 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꺼둔 핸드폰을 켜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음성메세지를 남겼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떻게 된거니? 정말 네가 그런 거 맞니? 아니지? 하고 우는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레이겐. 그래도 극단적인 선택은 안된다. 나는 그래도 언제나 아들 편이야' 하고 다시 울음을 참으며 제발 연락 좀 달라며 울고 있었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누나도 소식을 들었는지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미친 새끼. 영능력사무실인가 뭔가 하는 웬 이상한 사기꾼 같은 일을 하더니 이제는 아동 성폭행이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 너랑 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정말 끔찍해. 앞으로 내 얼굴 마주 볼 생각하지 마.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야.' 


그 와중에 사무실 건물의 건물주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의 건물주에게도 연락이 왔다. 둘 다 동일한 내용이었다. 

[아동 성범죄자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주민들의 공포가 극심하고, 집값 하락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이사를 가주시길 바랍니다]





재판 당일. 법정에서 시게오를 만났다. 시게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엇이 복잡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옆에는 동생이 시게오를 토닥이고 있었고, 또 다른 옆에는 시게오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시게오의 작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레이겐은 멍하니 시게오를 불렀다.


"저... 모브.."

"... 저 새끼가 지금 무슨 낯짝으로 시게오를 불러?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시게오의 어머니는 레이겐의 입에서 나오는 모브라는 단어에 참았던 이성을 잃고서 흥분해서는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이 개새끼! 그런 이상한 곳의 수상한 알바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 죽일 놈! 찢어질듯한 소리가 재판장을 가득 매웠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게 퉁퉁 부은 시게오 어머니의 눈물 범벅이 된 모습을 보니 레이겐은 갑자기 본인이 잘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옆의 사람들은 우선 진정하라면서 달려들어서 금방이라도 죽일 듯한 눈빛을 한 시게오의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말리는 사람들조차도 레이겐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정했고 싸늘했다. 


재판의 결과는 떠들썩한 사회의 이슈가 된 것치고는 가벼웠다. 초범인데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것으로 형량 9년에 출소 후에도 평생을 넷상에 모든 신상을 공개하고 사는 것이었다. 레이겐의 변호사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자리를 떴다. 저런 새끼는 평생 감옥에서 썩어도 모자란데... 우리 시게오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시게오의 어머니는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시게오는 동생인 리츠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얼굴 한 번을 들지 않고 가족과 함께 자리를 떴다. 레이겐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경찰들과 함께 이동을 했다.












 *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교도소의 삶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처음의 답답함을 느끼던 고통과, 사랑을 한 것도 죄가 되는 것인가 하는 허탈함과 원망은 무뎌졌다. 재판소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달라들려 하던 시게오의 어머니의 얼굴이 잠깐은 떠올랐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교도소가 과하게 억압적이지만 천성이 악하다거나 거칠지 않았던 레이겐은 다른 수감자에 비해서 고분고분하게 규칙을 잘 따랐기에 교도관들도 레이겐을 과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려한 말빨로 교도관들과도 꽤나 친분을 쌓아서 이젠 서로 농담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야, 어때? 어린애랑 하면? 좋았냐?"

"... 아, 그런 농담 좀 그만하세요. 뭐.. 저 이제 거의 포기했지만 저 진짜 생각할수록 조금은 억울하다고요"

"뭐가 억울해? 이 새끼야, 여기 들어온 사람치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새끼 한 명도 없어!"

"아니.. 전 정말로... 아 아닙니다 다 됐어요 이제..."

"좋았냐고 물어보잖아~ 좋았어?"

"당연히 좋았죠~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거부하는 건데. 하는 생각은 아직도 계속 드네요"

"거부는 무슨, 범죄자 새끼가. 성범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지금 네가 하는 말이야. 상대 쪽이 먼저 유혹했습니다! "


교도관은 피식 웃으면서 피던 담배를 깊숙이 빨고선 반절 정도 남은 담배를 끄지 않은 채로 내려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겐은 교도관이 내려놓은 그 담배를 허겁지겁 주워들어서는 깊숙이 빨아들였다.



레이겐의 어머니는 한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한참을 나가지도 못하고, 방 구석에서 하염없이 울며 지내다가 요즘에는 조금 마음을 고쳤는지 성당에 다니시면서 항상 기도를 한다고 했다. 거기에 참회의 뜻으로 시게오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아들의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시게오의 어머니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한 번만 더 찾아온다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면서 무릎까지 꿇은 어머니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수차례를 찾아갔었는데 최근에는 이사를 가서 그 장소에 없었다고 했다. 레이겐에게 어머니는 항상 편지에 괜찮아, 벌 다 받고 나와서는 착실하게 다시 시작하자. 하고 긍정적인 말들을 위주로 써서 보내주었다. 면회도 가끔 와주었는데, 그때마다 레이겐의 얼굴만 보면 어찌나 눈물을 흘리는지, 그 모습이 너무 찡해서 레이겐은 앞으로는 이럴 거면 오지 말라는 말이 입안에서 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가 없이 어머니와 자신의 사이에 있는 유리에 가만히 손끝을 대고 죄송합니다..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98714, 면회다"


얼마 전에도 면회를 오셨던 어머니인데, 또 오신 것일까? 레이겐은 대충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고는 면회 장소로 향했다.


끼이익-하고 신음하는 철문이 열리고 유리 벽 사이에 작은 체구와 검은 머리카락이 언뜻 보였다. 어머니의 실루엣이 아님을 눈치챈 레이겐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금 면회 온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침착하게 다가갔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시게오였다. 레이겐은 시게오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순간 잘못 본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하였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시게오가 면회를 직접 와줄 거라고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천천히 투명한 유리 앞에 앉은 레이겐은 헛웃음 만을 허탈하게 내뱉고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 잘 지냈니? 모ㅂ.. 아니, 시..시게오?"

"..네"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주변도 조용했다.


"...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잘 지냈니?"

"스승님은 잘 지내셨나요?"

"뭐.. 덕분에"


한참 눈앞의 이 어린아이를 바라보던 레이겐은 시게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먼저 물을 용기가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니? 하고 마음속으로만 몇 번이나 질문을 했다. 그 마음속의 질문을 들었는지 시게오는 묵묵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돌이켜보니.. 그래도 스승님을 사랑했어요"

".. 그렇구나"

"...."

"...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니 지금 와서"

"... 스승님도 저를 사랑하셨나요?"

"... 하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지금 와서..."

"한동안 스승님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무서웠는데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떠올랐어요. 아, 그래도 역시 나는 스승님을 사랑했었구나. 하고요"


레이겐 앞의 모브는 그 말을 하면서 조금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한다거나, 혹은 슬프다거나, 그렇다고 속이 후련해하면서 기쁘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으로 보이지 않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약간의 존경, 이상한 우러러봄이 느껴지기까지 하여 레이겐은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 나를 신고한 이유는 뭐였니?"


레이겐은 마음속에 수없는 질문 끝에 결국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냈다. 시게오는 레이겐의 말에 갑자기 이유 없이 눈을 빛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스승님! 스승님이 그러셨잖아요. 힘들면 도망쳐도 된다고.. 어른에게 모두 맡기라고 하셨잖아요...!"











*

카게야마 리츠에게 형인 시게오는 항상 남들에게 이용당하면서도 그런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답답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이 형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영등등사무실의 레이겐은 처음 시게오가 알바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부터 항상 주시하고 있었고, 시게오에게 수차례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조언에 시게오의 대답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리츠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잘 알겠어. 항상 고마워! 하지만 스승님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을 주고 계시는 좋은 분이야. 좋은 사람은 무슨, 형에게 나쁜 사람의 기준은 뭐야? 실제로 형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 있지! 티브이나 뉴스를 보면 자주 나오잖아 범죄자들이라던가.. 내 주위에 없을 뿐이야. 난 운이 정말 좋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리츠는 그런 시게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순수함을 내보이면 그 순간부터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여린 마을을  어떻게 이용할지 눈알을 굴리며 다가오리라는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시게오가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밤중에 불려나갈 때에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시게오가 레이겐씨와 오늘 함께 자고 온다고 했어, 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리츠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무엇인지 몰랐다.


고민이 있다면 들어줄게. 하고 말을 건네어 봐도,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것도 아냐 리츠 하고 웃어 보이는 그 웃음에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 무력함이 조금은 지쳐갈 무렵, 핸드폰이 고장이 난 그는 시게오의 핸드폰을 빌렸다. 누군가에게 급한 연락이 오지 않는 한 별일이 없다고 생각한 시게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선뜻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크게 누구에게 연락이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침 그때에 딱 맞추어 전화를 걸어온 것이 레이겐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가 왔고, 그가 말하는 이상한 단어. 콘돔?.. 콘돔 없이 하는 건 네가 싫어하잖아. 사가지고 와. 리츠는 몇 번이나 제 눈을 의심하면서 문자를 다시 읽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그날 저녁 밤새 레이겐이 부들부들 떠는 그의 형을 상대로 더러운 아랫도리를 꺼내어놓고는 사정을 하는 상상, 사람의 인적이 그리 많지 않은 영등등 사무실에서 형에게 옷을 벗게 한 후 자신의 몸을 핥으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협박하려고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었는지도 모른다, 등등 온갖 추잡한 그 모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끊이지 않는 불안함과 화가 치밀어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게오는 다음날 아침 웃으면서 리츠, 잘 잤어?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망울을 하고 물었다.



그는 그대로 포착한 증거를 가지고 경찰에 신고했다. 리츠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한치의 망설임이나 혹시나 하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시게오에게 이 문자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시게오가 그런 짓을 당했다는 것은 정말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레이겐이 그런 짓을 행했다는 것은 의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츠에게 레이겐이라는 사람은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경찰에 증거와 함께 신고를 한 후에도 가시지 않는 분노 때문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더불어 지금까지 고작 300엔이라는 소정의 금액을 받으면서 제령을 하는 일과 더불어 레이겐이라는 사기꾼 새끼에게 몸까지 굴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후에 시게오를 데리고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리츠가 갈 곳이 있다는 말에 따라간 시게오는 경찰서에서 레이겐과의 관계를 묻는 경찰의 물음에 처음엔 단순한 스승님이라고 대답하다가, 리츠가 증거로 제출한 문자 내용을 보여주며 추궁해오자 그제야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을 더듬으면 답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눈치가 보였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경찰도 리츠도 시게오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리츠는 그 대답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사기꾼 새끼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을리가 있는가? 


형이.. 성격도 조금 서투르고.. 레이겐 이라는 사람이 형이 어릴 때부터 사기를 워낙 많이 쳐서 쉽사리 인정을 못하는 것 같아요.. 레이겐이라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기꾼이거든요.


경찰은 리츠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 영등등사무소를 조사했을 때에 수상한 흔적도 많았고 무얼 하는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데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글도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시게오가 정신적으로 아직 다 털어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서, 천천히 조금씩 털어놓으라고 말했다.


리츠는 모브에게 말했다.

"형.. 나는 너무 슬퍼.. 형이 이런 일까지 당하고 있을 때 나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구나.. 내가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미안해... 힘들었지...? 이제 다 괜찮으니까..."


리츠는 시게오를 안고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모브는 리츠가 어째서 우는질 몰랐지만 본인이 무언갈 잘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챘다. 이후에 부모님이 아셨을 때도 엄마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한참 소리 내어 울고, 당장 그 레이겐이라는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걸 리츠와 아버지가 일단은 진정하라면서 겨우겨우 말리는 것을 보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이겐과 저의 관계가 미치는 영향력이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나 슬프게 만들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몇 번이나 슬퍼하는 리츠에게도 조사하는 경찰에게도 '사랑'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한참 시게오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오늘도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네.. 그 사기꾼이 그저 사랑이라고 말하니까 그냥 그대로 믿어버리는가 보구나.. 불쌍하게도...




"리츠, 나는.. 정말로 스승님과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런 게 아니었던 거야?"


"형.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그 사람은 그냥 그렇게 말하면 형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행위에 순순히 응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한 거야. 형을 속인 거라고"


"... 그런 건가.."


경찰도, 리츠도, 엄마도 레이겐이 시게오를 속였다고 말했다. 레이겐이라는 놈은 정말로 사기꾼이었던 거야! 시급 300엔도, 힘이 없으면서 힘이 있는 척했던 것도... 침착하게 생각해봐! 모두가 외쳤다. 그런 말들을 계속해서 듣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시게오에게 있던 레이겐과의 하얗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한순간에 거뭇하게 썩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시게오는 이런 모두의 말들과 압박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해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찰, 옆에서 더불어 정신을 차리라며 한없이 슬퍼하는 리츠.. 모두가 시게오를 향해서 레이겐 아라타카가 저를 강간했습니다! 라고 외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어, 아냐 하지만 리츠가 슬퍼하잖아,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지? 정말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시게오는 문득 레이겐의 말이 떠올랐다.


'힘이 들때는 어른에게 맡기고 도망가도 된다'




경찰이 드디어 시게오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이니?

-.. 네...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시게오는 반복되는 모두의 말들에 완벽하게 세뇌되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는 정말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피해 증상마저 비슷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괜히 밤에 무섭다며 리츠에게 같이 잠을 자자면서 침대 옆에 기어들어와서는 꼬옥 붙어서 잠을 잤고, 레이겐에 대한 소문들이라던가, 이야기만 나와도 갑작스럽게 덜덜 떨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리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뭔가 안심이 되는 듯한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본인에게 생기는 이상한 안정감이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시게오를 보면서 본인이 지켜주겠다며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시게오는 리츠.. 하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품에 파고드는 것이다. 시게오는 리츠의 체온에 비로소 안심하며 잠에 든다. 시게오의 밤은 리츠와 함께한 침대 안에서야 조용히 흘러간다.











*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도망이라니...."

".. 그렇지만, 힘이 들 때는 도망쳐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레이겐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기력도 없거니와 무언가 조금 이상한 낌새에 이런 것을 캐내더라도 자신의 처지가 쉽사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망이라는 단어에서 레이겐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킨 시게오가 쉽게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다는 것을. 


"그래... 무슨 말인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자. 근데... 왜 찾아왔니?"

"심리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스승님이 궁금해졌어요. 잘 지내고 계시려나.. 하는 막연한 호기심 있잖아요. 게다가 저, 스승님이 전에 내주셨던 숙제를 했어요. 그래서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숙제?"

"네! 데이지가 어째서 개츠비를 배신하고 떠났을까.. 이후에도 계속 생각했거든요.."

"...."

"이제야 알았어요 스승님! 데이지가 개츠비를 배신한 이유요. 그건... 데이지도 어린이였기 때문이에요.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어린이요!"


칭찬을 바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는 유리창 너머의 옛 제자. 자신을 배신하고 벼랑으로 몰아넣은... 데이지와 다름없는 눈앞의 한 어린이를 보고 레이겐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정답일지도 모르겠구나"


시게오는 레이겐이 듣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시게오의 동네 사람들은 시게오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감히 상상하지 못하고, 어떤 여학생이 당했다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게오에게 그 여자애가 누구냐고 종종 물었다고 했다. '레이겐'이라는 이름에 덜덜 떠는 모브를 보고 모두 다 '믿었던 스승님이 그런 일을 행했다는 게 충격이었구나..' 하고 모두 동정했다고 했다. 피해자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도 지쳐서 결국은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갔다고 말했다. 스승님 제 동생 기억하시죠? 리츠는 여전히 똑똑하고 성실해요! 하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사이가 엄청 좋은지 잠도 같이 자고 밥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떠서 먹여주기도 한다며 꺄르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제가 힘이 들 때 리츠가 절 많이 도와줬거든요.. 리츠는 제 부탁이면 무리한 부탁이라도 잘 들어주니까... 오늘도 제가 졸라서 같이 왔어요.. 지금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 갑작스레 불안한 듯 울적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레이겐을 향해 두려운 표정을 짓고는 이만 돌아가겠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잘 지내라는 이상한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이 돌아갔다. 



레이겐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기 그저 돌아가는 시게오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린아이의 책임이란 그런 것이었다. 

본인이 그렇게 도망쳐도 된다면서 짐을 덜어주려 했던 말이 이렇게 제 발목을 옭아매올 줄은 잡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시게오는 어린아이였고... 레이겐 본인이 말한 대로 책임을 져야 할 필요도 없으며, 나머지는 어른인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해버린 책임의 무게가 이렇게 크고 고통스러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면회 시간 끝났다.


교도관의 목소리가 텅 빈 면회장소에 울렸다. 레이겐은 그 말을 듣고서야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겐은 마지막에 자신을 쳐다보는 시게오의 두려운 표정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아마 그 위대한 개츠비도 마지막에 눈을 감으면서 데이지를 조금은 원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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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레이겐 좋아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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