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지오키긴] 꼬리표 12
*히지긴/히지오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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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와 약속을 했던 그 비번 날이었다. 사실 잊고 있었는데 새로 산지 얼마 안 된 핸드폰을 개통하고 다음날에 차이나에게 연락이 왔다.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의문이지만 알아내려 한다면 주변의 사람들을 이용해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을 테니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인거 알지 이 자식아 4시에 봐]
나는 귀찮아서 그 연락을 보고 그냥 귀찮아서 답장을 하지 않았고, 연달아 문자가 몇 통 왔다.
[사디스트, 내 문자 씹는거냐 해?]
[이 자식아 봤으면 답을 하라고!]
자꾸 울리는 핸드폰이 귀찮아서 응 이라고 한 글자 보냈다. 빨리 만나서 그딴 가방 던져주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귀찮지만 옷을 챙겨 입었다.
약속했던 장소엔 이미 차이나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곤 뛰어 와서 내 멱살을 움켜쥐더니 소리쳤다.
“이 자식아! 지금 시간이 몇시야! 남자라면 10분 정도 먼저 와서 여자를 기다리는게 예의 아니냐 해? 심지어 난 10분 늦게 왔는데 네 녀석이 더 늦으면 어떡하냐해!”
“뭐야.. 데이트 하냐? 게다가 그런 어이없는 발상은 또 뭐야? 누가 여자라는거야?”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며 이 꼬맹이의 손을 뿌리쳤고 따라오라고 말하며 앞장섰다.
“나도 길 안다해”
“그래? 생각보다 기억력이 좋네”
“응. 사실 몇 번 왔었다 해”
...?
“뭐?”
“혹시 니가 있을까봐! 창 밖에서 불 켜있나 정도만 보고 지나갔다 해! 네 녀석이 있는 그 곳 창문에 내가 별 그려놨거든!”
올라가기 전에 밖에서 보니 진짜로 노란색 크래용으로 작게 별이 그려져 있었다. 이 꼬맹이가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거다.
“지우고 가”
“왜! 예쁘잖아”
“저딴거 남기지 말라고! 싫으니까!”
내가 완전 투덜투덜 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녀는 따라오면서 무엇이 좋은지 자꾸 키득키득 웃었다. 집 문앞에서 차이나에게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가방만 던져주고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굳이 여기에 이 꼬맹이가 들어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문을 열자 그녀가 같이 쪼르르 따라 들어왔다.
“밖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청소하게? 깨끗하다 해”
들어와 아무렇지 않게 전처럼 구경을 하는 그녀를 보고 어이가 없어서 한참 쳐다보다가 구석에 놓인 가방을 집어 들고 그녀에게 휙 던졌다.
“자. 얼른 가”
“집에 손님이 왔는데 차라도 한잔 주는 게 예의 아니냐 해?”
꼬맹이는 탁자 앞에 앉더니 나에게 차를 내오라고 주문했다. 아. 그래 오늘 니가 나 괴롭힐 작정하고 왔구나.
나는 물 한잔을 떠서 그 꼬맹이 앞에 내밀고 말했다.
“차는 없고 물이야 먹고 가”
나의 말에 그녀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뭐야? 왜”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싫냐 해?”
“좋진 않아”
“나는 니가 좋다 해”
뭐라는 거야?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의 그런 표정을 살피던 그녀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 그니까,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 해”
순간 나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를 하지도 못했다. 이 꼬맹이도 우물쭈물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농담이라고 생각을 하기엔 이 꼬맹이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 꼬맹이가 왜 지금 까지 나에게 그렇게 행동을 해 왔는지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 꼬맹이의 말이 현재 상황에 너무나도 뜬금없었고, 전-혀 그런 말이 나올 타이밍이 아닌 상황이여서 떨떠름했다. 하지만 이런 엉뚱하고 뜬금없는 면이 이 꼬맹이 답다고도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조금은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뭐.. 내가 너무 생각이 없었기에 몰랐다는 것도 맞는 것 같다.
“당연하겠지. 난 잘생겼으니까”
나는 농담식으로 넘어가려 대꾸했다.
“이.. 이 자식아, 나 농담하는거 아니다해!”
이 꼬맹이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도 농담 아니야”
“너..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하냐 해?”
어떻게... 라니
“...해결사 형씨네의 힘쎈 바보 정도?”
“... 칫”
나는 이 꼬맹이를 한번도 여자로 생각해 본 적도 없거니와, 장난치는 친구 정도의 감정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이런 꼬맹이의 말이 어색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는 항상 장난이 맞닿아왔던 사이라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다시는 안본다거나 그럴 것 같진 않았다. 한참 적막이 돌았다. 나는 이 꼬맹이에게 아까처럼 거칠게 돌아가라고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려 했으나. 이 꼬맹이의 상태가 처음 왔을 때와는 좀 다르게 우울해 보여서 한참 있다가 내가 말했다.
“저기. 차이나”
내가 조심스럽게 이 꼬맹이를 불렀다.
“야 사디스트, 가서 맥주사와”
“..집에 안가?”
“오늘 같은 날 어떻게 그냥 집에 가냐 해! 어쨌든 너 내 친구니까 이런 날 같이 술 먹어줘라 해!”
친구라니,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같이 술도 먹어주지 않는 친구가 어디에 있냐며 이 꼬맹이는 나에게 소리소리 질렀고 나는 그런 그녀를 한참 한심하게 쳐다보다가 알겠다고 말하고 그것을 사러 갔다. 나도, 이 꼬맹이도 똑같이 술을 먹어서는 안 되는 입장인 것은 같았기에 나는 말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왜 이 꼬맹이의 말을 들으면서 이딴 걸 사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온 맥주를 주르륵 늘어 놓았다. 이 꼬맹이는 그것을 한 캔 들고는 한 잔 한잔 홀짝 홀짝 마시더니 왜인지 모르게 취한 듯한 눈으로 나를 한번 보았다.
“너,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냐해?”
이 꼬맹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없지? 나도 이런 적 처음이다해.. 긴짱이랑은 다른 감정이다해.. 긴짱도 물론 소중하지만 너와 있으면 뭔가 더 즐거운 것 같은 알 수 없는 기분이다 해”
이 꼬맹이의 내가 좋다는 말을 약간의 반 농담식으로 들었는데 얘가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으니 뭔가 아주 약간은 안쓰럽기도 하고, 그냥 그 순간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조금은 이런 헛소리를 들어줄까 해서 그냥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가까이 가서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어 마셨다.
“사실, 저 가방 일부러 놓고 간거다 해. 여기 한 번 더 오려고. 여기 있으면 너랑 둘이 있을 수 있잖아”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뭐라고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에.
“그날 나를 도와준 사람이 너여서 되게 좋았다 해.”
“...경찰이니까 당연하지”
“그래도! 그게 다른 녀석들이 아닌 너여서 난 되게 좋았다 해”
나로써는 듣기가 조금 미안하기도하고 너무 어색하다 못해 약간 소름이 돋기까지 하는 이 꼬맹이의 이야기를 언제까지 들어줘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나는 이 꼬맹이의 마음을 거절한 것에 대해서 미안하다거나, 동정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꾸 신경 쓸 만큼 크게 와 닿지도 않았고, 이 꼬맹이는 혼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가 나에게 마음을 밝혀왔던 어쨌던 간에 그냥 변함없는 해결사 형씨네의 힘쎈 바보다. 이 꼬맹이가 나에게 말한 건 저 자신의 마음을 그냥 멋대로 나에게 말한 것뿐, 나에겐 나의 마음이 따로 있으니까.
“...나.. 오빠가 있다 해”
약간 취했는지 이 꼬맹이는 발음이 어눌했다.
그녀와 나는 항상 서로 장난치기 바빴기에 이런 가족사는 물론이고, 사소한 사생활이야기는 서로 한번도 꺼낸 적이 없어서 (물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한 성격도 아니다.) 이런 걸 털어놓는 그녀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오빠가 자꾸 나를 찾아온다해...같이 가자는데.. 난 가기가 싫어. 근데 긴짱한테 말하면 분명 그냥 가라고 할거야. 그래서 말도 못했다 해”
“가면 되잖아 가족인데”
“싫어! 긴짱하고 있는 게 좋단 말이야!”
이 꼬맹이는 나에게 버럭 말했다.
“그렇게 간절히 말한다면 나라면 갔을 텐데”
나는 누나를 떠올리곤 말했다. 내가 말하자 이 꼬맹이는 한참 망설이더니 말했다.
“....오빠가 나를...때린....단 말이야”
이 꼬맹이가 취했는지 엎드려서 중얼 중얼거렸다.
“이번엔... 좋게 이야기를 하러 온 것 같았는데에.... 내가...나도 모르게 되게 심한 말을 해버렸다해.. 그래서 이번에도...하아...그리고 저 가방..주고 간건데.. 사실 뭐가 들어있을지 감도 안 온다해. 버리긴 뭐하고.. 그래도 바보 오빠가 준건데..”
그때 맞았던 건 이 가방을 훔쳐간 그런 허접한 녀석들이 아니었던 거다. 하긴, 그런 잔챙이들한테 당할 이 꼬맹이가 아니니까.
이 꼬맹이는 엎드려서 쿨쿨 잠들어 버렸고 나는 한참 그런 이 꼬맹이를 보다가 그냥 둔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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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열쇠를 가지러 다시 내 공간에 가보니 이 꼬맹이가 또 가방을 두고 갔다. 옆엔 이런 쪽지도 함께 있었다.
[나쁜 자식 깨우기라도 하지 그냥 두고 가냐 해!]
....아 진짜 귀찮게.. 나는 다시 이 꼬맹이가 두고 간 가방을 전에 있던 구석에 던져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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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나는 히지카타와 함께 순찰을 갔다. 히지카타는 여전히 가끔 나를 못마땅하다는 듯이 봤지만 나는 이런 그의 표정도 좋았다. 이 녀석이 나를 보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은 아마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칠때 짓는 표정임을 나는 알고 있다.
“오늘 저쪽 순찰 갔다와 난 여기 순찰하고 있을게”
그가 말했다. 그 날은 이상하게 다른 날처럼 의심이 들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순순하게 알겠다고 말하곤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혼자 돌아다는 것은 재미가 없어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만담을 들으며 풍선껌을 크게 불면서 거리를 지나는데 형씨를 만났다. 그를 본 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고, 형씨는 그런 나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다가왔다. 그 와중에 히지카타가 아닌 내가 형씨를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원은 했구나? 그때 병원에서 본 이후로 처음인가?”
형씨는 넉살 좋게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했고 나는 그런 그의 손을 귀찮다는 듯이 쳐냈다.
“뭐야- 너 요즘 변했다?”
형씨가 장난스럽게 나한테 말했다. 그래, 예전이라면 웃으면서 내가 먼저 달려가서 형씨 오늘 뭐해요 나랑 놀아요 등등 이야기를 많이 했을 텐데..
하지만 넉살좋게 웃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약간은, 아주 약간은 아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처음으로 마음을 터 놓은 친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만큼 화가 나기도 했다. 형씨는 내가 이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면서.. 내 소중한 모든 걸 빼앗아갔지만 그래도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따랐던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그를 원망했고 미웠다. 우리 누나한테까지 소개 할 정도로 나는 그를 은근히 믿고 있었기에, 내 앞에서 아무일 없다는 듯이 웃고 있는 그 얼굴이 너무 가증스러워서 나는 다시 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나는 경고를 하고 싶었다. 형씨에게 음료나 한잔 마시자고 권했다. 형씨는 웃으면서 그럴까? 오늘은 내가 살게! 라고 말했다. 웬일이래.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주스를 시켰고, 형씨는 초콜렛 파르페를 시켰다. 그를 마주보고 있자니 혐오감이 일어서, 자꾸 그 장면이 눈에 아른거려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저 주스에 꽂혀서 나온 빨대로 유리컵에 담긴 주스만 휘휘 저을 뿐이었다. 형씨는 파르페를 숟가락으로 크게 한 스푼 먹더니 말했다.
“요즘 얼굴보기 힘들다?”
“저요?”
“응 너도 그렇고”
그가 그 말을 하곤 다시 파르페를 한 숟갈 떠서 입에 한입 크게 넣더니 말을 이었다.
“..오오구시군도 그렇고”
“...역시 히지카타랑 친하시네요 맨날 싸우면서”
형씨가 이 녀석 이름을 말했다는 것조차 나는 화가 치밀어서 최대한 이성을 붙들고 말했다.
“친하긴. 안 친해~ 근데 그냥 안보여서 너도 그렇고, 그 녀석도 그렇고”
“언제부터 우릴 그렇게 찾으셨어요?”
나는 삐딱하게 말했다.
“응? 찾는다니~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말한거라니까?”
형씨는 그냥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참나, 그냥 물어본거라니. 그렇게 연락해댔으면서. 나랑 같이 있는 시간에도 히지카타에게 연락하면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틈틈이 엿보고 있잖아요. 야비하게. 대담하게 나와 있을때 빼내려고도 하잖아요. 그래봤자 안되겠지만.
형씨의 그 말을 뒤로 우리는 침묵을 지켰다. 서로 아무 말이 없었고, 그 침묵을 깬 건 나였다.
“얼마예요?”
“응? 파르페? 7천원이었나..”
“아니요. 형씨요”
“나? 내가 얼마냐니 무슨 소리냐? 하루 일당 물어보는거냐?”
“하루 섹스 하려면 얼마냐고요”
나는 삐딱한 태도로 최대한 화가 나지 않은 척을 하려고 무표정을 간신히 유지하며 물었다. 나의 태도와 질문에 형씨는 약간은 당황한 것 같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역시 지지 않고 그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수저를 물고 있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하지만 이내 다시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또 이런 농담이냐? 하긴 너 원래 이런 농담 잘했지?”
나는 그냥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피식 웃어보였다.
“나랑 자고 싶냐? 어떡하냐, 나도 잘 사람은 가리거든. 깔리던, 박던 포지션 불구하고 너 같은 꼬맹이는 사절이야. 왜 나 같은 놈에게 얼마냐고 물었는진 모르겠지만, 요시와라 가보는건 어때? 거기 가면 30-40대 아줌마들은 너 같이 어린놈한테 환장할지도? 게다가 그런 아줌마들은 가격도 얼마 안할걸?”
역시 형시는 호락호락 하진 않았다. 내가 말로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서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 이내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렇구나 조언 감사해요 형씨. 하긴, 나도 형씨같은 사람은 줘도 안먹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왜 돈까지 주면서 요시와라까지 가나 싶네요. 대주고 싶어서 나 쫓아다니는 형씨네 꼬맹이도 있는데”
내 비아낭대는 말투와 웃는 얼굴에 형씨는 진짜로 화가 났는지 벌떡 일어나선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더 화를 돋구려고 싱긋 웃었다.
“왜 이러세요? 화나셨어요?”
“이 새끼야 작작해”
“뭘요?”
“카구라 건들면 죽을 줄 알아”
“......형씨가 할 말은 아니죠”
나는 형씨의 손을 확 뿌리치면서 말했다. 형씨는 내 말을 듣고 조금 놀란 듯 했고, 그냥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전 이만, 일하러 가야해서”
나는 그냥 나가려다 이런 사람에게 얻어먹는 것은 내가 성이 풀리지 않아서 내 지갑에 있던 현금을 대충 집히는데로 꺼내서 탁자에 내려놨다.
“형씨한텐 얻어먹고 싶지 않아요”
그는 내가 왜 이러는지 생각하는 듯했다. 나에게 화가 나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동시에 나를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놔두고 그냥 유유히 그 카페를 나섰다. 나가면서 유리창으로 본 형씨는 계속 무슨 생각을 하듯 그 자리 그대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형씨는 이기적이에요. 형씨가 아끼는 그 꼬맹이에 대해선 끔찍하게 생각하면서 왜 내가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멋대로 나에게서 낚아채서 더럽혀요? 뭐, 섹스파트너라는 관계라는 게 형씨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니 그 책임까진 묻지 않겠지만 이전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왜 자꾸 연락해요 이 녀석에게. 벗어나려는 이 녀석이 보이지 않아요? 뭐, 그래. 이제. 알고 있으니 떨어지라는 내 몸부림은 이제 보이죠? 눈치 하나는 귀신같이 빠르신 분이잖아요. 섹스파트너라면 그 위치와 역할답게 정리도 구질구질하지 않게 깔끔하게 정리 하는 게 맞잖아요.
더 이상 과거의 나와 즐겁게 놀아주던, 나쁜 친구였던 형씨는 어느덧 내 안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사라졌다. 지금 나에겐 섹스파트너의 위치와 역할을 잊고 자꾸만 나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욕이라는 무기로 접근하는 남창으로 보일 뿐이었다. 형씨가 일방적으로 히지카타를 좋아하는지, 어쩌는지는 관심없다. 그래봤자 나와 비교대상 조차 되지 않게 히지카타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는 충분히 경고했다고 생각해서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제 발로 떨어지길 기다려야했다. 아.. 그냥 사실대로 직접적으로 더 강하게 말할 걸 그랬나? 더 열 받게 섹드립이라도 더 칠걸 그랬나? 나는 다시 곧장 히지카타에게 달려갔다. 잠시 떨어졌지만 형씨를 만나서인지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다시 만나서 그에게 나를 향한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다. 달려온 나를 보고 히지카타는 왜 왔냐며 물었다. 나는 그의 말에 이렇게 말했다.
“혼자 순찰 하니까 너무 심심해. 히지카타씨랑 같이 할래요”
내가 말하자 히지카타가 나를 한번 쳐다보곤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가 짓는 이 미심쩍은 표정도 내가 귀여워서 어쩔줄 모르는 표정임을 알고 있다.
“왜 이러냐 요즘. 수상하게”
“내가 뭘?”
나는 그의 답에 활짝 웃으면서 답했다. 약간은 당황해 하면서 그는 그냥 담배를 하나 입에 물었다. 담배는 싫지만 히지카타가 피는 담배라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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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이 끝나고 나는 그의 방에 찾아갔다. 샤워를 마친 후 낮은 책상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그는 내가 오자 나를 보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별 목적 없이 찾은 것이어서 나는 그냥- 이라고 답하곤 그의 책상 앞에 앉았다. 그가 읽던 책을 덮으려고 하자 나는 그의 행동을 말렸다.
“나도 이거 읽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니가 이걸 읽었다고?”
“응. 그니까 니가 알려줘”
어렸을 때 가끔 이 녀석이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었는데, 그때 나는 이까짓 녀석이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게 너무 싫어서 맨날 입을 삐쭉 내밀곤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일부러 틀린 대답하곤 했다. (틀린 거 아니고 정말로 일부러 틀린 대답을 의도적으로 한거다.) 이 녀석이 잔소리를 하면 난 욱해서 대들곤 했는데 그러면 이제 공부고 뭐고 둘이 또 치고받고 싸웠다. 누나는 그런 우리를 보고 보기가 좋다면서 소리내서 웃었다. 그때 나는 싸우고 있는데 뭐가 보기가 좋냐고 누나에게도 투덜거리면서 작은 투정을 부리곤 했다.
어릴 땐 자주 그랬었는데 크고 나서는 그냥 책 좀 봐라, 이런 식의 잔소리만 가끔 했는데 그것도 강요 같은 건 아니고 그냥 한마디씩 하는 정도라 새겨 듣지 않았다. 과거가 그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오랜만에 이 녀석이 알려줄 때 나오는 말투가 듣고 싶었다.
“진짜로 알려달라고 하는 거야? 진심으로?”
그의 의심쩍은 말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옆으로 오던가. 앞에 앉아서 책 볼 거야?”
아, 그러네.
나는 이 녀석 옆으로 가서 앉았다. 내가 순순히 이 녀석에게 공부 같은 걸 배운 적이 없으니 같이 책을 보고 있었던 적도 없다. 그래서 이런 적도 처음인 것 같다. 옆에 앉아서 턱을 괴고 책의 글자를 읽는 녀석의 옆 얼굴을 서서히 들여다보는 것도. 그와 함께 같은 것을 옆자리에 앉아서 보고 있다는 것도 새로웠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의 의미는 모르겠지만 그냥 같이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듣고 있어?”
“응? 어..어어”
어릴 땐 몰랐었는데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주려고 할 때 이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 때와 다르게 꽤나 나긋나긋하다. 중간에 알겠지? 하고 상냥하게 되물어보기도 한다. 사실 난 하나도 모르겠는데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모르는 얘기 계속 듣고 있으려니 졸리긴 졸린다. 내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하품을 하자 이 녀석이 설명을 멈추고 날 보더니 말했다.
“그럼 그렇지 니가. 가서 자 이 새끼야”
책을 덮는 이 녀석을 한참 쳐다보다가 내가 말했다.
“나 여기서 자면 안돼?”
“그러던가”
생각보다 그가 쿨하게 그러라고 말해서 내심 좋았다. 나는 이 녀석과 어릴 때부터 같이 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같이 잠자리에 들 때도 많았지만, 내가 이 녀석을 싫어했으니까 에도에 와서 각자 방을 쓰고 나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히지카타가 내가 잘 곳을 마련해주려 침구를 깔아주었는데 제 침구와는 좀 떨어진 곳에 깔 길래 내가 가서 침구를 딱 붙여 놓았다.
“..뭐하냐?”
“..음...침구가 떨어져있으면 뭔가 불안하지 않아?”
그의 질문에 나는 약간 당황해서 이상한 이유를 댔고 히지카타는 그냥 별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 새끼 지금 나 당황한 거 보면서 즐기는 거지?
불을 끄고 나란히 누웠을 때 내가 장난친답시고 녀석의 배게를 빼앗았다. 그가 또 시작이라는 듯이 귀찮아하며 몸을 일으켰다. 난 그런 그의 행동에 한참 웃으면서 장난을 걸었는데 한참 장난을 응해주던 히지카타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더니 가만히 있었다.
“화났냐? 여기”
나는 한참 웃다가 장난을 그만두고 그에게 돌려주었다. 어둠이 짙게 드리워 있는 방안에서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약간 씁쓸했다.
“요즘은 그냥.. 니가 무섭다.”
그가 내가 돌려준 베게를 받아들더니 말했다.
“...계속 이런 관계가 유지될지, 어떻게 될지도 자신 없고..”
“...응?”
“몰라 그냥... 미안 헛소리야”
그가 털썩 누워서는 나에게 등을 보였다. 그의 고민이 나에게 살며시, 그리고 조심스럽게 전해지는 듯 했다. 그는 죄책감에 짙눌리고 있었다. 나에게 미안한 거야. 자신이 사랑하는 내가 모르게 뒤에서 형씨와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침구에 누워서 한참 어두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히지카타. 나는 너에게 쉽게 실망 같은 거. 안해”
나는 그의 쓸쓸해 보이는 등을 와락 끌어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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