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혼/ing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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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서 하루 종일 머리만 붙잡고 있었다. 옆에 이 새끼는 없었다. 어제 술 마시다가 갑자기 술을 따라준다면서 비우는 족족 빙글빙글 웃으면서 술잔을 채워주던 그 새끼의 웃는 눈꼬리가 급 떠오르면서 혹시나 내가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계속 곱씹어도 술에 취해서 잃은 기억은 도대체 뇌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절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출근했는지도 모르고 정신을 차리자 내가 출근해 있었다. 머리를 붙잡고 한숨에 가까운 신음을 뱉으며 책상에 엎드려 있자 우리 부대 대원들이 대장 어제 또 과음이십니까? 하고는 저들끼리 키득키득 웃어댄다. 닥쳐.. 나 힘드니까 가서 약이나 사 오든가.. 하고 힘겹게 말했는데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저놈들에게는 들리지 않는지 우르르 나가버렸다. 저런 새끼들을 지금 부하라고 데리고 있네.. 한숨을 푹 쉴 때에 얼굴 옆에 탁 소리를 내며 놓이는 약병. 누구냐? 존나 사랑한다. 하고 말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내려다보는 주인공은 제발 다른 새끼였길 바라고 바라는 히지카타였다. 3초 정도 얼어있다가 다시 푹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먹어. 도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술을 같이 먹어주는 위인은 누구냐?"

"... 남이 어디서 술을 처먹든지 말든지."

"그래. 상관없지. 근데 업무에 지장이 되잖아."

"... 하이고.. 네에.. 어련하시겠습니까"

"소고.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을까?"

"... 저녁?"


고개를 슬쩍 들고 바라보았다가, 평소보다 조금 자상하게 웃어 보이는 히지카타의 미소에 나는 보기 싫은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곤 조금 생각하는 듯이 잠시의 시간을 둔 후에 다시 말했다.


"저녁이라니.. 유부남은 바쁜 거 아냐?"

"하하, 바쁘지"

"... 나 같은 것을 위해서 귀한 저녁시간을 할애해도 되냐고"

"사실 쿠리코가 너를 데리고 오래. 집으로.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하던데"


그럼 그렇지.


"됐어"

"너 별일 없으면 가자. 우리 집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잖아?"

"내가 너희 집에 가야 하는 이유는 뭔데?"

"... 그렇게 물으면 딱히 없지만.. 그래도.."

"내가 쿠리코가 부르면 가야 되는 사람인가?"

"왜 이렇게 꼬였어? 그냥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건데"


히지카타는 정말 인내심이 좋았다. 내가 까칠하게 굴어도 마지막까지 자상한 말투로 나를 달래주었다. 끝까지 싫다고 하려다가,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 가겠다고 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갈게"


히지카타는 내 말에 웃으면서 그래. 오늘 끝나고 같이 가자 하고 말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히지카타는 나를 잘 알면서도 때로는 나를 정말 모르는 인간이었다. 아니면, 설마 내가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닌데.





"히지카타씨! 오키타씨! 어서와요!"

함께 방문한 히지카타의 집. 이 여자는 히지카타와 함께 온 나를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사실은 히지카타의 손을 잡고 싶었다는 거 나도 안다. 불편하다는 듯이 손을 빼며 안으로 들어가자 쿠리코는 히지카타보다는 나를 더 신경 쓰면서 내 뒤를 따라들어왔다. 분명 이런 것도 히지카타가 내가 오기 전에 나를 대하는 방법을 조금은 조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신혼집은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히지카타와 쿠리코가 함께 쓰는 2인용 침대가 있는 커다란 방과 작은방이 하나 있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촉촉한 느낌이 들었다.


"좋네요"


내가 무뚝뚝하게 형식적인 말을 하자, 히지카타는 뒤에서 내가 사 왔다면서 작은 인테리어 소품을 쿠리코에게 건네주었다. 저런 것을 구입한 적이 없지만 히지카타는 누군가의 집에 처음 갈 때는 무어라도 사 가는 게 예의라면서 본인이 구입하고서는 쿠리코에게는 내가 준 것이라며 말했다.


"와아.. 이런 것까지..! 전 오키타씨가 이런 것까지 준비해 오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감사해요!"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으로 나에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히지카타는 이런 자신의 아내의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나를 팔아서 쿠리코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거 제가 산 거 아닌데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히지카타는 내 입을 확 틀어막으며, 이 녀석이 괜히 부끄러워서 자꾸 다른 이야기하려 든다니까? 하고는 쿠리코에게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안방이랑, 작은 방이랑 다 구경해도 괜찮아요?"

"당연하죠! 이쪽으로 오세요!"


쿠리코는 나를 자신들의 침대가 있는 안방으로 안내했다. 


"뭐 별것은 없는데.. 밖에서 보시는 게 다예요! 제가 집을 정성껏 꾸민다거나 하진 못해서..."


밖에서 언뜻 보는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함께 눕는 더블침대.. 그리고 이들의 모든 옷을 가지고 있을 옷장, 쿠리코의 꽃잎 향이 나는 화장대, 햇빛을 막아주는 고급 커튼 등등.. 뭐야 이상해. 한참 묘한 기분으로 그들의 침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침대 좋네요? 하고 잠깐 앉아보는 척을 하며 쿠리코가 다른 곳을 볼 때에 침대의 보이지 않는 아래쪽에 준비해 놓은 소형 도청기를 슬쩍 설치했다. 이것을 계획하고 실행할 적의 나는 이 세상의 재미있는 모든 것을 찾은 것 마냥 즐거워했지만, 후에 이 어처구니없는 장난을 실행한 것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나를 죄여올 것을 이때에는 알지 못했다.


여튼, 그렇게 나의 목적을 실행 한 후 쿠리코가 차려주는 밥을 기분 좋게 히지카타와 쿠리코와 함께 먹었다. 맛은 있었다. 먹는 나의 안색을 계속해서 살피며, 오키타씨 입맛엔 맞으세요? 하고 친절하게 물어봐 주는 것까지. 아이고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한참 밥을 먹던 중, 쿠리코는 히지카타 옆에 바짝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오키타씨는 지금 어디에서 생활하세요? 아직도 둔영에 계세요?"

"... 아뇨. 따로 살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역시 대장급이라서 상관없나 봐요. 그럼 혹시 연애는 하세요?"

".. 아뇨"

"혹시 생각 있어요? 제가 아는 동생 중에 진짜 괜찮은 애 있는데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없어요"

"얼굴도 진짜 작구, 엄청 예쁘고 성격도 밝은 애라서 보는 내내 오키타씨 생각나더라니까요?"

"싫어요"

"아니 정말로.."

"쿠리코씨. 전 히지카타의 부탁으로 조용히 밥 먹으러 온 거예요. 필요 이상의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


조금 쏘아붙이는 투의 내 말에 쿠리코는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는 그 이후로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 히지카타는 나와 쿠리코의 눈치를 보듯이 슬쩍 살피다가 조금 분위기를 전환할 생각이었는지 나에게 뭐 내일의 스케줄이라던가를 이야기하면서 쿠리코에게 다음 주엔 조금 한가할 것 같은데 셋이 외식할까? 하고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쿠리코는 제 잘난 남편이 웃으면서 이야기해주니 마냥 좋아서는 금세 시무룩했던 기운이 얼굴에서 싹 가시더니 좋아요! 하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는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서 괜히 짜증 나는 기분을 표출하고 싶어서, 제 입맛하고는 별로 맞지 않네요. 게다가 전 조용히 밥 먹는 게 좋아서.. 하고는 괜스레 투덜투덜 거렸다. 둔영에서는 모두가 내 성질을 받아는 사람들 뿐이었으니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누구 하나 태클 거는 사람이 없었고 히지카타 역시 나의 투덜거림에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아무렇지 않았다. 게다가 항상 나를 향해 병신처럼 웃기만 하는 쿠리코 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의 쿠리코는 조금 달랐다. 그런 나의 시건방진 비아냥거림에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예의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아요. 오키타씨가 제 남동생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한대 쥐어박아줬을 거예요"


당황한 히지카타와 나. 나도 이 순간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잊었다. 말문이 막혔다는 말이 잘 맞을 것이다. 멍하니 있는 나와 내 눈치를 살피듯 슬쩍 쳐다보는 히지카타. 그리고 나는 그대로 일어나서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집의 문을 부서져라 세게 닫고서는 나가버렸다. 히지카타가 뛰어나와서 나를 잡을 법도 한데 뒤돌아본 문에서 히지카타는 나와보지도 않았다. 굳게 닫힌 문은 말없이 얌전하게, 나와 그 빌어먹을 부부들 사이를 반듯하게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큰 걸음으로 한걸음 한 걸음씩 걷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도망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걸음을 돌려서 그들의 집으로 문을 벌컥 열고는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그 부부들은 나오려 했었는지 바로 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돌아온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다시 돌아온 나를 보고는 아, 오키타 왔구나. 잠시... 하고 곤란한 듯이 내 팔을 잡으려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내 몸에 손대기도 전에 내 몸을 홱 돌려 빼며 히지카타가 아닌 그 뒤의 쿠리코를 향해서 말했다.


"당신이 뭔데 나에게 예의라는 둥, 남동생이라면~ 하는 가정을 하는 거야? 히지카타가 나의 상관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에게까지 그런 취급 당할 이유 없다고 생각해. 어떤 식으로든 나와 당신을 연관 짓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히지카타는 열받아서 소리치는 나를 붙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받은 열을 채 식히지 못하고 씩씩 거리는 나를 보고는 아무 말없이 나를 보다가 말했다.


"소고,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내일 보자."


나는 히지카타가 나를 따라 나왔기 때문에 나에게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쿠리코가 그런 의도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하던가, 자신이 대신 미안하다며 나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했을 히지카타가 뻔뻔하게 내 앞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내일 보자 라니. 너 화났냐? 지금 네가 화내는 거야? 네가 뭔데 지금 나에게 화를 내?



물론 나도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히지카타 앞에서 더 이상 열받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저 히지카타도 그렇고 쿠리코도 그렇고 둘다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을 지울수가 없어서 한참을 씩씩대다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침실에 몰래 설치해 놓은 도청기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한 번 들어보았다. 작동은 잘 되고 있었다. 처음엔 약간의 잡음이 살짝 들리다가 이내 제대로 그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고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 애가 조금 예민한 구석이 있어. 내가 너무 받아주기만 했던 것도 있고....]

[오키타씨는 나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전부터 항상 저에겐 저런 말투예요. 맘에 들지 않는 드는 식의 말투...]

[너에게만 그런 게 아니야. 그 애는 누구에게나 그래. 나도 그렇고.. 그나마 고분고분한 건 곤도씨 정도? 그니까 조금만 이해하자.. 응?]

[....]

[소고에겐 내가 주의 줄게]

[그럼 대신 자주 데려오지 마세요]

[.. 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약속해야 해요? 흥. 그럼 저에게 뽀뽀해주세요]

[알았어.. 그니까 이만 화 풀자 응?]


그리고 그 이후엔 까르륵 웃는 쿠리코의 목소리와 히지카타의 목소리, 그리고 옷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전에도 그렇고 지금 이 순간에도 히지카타가 쿠리코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말뿐이고 형식적이기만 한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나긋나긋하게 들리는 이 음성들은 정말로 히지카타가 쿠리코를 사랑하는 듯이 달콤하게 말하고 있었다. 히지카타씨 히지카타씨.. 토시로씨.. 하고 부르는 쿠리코의 음성에, 그리고 히지카타가 쿠리코의 이름을 부르는 그 자상한 목소리에 미칠듯한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니야! 내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아니.. 그럴 수도 있을까?...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지금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거다. 나는 듣고 있던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귀에서 뽑아서 내려놓고 창밖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를 자주 보기 싫다는 쿠리코의 말에 그래, 그렇게 할게라고 말할 수 있어? 네가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어? 네가 나를 감히 저 여자의 한 마디에 그렇게 할 수 있냐는 말이야.


내가 이런 더러운 기분을 히지카타와 쿠리코 때문에 느끼고 있다는 게 너무 화가 치밀어서 집에 들어와서는 멍한 기분으로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밤이었으니 어두웠지만 괜히 창밖에 화려하게 빛나는 야경조차 보고 싶지 않아서 커튼까지 다 쳐버렸다. 나를 찝찝하게 보냈으니 분명 연락이라도 해야 할 히지카타는 여전히 나에게 문자도 전화도 없이 나를 방치해 두고 있다. 참다가 참다가 전화를 했다. 처음의 전화도, 두 번째 전화도 받지 않아서 도청장치 이어폰을 끼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소고 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계속 전화 오는 걸 보면..]

[.. 나오라고 하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저녁에.. 아까도 왔다가 갔으면서..  싫어요! 가지 마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닐 거야. 본인도 지금 뭔가 생각을 하고서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아. 핸드폰 좀 줘. 응?]

[그렇다면 이런 저녁에 전화가 올 이유가 뭐가 있어요? 급하면 문자라도 넣어 놓지 않을까요? 분명 또 투정 부리려고 전화했을 거예요]

[... 아니.. 그래도.....]

[그럼 받아봐요]


쿠리코의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 후에 히지카타는 전화를 받았다.


[어.. 소고.. 무슨 일이야?]


떨떠름한 히지카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대로 끊어버렸다. 그러자 5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히지카타가 '소고,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 하고 달래려는 듯한 말투로 문자를 보내왔지만 전화를 하면서 들은 이 부부의 대화를 통해서 히지카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누나도 아니고, 나도 아닌 그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어, 와 있었네? 커튼 때문에 밖에서 보니까 불이 꺼져있어 보여서 아직도 안 온 줄 알았어"


그 녀석이 와서는 조금 기분이 좋지 않은 내 옆에 털썩 앉아서는 무엇이 좋은지 활달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커튼은 왜 쳐놨어?"

".. 그냥"

"좋다. 앞으로도 쳐놓고 있자"

".... 마음대로 해"

"오늘은 더 까칠하네?"

"늦었어. 잘 거야"


이 녀석의 대답도 듣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는 불을 신경질적으로 껐다. 어두운 거실에서 이 녀석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깔아놓은 침구에 누운 나를 보더니, 그럼 나도 자야지 뭐.. 하고는 씻는다면서 샤워를 하러 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쉽게 잠들지 않는 내 상황을 탓하며 도무지 알 수 없는 히지카타의 머릿속을 한참이나 고민할 때에, 카무이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비누 냄새를 풍기면서 내 옆의 침구에 풀썩 누웠다. 내가 잔다고 생각했는지 별말없이 핸드폰을 잠시 켜서 보다가 다시 누웠다. 그러다 문득, 히지카타는 지금 이 시간에 뭘 할까? 자고 있겠지? 오늘 내가 봤던 그 커다란 침대에서 같이... 자겠지? 같이.. 같이.. 같이... 키스할까? 아니다. 히지카타는 성욕 같은 것도 눈곱만큼도 없는 성인군자 새끼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설마 쿠리코와 함께 침대에서 뒹구는 그런 더러운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결혼을 했다고 모두가 섹스를 해? 그런 건 아니다.


"야, 자?"


내 말에 카무이는 내 쪽을 바라보며, 뭐야 아직 안 잤어? 하고 물었다.


"응. 잠이 안 와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 다른 사람들 말이야, 결혼하면 섹스할까?"

"하하, 뭔 개소리야 갑자기?"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 결혼을 한다고 전부다 섹스를 해?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나는"

"뭐.. 하기 싫으면 안 하겠지 뭐.. 그건 결혼한 두 사람들의 사정이니..."

"그렇지? 꼭 다 그런 건 아니지?"

"... 그렇겠지 뭐.."

"섹스하기 전에 키스 먼저 해?"

"하기 나름이겠지 뭐,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도대체 이런 걸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야?"

"섹스하면 좋을까? 좋아서 하는 거야? 자위하는 것보다 좋을까?"


내 말에 카무이는 또렷이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웃으면서, 하고 싶은 사람과 하면 분명 좋겠지. 하고 웃었다.


"하고 싶은 사람?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야?"

"싫은 사람과 살을 맞대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할 수도 있잖아"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

"카무이, 너는 좋아하는 사람과 해봤어?"

"해봤다고는 안 했는데"

"안 해봤어? 네 말투가 해봤다는 식으로 들려서"

"안 해봤다고도 안 했어"

"뭐야 재수 없어"


내 말에 카무이는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대답하기 싫은가 보네"

"아냐 이런 거 물어보는 게 너무 웃겨서 그래. 맞아 그런 게 궁금할 시기가 있지"

"... 어른인 척 대답하는 건 뭔데? 나 너랑 동갑이거든?"

"어쨌든 질문은 네가 나에게 했잖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너였으니까 너에게 물어본 거야.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물어봤을걸?"

"아하, 그러시구나"

"응. 그래서 말인데"

"응?"


나는 그 녀석의 눈앞 가까이에 바짝 다가가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 녀석의 입에 가볍게 입을 한번 맞추고 말했다.


"나랑 한번 해볼래?"

".... 응?"


약간 당황한 듯한 이 녀석의 행동이 더 재밌었던 것도 맞다.


"물론, 네 의사는 나와 관계없어"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어두워서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잠에 취했는지,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입에 닿는 이 녀석의 입술이 부드러워서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 맞다 전에 내가 이 녀석에게 염산을 뿌렸던 적도 있었지.. 하고 갑자기 과거의 일이 생각나면서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다. 이 녀석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이 집의 시끌벅적했던 추억의 정겨운 소음이 귀에 들리는 듯도 하였다. 카무이는 내가 반강제적으로 시도하는 키스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그 이후에는 내가 하는 데로 놔두었다가, 그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키스를 시도해왔다. 끈적한 혓바닥을 한참을 서로가 맞대고 휘저었다. 미지근하고 미끄덩한 이상한 감촉이 왜인지 나를 조금씩 흥분시키는 듯도 했다. 카무이가 내가 입고 있는 옷에 손을 대자 나도 질세라 이 녀석의 옷의 단추를 풀었다. 위에 올라타서 왜인지 급하게 이 녀석의 목을 핥으면서 탄탄한 가슴과 배를 손댈 때에 이 녀석은 왜인지 웃었다. 그리고는,


"너, 생각보다 훨씬 귀여운 면이 있다"


하고 웃겨 죽겠다는 듯이 말하고는 그와 동시에 홱 하고 이 녀석과 나의 위치가 바뀐다. 


"뭐야? 놔. 주도하는 건 나야"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그리고는 내 위에 올라타서는 목덜미를 핥아온다. 닿는 이 녀석의 머리카락이 간질간질해서 기분이 좋았다. 귀와 목을 살살 핥아오다가, 나도 모르게 뱉은 신음에 나를 빤히 보았다. 그 눈길이 새삼스럽게 너무 당혹스러워서, 급하게 입을 틀어막자 막고 있던 손을 억지로 자신의 깍지 껴 부드럽게 잡으며, 왜? 더 크게 내도 좋은데. 하고 말하며 하던 행동을 계속했다. 나도 저항을 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복잡했던 머리가 새하얗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점점 내려가서는, 가슴 부근을 혀로 핥다가 나에게 물었다.


"하아.. 오키타, 근데.. 계속해도 괜찮아?"

".... 싫다고 하면.. 하아.. 안 할 것처럼 이야기하네?"

"왜 그렇게 생각해?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야"


의외의 대답을 던지고는 정말로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을 것처럼 서로 윗옷을 벗고서 급하게 핥아대던 그 행동을 멈추고, 얌전히 내 위에 올라타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자"

"좋다는 거야?"

"계속하자"


그러자 다시 내 몸에 입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만졌다. 분명히 내가 온전한 맨정신이었다면 계속하자고 말할 리도 없을뿐더러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만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나는 맨 정신이 아니었다. 술을 마신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투른지 능숙한지 파악도 되지 않는 이 녀석의 애무가 싫지 않았다. 되려 좋았다... 



".....으읏..... 하, 아아,,ㅅ.... 아... 아"


거의 비명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내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그와 동반해서 카무이가 나의 몸에 접합시키고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 부분에서도 질척이는 기분 나쁜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뜨거운 그 부분은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지만 조금 멍한 상태여서 그런지 지금 나에게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처음에 그 녀석이 자신의 것을 꺼내어 내 엉덩이에 가져다 댈 때는 조금은, 아주 약간은 무섭기도 했었지만 흉폭한 그 부분과는 다르게 나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생각보다 부드러웠으므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 그냥 가만히 누워 있는 게 편하네 하고 꽤나 수동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낮은 신음을 토하고서 내 배에 정액을 뚝뚝 떨어트리던 이 녀석은 나를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 싫어?"


내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을까? 대답을 하려는 찰나, 카무이는 나의 것을 손으로 잡고선 혀로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 괜찮....앗.... 야.. 그런거 아니... 아아..ㅅ..."


따뜻한 입안. 그 미지근한 온도에 내 몸 안의 모든 열이 아랫배로 끓어 뭉치고, 이 녀석이 입안에 담고 있는 내 몸의 일부에 모든 신경이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일시적으로 머리가 띠잉 하고 울린다. 아, 아아아.. 조.. 좋아.. 나도 모르게 작게 내뱉은 작은 한마디, 포자가 톡 하고 터지듯 흩뿌린 하얀 정액.. 나를 핥던 그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하얀 액체를 입 근처에 살짝 묻히고는 잔뜩 상기되어 숨을 고르는 내 얼굴을 보며 씨익 웃는다. 내가 미쳤을까.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일이 끝나고 난 뒤에도 카무이는 나를 끌어안고서 목덜미에, 어깨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이 새끼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일단 나는 너무나 지쳐있었고 몇 번이나 그만해, 하지마 하고 밀쳐내었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어서 내버려 두었다. 이런 게 섹스구나. 하고 알게 되자 더욱더, 히지카타는 그 여자와 잤을까? 정말로 했을까? 이렇게? 하는 의구심이 갑작스럽게 몰아쳐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온갖 매체들을 통해 알고 있는 섹스라는 개념보다, 실제로 경험해 본 것은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히지카타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동시에, 나 지금 이 새끼랑 뭐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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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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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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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았다. 기껏 찾아낸 그 녀석을 찾았고, 다시 오겠다는 말까지 들었기에 내가 취하려는 것을 거의 다 손에 넣은 포만감에 한껏 여유가 있었다. 오키타가 급하게 뛰어나가고 나서 슬슬 하루사메로 갔을 때 아부토는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왜 이렇게 들떠있어?"

"내가?"

"그래 보이는데? 뭐, 아니면 말고. 혹시 사고라도 친 건가 해서 물어보는 거야. 밤사이 조용한 걸 보니 별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넌 내 걱정 밖엔 안 하는구나?"

"그니까 좀 덜어주라 제발"

"어머? 7번대 꼬맹이는 또 지각이신가 봐"

카다는 나와 아부토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어서는 우리를 쳐다보곤 웃으며 말했다. 카다와 나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묘한 심리로 우린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희미하지만 보다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현재 조직 안에서 날뛰고 싶지는 않기에 가급적이면 카다와 마주치는 것을 꺼리는 나와 달리 카다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나를 자극하려 다가왔다. 기세등등한 살의라기보다는 재밌게 가지고 놀 장난감을 찾은 듯한 객끼였다. 카다를 보고 얌전히 인사를 하는 아부토의 태도도 나를 조금은 열받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녀가 스스로 자멸해서 누구보다 추악하게 망가지는 것이지만, 그럴 일이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조금은 짜증 나는 점이지만.

무시하고 지나가는 나를 보고는 카다는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저런 노망난 노처녀와 놀아줄 정도로 착실하고 한가한 꼬맹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내 손에 피를 묻히기에도 부끄러운 육신이기에 집착하며 쫓고 싶지도 않은 그런 애매한 여자였다.

꼭 내 손으로 치지 않아도 이 여자를 치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재밌고 쉬운 것은 하루사메의 법을 어기게 만들어서 이 범죄조직의 배반자로 만들어 모두에게 쫓기게 하는 것, 조금 어려운 다른 방법은 공권력을 이용해서 이 여자를 잡아넣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의 경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공권력과 접촉하려면 우리도 적당히 사려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방법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루사메는 모두가 적당한 범죄를 가지고 있기에 그런 일에 대해서 서로를 딱히 협박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게 어찌 보면 관례 같은 법이었지만 사실 모두가 뒤에서는 다른 이들의 범죄를 증명할 자료를 숨겨가지고 있었다. 그 자료가 있어야 서로가 안심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부토가 혹시 모르니 이런 자료는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좋다며,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 나에게 어때? 든든하지? 하고 나에게 씨익 웃어 보이던 얼굴이 갑자기 다시 떠오른다.




무시하는 나와 달리 붙잡힌 아부토는 카다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둘이 속닥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부토는 그런 카다와의 대화를 신경 쓰는 것도, 자신의 일도 바빴기 때문에 나에게 평소처럼 집요하게 신경을 쏟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묘하게 들떠서 평소라면 예민하게 행동했을 사건도 웃으면서 넘겼다. 아부토가 바쁘지 않았다면 나의 이상한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알지 못했다. 이번에 나의 감은 정확하다.


이번에도 몰래 빠져나와서 그 녀석이 있을 집으로 향하던 도중, 어느 허름한 술집도 아닌 어떤 편의점 앞의 탁자에 홀로 앉아서 술을 마시는 익숙한 제복의 그 녀석을 발견했다.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인가 해서 주위를 지켜보아도 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누구와 있다는 것이 딱히 나와 상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술 먹는 거야?"

다가가서 묻자 이미 술을 거하게 마신 후여서 그런지 풀린 눈으로 조금 놀란 듯이 나를 보고는 뭐야, 너였냐.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먹을 거면 나 부르지"

하고 이야기를 하며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 널 왜 불러?"

"같이 먹으면 좋잖아"

"혼자 먹고 싶은 날이야. 꺼져"

"아 그래? 그럼 혼자 마셔. 나 앞에서 가만히 있을게"

술을 한잔 따라 주면서 말했다. 풀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행동이 우스웠다.

"뭐래 미친놈이"

한 입에 술잔을 털어 넣으면서도 딱히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그저 다 비운 술잔에 말없이 조용히 술만 따라주었다. 그렇게 있기를 두어 시간 후, 결국 취해서 싸구려 탁자에 쓰러진 이 녀석을 엎고 가야 했다.

"야 정신 차려봐"

술기운에 정신이 없는지 내 목을 꽈악 끌어안으면서 그 와중에 빨리 가.. 하고는 작은 욕설과 함께 중얼거렸다.

비워낸 술잔에 계속해서 술을 따른 것은 나였으니 이렇게 취해서 딱히 짜증이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 진짜 짜증 나는 새끼야.."

"한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니고 뭐, 익숙하네"
 
"... 물론 내가아... 너에게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마안,... 네가 그렇게 사라질 줄은 잘 몰랐거드은......."

"......응?"

"아..., 몰라, 너 역시 진짜 싫어"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이 새끼야"

"... 나를 찾았었어?"

"항상 옆에 있었으니까..... 조금... 아 몰라, 열받게 이딴 거 물어보지 마"

"...."

"뭐해애  빨리 가아!! 나 집 가서 잘 거야!"

꽉 끌어안은 목을 보채며 조여왔기 때문에 알겠다고 말하며 걸음을 마저 옮겼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식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 외로 이 녀석은 나를 조금은 기대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구심과 동시에 어릴 적 같이 보던 벽에 붙은 야광 별들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 기다렸을까?

아침에 나간 그대로 펼쳐져 있는 침구에 이 녀석을 눕혀놓고서 한참 옆에 앉아서는 쳐다보기만 했다.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옆에 누워서 한참 머릿속의 정황을 정리하다가, 혹시 이 녀석은 내가 자신을 이상한 방식으로나마 사랑한다고 믿었을까? 그래서 기다렸을까? 혹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에 어린애처럼 콩닥이며 설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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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많은 사람, 혹은 약간의 신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전부 귀신같아서 아무리 감이 좋은 나라고 한들 피하려고 노력해도 피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원장을 요시와라를 나가자마자 그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그 골목의 정면에서 딱 마주쳐버렸으니...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어릴 적 봤던 그 인상의 원장은 변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조금 하얗게 변하고 얼굴에 주름이 약간 늘었을 뿐. 세월이 아무리 지났다지만,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봤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 시선을 돌리며 피하려는 나를 알아보고서는 잽싸게 내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잘 살고 있었구나. 연락이 아예 끊겨서 걱정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주먹에 쥐고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이 원장 앞에서 나는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아부토가 옆에 있었다면 조금 허세를 부렸을지도 모르나, 마침 아부토도 없고 다른 부하도 없는 이런 기막힌 타이밍..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이 원장 앞에 가서 못 이기는 척 나름 건방지게 삐딱한 목례를 했다. 차분하게 묵직한 그 분위기도 여전했고 그 위압감도 여전했다. 이런 하찮은 여자 따위 내가 지금까지 잡아먹은 다른 어느 사람들과도 다르지 않겠지만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만으로 내가 감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나를 압도하는.. 불편한 사람이다.

"바쁜 것 같지는 않은데 잠깐 이야기라도 하지 않을래? 이름은 아직도 카무이를 쓰는 거니?"

고개를 끄덕이자 반갑네 하고 중얼거리고는 살짝 웃어 보였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차라도 한 잔 마시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순순히 뒤따랐다.

원장이 안내한 카페는 낮이지만 어둡고 낡은 목제로 지어서 걸을 때마다 둔탁한 나무의 마찰음이 기분 나쁘지 않게 울리는 곳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할 골목에 위치한,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소박한 모습이 꼭 원장과 함께 있었던 고아원과 많이 닮아서 이 사람은 이런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마지막에 갔던 가족들과는 어떻게 지내니?"
".... 지금은 따로 지내고 있어요"
"그렇구나"

점원이 커피 두 잔을 내려다 놓으려 오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점원이 자리를 뜨자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커피 맛이 괜찮더라. 네가 어릴 적 모습밖엔 생각이 안 나서 그런 것인지... 이렇게 너와 커피 같은 것을 마실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사실 너를 다시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
"아까 우산을 쓰고 있던데. 이유라도 있는 거야?"
"... 햇빛을 싫어해서요"
".. 그렇다면 더욱 이곳에 오길 잘했네. 햇빛도 없고"

그리고 원장은 손목에 찬 싸구려 손목시계를 몇 번이나 자꾸 확인했다.

"..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럼 저도 이만.."
"일? 아니야.. 실은.. 널 만나서 카페로 오는 도중에 네 동생을 불렀어"
"동생이요?"
"카구라.. 생각나지?"
 "아...."

동생?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구나. 실종되어서 죽은 줄만 알았는데.. 살아있었어...! 얼마 전에 고아원을 찾아왔었단다. 어떻게 알았는지 네가 요시와라의 부근에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던데? 카구라는 너를 찾고 있었어"

사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서 누구인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침묵이 너무 놀란 탓에 나오지 않는 듯이 보였는지 원장은 뿌듯해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둘을 만나게 하는 매개체가 내가 되어서 정말 기쁘구나."
"아..... 네... 저도 만나고 싶었어요."
"카구라가 오면 내가 자리를 비켜줄게. 둘이 이야기 나누렴. 종종 연락도 하고.. 뭐.. 고아원에 있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으니 강요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들이 어디에 가서든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커다란 바람이란다"

원장은 어째서인지 어울리지 않게 주름진 눈에 눈물까지 방울방울 맺혀 자기 혼자만의 감정에 취해서는 눈물을 보였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원장은 내가 떠나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를 궁금해했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듣고 싶어 했지만 나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원장도 그 이후부턴 거의 묻지 않았다. 내가 여러 번 입양된 만큼 사람들의 눈에 내가 첫인상은 꽤나 좋은 편인 것 같다며 칭찬을 하기도 하고 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며 내가 느끼기에 조금 가식적으로 와 닿는 입발린 소리도 했다.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며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에 뛰어왔는지 헥헥대는 숨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문소리만 들어도 요란스러운 어떤 여자아이가 조용한 카페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려보며 사람을 찾는 듯이 왔다 갔다 하다가 발걸음이 멎은 곳은 나와 원장의 테이블이었다. 그리고는 처음 들어올 때 왈가닥한 모습이 조금 진정되었는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나와 원장을 보고는 갑자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이내 엉엉 울면서 정말 오빠가 맞아? 오빠가 맞는 거야? 하고는 소리 내어서 계속 울었다.

원장은 이 여자아이가 오자 눈물을 닦으라며 조금 달래주고는 둘이 이야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원장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내 앞에 앉아선 계속 말없이 훌쩍이던 카구라는 이내 진정되었는지 눈물을 닦고선 입을 열었다.

"오빠, 나 기억하냐 해?"
"당연하지"
"다행이다.. 내가 오빠를 혹시나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많이 불안했었다 해.. 다행이다... 다행이야..."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어. 반가워. 어떻게 살고 있어?"

어릴 적의 감정은 둘째치고, 동생이 반가웠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보다 진한 게 피라고, 내가 봐도 나와 비슷한 산호색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파란 눈동자가 이상하게 나를 동요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상한 동료의식 이상의 감정을 작게나마 느꼈다.

"나는 해결사 사무실이라는 곳에 있다 해.. 이곳에서 해결사라는 긴쨩을 우연히 만났고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어"
"그 이상한 말투는 뭐니?"
"... 전에 중국 쪽 사람들하고 일했던 적도 있거든 그때 배운 말투가..."
"됐고, 그나저나 대단하더라. 내가 요시와라에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고 말이야"
"해결사 사무실을 무시하지 마라 해! 인상착의뿐으로 알아낸 것이지만.. 뭐 오빠인 줄 알고 찾았지만 아니었던 경우도 많았다해.. 비슷해서 가보면 오빠가 아니었거든"
"... 흐음"
"오빠, 어떻게 살고 있었냐 해?"
"..."
"요시와라에서 일하고 있는 거냐 해?"
"..."
"이름은 그대로 카무이라는 이름을 쓰는 건 맞냐 해?"
"..."
"근데 왜, 오빠 너의 정보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는 거냐 해?"
"..."
"역시, 떳떳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네"
"하하, 너야말로 사람 뒷 조사하는 일을 하는 거면 떳떳하고 당당한 건 아니지 않니?"
".. 우리는 나쁜 일로는 절대로 사람의 뒷조사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해! 게다가 긴쨩은 나를 구해준 은인이다 해!!"
"긴쨩?"
"응! 오빠! 이제 우리 드디어 만났으니까.. 같이 살 수 있다 해! 긴쨩도 오빠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나를 보면서 오빠를 궁금해했다 해! 꼭 만나고 싶다고 했어! 같이 살자!"
"내가 너랑? 왜?"

내 대답에 생기가 잔뜩 넘쳐서 말하던 카구라는 갑자기 표정이 확 굳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어릴 적부터.. 오빠와 내가 고아원이 아닌 밖에서 함께 사는 게 내 꿈이었다 해.. 그리고 그건 아직도 유효한 내 꿈이다 해!"
"네 꿈과 내 꿈은 다른 거잖아. 난 어릴 적부터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구나?"

확실히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 한 것은 어릴 적에 카구라는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에 곧바로 울음을 터트릴 얼굴을 했지만, 지금 눈앞의 카구라는 새삼 냉정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시피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옅은 여유마저 느껴지는 그 표정을 보니 아부토가 저런 표정의 나를 보면 이렇게 한대 날려버리고 싶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 앞에 철부지가 이렇게 변한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나를 찾은 적도 없고, 이렇게 만난 내가 반갑지도 않고, 나와 연락도 하고 싶지 않은 거냐 해?"
"그건 아니야. 너무 반갑고 기뻐. 종종 연락하자"
"어떻게 지내고 있어?"
"친구랑 같이 살고 있어"
"그럼... 나 오빠랑 같이 살면 안 되냐 해...?"
"당연히 곤란하지. 이러다가 네가 내 친구를 죽여버릴지도 모르잖아"

실제로 카구라는 겉 보기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 순진하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다. 커다란 파란 눈으로 같이 살고 있다는 그 남자에게 어떻게 자신을 데려가라고 마법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도 아마 감당 안 되는 이 왈가닥 여자아이 한 명에게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오빠, 알고 있어? 조심하도록 해. 나, 경찰하고 연이 닿아있다 해"
"우연이네? 나도야"
"... 에이... 뭐야 조금은 협박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끄떡없다니"

카구라는 조금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만나자마자 멱살이 잡히는 바보 오빠는 아니니까"
"흠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내 기억에 오빠는 항상 바보였는데"
"난 바빠서 가볼게. 잘 있다는 걸 봐서 이 오빠는 정말로 기뻐"
"나는 뭔가 슬픈데..... 오빠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해?"
"요시와라로 와. 너무 자주 오지는 말고. 난 바쁘니까. 그럼 먼저 간다"

먼저 일어나 걸어가는 내 뒤에 대고 카구라는 작게 말했다. 역시.. 오빠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그런 오빠가 너무 좋아...

너무 비슷하기에 우리는 조금 떨어지는 게 좋다. 카구라는 마녀를 화형 시키는 제도가 지금도 남아있었다면 가장 먼저 처형당 해야 할 마녀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뛰어난 마녀라서 처형단을 데리고 놀며 산 채로 집어삼켜도 아무도 마녀라고 생각지 못하는 그런 어마어마한..  그러니 저런 마녀는 되도록이면 조금 멀리 두고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뼈를 오독오독 소리 내며 씹을 때에 노리는 것이 좋다. 그것이 마녀를 사냥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


 







-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는 이미 너무 오래되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지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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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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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 저....."


얼간이처럼 말을 더듬었다. 내 눈앞에 이 녀석은 나를 보더니 뜬금없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뭐해, 들어와 하고 말하고는 반쯤 열고 있던 물을 더 활짝 열었다. 나는 혹여나 문이 닫힐까 무서워 문을 붙잡고는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마지막에 비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건조한 공기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오키타는 보고 있던 중인 것으로 보이는 TV 음량을 높이고서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꺼내며 나에게 너도 마실래? 하고 물었다. 나는 어... 하고 또다시 병신같이 대답을 했다.


오키타는 맥주 한 캔을 내 앞에 놔주고서 소파에 앉아서는 맥주 한 캔을 따서 홀짝홀짝 마셨다. 분명히 내가 전에 봤던 사람이 이 녀석임은 틀림없었다. 나는 앉아서 맥주 캔 조차 뜯지 않은 채로 홀린 듯이 멍청하게 이 녀석을 쳐다보았다. 그는 나 따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이 아무 말을 걸지 않고 한참 TV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원래도 좀 모자라긴 했지만 더 얼간이가 돼버린 거야?"


TV를 향하고 있던 적갈색 눈동자가 스르륵 나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진다.


"... 응?"


"왜 그렇게 쳐다봐?"


"아, 아니..."


"안 먹을 거면 다시 넣어놓던가"


"아냐, 마실 거야"


그제야 나는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너무 급하게 마셔서인지 얼굴이 한 번에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자고 갈 거야?"


뜬금없이 왜 저런 걸 묻나 해서 시간을 보자 시곗바늘은 어느덧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오키타는 거실에 침구를 깔다가 나를 한번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난 지금 잘 건데"


사실 아무런 계획 없이 훌쩍 왔다가 이 녀석을 만나버렸고, 이 집에 들어와서 같이 이렇게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곧바로 응! 자고 갈래! 하고 대답했다.

내 말에 그는 하나를 더 가지고 와서는 저가 자려고 생각한 곳 옆에 하나를 더 깔아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침대에서 잘 거면 그렇게 하던가, 하고 말했다. 나 역시 거실에서 잘 거라고 말하고는 베개를 꼭 껴안았다. 


불을 끄자 TV 화면만이 알록달록하게 방을 비추었다. 오키타는 TV소리를 줄이고서 깔아놓은 침구에 누웠다. 나도 옆에 깔아놓은 침구에 앉아서 끄지 않는 티비를 얼핏 보다가 물었다.


"끌까?"


"아니, 놔둬"


내가 들고 있던 리모콘을 내려놓자 갑자기 이 녀석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너 진짜 이상해졌구나? 왜 이렇게 고분고분 해졌어?"


"... 그런 거 아닌데"


"낯가리는 거야? 네가 이러니까 내가 다 어색하다"


그리고는 내가 웃겼는지 조용히 웃었다. 여전히 웃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전에 이 녀석을 떠나던 당시에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떠났을까? 어떻게 잊었다고 감히 단정 지을 수 있었을까? 어둑어둑한 거실에는 소리 낮춘 TV의 알록달록한 불빛만이 형형색색으로 우리를 비추고 있다. 


"저... 오키타"


"왜"


"안 궁금해?"


"뭐가?"


"보통은 어떻게 지냈냐, 어딜 갔었냐 이런 거 물어보지 않아?"


"넌 궁금해?"


"응"


"이렇게 다시 본 거면 어쨌든 잘 지내고 있었던 거잖아?"


"뭐, 그건 그렇네"


"너는 경찰이 된 거야?"


"어쩌다 보니... 어떻게 알았어?"


"아, 저기에 옷 걸려있길래.. 근데, 너 공부 못하지 않았어?"


"새끼야 너보다 잘했거든?"


내 말에 약간 발끈했는지 어이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전엔 더 발끈해서 화냈던 거 같은데. 이젠 좀 덜하네?"


"닥쳐. 넌 여전하네, 웃으면서 사람 승질 슬슬 긁는 거"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었다. 화면을 마주 보고 누워있는 그의 눈동자에 화면의 빛이 비춰서 노랑색 분홍색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으로 계속 바뀌며 느리게, 혹은 빠르게 빛을 바꾸는 홀로그램처럼 빛을 발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너무 예뻐서 이상하기까지 하고 심지어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속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서 다시금 네가 내 눈에 있는 게 맞을까? 단순한 환각, 혹은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무의식적으로 나도 모르게 눈앞의 이 녀석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만졌다. 손끝이 부드러웠다.


"뭐야"


오키타는 내 손을 어이없다는 듯이 툭 쳐냈다. 그래서 나도 순간 아차 하는 심정으로 쳐내진 손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 아니 그냥"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눈빛을 보고 나는 곧바로 이 녀석에게 등을 보이며 몸을 홱 돌렸다. 잠시의 정적 후에 그가 말했다.


"나 아침에 되게 못 일어나"


".. 알아"


아침에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그 모습이 뜬금없이 생각 날 때가 있었는데 어떻게 잊겠어?


"... 그니까 아침에 갈 거면 문 잘 닫고 가. 이불이랑 저 안쪽에 넣고"


그 말을 하고서는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뒤돌아보자 이 녀석도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누워 있었다. 머리카락이 살짝 덮고 있는 목덜미, 그리고 이어지는 어깨와 등을 보자 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꼭 껴안고 싶었다. 그러나 아까 누워서 마주 보고 웃었던 것이 너무 좋아서, 혹여 이 녀석이 나의 이런 돌발행동에 잔뜩 경계 태세를 취하고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본다면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시도를 할 용기는 없었다.


조용히 천장을 봤다.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 녀석의 체취에 대한 기억이 내 살갗 안쪽에 깊숙이 남아 있었는지 희미하게 도는 이 향이 그립다 못해 평온했다. 드디어 내 자리에 다시 온 것 같다는 안정감 마저 들었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문득 시간이 궁금해져 핸드폰을 꺼내어 봤다. 아부토에게 전화가 3통, 그리고 문자가 몇 통 와있었다.


[편의점 간 거야? 그럼 나 음료수 좀 사다 줘]

[이 녀석아 어디 갔어]

[사고 친 거야? 평소엔 사고 쳐도 당당하게 연락도 잘하는 새끼가 왜 이번엔 잠수야?]

[?너 오늘 안 오는 거야? 엉?]

[새끼야 안 올 거면 말이라도 하라고]


그 문자가 마지막 문자였는데 시간을 보자 3분 전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답장을 했다.


[응 안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동이 요란하게 울리며 전화가 왔다. 고요한 우리 틈의 진동이 너무 시끄럽게 들려서 바로 진동을 차단하고서 혹시나 오키타 녀석이 깨지는 않았을까 한번 돌아봤다. 그러나 쌔액쌔액 하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곤히 자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고 전화를 받아 들었다.


"응"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하게 받아?]


"시간이 늦었잖아"


[뭔 개소리, 늦은 거랑 뭔 상관이야? 너 어디야? 어딘데 이렇게 목소리를 작게 하고 받아?]


"할 말만 해. 잔소리는 그만하고"


[아니, 너 어디에서 뭘 하나 해서..]


"음.. 별일없어. 내가 내일 연락할게"


아부토는 무어라고 더 이야기를 하려 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대로 끊어버렸다.


아부토와의 전화를 끊고나자 갑자기 내가 전에 있었던 집에 지금 와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옆에 그렇게 찾아다니던 이 녀석이 다시 누워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어쩔 줄 모르는 상태로 이 녀석 옆에 누워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왜 이 녀석은 나를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도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내가 저에게 했던 행동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알고 있다면 나를 이렇게 집에 들이지도, 이렇게 옆에서 재우지도 않았을 텐데. 기억하고 있었다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목을 조르려 달려들어도 모자랄 녀석이기도 하고.. 아니면 혹시 나의 방심하는 틈을 노리는 걸까 생각을 해봤지만... 옆에서 곤히 자는 이 녀석을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뭐, 이렇게 나를 방심시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깊이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 녀석이 옛날에 비해 비교적 따뜻하고, 생각보다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래서 나는 이 녀석이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갑자기 그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내 눈에 띄었을 뿐이다. 높이 떠 있는 푸른 달은 우리 둘의 얼굴 위에 하얀 빛을 비추며 우리를 내려다본다. 투명한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가벼운 마찰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오늘의 달빛은 너무나 눈이 부셔서 내 눈을 멀게 만들고 방금 마셨던 맥주 한 모금은 내 심장을 미친 듯이 뛰게 만들어서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동굴의 미로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이 아득했다....












-

강하게 쏟아지는 오렌지빛 햇살 때문에 아침 일찍 잠에서 깨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버리고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카무이 녀석은 아직도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뭐.. 당연히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나 히지카타는 오지 않았다. 핸드폰을 켜볼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는, 부재중 전화 0통, 부재중 문자 0통, 00시 00분이라고 떠 있는 꽤나 열받는 화면을 마주 보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냥 던져두었다. 무단결근이라니... 지각은 밥 먹듯이 했지만 아무런 말없이 모습을 비추지 않은 적은 없었다. 뭐 히지카타와 같이 살고 있었으니 그런 일은 마음을 먹어도 가능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오늘 처음으로 반항을 했다.


잠이 더 이상 오지는 않았지만 일어나기가 귀찮아서 누워 뒤척이고 있을 때, 그 녀석도 일어났는지 눈을 비비면서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시계를 보고 나를 한번 보더니 물었다. 


".. 안가?"


".. 응"


"와, 정말?"


"... 너는 안가?"


"응!"


하고 대답하더니 갑자기 나를 와락 껴안았다.


"뭐 하는 거야! 떨어져"


품 한가운데에 한가득 들어온 이 새끼 머리를 떨어트리려고 밀쳐내자 나를 안고 있던 손을 얌전히 놓고서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전히 나 싫어하나 보네?"


"뜬금없이 와락 안기는데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어? "


"왜? 난 네가 나한테 안겼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또라이야"


"맞아.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잖아"


"그래.. 그래서 나 역시 한번 싫어한 건 쉽게 좋아하지 않아"


"나도 그래. 한 번 좋아한 건 다시 봐도 좋거든"


"... 개소리 좀 그만할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혼자 있었다면 시체처럼 하루 종일 누워서 시계와 꺼져 있는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보며 시곗바늘 소리만 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좋든 싫든 이 녀석이 있어서 이상한 말장난이라도 하면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내가 히지카타를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 이 녀석이 여기에 찾아와 준 것이 우연이든 뭐든 나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이 녀석은 뭘 좀 먹자면서 자연스럽게 나에게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라면이나 먹을까? 하고 말하자 알았다고 말하고서 사러 갔다 오겠다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저 새끼가 나가자마자 문득, 나 지금 저 새끼랑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은 그다지 사이가 좋은 사이도 아닌 데다가 내가 전에 행한 일 때문에 저 녀석도 나에게 그렇게 좋은 감정 따윈 하나도 없을 텐데... 잠시 후, 다녀왔다며 문을 열어달라는 그 녀석의 말에 문을 열어주면서, 아까는 이 녀석이 여기에 와준 게 그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 이 상황이 너무나 어색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 녀석은 뻔뻔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스럽게, 마치 계속 우리 둘이 이곳에 있었던 것 마냥 들어오면서,


"비밀번호 알려줘. 불편하잖아"


하고 투덜거렸다. 설거지는 아무래도 귀찮아서 컵라면을 샀다면서 장 봐온 봉투를 내려놓는 그 녀석을 넋빠진 사람처럼 쳐다보다가 물었다.


"너... 안가?"


"어딜?"


"... 아니, 저기... 너 여기에 계속 있을 생각이야?"


내 말에 이 녀석이 되려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 아니, 나가라는 뜻이 아니라... 아니다, 우선...."


나는 이 녀석이 들고 온 컵라면들을 잠시 쳐다보다가 물을 끓였다. 끓은 물을 붓고서, 식탁에 앉아 라면이 익기를 가만히 기다리다가 물었다.


"너 어디에 누구랑 있어?"


"어젠 궁금하지 않다더니."


내 물음에 이 녀석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 지금 궁금해졌어. 대답 안 할 거야?"


"다 익은 거 같은데 너도 어서 먹어"


말 돌리는 건가?

컵라면 뚜껑을 열고 이 녀석을 수상하게 쳐다보다가 젓가락으로 라면을 뒤적거렸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배가 부를 정도로 맛있게 처먹었다. 


"나, 친구랑 같이 지내고 있어"


한참 얼굴을 컵라면 그릇에 박고서 한참 먹다가 그가 말했다.


"친구?"


"응"


"흠.. 그래? 난 또다시 돌아간 줄 알았어"


"어디로?"


고아원.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아냐, 헛 나왔어. 뭐하고 지내고 있는지 물어봐도 돼?"


"응. 근데 뭐 특별한 건 없어. 친구의 일을 도와주고 있어"


"친구의 일?"


"응"


"너 친구도 있었구나. 놀랍네. 근데 안 가도 괜찮아?"


"응 오늘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너는?"


"아.. 나는...."


하고 우물쭈물거리자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 없는지 별 신경 쓰지 않고 제 눈앞에 있는 라면을 마저 먹었다.


"이거, 네 핸드폰이지? 왜 꺼놨어?"


그는 내 핸드폰을 들고는 내가 무어라고 할 틈도 없이 전원 버튼을 꾸욱 눌렀다. 아, 하지 마! 하고 말하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핸드폰은 말간 빛을 발하며 화면을 드러냈다. 그 녀석이 볼 틈도 없이 빼앗아든 핸드폰 화면에는 정말로 부재중 전화 0통, 부재중 문자 0통 하고 고요하게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걸 보자마자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연락 따윈 안 왔을 거야, 안 왔을 거야, 하고 생각했던 것은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나만의 자기 위로 법이었다. 그래도, 설마 연락 한 통이 없겠어? 당연히 히지카타 그 새끼가 난리를 쳤겠지, 하고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나 보다. 어이없음과 동시에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왜?"


내 행동에 놀랐는지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 나한테 일일이 신경 쓰지 말고 먹던 거나 마저 처먹어"


하고 말하는 찰나, 핸드폰의 문자 도착음이 울렸다. 허겁지겁 내려놓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확인해보자,


[ㅇㅇ마트에서 현재 00일까지 20% 대박 세일! 놓치지 마세요!]


아, 씨발


두 젓가락 정도 집어먹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급속하게 히지카타에게 모든 신경을 빼앗겼다. 지금이 12시 반, 12시 반이면 다들 모여서 식당에서 식사를 할 시간이다. 식당 밥이 맛이 없으면 나가서 다른 걸 사 먹자고 대원들이 이야기하고 있을 거고....  아니 근데, 히지카타도 히지카타지만 1번대 이 새끼들도 어느 한 명 연락하는 새끼가 없어? 아니.. 아니지 이 녀석들 입장에선 더 좋으려나..


젓가락만 쪽쪽 빨고 있자 이 녀석이 나를 보더니 물었다.


"왜 안 먹어?"


"다 먹었어"


"아예 그대로인데?"


"먹기 싫어"


"그럼 나 먹어도 돼?"


"그러든가"


내 말에 이 녀석은 내가 먹다만 컵라면을 가져가서 다시 맛있게 먹어댔다. 나는 지금쯤 히지카타와 다른 둔영의 새끼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나 혼자만의 공상을 하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한숨을 푹 쉬고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나를 옆에서 한참 말없이 쳐다보던 카무이는 뜬금없이 막대사탕을 하나 내밀었다.


"뭐야?"


"나 먹으려고 샀는데 특별히 너 줄게"


".... 놀리는 거야?"


"아냐, 기분이 계속 안 좋아 보여서"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왜 이렇게 착한 척이야? 나는 한참 이 녀석을 노려보다가 막대사탕을 낚아채서는 비닐을 거칠게 잡아 뜯고서 입에 넣었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단 맛의 바닐라 맛 사탕이었다.


그렇게 둔영이 끝날 시간이 됐다. 연락을 해온다면 지금 쯤이면 할 때도 됐는데.. 아니 설마 아예 날 잊은 거야? 다른 번대 누구라도 말없이 결석을 한다면 바로바로 알아채고 찾아 나서는 새끼가 어떻게 나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가 있어? 너 진짜 미친 거냐?


결국 어떻게 그날 하루가 지났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늘 내가 출근하는 시간(보통 9시 출근이지만 나는 항상 10시 반 정도 출근을 했다.) 에 맞추어 나가기 위해 샤워를 했다. 준비를 하는 나를 보고 카무이는 뭐야, 휴가는 벌써 끝인 거야? 하고 물었다.


"뭐, 사실 휴가가 아니었거든."


"흠.. 그럼 가기 전에 집 비밀번호 알려줘"


"0505. 근데, 나 진짜 별생각 없이 물어보는 건데. 다시 이 집에 살기 위해서 온 거야?"


"음.... 실은 아무 생각 없이 왔어. 그리고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네가 있잖아. 그래서 살고 싶어졌어"


"아, 그래? 좋을 대로 해"


"너도 다시 오는 거지?"


"음, 아마? 여튼 난 간다"


나는 옷을 급하게 입고 서둘러 밖을 나섰다. 저 녀석이 여기에 있든지 말든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사실 내가 다시 여기로 와야겠다 라던가 아니면 오지 않아야겠다 라든가.. 뭐 그런 생각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가면서 끊임없이, 히지카타는 나를 마주 보고 도대체 뭐라고 할까, 나는 무어라고 해야 할까에 대해서만 한참 고민했다. 


둔영에 도착하자마자 운 없게도 히지카타를 바로 만나버렸다. 멈칫 한 나와 다르게 히지카타는 나를 보곤 웃으면서, 땡땡이는 재밌었냐? 하고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니까 네가 없더라, 다들 아직까지 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했고. 그 말을 듣는데 왠지 다음날 네가 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머리 식히러 어디라도 간 것 같다고 일부러 1번대에게도 내일 네가 오지 않아도 연락은 하지 말아두라고 했거든."


"아.."


화가 날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나는 히지카타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 풀려버렸다. 게다가 조금은 나를 생각해주고 이해해주는 듯한 이 모습에 바보같이 화가 전부다 풀렸다. 


"쉬고 싶을 때 자꾸 연락하면 짜증 나잖아. 너 특히 내 잔소리 듣는 거 죽기보다 싫어하고"


"... 그럼 문자라도 보내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히지카타는 못 들었는지 되물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는 먼저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방금 전까지 초조하고 불안했던 일 따윈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안정을 찾았다. 


히지카타는 나를 불러서는 순찰을 같이 가자고 말했고, 웬일인지 순찰 도중에 간식거리라도 사주고 먼저 쉬었다 가자고 말도 하고.. 시답지 않은 농담도 건넸다. 평소의 나였다면 괜한 신경질을 낼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나도 웃으면서 다 받아주었다. 일단 나는 이 녀석의 옆이 무엇보다 익숙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이 녀석이 결혼을 했고, 그래서 혹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를 절대로 사랑하진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거 봐.. 내 옆에서 이렇게 자상하고 친절하잖아.



히지카타는 곧바로 집에 가진 않았다.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늦게까지 서류에 쌓여서 야근을 했다. 히지카타는 할 일이 없는데도 집무실에서 얼쩡거리는 나를 보곤 들어가서 쉬어, 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여기까지는 같이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다름이 없었다. 그 안정감에 도취되어 있을 때.. 항상 이럴 때에 무언가가 나에게 현실을 보라는 듯 경고를 준다. 그 신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은 핸드폰 벨 소리였다. 


히지카타의 핸드폰이 울렸다. 히지카타는 전화를 확인하더니 밖으로 나가서는 전화를 받았다. 보통 다른 전화라면 스스럼없이 내 앞에서 받았을 녀석이기에 쿠리코가 전화를 걸었다는 것쯤은 바로 알았다. 그래서 문 앞에서 통화를 하는 것을 다가가 몰래 엿들었다.


"미안, 일이 많아서 조금 늦을 것 같아. 항상 이렇지 뭐. 내일은 조금 일찍 들어가도록 노력해볼게. 먼저 자. 그래. 나도 사랑해"


사랑해? 결혼을 하더니 거짓말에도 능숙해졌구나 너. 


전화를 끊고 나온 히지카타는 아직도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이만 들어가서 쉬라고 다시 말했다. 합숙소로 들어가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합숙소에 가더라도 히지카타는 옆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기 전에 내가 먼저 등을 돌려서 가야만 한다.


"나... 나 오늘은 친구네 집에..."


분명 친구? 네가 친구도 있어? 친구 누구? 뭐 하는 녀석인데? 그리고 너 합숙하기로 했는데 왜 자꾸 외박이야? 하고 물고 늘어져야 할 히지카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래. 알았어. 내일은 일찍와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변명할 거리가 없어져서 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히지카타를 두고 뒤돌아 나오면서 숨통에 커다란 돌이 들어선 것처럼 답답했다... 왜일까.. 

그 답답하고 이상한 감각이 너무 싫어서 집에 가는 길에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에 오랜만에 외롭다,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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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2주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이렇게 짧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자 히지카타의 결혼식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2주 동안 히지카타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 했다. 잠깐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하루 종일 전화를 붙잡고 있거나 문서에 쌓여있었고 아니면 아예 자리에 없었다. 히지카타와 이렇게 오랫동안 말조차 하지 않고 지낸 적은 처음이었다. 대원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쿠리코가 드레스를 봐달라고 해서 드레스를 보러 다니고, 결혼 예식장도 함께 가보자고 졸라서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부장님도 안 그런척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고 계시나 봐요. 그런데 다 따라다니면서 봐주시는 거 보면. 절대 그런데 따라가실 것 같지 않은데"


"야야, 사랑하는 여자와의 결혼인데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냐?"


"뭐, 당연하긴 하지만.."


나는 잠자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자 빤히 귀 기울이는 나를 보고는 한 명이 물었다.


"전에 식당에서... 많이 혼나셨어요?"


"아니."


"와 역시 대장한테는 자비롭다니까요"


"자비는 무슨"


"그런 말을 우리가 했어 봐 아주 난리 났을걸요? 뭐.. 할 수 있는 깡이 있는 사람도 없겠지만"


하고는 나에게 부럽다 오키타 대장, 그런 용기. 역시 대장급은 다른가봐. 하고는 웃었다. 나는 나오지 않는 웃음을 억지로 피식 웃어 보였다.




다음날에 히지카타는 외근을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어쩐 일인지 쿠리코가 와 있었다. 나를 보고는 활짝 웃으면서, 오키타씨! 하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으면서 달려왔다. 그러고는 하얀 봉투에 은색의 고급스러운 스티커로 마감된 청첩장을 내밀었다. 봉투 앞에는 반듯한 글씨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청첩장이에요. 꼭 직접 전해드리고 싶었는데 좀처럼 오키타씨가 안 보여서 오늘은 직접 와버렸다구요! 제가 직접 드리는 거니까 꼭 오실 거죠?"


"아, 네 뭐.. 글쎄요"


"혹시 지금 안 바쁘시면 저랑 차 한잔 안 할래요? 저 지금 엄청 목마른데"


"아뇨 바빠서"


"그래도 잠깐 시간 내주시면 안되요? 저 오늘 오키타씨 때문에 일부러 여기 왔는데"


쿠리코는 애교 있는 목소리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딱히 할 이야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마구 뿌리치기에 이 여자는 뭔가 선이 너무 얇아서 격하게 뿌리치지 못 했다. 이런 모습이 히지카타는 좋았던 것일까? 그녀가 나를 끌고 간 카페는 핑크색으로 도배를 한 아주 여성스럽고 조용한 카페였다. 그녀는 커피를 주문했고 나에게도 물었지만 고르기가 귀찮아서 나도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얼마 전에 왔었는데 오키타씨만 못 만난 거 있죠? 그래서 계속 찾았는데 히지카타씨는 그냥 본인이 전해주겠다면서 달라는 거예요. 근데 뭔가 제가 꼬옥 전해주고 싶어서 절대 싫다고 했어요! 그래서 덕분에 오키타씨랑 커피도 마시고 좋네요"


"아, 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자 나에게 물었다.


"원래 이렇게 말이 없어요? 엄청 장난끼 넘치는 이미지로 봤었는데"


 "어색한 사람하고는 말 잘 안 해요"


"그럼 이제 앞으로 저랑 친하게 지내면 되겠다"


이상한 말을 하고서 내 앞의 여자는 활짝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서는 마치 단짝 친구처럼 어떤 드레스가 예쁜 것 같냐며 제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음.. 이건 너무 많이 파인 거 같죠? 그럼 이건 어때요? 이게 요즘 유행하는 디자인이래요. 저는 이게 맘에 드는데 히지카타씨는 별론가.. 뭐가 예쁘냐고 물어봐도 딱히 속 시원한 대답이 없어요. 오키타씨는 뭐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딱히 무엇을 고를 생각은 없었지만 보여주는 사진의 이 여자도, 드레스도 예뻤다. 새하얀 드레스에 빛을 받아서 반짝반짝거리는 비즈 장식이라던가 작은 티아라라던가.. 여자들이 어째서 이런 것에 집착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전 잘 몰라서요."


혼자 잔뜩 들떠서 이건 이렇고 저렇고 하고 나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는 이 여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히지카타는 쿠리코씨의 어디가 좋데요?"


"음... 글쎄요? 물어본 적이 없는데"


"왜요? 궁금하지 않아요?"


"에이, 유치하게. 그냥 서로 좋다는 마음만 알면 되죠. 게다가 그런 걸 말해줄 것 같지도 않고. 저는 그냥 히지카타씨의 곁에 평생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행복해요."


생각만 해도 좋은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혐오스럽고 가증스럽기까지 해서 속이 뒤틀림을 느꼈다. 이성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면, 이 여자가 마츠다이라 선생님의 딸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엑스트라급의 여자라면, 이 공간에 우리 둘 말곤 아무도 없었다면 당장 배를 걷어차고서 목을 졸라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에게 보여주던 핸드폰에 '애인'이라는 글씨가 팟 뜨더니 핸드폰에 요란한 밝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는 아, 전화 왔다! 하고는 잠시만요~ 하고 말하고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응~ 지금 오키타씨랑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어요~ 또 땡땡이친다고 혼내지 마요. 가기 싫다는데 내가 억지로 막 가자고 끌고 나왔다니까요? 청첩장도 줄 겸, 내가 입을 드레스도 보여주려구! 이게 다 히지카타씨가 속 시원하게 골라주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흥 나 정말 삐질 거야~ 나 그냥 오키타씨가 골라준 드레스 입을 거예요! 


그러더니 조금 후에 전화를 끊고 나에게 말했다.


"히지카타씨는 내가 오키타씨 이야기만 하면 말을 자꾸 피해요. 왜일까요?"


".. 말하기 싫은가 보죠. 내 이야기"


"하지만 내가 봐도 히지카타씨에게 오키타씨는 가장 특별하던데요?"


쿠리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난 궁금한데.. 내 남자에게 특별한 사람이면 나에게도 특별하잖아요?"


'내 남자'라니, 나는 어이없음이 뒤섞인 비웃음을 터트렸다. 내 웃음에 이 여자는 본인이 한 말이 괜히 창피했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다가 쑥스러움에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아! 저... 이거 그냥 단순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건데요.."


쿠리코는 약간 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히지카타씨 옛 애인이라던가, 알고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뭐, 알고 있다면 알고 있는 것만으로 더 화가 났을 것 같기는 하지만.


"물어봐도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걸 보면 있긴 있었던 거 같긴 한데... 뭐, 사실 없을 거란 생각은 안 해요. 근데 말을 안 하니까 더 궁금한 거 있잖아요. 뭐... 오키타씨도 모르면 됐어요"


쿠리코는 내가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웃으면서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모든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음.. 모르고 계셨구나. 전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말 못할 법도 하죠. 그 새끼 완전히 빠져있었거든요. 아, 이런 이야기해도 되나?"


내가 운을 떼자 당황한 웃음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고, 다른 의미로 당황하고 조금 화난 것 같아 보였다. 하긴, 이 여자는 내 입에서 옛 애인이요? 에이, 히지카타는 지금까지 줄 곳 애인 같은 거 없이 일밖에 모르는 등신 새끼예요 하는 대답을 듣고 싶었겠지. 

내 입으로 확인사살을 당한 이 여자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표정은 사뭇 진지했고 내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듯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히지카타에겐 비밀이에요. 그 새끼 전에 꽤 오래 만난 여자가 있었거든요. 저도 같이 자주 봤었는데 진짜 예쁜 사람이었어요. 엄청나게, 내가 지금까지 본 여자 중에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도 그 여자보다 예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게다가 실제로 그런 여자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어요. 얼굴도 예쁜데 상냥하고 어떤 면에선 씩씩하기도 하고... 내가 여자였다면 신은 정말 불공평하다고 말하면서 완전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 정도로 완벽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나도 그렇고, 히지카타도 그렇고.. 그분 말이면 아무 말도 못했어요. 묘한 카리스마..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우리가 너무 좋아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말 한마디면 우린 바로 설설 기었거든요. 히지카타도 그 여자 말이면 넙죽 엎드릴 정도였다니까요. 상상이 잘 안가죠?"


"아하.... 네에.. 그러네요"


"사실 분명히 그 여자랑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두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했었거든요. 내가 보기엔 여자 쪽이 백배천배 아까웠지만"


"...오키타씨도 많이 만나신 분인 건가요?"


"네, 뭐.. 히지카타랑 이렇게 악연을 이어온 것도 그분 때문이에요"


"저..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그럼 왜 헤어졌나요?"


...


".. 히지카타 그 새끼가 차였겠죠 뭐. 그래서 아직도 못 잊었잖아요"


이 여자에게 누나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히지카타는 누나의 남자임이 분명하고 영원히 너 따위의 저급한 여자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이며, 내가 잠시 너 같은 여자를 보면서 누나가 생각이 나서 멈칫했던 적이야 있지만 저급한 너 따위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야. 그러니 평생을 볼 수도 없고, 히지카타는 말도 해주지 않을 우리 누나의 존재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면서 치를 떨며 살아. 


"못 잊었다뇨?"


내 말에는 갑자기 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아, 실수예요 그 말은 잊어버리세요."


당황한 듯이 손을 내저으면서 웃으면서 말했고 내 의도대로 이 여자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웃으면서 나에게 드레스 입은 사진을 보여주던 그 화사한 얼굴에 어둠이 옅게 드리워진 것을 보자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급 기분이 좋아진 나는 방금 전 그녀가 내밀었던 청첩장을 과격하게 뜯었다. 안에는 새하얀 청첩장이 얌전하게 들어있었다.


"신부, 마츠다이라 쿠리코. 신랑 히지카타 토시로...  축하해요. 갈 수 있으면 꼬옥 참석할게요"


나 역시 그녀처럼 '꼭'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서 말했다. 그 말을 하고는 더 이상 놀아버리면 히지카타가 또 지랄할 테니 가야겠네요, 하고 간략하게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왔다. 쿠리코의 질투 어린 표정을 보면서 나는 꽤나 희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하지 못한 채 마냥 즐거웠다. 




몇 일후, 아무 일 없이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곳에 참석을 해서 그 여자의 표정을 한 번은 더 봐두고 싶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 친하기로 유명한 내가 결혼식도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나 이상하게 비춰질 것을 감안해서 준비를 하고 나섰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나를 보곤 어서 오라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리고 쿠리코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며 손수 나를 데리고 그녀에게 안내했다. 아직도 조금은 질투심에 가득 찬 그 여자의 표정, 가장 행복해야 할 그 순간의 표정을 상상하며 기분 좋게 웃으면서 뒤따라갔다. 

쿠리코는 반짝이는 흰 드레스를 입고 하얀 장미와 분홍 장미가 적절하게 섞인 커다란 부케를 들고 웃으면서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서 저를 찾아온 지인들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나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누나가 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면 훨씬 더 눈이 부셨을 것이라는 생각에 되려 내가 우울해지고 갑자기 울컥해버려서 눈언저리가 뜨거워졌다. 


"어머, 오키타씨!"


그 여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어주었다. 내가 기대했던 어두움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와주셨네요? 저, 너무 기뻐요! 오키타씨가 오셔서 히지카타씨도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하하.. 아니에요, 당연히 와야죠"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식장 안으로 돌아와 멍하니 앉아 있자 나를 알아본 대원들이 주위로 와서는 앉았다. 대장, 부장님 신혼여행은 이틀 정도 가신데요, 아, 아쉬워라. 왜 이렇게 짧게 가신담, 쉬실 거면 좀 푹 쉬시지. 저렇게 열정적인 사람이 상사면 아래가 피곤하다니까요. 쿠리코씨는 한 술 더 떠서, 이틀이나 가도 괜찮냐고 물어봤데요. 안 가도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고 그러셨다던데.. 끼리끼리인 건가.. 이렇게 바쁜 남자라는 걸 아는 여자라 그런 건가.. 뭐.. 이런 걸 다 배려해주는 여자기 때문에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겠죠? 부장님도.


미친 소리하네. 뭐, 처음이야 좋겠지. 저 여자는 명백하게 더럽고 치사한 거짓말을 어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했을까? 히지카타 정도라면 대충 거짓말인지 진심인지 파악도 잘 했을 텐데. 범죄자가 아니라서 몰랐던 걸까? 제 아빠가 경찰쪽 사람이라서 정말로 이해를 한 것일까? 역시... 싫어.


히지카타는 바빠 보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참 나를 쳐다보았다.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와도 그냥 소소한 대답 만을 하면서. 눈을 먼저 돌린 것은 나였다. 우리는 그날 그 혼잡한 결혼식장에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아니, 하지 않고 헤어졌다. 그리고 히지카타는 결혼식이 끝난 그 길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다른 대원들의 환호의 뒤에서 장식된 자동차가 떠나는 모습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다가 합숙소에 돌아와서는 핸드폰을 끄고 하루 종일 잤다. 안대를 하고 귀에 이어폰도 꽂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는 라디오의 잡음 같은 만담을 들으면서 서서히 잠에 들었다.










-

히지카타가 없는 다음날은 너무나도 허전하고도 조용했다. 다른 대원들은 완전히 휴가라면서 부장님이 안 계시니 나가서 술을 미친 듯이 마시고 들어오자,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서 보자, 야한 영화를 밤새워서 보자는 둥 다들 시끌벅적했다. 나도 겉으로는 웃어 보이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히지카타의 부재는 우리 모두에겐 축제였지만 나에게는 너무나 건조한 모래사막 위를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서 자꾸만 타는 듯이 목이 말랐다. 어차피 하루 정도만 기다리면 되는 별일 아닌 일이었지만 그가 돌아온다고 한들, 나의 갈증은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이미 히지카타의 옆에는 누나와 나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그가 우리를 전처럼 생각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돌아오기 몇 시간 전, 대략 1시간 정도를 남겨두고 잠시 순찰을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갔다. 돌아온 히지카타에게 웃으면서 다녀왔냐고 물어볼 자신도 없고, 이제 합숙소가 아닌 자신의 신혼집으로 향할 그의 등을 바라보는 것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는 맥주를 한가득 샀다.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술을 사본적이 없었다. 낑낑대며 들고 와서는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엔 예전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버리지 못한 엄마, 아빠, 누나의 신발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문득, 히지카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바꾸었다. 물론 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혹시나 둔영에 와서는 소고녀석은 어딜 갔냐면서 묻다가 아무도 모르는 내 행방을 찾다가 찾다가 역시 이곳에 올 것 같았다면서 문을 두드려 온다면.. 만약 그런다면 여행을 갔다 왔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처자라고 욕해주고서 문을 쾅 닫아버려야지.  


비밀번호를 바꾸고 사온 술들을 텅 비어있는 냉장고에 모조리 집어넣고 소파에 앉아서 한 캔을 홀짝홀짝 마셨다.. tv에서는 꽤나 유명한 연예인들의 이야기가 중계되고 있어서 멍하니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웃긴 이야기도 있고 슬픈 장면도 있었다.


Tv소리를 작게 줄여놓고 거실에 누워있다가 잠에 들었다. Tv소리조차 없다면 조용한 적막함이 내 목을 졸라올 것 같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 소리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그래도 이번에는 비교적 편하게 꿈도 꾸지 않고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를 깨운 것은 쾅쾅 하고 다소 과격하게 울리는 발길질 소리였다. 자리에 일어나 앉아서 문쪽을 바라보았다. 비밀번호를 열으려 달그락하는 소리, 틀린 비밀번호를 눌러서 나오는 오류음.. 히지카타다. 휴.. 하고 나도 모르게 안심했다. 와줬구나. 그리고 나는 문을 벌컥 열면서 반가움과 함께 짜증 섞인 말투로 소리쳤다.


"미친 새끼야 조용히 해! 동네 사람들 다 깨울 일 있어?"

 











당연히 아부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털털하게 나에게 다가와 주었다. 나 역시 평소라면 잊고 넘어갔을지 모르지만 이번엔 그저 내가 조금 찜찜해서 한마디 건넸다.


".. 요즘 내가 조금 예민한가 봐"


"응?"


"그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너 하는 짓에 하나하나 신경 쓰다 보면 어떻게 살아있겠냐? 이미 병 걸려서 병원 침대에 사형선고받고 누워있을 거다"


하고는 뭐가 웃긴지 하하, 하고 거창하게 웃었다. 하긴, 뭐. 그래서 나도 웃어 보였다. 


내가 누굴 찾는지 궁금해? 하고 묻고 싶었지만.. 이런 건 나 스스로에게 독이 되는 말이 될 것 같아서 묻지 않았다. 아마 저 새끼도 뒤로 나를 조사해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아마 나보다 먼저 찾아낼지도 모른다. 이미 내가 저에게 숨기고 있다는 것부터 내가 이상한 짓을 한다고 판단하고서 특기인 그 처세술로 대상에게 접근해서는 어떤 미친 새끼가 널 찾고 있으니 어서 도망치라며 도와주고 있을 수도 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놓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그렇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한다면 커다란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왜인지 아부토에게는 별로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 요즘은 나와 관계가 조금 이상해진 바람에 극단적인 행동이야 힘들겠지만. 


실제로 아부토는 내가 수상하다며 사람을 붙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 고아원 원장이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몇 번이나 귀찮게 연락을 해왔고 다시는 연락을 하지 말라고 시큰둥하게 이야기를 하자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이라도 찾아와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절대로 찾아가지 않겠다는 완강한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왜 저렇게 나에게 와달라고 이야기를 하나 조금은 궁금해져서 한 번쯤은 가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나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그때 나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었는지, 내가 어디에 가는지 알려주지 않고 밖을 나서자 아부토는 그런 내가 분명히 이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고는 사람을 붙였다. 분명히 잘하는 새끼를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제일 뛰어난 새끼를 붙인 것이겠지만 그 새끼도 결국 그 정도의 급이었다. 들킨 그 새끼는 역으로 나에게 뒤를 밟히면서 나에게 목이 뜯겨 죽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과 옷 때문에 갈 수 없게 돼버리자 다시금 아, 내가 왜 가려고 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바닥엔 떨어진 내 핸드폰이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 잠겨 화면이 꺼졌다 켜졌다 하면서 청록색, 핑크색, 검정색, 흰색이 왔다 갔다 하면서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이 새끼 머리를 들고 가면서도 화가 주체되지 않았다. 곧바로 아부토에게 찾아가서, '스토킹은 질색이니 다시는 이딴 헛짓거리 하지마.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하며 들고 온 축축한 머리를 앞에 툭 던졌다. 아부토는 잘려진 그 머리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이내 쿡쿡 웃으면서, 아이고- 설마 했지만 정말 들킬 줄은 몰랐네, 미안해 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그 이후론 두 번 다시 나에게 사람을 붙이진 않았다. 

물론, 무슨 일이든지 아부토가 나에게 있어서 나쁜 의도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뜬금없이 머릿속에 팟 하고 떠오르는 일이 있다.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일. 그런 일은 대체적으로 쓸데없고, 시간 낭비뿐인 일이 대부분인데 그걸 알면서도 꼭 실천하게 된다. 지금이 그렇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오른 것은 그 녀석과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곳. 2층 침대가 있고 천장엔 싸구려 야광 별들이 반짝이던 집. 지금 그곳엔 아마 다른 사람이 살고 있겠지만 그래도 뜬금없이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밖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 있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하고 나가자 아부토는 자신은 피곤하다며 먼저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보통은 기다려서 같이 가자고 하거나 아니면 뜬금없이 어딜 가냐며 꼬치꼬치 캐묻을 때도 있었는데 오늘은 그런 걸 묻지 않아서 좋았다. 나가는 뒤에 대고 아부토는 조용히 갔다 와 이 녀석아! 하고 외쳤다.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찾아간 집 근처는 많이 바뀌어 있지는 않았다. 나의 좋은 기억이 잔뜩 있었던 곳이라서 그런지 몸이 이상하게 후들후들 떨렸다. 분명 아무 흔적이 없을 것도 알고, 이미 다른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지만.. 한창 드나들던 때의 몽롱한 석양빛 기억을 한번 더 느껴보고 싶었다. 


"어머, 여기 살았었던..... 오키타씨네 아들 맞죠?"


"네?"


"아직 여기 살고 있었구나.. 그 가족이 아무도 안 보여서... 뭐 안 좋은 이야기도 있고 하긴 하던데 그렇다고 집을 판 것도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도 드나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된 걸까 했는데..."


예전에 우리 가족을 종종 봤었던 근처의 사람인가 보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서 등을 돌렸다. 아직 집을 팔지 않았고 드나드는 사람도 못 봤다는 건 뭘까?

 

집 앞에 서자 닫힌 문이 조용하게 버티고 있었다. 집을 팔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하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오류음이 울리면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잘못 눌렀을까? 다시 눌렀다. 또다시 울리는 오류음. 또다시 또다시 눌러도 그 번호가 아니라는 경고음이 계속해서 울렸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문을 부숴버릴까 했지만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아부토의 조용히 다녀오라는 말이 생각나서 홧김에 문을 여러 번 발로 걷어찼다. 씨발, 난 도대체 뭘 바라고 온 거야. 그렇게 애꿎은 문에 화풀이를 하고 돌아가려 등을 돌렸을 때,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았던 문이 벌컥 열리면서 짜증 섞인, 내 귀에 꽤나 익숙한 특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친 새끼야 조용히 해! 동네 사람들 다 깨울 일 있어?"


돌아보니 그 녀석이었다. 누군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도 무엇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너무 당황해서 그 어떤 말을 꺼내지도 못 했다.


".... 어...?"


오키타 녀석도 내가 올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는지 문을 열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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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오키] Jacobs ladder 17

2016. 7. 23. 12:43



*히지오키/아부카무아부 요소 주의*



17.











-

"단장,요즘 이상하게 조용하네"


"내가 뭘"


"이상해 너 요즘"


"너도 이상해"


요즘 아부토와 나의 관계가 별로다. 집단 안에서도 집안에서도 우리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나는 아부토가 카다에게 했던 행동 때문에 약간은 화가 나 있었다. 아부토도 나에게 뭔가 불만이 있는지, 전이라면 내 말투가 조금은 이상해 보인다면 다가와서 풀어주려 이것저것 병신 같은 이야기라도 했을 텐데 나의 성의 없는 짧은 대답을 듣고서는 소파에 풀썩 누워서는 나를 옆으로 슬쩍 보다가 뜸을 들인 후에 내키지 않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요즘, 고민 있냐?"


"고민이라니? 고민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 새끼가 하는 거라면서?"


"그렇지 그래도"


"너야말로 고민 있는 거 아냐?"


".. 없어"


우리 둘의 대화에는 보이지 않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이런 아부토는 약간 적응이 되지 않는다. 대답 후, 아부토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카다와 술을 마셨던 이후로 아부토는 분명 이상해졌다. 그 여우년에게 홀딱 빨아먹힌 게 틀림없다. 이 멍청한 새끼. 나한테 말하면 분명 내가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을 것을 알고 나한테 말도 못한 채 끙끙대는 것이겠지.


항상 아부토가 나에게 다가왔으니 이번엔 내가 조금 풀어줄까 하는 너그러운 생각을 가지고 침대에 누워있는 아부토의 곁에 다가가 침대 옆에 앉아 시선을 맞추고 아부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들었다.


"뭐, 이 망할 녀석아."


"못생겼어"


"뭐래"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부토는 내가 씨익 웃자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

히지카타의 결혼 소식은 내가 안 이후 일주일도 안되어 순식간에 퍼졌다. 그 깐깐한 마츠다이라 선생도 흔쾌히 허락했다는 걸 보면 쿠리코가 엄청나게 졸라대기도 했겠지만 히지카타 정도의 남자라면 능력도 능력이고, 생긴 것도 흠잡을 것 없이 생긴 괜찮은 새끼니까 딱히 싫어하지 만은 않았을 법도 하다.


"소고"


낮잠을 자려 기대어 앉아 있는 나를 그가 찾아왔다. 나를 '소고'라고 부르는 사람이 몇 없기도 할뿐더러 중저음의 반듯한 말투에 쓸데없이 좋은,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목소리와 말투 만으로도 히지카타라는 것을 알았지만 안대를 벗지는 않았다. 


"응"


"안 자고 있었네.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아니, 또 잔소리할 거잖아"


"안 할게"


"그래도 싫어"


대답하자마자 갑자기 눈앞에 확 밝아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잔뜩 찌푸렸다. 히지카타가 나의 안대를 위로 벗기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고, 잘생기기도 했네. 아무리 내가 저 새끼를 싫어한다지만 저 잘생긴 얼굴만은 인정하고 있다. 씨발새끼. 짜증 나게 잘 생겼단 말이야. 남 주기 아깝게.


"따라와"


히지카타는 먼저 등을 보이며 휙 돌아서서는 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한참 보다가 조금 늦게 그를 뒤따라갔다. 히지카타는 따라온 나를 보고는 얼마 전 합숙실이 아닌 나의 본가에서 잤던 일에 대해서 추궁했다.


"어디 갔었어? 너 갈 데도 없으면서"


"..."


"... 너 혹시.. 아 아니다"


히지카타는 분명 나에게 집에 갔었니? 하고 물으려 했을 것을 나는 알았다. 하지만 아닐 것이라는 것도 알 것이고, 괜히 그런 말로 날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을 피했다는 것도.


"연락 없이 외박하고 그러지 마. 합숙에는 다 규칙이 있는 거잖아. 나이가 어리다고는 하지만 어엿한 대장이잖냐"


"봐. 잔소리하잖아"


".. 그래 알았어. 잔소리는 그만할게"


히지카타는 그렇게 말하고는 담배 하나를 꺼내들고서 깊이 들이마셨다. 평소라면 나에게 가보라거나 알았다고 하거나 해서 말을 매듭지어야 할 그 녀석은 할 말이 더 남은 듯이 어물쩡댔다.


"할 말 끝났으면 나갈게"


문 손잡이를 잡자마자 그가 뒤에 대고 말했다.


"소고"


그가 약간 나를 잡는 듯이 나를 불렀다.


"뭐"


"2주 후에...."


".. 결혼?"


".. 응"


"그래"


나는 건조한 대답을 건네고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나 빨리 서두르다니. 쿠리코가 혹시 저 자식 애라도 가진 게 아닐까 하고 잠시나마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히지카타가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히지카타는 아닐 거야. 히지카타가 아니라면 겉모습은 순진해 빠졌지만 속은 어떨지 모르는 저 여자가 다른 놈 애를 배고서 히지카타에게 무작정 '당신 아이에요! 결혼해주세요!' 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둘 다 유쾌하지 않은 일임은 사실이지만... 하지만 임신을 하려면, 당신의 아이라고 우기기라도 하려면 임신을 할 만한 행위가 있었다는 건데.... 저 새끼와 그년이 한 침대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의 입술을 핥고, 서로의 몸을 보고, 서로를 만지고, 비밀을 하나씩 공유해가는... 그런 개 같은 경우는 별로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쿠리코와 마츠다이라 선생의 등쌀에 못 이겨 빠른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게 나의 마음이 편해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만... 이미 결혼을 하기로 했다는데 사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결혼 전인가, 결혼 후인가 하는 하찮은 문제일 뿐인데. 이렇든 저렇든 배배 꼬여버린 나의 성격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속이 편하지 못 했다. 계속해서 쿠리코나 히지카타의 이야기만 나와도 급격하게 예민해지고, 기분이 다운되는 것을 막을 수도, 감출 수도 없었다. 남 잘 되는 꼴 보기 싫은 나의 이기적인 심보다. 누나가 항상 꾸짖던 나의 못된 심보.



그날은 대원들이 식당에 간만에 맛있는 게 나온다면서 식당으로 가자고 했다. 배가 고프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걸 먹고 싶은 생각도 없어 그들의 말을 따랐다. 맛있는 것이라고 해봤자 딱히 별거 없는 식단이었지만 후식으로 나온 당고는 맛있어 보여서 두 개 집어왔다. 조금 늦게 우리의 무리를 뒤따라왔는지 함께 오지 않았던 히지카타가 내 앞에 와서는 앉았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식사를 하는 것도 꽤 오랜만이다. 히지카타 딴에는 저를 미세하게 피하는 나를 직감하고서 일부러 나와 부딪히려 나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나는 이 자식만 봐도 결혼이라는 글자가 자꾸만 떠올라서 입맛이 뚝뚝 떨어진다. 게다가 가십거리의 주인공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와준다면 입 놀리기 좋아하는 대원들은 얼씨구나 좋다, 하고 선 덥석 물어대겠지. 아니나 다를까 이 녀석을 보자마자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끄러운 질문거리... 짜증나. 그들은 축제라도 시작된 듯 히지카타에게 질문 세례를 시작했다.


"와아, 곧 결혼하시는 부장님!"


"부장님 왜 이렇게 결혼을 빨리하세요? 아 이거 아쉬워서 어째, 총각파티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거하게 놀아보지도 않으셨을 텐데"


"다 안다고요 부장님 생각보다 순정파인 거 으하하하하"


"쿠리코씨는 역시 귀엽죠? 부장님 엄청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셨어!"


"시끄러, 밥이나 처먹어"


히지카타는 그들이 멋대로 떠드는 것에 한마디 하고는 잠깐 나와 눈을 맞추었다. 짜증나. 쳐다보지 마. 나를 쳐다보는 히지카타의 눈빛에 나도 지지 않는 듯이 노려보다가 한마디 했다.


"하하, 다들 진짜 묻고 싶은 건 물어보지도 못하는구나? 히지카타씨, 혹시 사고 친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잠시 싸한 분위기가 되었지만 히지카타는 평소의 나 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피식 웃고는 대꾸했다.


"미쳤냐"


"아하, 네네~ 아니라고 하겠죠. 원래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잖아. 히지카타씨도 남자는 남자였구나. 섹스하면 어때요? 좋아요? 그 여자 완전 히지카타씨한테 껌뻑 죽던데, 혹시 먼저 막 덮쳐온 거 아니에요?"


"저.. 대장.."


옆에선 어떤 대원이 굳어지는 히지카타의 표정을 보고서 나에게 살짝 눈치를 주었다. 나도 알아. 저 새끼 지금 슬슬 열받으려고 하는 거.


"가슴 커요? 젖꼭지는 무슨 색이에요? 처음 할 때 속옷 색은 무슨 색이었어요? 아, 그 여자 엄청 순해 보이던데 의외로 속옷은 새빨간 망사나 호피무늬 같은 거 입는 거 아냐? 침대 위에선 적당히 내숭 떨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듯하지만 엄청 적극적일지도 몰라. 펠라도 해줘요? 펠라 할 때 정액도 먹어줘요? 섹스할 때 막 더 해달라고 애원하진 않아요? 신음은 참는 편? 아니면 막 오버해서 더 내지르는 편? 아니면 딱 꼴릴 정도? 흠.. 엄청 오버할 것 같은.."


"그만해"


"아니면 막 바지 벗은 히지카타씨의 그곳을 보고 어느 싸구려 라노벨 주인공처럼 꺄앗 너무 커! 말도 안 돼! 그런 게 들어갈 리가 없잖앗! 이러면서 내숭떨고 있는 게 아닌가 몰라.. 아! 죄송 히지카타씨는 그렇게 크진 않았던 거 같네요"


다른 대원들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어때? 너희들도 궁금하지 않아? 사실 이런 거 묻고 싶었던 거 아냐?"


내가 이 말을 하자마자 내 주위에 있던 모든 대원들은 벌떡 일어나서는 식당에서 소스랏치게 뛰어나갔다. 내가 의도한 대로 지금 내 앞에 이 새끼는 나도 약간은 무섭다고 느낄 정도로 화가 난 게 보였다. 그래, 나한테 화 내봐 어디. 이 새끼야.


"왜, 기분 나빠?"


나는 일부러 더 천연덕스럽게 당고를 들고서 한 개씩 빼먹으면서 물었다.


"지나치다 너 오늘"


"나 원래 이러잖아요. 히지카타씨가 참아요. 나를 잘 알잖아?."


히지카타는 내 껄렁한 말투에 한숨을 크게 한번 쉬고는 그래, 하고는 또 참는 듯했다.


"와아, 잘 참는다. 곧 부인될 여자가지고 이렇게 섹드립을 쳐도 히지카타씨는 잘 참으시네요? 엄청 화낼 줄 알았는데. 진짜 존경스러워. 나도 꼭 히지카타씨 같은 어른이 되어야겠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 다 알아. 그만해"


화를 삭이는 모습도 짜증나게 잘생겼어.. 앞에 놓인 물 한 잔을 침착하게 들이키자 울렁이는 목울대가 섹시해서 한 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내가 미쳤나..

일부러는 무슨,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벌떡 일어서자 히지카타가 말했다. 


".. 미안해"


웬 병신 같은 소리. 뭐가 미안하냐 너?


나는 그대로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젖히고 나갔다. 뒤늦게 콰앙 하고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

비가 오려는지 하늘엔 구름이 가득했다. 햇살이 없어서 우산 없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바람이나 쐴 겸 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쏟아져 내릴 듯 구름이 묵직하고 어두웠지만 이상하게 비는 내리지 않았다. 곧 비 올 거 같은데 이런 데에서 뭐 해? 하고 껄렁한 목소리가 들려서 옆을 보니 5번대였던가... 2번대였던가 암튼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나와 이야기도 몇 번 한 적이 있는 다른 사단의 단장이었다. 이 녀석은 아부토 정도 되는 덩치에 여자 앞에만 가면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리는 나와 다른 타입이었지만 나를 꽤 인정하고 있는지 나에게 항상 '난 너같이 뛰어난 재능이 있는 놈을 본 적이 없어'라고 칭찬을 하면서 나와 함께 임무하는 것을 좋아했다. 


"전에 카다랑 같이 술 먹던데 재밌었어? 쳇, 나도 같이 먹고 싶었는데"


"음 난 오래 없어서 모르겠어. 너야말로 유녀 끼고 시시덕 대느라 정신없던데 뭐"


"그 여자랑 카다는 비교가 안돼. 카다가 훨씬 예쁘잖아"


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 녀석은 나를 보고 되려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의 말로는 카다는 하루사메에 오기 전에 유명한 사기꾼이었다고 했다. 도둑질이면 도둑질, 도박이면 도박, 거기에 지금이야 단장이라는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럴 일이 많지 않겠지만 어릴 적에는 남자를 살살 꼬셔대는 것에는 당해낼 자가 없을 정도로 섹시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지금도 섹시하게 생기긴 했잖아?" 


하고 말하고는 웃었다. 이 단장의 말로는 푸른빛을 겉도는 긴 머리카락이나 조금 특이한 뾰족한 모양의 귀(다른 남자들도 이 귀를 보고는 엘프 같다며 찬양했었다)라던가, 암갈색 눈동자는 때로는 아주 값싸게 보이다가도 또 어느 때에는 뿌리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을 가지지 않았냐면서 나에게 동의를 구했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넌 어려서 아직 여자를 모르는 거야, 하고 말했다.


"아부토와는 친하잖아?"


하고 말하고는 부러움이 담긴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나에게 자신이 아부토보다 외모가 낫지 않냐는 둥, 그 새끼는 아직도 카다 앞에만 가면 말을 더듬는 얼간이라는 둥 욕을 해대며 이렇게 말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 새끼 이상형이 자신이 감당 못할 정도로 버거운 여자라던데.. 카다 앞에서 병신 짓 하는 거 보면 그 새끼도 참 뱉은 말이랑 딱딱 맞는다니까" 

 

"아 그래?"


"딱 봐, 완전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까 절대로 아니라던데 너한테도 말 안 한 거야? 와 너무한다야, 너한테까지 비밀?"


"비밀이랄 거까지야, 내가 애초에 물어보질 않는데 뭐"


"에이. 재미없어. 이런 거 하나씩 터지는 게 참 재밌는데 말이야. 뭐하냐 넌, 가장 가까이 있는 새끼가 그런 거 하나 모르고."


하고 나에게 한참 구시렁대더니,


"하긴.. 그러면 뭐 하나, 카다 눈에 아부토 같은 녀석이 찰 리도 없지만.. 빨리 아부토 녀석 차이고 우울해하는 거 놀리고 싶은데.. 다음에 혹시 급속도로 우울해 보인다면 100퍼센트 차인 거니까 나한테도 말 좀 해줘"


하고는 일이나 하러 가야겠다면서 자리를 떴다.


저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아부토가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저 녀석의 말대로 카다가 아부토를 좋아할 리도 없다. 실제로 아부토처럼 투박하고 나이에 비해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에 덜 깎은 수염, 부시시한 머리카락, 퀭한 눈, 까칠한 피부를 가진 데다가 말투조차 자상하지 않은 말투로 툭툭 내뱉는 저런 새끼를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여자들의 눈이라면 전에 왔던 누나의 남자친구 정도는 되어야 아, 정말 멋있다 하고 반하겠지. 하지만 제 나름대로 배려해준다며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아선 혹여나 취할까 술잔을 반 잔씩 채워주는 그 꼴사나운 모습은 누가 봐도 한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런 모습의 아부토가 싫은 거야.


전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던 아부토는 다음날엔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린 서로 잡다한 모든 것을 걸고넘어지고 세세하게 확인하려 드는 타입은 아닌지라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조금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었지만...



일을 할 때에 나와 아부토는 항상 함께 움직이곤 했는데, 이번에는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보통은 내가 편하게 쉬어야 했을 텐데 이번엔 이상하게 아부토가 먼저 끝이 나고 나는 밤늦게까지 이 짜증나는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일에 처해버렸다. 아부토는 나를 보곤 장난 식으로 놀려대면서 편하게 지금까지 잘 지냈으니까 하루 정돈 고생하라고 단장~ 하고는 웃었다. 아부토는 다른 대원들이 저질러서 커져버린 일들, 그러니까 시체 처리 같은 자잘한 일을 하러 간 것이고 나는 조직의 도망자를 잡고 처단하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었으니 분명 내가 더 재미있는 일은 분명하지만, 그 도망친 새끼를 찾아서 혹여나 자살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살살 다뤄야 한다는 점은 꽤나 짜증 난다. 조직의 도망자는 죽이는 것은 금지. 반 병신으로 만들더라도 분명히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데리고 와야 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나라도 내가 품고 있던 사람이 나에게서 등을 돌렸을 적에는 순순하게 편히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상만큼은 나와 나의 조직이 잘 맞는 부분이었다.


도망치던 그 녀석은 검은색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녀석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다. 우리 팀엔 사람을 찾는 것만으로 가히 최고라고 할만한 몇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친 그 녀석은 우리가 본인을 잡으러 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 끈질기게 도망쳤다. 처음에는 본인이 아님을 강조하려 했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세하게 떨면서 조용히 있다가, 바로 뒤에 다가온 나를 보고는 쓰러져서는 바닥을 기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곧 꺼낸 총을 꺼내들고서 심각하게 떠는 손으로 나를 향해 겨누었는데 그렇게 심각하게 손을 떨어대며 쏘는 총에는 그 어떤 얼간이도 총에 맞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결국 우리에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 녀석은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쏠 용기를 가다듬으며 심호흡을 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붙잡혔다. 이번 녀석은 겁쟁이 녀석이라서 시시하게 끝나버려 조금 싱거웠지만 돌아가야 할 집의 방향에서 꽤 멀리 와버려서 돌아가는 길이 참 피곤하겠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엔 일부러 사람을 잘 찾는, 나와도 꽤나 친분이 있는 한 명을 골라잡아서 같이 차에 타도 되냐고 물었다. 안경을 쓴 그 녀석은 흔쾌히 타세요 단장, 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이 녀석은 참 신기하게도 사람을 잘 찾기에 조언 같은 것을 조금 구해볼 생각이었다.


차 시동이 걸리는 가벼운 소음과 함께 그는 운전대를 잡았다. 보통 다른 녀석들의 차는 커피향의 방향제, 혹은 싸구려 과일향의 방향제 냄새 등등이 코를 찔러오는데 이 녀석의 차는 별다른 냄새가 없었다. 게다가 장식이라던가, 작은 소품 따위도 없는 점이 인상적이라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우리 조직의 사람들 중에 얌전한 운전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그는 거칠면서도 꽤나 부드러운 운전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까지도.


"운전 엄청 잘하나 봐. 큰 소음도 없고"


"하하 사람을 찾으려면 조용한 운전은 기본이죠"


"하긴 그렇네"


"단장은 너무 요란해요. 집요하게 달라붙는 타입은 아니라서 스토킹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어요"


"스토킹은 당하는 것도, 하는 것도 별로야. 차라리 직접 데려와서 내 옆에 두는 게 낫지"


"옆에 데려다 두는 것도 좋겠지만.. 스토킹도 은근히 재밌다고요. 상대가 모르는 상태에서 지켜보는 스릴이 얼마나 좋은데"


"변태 같아 너"


"단장도 마찬가진데요 뭐"


그 말에 그 녀석과 나는 서로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나는 물었다.


"신기해. 너 사람 찾는 거. 비법 같은 거라도 있는 거야?"


"하하, 와 진짜 신기하다"


"...?뭐가?"


나의 질문에 뜬금없이 그 녀석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부단장이 아마 단장이 나에게 사람 찾는 것을 물어볼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는 그 말을 하고는 다시 작게 웃다가 말했다.


"그냥 말씀하세요 제가 찾아드릴게요"


"아부토가?"


"네. 요즘 사람을 찾는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누군진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도 말을 안 하는 거 같다고.. 단장, 누구예요? 저한테 말씀하시면 바로 찾아드릴게요"


"아냐, 그런 거 아니야 진짜 그냥 궁금한 거였어"


"누굴까? 애인? 은 아니겠고.. 뭐 돈이라도 떼이셨어요? 말해봐요. 제가 특별히 서비스로 찾아드릴게요. 단장은 무서우니까. "


"무서우니까는 뭐야?"


"농담이에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에서 나와 그 녀석은 가벼운 농담만을 주고받았다. 더 이상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화제가 돌아가서 인지 이 녀석도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아부토는 언제부터 내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기분 나빠.


계산보다 두어 시간을 빨리 도착했다. 이 녀석은 길에도 아주 밝아서 막히지 않는 지름길이나 골목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와 아부토가 살고 있는 집 근처임에도 나로서는 생소한 길 투성이를 지나 집에서 내렸다. 가벼운 인사를 하고 집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내가 제일 처음으로 본 것은 아부토였다. 


제 그곳을 다 드러내놓은 채로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아부토. 옆에 널브러져 있는 휴지 더미와 풍기는 찝찝한 정액 냄새와 함께.


"어..어..어어.. 와.. 왔....어....? 이.일찍 왔...."


아직 끝내지 못한 행위 때문에 아부토의 것은 아주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같이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까지 공유한 적은 없었기에 나도, 아부토도 완전히 당황했다.


"...."


할 말을 잃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아부토는 허겁지겁 옷을 입으려 허둥대고 주위의 휴지 따위를 치우려 허둥대는 바람에 옷을 입지도 못하고 옆에 쓰레기를 치우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황한 아부토의 앞에 찬찬히 걸어가서는 물었다.


"누구 생각하면서 한거야? 많이도 했네"


"...그.. 그런거 아냐.."


"누구야? 누구 상상하면서 한거야?"


내 말에 아부토는 얼굴이 확 붉어지다가 말을 더듬으면서 그런 거 아니라며 말하고는 다시 옷을 입으려 했다. 앞에 주저앉아 있는 아부토의 손을 거칠게 밟고서 다시 말했다.


"계속해, 왜?"


아부토는 행동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부토는 나를 잘 알고 있으니 내가 하는 말이 진심인 줄도 잘 알 거다.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부토의 시선에 맞춰 무릎을 굽히고 아부토와 눈을 맞추자 아부토는 나의 시선을 심하게 피했다. 아부토의 꼿꼿하게 선 그곳을 보니 암여우 년의 실실거리는 눈꼬리가 자꾸만 떠올라서 이상하게 화가 치밀었다.


"... 됐다, 난 잘래. 마저 끝내"


"저기.. 다.. 단장...!"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더듬는 저 꼴좀 봐. 그 당황하는 꼴도 너무 보고 싶지 않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홱 뒤돌아 침실로 들어갔다.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워서 밖에 저 새끼가 어떤 행동을 할지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아부토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지 아무런 소리가 없다가 얼마 후엔 주변을 정리하는지 부시럭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왜인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럽다고 느껴서 아부토에게 그렇게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누군가와 하고 싶다'라는 감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오키타 녀석을 상대로 수없이 상상했던 일인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머릿속에서 내가 상상했던 것처럼 아부토도 그 암여우 년을 상대로 수없이 머릿속에 그 여자랑 이런 저런 야한 짓을 하는 상상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사실 적당히 놀리면서 끝내도 되는 문제를 내가 긁고 후벼 파버린것 같다. 아부토의 조금 당황한 눈빛이 자꾸 생각이 났다.



하얀 침대 시트는 내가 작은 움직임만 취해도 바스락 거린다. 사락사락해서 간지럽기까지 하다. 


이 침대를 처음 살 때 나는 굉장히 귀찮아했다. 침대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이딴 걸 사러 지금 이런 사람 많고 귀찮은 곳까지 나와야 하냐며 하루 종일 투덜거렸다. 잘 때만큼은 편하게 자야 한다면서 1인용 침대 두 개를 사자는 아부토의 말에 나는 2인용을 사자고 했다. 내 말에 아부토는 2인용..? 불편하지 않겠어?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게 하자면서 2인용을 주문했다. 조금 짙은 나무 색깔의 심플한 침대였다. 집에 설치를 마친 후에 나는 가운데에 털썩 누워서는 나 혼자 쓰겠다고 우겼다. 


"이 망할 새끼, 그러니까 내가 1인용으로 두 개 사자고 했잖아"


"그건 작잖아. 난 이렇게 큰 침대에서 혼자 자고 싶어. 넌 아래에서 자"


"하아... 넌 정말이지...."


아부토는 혼자 작게 투덜투덜 거리고는 침대 아래에 이불을 깔았다. 그 이상으로는 내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당연했다. 나의 억지스러운 고집이나 이상한 부탁도 아부토는 모두 다 군말 없이 들어주었다. 화를 내는 건 아부토 쪽이 많지만 진심으로 나에게 화를 낸 적은 없다. 항상 똑같이 이 망할 녀석이, 이 새끼가, 이 정도의 말을 한번 뱉고는 말없이 처리해주는 녀석이고 나는 이상한 억지를 계속 우기면서 당연한 듯이 아부토를 쳐다보면 된다.



오늘 아부토는 항상 와서 자던 내 침대의 아래로 돌아오지 않았다. 침대 아래엔 그 녀석이 아침에 빠져나간 흔적 그대로 이불과 베개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는 그 상태 그대로 껍질을 벗은 허물처럼 숨을 죽인 채 놓여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오늘의 밤은 너무나 길어서 도무지 지나갈 것 같지 않다.


아부토, 오늘 너는 어떤 꿈을 꾸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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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오키/아부카무아부 요소 주의*



16.











-

카다.

아부토가 나에게 예전에 여자친구라며 소개했던 여자로 지금은 4번대의 단장이라서 가끔 마주치는 사이가 되었다. 아부토는 이 추잡한 여자를 여러 가지 의미로 좋아하는 듯했다. 물론 이 여자는 관심 없어 보였지만.


"아부토, 너 저 여자랑 하고 싶어?"


"그런 거 아냐" 


"쟤가 말 걸면 어쩔 줄 몰라 하던데?"


"여자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래. 나 은근히 여자랑 말 잘 못하거든"


아부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알레르기 같은 소리.



회의랍시고 요시와라에서 임원들이 모여 술을 마시게 되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내가 단장이 된 이후로 두 번째 있는 모임이다. 이들은 모두 천천히 즐기자며 저녁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바깥이 훤히 내다보이는 고층 빌딩. 화려한 비단천으로 잔뜩 장식되어 있는 술집은 우리가 온다고 하면 손님을 안 받는 것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우리가 가면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나름 임원들이라고 비싼 요리와 고급술을 마신다는 것은 좋다. 맘껏 먹을 수 있는 것은 좋지만 다른 임원 놈들이 술을 두어 시간 마시다가 잔뜩 취해서 정신줄을 높은 상태가 되어, 요시와라의 유녀들을 하나씩 끼고 구석으로 가서는 바지 벨트를 푸르는 장면은 언제 봐도 더럽다. 아부토는 내 옆에서 눈치를 보는 것인지 꼼짝하지 않았는데 내 눈치가 아니라 카다의 눈치였던 것 같다. 아부토는 은근히 이 여자를 챙겨주려 옆에서 빈 술잔을 반절씩 채워주며 실없는 소리를 하고, 카다는 도도하게 깃털 장식이 달린 고급 부채를 들고서 입을 가리고 웃으며 아부토를 하대했지만 그런 것조차 아부토는 즐거워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부토의 옆에서 밥을 먹는 나를 보고 카다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같은 단장이지만 우리 둘은 거의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전에 만났을 땐 설마 다시 만날 거라곤 생각 못했지 뭐야? 만나도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후후"


"뭐, 나도"


"그 싸가지가 이런 곳에서 단장까지 되다니."


"나도 그쪽 같은 여우가 단장일 줄은 몰랐어"


"후후, 아부토는 네가 마음에 많이 드나 봐. 싸가지없는 데다가 나이도 어린 널 데리고도 철저하게 방패 쳐주잖아? 네가 없었으면 아부토가 단장이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 그건 그쪽이 상관할 바는 아니지 어쨌든 지금은 내 쪽 사람이니까"


"후훗 건방진 단장님이시네? 뭐 이 정도는 되어야지"


말투가 끈적끈적하게 눌어붙는 게 마치 뱀같이 스멀스멀 거리는 기분 나쁜 여자다. 첫인상부터 지금까지 이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뭐야, 둘이 싸우는 거야? 오늘은 그러지 말고 좋게 좋게 있다가 헤어지자고 단장님들"


아부토는 나와 카다의 사이에서 웃으며 말하고는 뒤로 내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걸 조금은 눈치챘나보다. 아부토는 조금 언짢은 상황일때 나의 기분이 좋지 않은게 느껴지면 내 어깨에 커다란 손을 툭 얹곤 했다. 그런 행동이 나를 진정시키는데에 성공한 적은 별로 없지만 오히려 내가 이 녀석이 지금 나를 말리려고 하는구나, 하고 알아채곤 했다. 


꺄르르 웃는 카다의 웃음소리와 저 정신나간듯한 여자에게 사소한 관심사를 묻는 아부토도 이해가 되지도 않고, 구석 틈틈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살갗의 마찰 소리와 미세한 신음소리가 나를 그 안에 도저히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아부토는 나를 보고는 어디 가냐며 물었다. 잠깐 바람 좀 쐴 거야, 하고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말하자 아부토는 정말로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심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밖은 어느덧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며 타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 본 나는 다시금 몸이 바짝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다시금 나를 이끄는 자성과도 같은 운명의 부름으로 우연히 그를 발견한 것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제복을 입고서, 옆의 어떤 여자아이와 함께 군것질을 하러 왔는지 무언갈 먹고서는 함께 자리를 뜨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빛이 비치면 레몬빛으로 화사하게 빛나는 저런 매력적인 머리카락은 흔하지 않았고, 특유의 묘한 분위기가 나에게 다시금 확신을 주었다. 잡아야 해, 내가 저 녀석에게 지금 당장 달려가서 찾고 있었다고 말해야 해.! 나는 그를 보자마자 정신없이 출구를 찾아서 뛰어갔다. 달려오는 나를 보고 아부토는 어딜 가냐며 잡으려 했지만 그대로 그를 뿌리치고 허겁지겁 달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가득 차고 심장이 터질 듯이, 심장박동이 내 가슴팍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시점에서 그는 이미 내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었던 그 자리엔 이름 모를 벌레 같은 사람들이 그의 흔적을 지우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순간 기분이 땅 끝까지 가라앉았다. 이로써 그가 내 눈에 띈 것이 두 번째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 녀석에 대한 원망이 밀려왔지만 세 번째에 너는 반드시 나와 마주할 것이라는 알 수없는 막연한 확신이 나의 화를 조금은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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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히지카타와 나의 관계, 그리고 우리의 자리에 불만은 전혀 없다. 아무런 저항 없이 우리의 관계가 이대로 평행선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옆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했다. 지금은 모두가 사라진 내 기억 안의 사람들. 그래서 나의 기억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분간되지 않을 때에 그것은 사실이라고 말해주는 기억 안의 네가 아직도 내 옆에 있어주기에 그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히지카타는 자신에게 다소 의존적인 내 모습이나, 아니면 심하다면 심하다고 할 수 있는 정신질환적인 나의 모습을 고쳐주려 했는지 나를 불러 놓고 상의할 게 있다며 조금은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우리 대원들 합숙하고 있는 거 알지?"


실제로 우리는 비상시의 인원들 때문에 합숙을 하고 있었다. 현재 낮은 직급은 거의 의무였고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직위였다. 


"응 근데?"


"우리도 같이 합숙하자"


"상관은 없지만 왜?"


"음.. 그니까...."


"뭐, 물어보나 마나 일 때문이겠지 뭐, 네 녀석 머릿속엔 일 밖에 없잖아"


실제로 이 녀석은 합숙소의 녀석들을 계속 걱정하기도 했고 실제로 자주 들러서 다른 대원들을 잘 돌봐주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기에.


"난 뭐, 딱히 상관없어."


나의 대답에 히지카타는 다행이라면서 다른 대원들과 함께 지내는 게 너에게도 좋을 거야 하고 꼰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우리는 빠르게 합숙을 했다. 다른 대원들과의 합숙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만화책 따위를 잔뜩 빌려서 돌려보기도 하고 히지카타에게 들키지 않도록 몰래 야식을 시켜 먹는다던지 (야식을 시켜 먹는 행위는 금지였다.) 몰래 뛰어나가서 술 따위를 사 와서 숨어서 먹는다거나 하는 것은 재밌었다. 들켜서 히지카타에게 엄청나게 혼나는 것조차도 즐거웠다. 식당에서 나오는 밥이 맛이 별로 없어서 편의점에 가서 라면을 먹는 것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안의 시끌시끌한 분위기는 마음에 들었다.


그런 생활이 2주 즈음 지나고 나서 히지카타는 나를 따로 불러서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그를 찾아가자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서 어느 한적한 카페로 데려갔다. 평소에 자주 가던 카페가 아닌 조금은 멀고 생소한 곳이었다. 인적이 많지도 않았고 안에 사람이 적게 드문드문 있는. 새하얀 벽과 검정색의 포인트가 차분하고 깔끔한 카페였다. 이런 곳도 알고 있었나?


"여기 되게 좋다. 남자 둘이서 올 곳은 아닌 것 같네 엄청 고급스럽고"


푹신한 의자와 창밖 풍경이 눈이 부시는 그 자리에서 나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채로 히지카타를 바라보았다.


"뭐 먹을래? 너 단건 별로 안 좋아하지? 여기 아이스크림도 맛있다던데"


히지카타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말했다.


".. 난 주스"


"애기냐 아직도 주스 마시고"


"남 이사 뭘 먹던 무슨 상관이야"


내가 투덜거리자 피식 웃어 보이고는 커피 한 잔과 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히지카타는 말없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히지카타를 한번 봤다가 주변을 둘러봤다가 했다. 이상한 적막이 어색한 순간이었다. 잠시 후 주문한 커피와 주스가 나오고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없었던 알 수 없는 이상한 어색함을 깨보려 아무 말이나 했다. 비가 올 것 같아. 우산 없는데. 여기 생긴지 얼마 안 됐어? 페인트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에 아무 대꾸 없이 있던 히지카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우산 차에 있어. 그리고 이 카페 꽤 전에 생겼고."


"그래? 커피 마시러 이렇게 멀리도 다 오고 부장님 요즘 한가하시나 봐? 나한테만 땡땡이친다고 뭐라고 할게 아니네"


비꼬는 내 말에 히지카타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정적. 뭐야 이 새끼.


"뭐 좋으라고 이런 곳까지 데리고 왔어? 말해봐"


"그냥 왔어. 잠시 머리도 식힐 겸 해서"


싱거운 새끼.


히지카타는 그 말을 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멈춘 듯이 조용한 시간을 잠시 보내고 히지카타는 뭔가 망설이는 듯이 입을 열었다.


"합숙은 어때?"


"누구 때문에 조금 짜증 나지만 나름 재미있어"


"누구...라는 거 나 말하는 거야?"


"당연하잖아. 잘 알고 있네 뭐"


히지카타는 내 말에 다시 웃고는 작게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왜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을까?


".... 소고. 나.."


"응"


"... 결혼해"


결혼? 나는 그 말에 놀라서 마주 본 그 녀석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히지카타는 나의 눈을 바라보지 못 했다. 약간 시선을 아래로 깔은 그는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 당장은 아니지만.."


장난이라고 믿고 싶지만 이 분위기는 절대로 장난 따위가 아니다. 내 자존심은 이 녀석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나 보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것이 나 답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 너에게는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하, 왜? 나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져?"


"달라지는 게 아니라..."


"아니면, 나한테 듣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그런 거 없어, 나는 그저.."


"축하해."


티를 내고 싶지 않았지만 감춰지지 않는, 조절되지 않는 가시 돋친 축하에 히지카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축하한다잖아. 그래서 결혼 상대는 누군데?"


내 물음에 답하지 않는 이 녀석의 개 같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얼마 전에 대원들이 말하던 쿠리코가 떠올랐다.


"...쿠리코?"


아마 정답이다. 히지카타의 미묘한 표정 변화가 나에게 답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이 지겨운 상황과 내 눈앞의 이 녀석과 더 이상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 돌아가자고 말했다. 멀리 오지 않았다면 가자는 말 따위 없이 그냥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행동했다면 난 틀림없이 후회를 했을 것이다.


히지카타는 담배를 물었다. 왜 인지 모를 허전함에 이를 꽉 물었다. 눈가가 조금 시었다.




차 안에서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정직하게 침묵을 지킨 적도 많지 않다. 나와 함께 간 이 카페도 아마 그 여자와 함께 왔던 곳이겠지.


돌아와서 누웠다. 몸이 무거워서 꼼짝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질어질했다. 야마자키가 밖에서 노크를 하면서 밥을 먹을 시간이라며 불렀지만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는 보냈다. 히지카타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결혼을 말하다니. 그의 결혼을 상상한 적이야 있지만 설마 그게 이렇게 빨리,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렇게 혼란스럽게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합숙을 제안한 것도 나를 혼자 둘 수 없기에 합숙을 제안했었구나. 언제부터 였을까? 이렇게 나를 감쪽같이 속이고 그 여자를 만났던 건.


이미 마음을 먹은 너에게 이제 와서 내가 결혼하지마! 라고 말해도 될까? 그렇게 평소처럼 고집부려도 괜찮아? 아니, 이미 나에게 말을 꺼낸 이상 나에게 말릴 자격은 없고,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뭐.. 사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누나와의 의리를 지켜달라는 이상한 말을 할 수 없기도 하고... 내가 어떻게 너에게 내 곁에 있어달라고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다른 여자에게 떠나는 그를 조금 야속하게 여기고, 조금 원망하고... 히지카타는 이제 새로 생길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거다. 그 새끼는 바람 같은 것도 안 필 거야. 설령 결혼하고 나서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하더라도 가정이라는 이름 안에 있는 한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사랑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다시 사랑할 거야. 너는 그렇게 바른 새끼니까. 미치게 얄밉게 말이야.











-

내 얄팍한 자존심은 히지카타의 앞에서 내가 평소처럼 행동하도록 만들어주었다. 카페에서 이야기할 때는 욱한 성질을 참지 못하고 조금은 쏘아대듯이 말을 했지만 그 이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히지카타에게 행동했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 일은 약간 피했지만. 쿠리코는 부쩍 우리 둔영을 자주 드나들었다. 잠깐 마주치면 여전히 화사하게 웃으면서 오키타씨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했는데, 그 표정은 누가 봐도 사랑에 푹 빠진 여자의 표정이었다. 히지카타와 연애할 때에 누나 같은 그런 화사한 표정. 그 표정에 누나가 겹쳐 보여서 나는 그 여자를 미워하면서도 마음 놓고 나답게 제대로 미워하지는 못 했다. 그래서 더욱이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대원들의 가십거리엔 항상 그 여자와 히지카타가 있었는데, 들어보면 쿠리코가 결혼을 빠르게 하고 싶다며 조르고 있으며, 그래서 벌써부터 결혼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언제부터 만났데? 둘이"


"와, 오키타 대장 진심으로 모르셨습니까?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데요. 부장님은 죽어도 말 안 해주고 쿠리코씨가 살짝 말하길 4개월 정도 됐다고 하더라고요"


4개월? 뭐, 사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깊어지는 데에 기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지만 누나와 오래 사귀어왔던 저 녀석이라서 그런지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연애를 하고서 결혼을 결심했다는 것은 짜증이 치민다. 하지만 뭐.... 내가 모르게 긴 연애를 할 수는 없기도 했을 거다. 하지만 저 여자와의 결혼을 대비해서 나에게 합숙을 제안한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 내가 너의 미래를 막는 장애물이었구나. 이제 네 주위엔 가족이 형성되겠네. 나는 그대로인데.



히지카타 덕분에 오랜만에 집에 갔다. 하얗게 남겨놓은 사고의 흔적은 사람들의 발길과 세월의 입김에 의해 많이 지워져있었다. 아직도 이 근처만 오면 식은땀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 몸이 미세하게 떨리지만 시간이 흘러서인지 사고 직후보다는 조금 나아진 상황이 되었다. 


추억을 가지고 있는 집 문을 힘겹게 열었다. 문틈에 끼워져있던 편지 한 통이 툭 떨어졌다. 이곳으로 올 리없는 편지이기에 뭐 청구서 정도 되나 보다 하고 생각하고는 대충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히지카타가 왔다가 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온 적 없는 집이 이상하게 깔끔했다. 전에 히지카타는 나에게 집을 팔 것이 아니라면 청소라도 해놓자고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하여튼 그 새끼는 이런 쓸데없는 짓을 너무 친절하게 나에게 베푼다. 이런 짓이 나에겐 더 비참하다고. 이 새끼야.



대충 둘러보다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밖에선 조용한 바람이 불어와 내 뺨을 스치었다. 


"왔니?"


문이 열리며 누나가 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나?"


몸을 일으키자 누나는 장을 보고 왔는지 잔뜩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무거웠을 텐데, 나 부르지 그랬어? 나는 투정 섞인 말을 했다.


"하하 얼마 안 되는데 뭐,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게 왔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냥... 좀 바빴어요.. 합숙을 막 시작하기도 했고..


"그래? 어때? 사람들은 잘해주니?"


사람들이야 똑같죠 뭐, 히지카타는 맨날 내가 문제라고 화내던데요 뭐..


"히지카타씨는 여전하구나?"


누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가 전에도 말했죠? 그 새끼는 진짜 나쁜 새끼예요.


"좋은 사람이야. 네가 너무 삐뚤 어진 시선으로 보고 있으니까 그렇지."


삐뚤어진 시선? 내가요? 무슨 소리예요? 누나 그 새끼 말이에요 요즘 어떤 줄 알아? 그 새끼 곧....


"곧?"


아, 아니에요..


결혼을 한데요 그 새끼가...! 결혼을...!! 하고 입 밖으로 뱉으려던 그 말을 차마 하지 못 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누나는 울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누나는 다행히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카무이는?"


누구? 누구요?


"카무이~ 기억 안나? 네 형이었잖아"


아...... 카무이...


"그 애는 어디 갔니? 밥 먹을 시간인데"


...모르겠어요


너무 생소하고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히지카타도 전에 그 녀석의 행방을 물었었는데.


맞다 누나 히지카타 그 새끼가 얼마나 웃긴 줄 알아요? 갑자기 나에게 네 형이 어디에 있냐면서 다그치듯이 물어봤던 적도 있어요. 그래서 내가 찾지 말라고 했어요... 그 녀석은 어디엔가 갔어요. 집에는 오지 않을 것 같아요. 어때요? 상관없잖아요. 누나랑 나 둘만 있으도 괜찮잖아요!


"... 응, 누나도 좋아.. 근데, 둘이 아니라.. 넌 혼자 있어도 괜찮니?"


제가요? 제가 왜 혼자예요?


"누나는 곧 가야 되는데"


어딜? 어딜 가요?


"어디긴?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야지"


누나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마자 나는 그제야 누나가 돌아오지 않을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어두운 거실의 소파에 웅크리고 잠깐 잠들어버린 나의 위치를 보고 아무도 없는 이 현실에 흐느끼며 울었다. 누나는 마지막까지 환하게 웃었고, 다행히 나도 누나를 보며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이 내심 안심이 되었다. 넌 혼자 있어도 괜찮니? 당연히 괜찮죠! 라는 말을 깜빡했지만 누나는 분명히 이 집에 내가 다시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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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ㅠ_ㅠ

카무오키가 세ㄱ스해야된다는건 아직도 잊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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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지오키/아부카무아부 요소 주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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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기 그지없는 몇 번의 회의를 참석했다. 실제로 직접 나서서 그 녀석을 찾아보려 하기도 했으나 어째서인지 아부토의 눈치를 보게 되어 적극적인 움직임은 취하지 못 했다. 내가 아직 덜 미쳤다는 것이기도 하다. 슬슬 회의에 참석해서 온 인원을 보고 실망하기도 지쳐가고 점점 '내가 왜 이딴 곳에서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할까?' 하는 의구심에 빠지기까지 했다. 동시에 내가 잘못 본 것이라는 생각도 커져갔다. 


날이 우중충한 어느 날, 다른 사단에서는 요시와라로 인신매매해온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그들을 선별하는 것을 지나가다가 보았다. 쓸만한 놈들이 있다면 우리 조직으로 끌어들이고, 딱히 우리가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다면 여자는 유녀로, 남자는 그들을 감시하는 감시역으로 일하게 구속해 두었다. 늘 해왔던 일이었는데 그날따라 그 일이 경찰에게 꼬리를 물렸는지 그 지루한 회의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던 시점에 공격적으로 우리에게 만남을 재요청 해왔다. 연락을 받은 아부토는 굉장히 머리 아파하면서 귀찮아했다.


"이 새끼들 우리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거야"


"괜찮아.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잘 빠져나갔잖아? 넌 할 수 있어 아부토!"


"네 일 아니라고 편하게 막 이야기하는 거지 지금? 일 처리해야 하는 아랫것들은 힘들다고 이 녀석아"


그 말에 나는 회의를 들어가기 전, 아부토의 꼴이 우스워 한참 웃었다. 아부토는 웃지 마 이 녀석아. 하고는 머리 아픈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경찰 무리들. 그들은 아부토의 말대로 공격적이었고 저들이 단장이라고 생각하는 아부토를 보자마자 눈빛이 사나워졌다. 대머리와 평범한 녀석, 그리고 옆에 있는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녀석이었는데 첫인상부터 잘생긴 녀석이었다. 강렬한 눈매가 인상적인 데다가 여유 있게 앉아서 담배 연기를 피워대는 모습이 멋있다. 멋있다는 말 외엔 딱히 다른 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검은 머리칼과 더불어 경찰 제복이 정말 잘 어울리는 분위기까지 가진 그런.. 볼수록 뭔가 낯이 익은.... 


그 남자는 아부토에게 무어라고 말을 시작했고 아부토도 맞서서 대응을 했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남자를 쳐다봤다. 누구라도 이 남자를 본다면 이렇게 쳐다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무지 어디에서 봤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얼굴이지만 분명 나와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신경 쓰였는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잿빛 눈동자가 섹시했다. 어디서 봤지? 어디에서 마주쳤지? 


"부장, 우리 좋게 이야기합시다. 우린 정말로 모르는 일이야. 다른 쪽의 개입이 있었나 보지. 왜 툭하면 우리한테 와서 난리래? 엉?"


"당연히 너희에게 책임을 물어야 된다고 보니까. 일단 너희가 관리하는 구역 아니야?"


"몰라 그런 거. 우린 그곳에 가서 술 팔아주는 것 밖엔 안 하거든? 거기 유입되는 사람들이 좀 많아? 당신도 가본적 있을 거 아냐? 술 하면 요시와라인데. 일단 진정하고, 다시 알아볼 테니까 일단은 여기서 물러들 가쇼. 아니면 요시와라에서 술이나 한잔할까 형씨? 이름이 뭐랬지? 히지카타였나? 엉?"


히지카타? 히지카타라고? 히지카타? 히지카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아!... 생각났다. 누나의 남자친구였구나. 내가 왜 기억을 못했을까? 오키타 녀석과 항상 함께 있었던 그 새끼구나. 못 본 사이 더 잘생겨졌네.. 전에 비하면 지금은 약간 날카롭게 눈빛이 변한 것 같다. 지금이 더 섹시하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리자 다시 나를 보던 그는 약간은 불쾌했는지 나에게 말을 걸었다.


"... 넌 뭐야 아까부터. 할 말이 있으면 해"


"... 잘생겼어요"


"...?"


황당해하는 그의 표정.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긴 것 같아, 내가 여자였으면 이 자리에서 키스해버렸을지도? 아하하, 인기 많죠? 여자친구 있어요?"


"..... 이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우선 확인해줘. 가자"


그는 일어나서 뒤돌아가면서 조금 찜찜했는지 나를 한번 더 뒤돌아보고는 나갔다. 하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가 나와 서로가 제대로 얼굴을 본 것은 오키타 녀석과 같이 그 녀석의 차에 타서 그 녀석이 나를 '친구'라고 소개했던 한번뿐이었다. 나는 숨어서 몇 번 더 그를 보았으니 내가 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데다가, 내가 그를 향했던 관심도와 그가 나에게 향했을 관심도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 녀석과의 마지막 날에 문을 두드리던 그 광기 어린 소음과 집착, 우리의 틈에서 나에게 질투라는 감정까지 알려준 당신을 내가 잊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나는 내 앞에 온 누나의 남자를 통해서 내가 만났던 녀석이 정말 그 녀석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 녀석를 찾았다는 기쁨과, 나와 마주쳤다는 게 정말 그였다는 황홀함 직후엔 급격하게 우울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제일 미워하고 있었던 그와 함께 있는 거니? 나와 헤어져 있던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 동안 쭉 그 녀석과 함께 있었던 거야? 내가 모르는 시간 동안 너는 그 사람과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너는 내가 단 한순간도 생각나지 않았어?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너는 나를 찾았어야지.











-

오늘도 바쁜 히지카타는 외근을 갔다가 돌아왔다. 항상 차가운 얼굴로 내부에서는 귀신 부장으로 불리고 있지만 나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모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할 때도 나 혼자만은 그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러면 내 머리카락에 손을 턱 얹으며 사고 안치고 잘 있었지? 하고 따스하게 묻는다. 분명히 나에겐, 아니 내 옆에만 두기에는 과분한 사람이다. 정신 못 차리는 나를 데리고 와서 이곳의 대장이 되기까지 지켜봐 준 히지카타는 분명히 나에게 누나의 남자친구 그 이상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본래 까칠한 내가 낯간지럽게 히지카타를 따뜻하게 대한다거나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고, 사실 누구에게 보다 거칠게 굴었다. 내가 이렇게 너에게 까칠하게 굴어도 너는 나를 미워하지 말아줘,라는 막연한 마음, 그리고 실제로 그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기에. 이건 모두 이 새끼가 나를 이렇게 길들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옆에 없으면 손가락도 까딱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아무리 내가 싸가지 없게 굴어도 자신만은 내 옆에 있어주겠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믿음.. 분명히 나는 그에게 믿음을 키워버렸다. 이런 시덥잖은 마음이 언젠간 나에게 있어 커다란 화근으로 다가올 것이다.


"음... 소고, 조금만 기다릴래? 나 조금 걸릴 것 같은데.."


"그래? 그냥 집에 와서 해"


"너 가면 또 티비 엄청 크게 틀어놓고 볼 거잖아. 조금만 기다려, 나 곧 끝나니까.."


"누가 기다린데? 나 피곤해 가서 잘 거야. 평생 일이나 하셔"


약 올리듯이 혀를 쏙 내밀자 히지카타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


"언제 철들 거냐?"


"철 안 들 건데? 난 평생 이렇게 네 옆에서 빌붙어 살 거야"


내가 혼자 설 힘이 생길 정도로 철이 든다면 너는 나를 떠날 거잖아. 

나는 생각보다 은근히 히지카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것은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그가 다른 팀원들을 조금이라도 챙겨준다거나, 다른 번대의 대장을 조금이라도 조금 더 챙겨주면 그 모습이 어째서인지 미친 듯이 보고 싶지 않고, 짜증이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날엔 일부러 괴롭히지도 않고 나의 기분을 알아차리라는 듯이 말도 걸지 않곤 했는데, 히지카타는 그런 상태의 나를 오히려 좋아하는 듯 하기도 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래놓고 집에 와서는 꼴에 챙겨준다면서 네가 좋아하는 술이야 마실 거지? 하고는 내밀곤 하는데 사실 먹고 싶다기보다 나를 풀어주려고 일부러 생각해서 사 왔을 히지카타에게 약간은 으쓱하며 저 새끼가 나를 풀어주려고 이걸 사 왔다는 것에 대한 승리감 같은, 약간 가... 감동? 비스무레 한 감정을 느끼며 못 이기는 척 툴툴거리면서 받아주었다.


그렇다. 나는 결핍이 많았다. 히지카타가 나에게 보이는 관심에 대한 결핍, 혼자서는 모두 다 잃어버린 허탈감과 공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수면의 결핍, 남들을 괴롭히는 걸 좋아하게 되어버린 괴상한 취향을 가져버린 감정의 결핍까지. 이 모든 허전함을 나는 히지카타에게 풀고 싶어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불을 켜기도 귀찮은데다가, 조용한 공기의 마찰 소리와 바깥에서 들리는 사람들 소리가 듣기 싫어 티비를 크게 틀었다. 무슨 내용이 나오는지는 몰라도 집안을 시끄럽게 해준다는 것만으로 티비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냥 히지카타 괴롭히면서 기다릴걸 그랬나? 조용한 집은 재미도 없고, 히지카타에게는 큰 소리치며 먼저 갈 거라면서 왔지만 그렇다고 잠들지도 못하고.. 


어둑한 방 안의 티비에서 나오는 새파란 불빛과 높은 음의 여자 리포터의 목소리.. 「하하 여기에서 드셔보신 소감이 어떠셨어요? 아 네 맛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주는 과일샐러드 정도가 더 좋아요. 어머, 진심이세요? 아 뭐.. 사실 오늘 엄마 생신이라서 조금 띄워 주는거예요 하하!... 엄마 사랑해애!」 엄마...엄마, 엄마! 나도 그날 아침에 먹지 못한 과일 샐러드를 한번 더, 한번 더.... 마지막으로 먹고싶어요! 그때 무슨 과일이 있었어요? 왜 나는 그때 고작 잠을 더 자겠다며 침대에 나뒹굴고 있었어요? 한번 더 엄마의 품에 안겨볼 수도 있었을텐데.... 「제가 누나가 있는데요 많이 싸우거든요, 사실 뒤돌아서 후회해요 티격태격해도 우리 꽤나 친해요 누나아! 항상 라면끓여줘서 고마워! 난 누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나도. 나도 누나를 제일 사랑했어 누나 내가 의지할 곳은 누나밖에 없었고.. 알지? 그때 그... 그 녀석보다도 내가...사실은 내가 더 누나를 더 사랑하고 좋아했어요 그런데 누나가 어떻게 자살을 해 어떻게 나한테 그럴수가있어 어떻게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릴 생각을 해 힘들면 나에게 힘들다고 한번만이라도.. 나한테 한번이라도 한번이라도 한번이라도 말했어야지, 마..말했어야지 아니구나.. 몇번이나 말했던 것 같아.. 내가 못들은 척했던 것 같아... 어.. 엄마, 엄마! 어...어딨어요? 누나! 누나아....! 주위를 둘러보니 이 곳은 내 집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난 다시 엄마 아빠와 웃으면서 반겨주는 누나를 만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아득하게 그 곳이 어디인가에 대한 혼란이 파도처럼 뿌옇고 아득하게 덮쳤다. 어두운 방 안의 티비에서는 온몸을 섬짓하게 만드는 웃음소리가 나를 비웃고, 차가운 손이 내 머리카락을 붙잡는 듯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나.,나가야해 나가야해, 문 앞까지 기어가서는 손을 뻗어서 손잡이를 붙잡아도 손이 주체할 수 없게 떨려서 문 손잡이를 잡아서 돌릴 힘이 없었다. 몇번을 헛으로 잡아서 돌리기를 반복하다, 점점 커지는 공포감이 내 뒤까지 바짝 쫓아와, 손톱으로 철문을 밀면서 긁었다. 무...무서워, 여..열어주세요... 열어주세요.. 끼릭끼릭하는 손톱으로 문을 힘없이 한참을 긁자 주문이 된 양 문이 벌컥 열렸다. 


"....소..소고?"


히지카타는 신발장에 힘없이 주저 앉아있는 나를 보고는 양손에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던지고는 내 얼굴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히지카타가 내 옆에 오자 나는 깊은 안도에 휩쌓여 내 앞에 있는 사람이 히지카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 품에 와락 안겼다. 정신을 차리고나면 정말이지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나의 나쁜 버릇이지만 분명히 히지카타의 가슴 팍은 따듯하고, 은근하게 풍기는 담배향이 친근하고, 낮은 저음으로 소고 하고 불러주는 것도... 좋다. 어쩔수 없이. 아직도 여전히 재수없는 새끼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가 오자마자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던 나의 몸이 다시 따뜻하게 데워지면서 불을 켜지 않았지만 밝아진 기분이 들었다. 포근했다.

 

"그니까 내가 조금만 기다리랬잖냐.. 아니다, 미안해.... 내가 미안"


찔끔 나와버린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의 가슴팍에 파고드는 척을 하면서 문질러 닦았다. 히지카타는 내가 스스로 품에서 떨어질 때까지 잠자코 나를 지켜봐준다. 어떤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히지카타는 그가 사온 맥주 한캔을 그의 옆에 기대어 앉아 말 없이 함께 마시며 우스운 예능프로그램을 실없이 시청하고 나서 씻고 각자의 침대에 누웠다. 등 돌린 그의 넓은 등을 한참 쳐다보다 약간 떨어진 우리의 침대의 틈으로 나는 자는 듯 뒤돌아있는 히지카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히지카타는 자다가 깬 것인지, 아니면 아직 잠들지 않은 것인지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손을 내밀자 옅하게 웃으면서 손을 잡아준다. 내가 불안할때 하는 행동이다. 히지카타의 손은 추운 겨울에 잠깐 쬔 난로처럼 기분이 좋아서 절대 놓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무 오래 쬐는 난로는 나를 추위로 내몰았을때 더 큰 고통을 주기에 적당한 선에서 손을 떼고 추위에 익숙해지는 다른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잠든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놓고 등을 돌렸다.











-

"대장, 부장님 얼마전에 프로포즈 받은거 알고 계셨죠?"


"응? 프로포즈? 무슨 소리야?"


"뭐야, 몰랐어요? 진짜? 그렇게 맨날 붙어있는데도 몰랐단 말이에요? 벌써 소문 다 퍼졌는데"


"무슨 프로포즈?"


"무슨 프로포즈라뇨, 당연히 결혼하자는 말 들었다는 거죠. 마츠다이라 선생님 딸 쿠리코라는데요?"


"...쿠리코?"


"네네. 그 정도면 부장님도 거절하실 이유가 없지 않으시겠어요? 일단 착하고, 목소리도 귀엽고 애교도 많잖아요. 게다가 배려도 많이 해주고..."


"어어.. 뭐, 그렇겠네"


"잘 어울리죠?"


"어.. 뭐.... 응"


"우연히 그 근처에 있던 대원이 숨어서 들었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다 놀리고 난리도 아니에요, 부장님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부장님 성격에 당연히 아니라고 하시겠죠, 근데 조금은 핑크빛 기류가 돌고 있데요"


음료수나 한잔 마실까 하고 자판기에 왔다가 이런 소리를 듣다니.. 


나에게 정보를 알려준 이 녀석은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잔뜩 들떠서는 멋대로 말하고는 후다닥 자리를 떴다. 평소에 히지카타를 놀리는 거라면 누구보다도 앞장서는 내가 이런 일로는 그를 놀릴 마음이 딱히 생기지 않았다. 다만, 심경이 복잡했다. 축하를 해줘야 하나? 


쿠리코. 붉은색이 섞인 갈색 머리에 짧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 말끝마다 애교가 흘러넘쳐서 대원들도 다 입을 모아서 귀엽다고 말하는 여자다. 아빠에게 무언갈 전해주러 가끔 방문할 때도 항상 우리들에게 도시락이나 간식거리를 사 와서 나눠주곤 했는데 됐다며 거절을 해도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안돼요! 쿠리코가 생각해서 챙겨왔으니 꼭 받아주셔야 된다구요~ 하고 다소 높은 톤으로 애교 섞인 말을 늘어놓으면서 나에게 저가 사온 것들을 가득 안겨주곤 했다. 그런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녀가 내민 간식거리를 거절하지 못하고 내가 들고 있다. 섬세하게도, 내민 포장에는 오늘도 힘내세요 하는 문구까지. 미워하기 쉽지 않은 여자다. 나 역시도 그녀를 싫어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 여자는 히지카타 한 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우리의 것까지 모두 챙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왜인지 모르게 복잡해서 순찰을 갔다 온다면서 자리를 떴다. 공원 벤치에서 머리나 좀 식힐까 하고 저리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무 그늘이 적당히 있고, 앞에 보이는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꺄르르 웃으면서 시소나 미끄럼틀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햇빛이 현기증 나게 쏟아지는 그 공원에서.


집 근처에도 이런 놀이터가 있었다. 집에 같이 있던 그 녀석 때문에 열받아서 뛰쳐나온다거나 했을 때도 히지카타를 종종 불러내곤 했었다. 그때의 히지카타는 누나와 사귀고 있었고, 어쨌든 그래서 나에겐 그 녀석을 불러낼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히지카타와 공적인 관계 외엔 다른 어떤 연관된 무엇도 없을뿐더러, 그에게 나는 선생님이던 시절에 알던 학생, 그리고 자기 애인이었던 여자의 남동생 정도의 추억거리 정도였다. 그런 히지카타에게 내가 무언가를 더 바랄 자격이 있을까? 



"또 땡땡이치는 거냐 해"


뒤를 돌아보아보니 차이나가 서있었다. 이상하게 이곳에서 이 녀석을 자주 마주친다. 다시마 초절임을 입에 물고서는 항상 중국인 복장을 하고 있어서 내가 차이나라고 부르는 여자애. 본인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서는 다가왔다. 힘도 무식하게 쎈 이상한 꼬맹이. 카구라는 히지카타가 가르치던 반의 학생이었다. 지금은 이상한 괴짜 해결사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우리와 자주 엮여서 조금은 피곤한 그런 관계였다. 


"너야말로 땡땡이잖아, 그 괴짜 해결사 사무실에서 일 안 해?"


"긴쨩은 돈도 안 주는데 뭐, 내가 하고 싶은 데로 할 거다 해"


"곧 망하겠네"


"무슨 소리야? 이미 망했다 해"


실없는 소리에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러자 차이나는 발끈하며 웃지 마라 해! 우리 심각하다해 하고는 장난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아... 너 일 없으면 요시와라에 갈래?"


하고 묻는다. 


"거기 조금 위험한 곳인 거 몰라?"


"안다 해, 그래서 네놈한테 같이 가자는 거잖아. 거기에 엄청 맛있는 당고 집이 있대서 먹고 싶다해"


차이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달한 왈가닥이었지만 꽤나 용의주도하고 조심성도 깊은 듯했다. 마지못해 같이 간 요시와라에서도 본인 말로는 '안전을 위해' 나와 함께 가자고 했지만 나보다 더 무섭게 보일 정도로 사납고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요시와라의 이곳저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차이나는 꽤나 익숙하게 길을 안내했다. 도착한 그곳은 요시와라의 꽤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별 특징 없는 당고 가게였다. 엄청 맛있는 당고집이라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평범한, 지나가다가 어떤 집을 가도 이 정도의 맛은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저 그런 맛이었다. 차이나는 성의 없이 입 안 가득 당고를 집어넣고 또다시 주위를 주의 깊게 살피다가, 감흥 없이 이만 가자고 말했다. 


차이나는 가끔 이상하게 활달하다가도 섬찟한 구석이, 그리고 가끔은 이상하게 친근한 면이 있기도 하다. 그런 부분이 기분 좋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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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카무이 생일...!

미리 생일 추카해앳..!♥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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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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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라는 시간이 조금은 빨리 지나갔다. 내가 처음 아부토를 찾아갔던 때부터 아부토와 나는 쭉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좁다고 느꼈는지 아부토의 제안으로 집은 조금 더 깔끔하고 넓은 곳으로 옮겼다. 살고 있었던 작은 낡은 원룸도 나름 적응이 돼서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아부토는 나에게 이런 곳에서 사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장난스럽게 알고는 있나봐? 하고 장난스레 던졌지만 아부토는 진심이었는지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처음엔 내가 제 위가 됐다면서 어이없어하던 아부토도 이제는 그런 것을 더 이상 어이없어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 제 멋대로인 나의 행동에 망할 새끼야, 너 진짜 나 죽이려고 작정한 거지? 하고 한탄 섞인 화를 내다가도, 아니지 다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거지 에휴, 하고는 비꼬는 말투로 어이 단장 오늘은 어떤 사고를 칠 거야?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좀 하자 하고 투덜투덜거렸다. 그리고 아부토는 항상 나에게 피해가 없도록 깔끔하게 뒤처리를 해놓았다.


누군가와 단순하고도 무식하게 싸워서 이기는 것을 즐기는 나와는 달리 아부토는 처세술에 능했다. 그래서 실제 나가서 일을 처리하는 것에서 과격한 내가 모든 일을 다 뒤집어 엎어놓고 나면 그 일을 수습하고, 내가 귀찮아하는 모든 잡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거의 일이 없이 노는 일이 많고 아부토는 항상 온갖 일에 쫓기는 신세가 되곤 했다. 내가 알게 모르게 심적으로 의지하고 있어서인지 바쁜 그의 큰 등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의 등에 기대어 한참 앉아 있기도 하고 관심도 없는 그의 잡무 내용을 보면서 이건 뭐야? 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뭐긴 뭐야 이 녀석아, 네가 사고 친 내역이지 하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이내 피식 웃어 보인다. 내가 버렸던, 나를 지나쳐간 수많은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묘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다.



내 외모도 그렇고 실제 나이가 너무 어린 탓도 있고, 조금만 동등해 보이거나 강해 보이는 사람만 보면 싸우고 싶어서 안달 나 하는 성격 때문에도 그렇고, 누군가와 교섭을 한다거나 하는 자리에 나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사실 아부토와 딱 두 번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처음에 갔을 때는 뭔가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이 생긴, 샤프한 외모에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만을 잔뜩 늘어놓았었고 나는 하품을 하면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무시하고 아부토와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기 바빴고 나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서 잤다. 나중에 아부토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웬 꼬맹이를 이런 자리에 데려왔냐면서 화를 냈다고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나는 너무 졸렸고, 그렇다고 재미있어 보이는 녀석도 없고.. 내 말에 아부토는 그냥 웃어 보였다. 그래.. 그땐 웃었었지, 두 번째로 나를 데리고 갔을 때 그저 심심해서 눈 앞에 보이는 한 녀석이 들어오자마자 아부토가 쓰려고 책상 위에 얌전히 놓았던 파란색 볼펜을 그 녀석의 얼굴에 표창처럼 집어 들고 던졌다. 그 녀석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재미없는 놈이었는지 그대로 눈에 볼펜이 꽂힌 채로 얼굴 가득 피를 뒤집어쓰고서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괴성을 질러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싱거운 그의 반응에 나는 조금은 시무룩 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녀석은 다른 조직의 꽤나 힘 있는 새끼였고, 그를 건드리고 나서 그 조직과 우리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질 뻔했다만.. 그쪽은 우리 만한 힘이 없었기에 그저 한 번 일을 덮고서 나중에 더 큰 힘을 우리 쪽에서 실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 일로 대외적으로 얼굴을 보이는 단장의 역할은 아부토가 맡고, 나는 그런 대외적인 일에 대해서는 아부토의 말을 듣고서, 결정을 내릴 뿐이었지만 사실 결정이라고 할 것도 없이 아부토가 하고 싶은 데로 하게 놔두었다. 그쪽이 나도 편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아부토는 막 일을 끝냈는지 지겹다는 표정을 짓고서 소파에 기대다시피 앉아 있었다. 


"일은 다 한 거야?"


"...... 몰라 이 망할 녀석아"

 

수건으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다가 아부토가 앉아있는 소파에 다가가서 그의 무릎을 베고서 누웠다. 긴 머리카락이 그의 무릎 위를 덮었다. 아부토는 지친 모습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무릎을 베고 누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내 머리칼을 살짝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듯이 만지면서 말했다.


"... 졸려?"


".. 아니"


"머리 말리고 자야지"


".. 귀찮아"


"힘들지?"


"뭐가?"


".. 그냥, 다.."


아부토는 아직도 이상한 소리를 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이런 헛소리를 하는 근원은 자신이 애초에 불안정한 상태의 나를 데리고 와서 폭주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큰 것 같았지만 나로서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황당했다. 또한, 아부토는 이상한 행동을 하는 버릇도 여전했는데, 그중 가장 이상한 태도는 제 무릎을 베고 잠들어버린 내 머리카락과 뺨을 쓰다듬다가, 숨이 닿는 간지러움에 눈을 살짝 뜨면 어느새 방의 침대에 누워 있는 나와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조금 놀란 표정의 아부토. 잠시 눈을 맞추었다가 다시 스르르 잠에 든다.


아부토에게 단장의 자리를 빼앗길 것 같지 않아? 하는 이상한 말을 다른 사단의 단장에게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저 새끼가? 아부토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강력하게 알고 있다. 아부토는 잘못된 나를 바로 잡기보다 내 멋대로 갈 경우에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을 편하게 가도록 이끌어주거나, 방해요소를 먼저 제거해 줄 녀석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나를 진정시키려 다른 방안을 쓰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부토는 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마지막까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기에 미안하다며 사과를 할 녀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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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토가 하는 일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던 나는 아부토와 경찰들이 만나는 광경을 봤다. 그것도 당당하게 우리 본부에서. 우리 쪽도, 경찰 쪽도 너무 당당한 태도가 조금 신기한 나는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아부토에게 물었다.


"경찰이 여기엔 왜 와? 조사? 뭐 걸린 거 있어?"


"없어. 저쪽은 우리 건드리고 싶어도 건드리지 못할걸?"


"그래? 왜?"


"뭐, 일단은 우리 조직이 크잖아. 우리가 아예 위에 위치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약간 저쪽이 숙이고 들어오는 쪽이지. 우리도 적당한 눈치는 봐야겠지만. 우리가 적당히 경찰하고 친분을 유지하면서 일반인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고 이런 부류들끼리만 부딪히겠다고 하면 돼. 뭐, 저들에겐 필요한 악인 거지"


"근데 우리, 일반인에게도 피해를 입히고 있지 않나?"


"그렇지, 그니까 적당히 저쪽도 모르는 척 눈 감아 주는 부분도 있을 거야. 우리가 철저히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조직 꼭대기는 정치 쪽하고도 연결되어 있으니까"


"흐음.. 그래? 신기하네"


아부토는 약간 생각하는 듯한 나의 표정을 보고 약간 겁먹어하며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단장님께서 만나보고 싶다고 할까 봐 이 아래 것은 무섭습니다요"


"에이 그런 재미없는 공무원들이 뭐 있겠어? 걱정 마 관심 없으니까"


어떤 형태든 공무원은 다 재미가 없어.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서 문서나 작성하고, 시키는 데로 일만 하는 충실한 개들. 내가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아부토는 한시름 놨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날 이후로 서너 명씩 오는 그 경찰들은 유난이 내 눈에 자주 띄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방문을 해왔지만 나와 마주치면 내가 어려서인지 다들 조금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홱 지나갔다. 전혀 관심 없는 그들이었고, 나로서는 흥미를 가질 이유도 없는 그들일 텐데.. 이상하게 마주칠 때마다 뭔가 주의 깊게 살펴보게 되었던 것은 나와는 다른 종족들에 대한 호기심뿐이었을 것이다. 깔끔한 제복을 입고서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는 그들, 나와는 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그들.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정도의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행동으로 옮길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렇게 두어 번 정도를 마주쳤다. 아주 머저리들 급으로 약한 놈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막 달려들고 싶을 정도로 강한 정도도 아닌 수준. 항상 오는 대머리, 그리고 옆에 따라다니는 엄청나게 평범해서 존재감도 별로 없는 한 명,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항상 바뀌어서 기억하지는 못 했다. 


그 날도 경찰들이 왔다가 가는 날이었는지 유난히 깔끔한 녀석 4~5명 정도가 아부토와 간단한 인사를 하면서 나왔다. 대머리의 외모가 항상 눈에 띄어 마침 지나가는 길에 마주쳐 쓰윽 지나가려는데 순간 내 눈에 들어온 한 녀석은 나의 모든 생체리듬을 멈추게 했다. 그 녀석은 밝은 모래색 머리카락에 그렇게 큰 몸집은 아닌 체구였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서 귀찮은 듯이 분홍색 풍선껌을 불면서 관심 없이 내 쪽을 한 번 돌아보고는 홱 지나갔다. 그 순간이 너무도 느리게 흘러가고 눈빛이 쨍할 정도로 선명해서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그 녀석. 분명.. 분명히 그 녀석이었다. 집을 나온 직 후 꿈에 나타난 것을 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그 녀석. 잠깐이었지만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붉은색 눈동자도 그렇고 모랫빛 머리카락도 그렇고 여전했다. 바뀐 부분이 있다면 전보다 분위기가 조금은 가라앉았다고 해야 할까.. 무엇이든 관심 없다는 눈 빛, 앞에서 걷는 대머리와 평범한 녀석이 뒤돌아보면서 말을 걸면 무심하게 고개나 끄덕이는 정도의 조용한,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전보다 약간 마른 것 같기도 하고...


"아.. 저... 저기..."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다가 뒤늦게서야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서 팔을 뻗어 말을 걸고 싶었지만 나 답지 않게 입도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았고, 그때 마침 몰려 들어온 우리 사단 녀석들이 나를 보고는 단장, 오늘은 말이에요!로 시작하는 마구 이상한 말을 해대며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렇게 그를 놓쳤다. 


자살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꼭 죽지는 않았더라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지는 못할 것이 보였던 그였는데... 경찰이 된 걸까? 아니면 내가 잘못 본 걸까? 확실한 것 같은데..  그 녀석은 나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간 걸까? 아니, 사실 나를 본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닌데.. 나랑 눈이 마주친 거 같았는데.. 정말 그냥 단순히 닮은 녀석이었을까? 아냐, 그냥 닮은 정도만으로는 내가 그렇게나 동요할 리가 없을 텐데..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쳐다보니 아부토가 음료수를 내 뺨에 가져다 대고는 놀라는 나를 보고되려 본인이 놀라 나를 보고 있었다. 


"뭐야,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뭐 고민이라도 있어?"


하고 말하며 손에 든 음료수를 내밀었다. 


"고민? 고민은 무슨.."


"하긴, 너 같은 바보가 고민은 무슨, 고민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 사람이 하는 거 거든. 넌 머리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쪽이잖아"


"... 그렇지"


그럼 뛰어가서 붙잡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가 이렇게 혼자 생각만 하고 있다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아부토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슬쩍 물었다.


"아부토, 오늘 경찰들 왔었지?"


"응"


"어땠어?"


"뭐 어떻긴 똑같지 뭐"


오늘 온 사람 중에 연갈색 머리카락한 경찰 기억나? 그 녀석 말이야, 어땠어? 하고 물으려던 걸 꾹 참았다. 분명 내가 이렇게 한 명을 지목해서 묻는다면 아부토는 내가 또 좋은 장난감을 찾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최대한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나를 훼방 놓을 것이다. 아부토는 나를 말리지 않는다. 앞에서는 아이고, 또 시작이야, 하고 말하면서 내버려 두다가, 뒤로 움직여서 나를 멈추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아부토를 약간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다음엔 나도 갈래"


"왜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그런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정말로 얌전하게 있을게"


내가 말하는 '얌전하게 있을게'는 그렇게 큰 신빙성이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는 아부토는 제발 부탁이다.. 하고 한숨을 다시 푹 내쉬고는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참을 성이 없는 나에게 한 달을 기다리라는 것은 고문이었다.


"그럼.. 내일 한번 더 오라고해"


"뭐?"


"왜?"


"... 내일은 좀...  뭐 이유라도 있어야 불러들이지"


"그래? 그럼 부를 이유를 만들어서 불러줘. 최대한 빨리"


그 말을 남기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아마 아부토는 또다시 내 욕을 지껄이면서 이유를 만들어 내고 있겠지. 

결국 아부토는 보안상에 이상한 문제가 생겨 조금 봐줬으면 하는 일이 생겼으니 한번 더 방문해 달라는 이상한 말로 그들을 이틀 후에 방문하도록 했다.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뻐하는 나를 보고 아부토는 조금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렇게 깊이 수상쩍어 보이지는 않았는지, 나는 네가 기뻐하는 포인트를 가끔은 잘 모르겠다 하고 말하고는 웃어 보였다.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만약 만났는데 그 아이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너무 화가 날 것 같은데.. 그리고 만약에 그가 맞으면...? 그럼 그땐 무슨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하지? 분명 나를 딱 마주하게 된다면 말도 없이 떠나버린 나를 좋게 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잘 지냈어? 어떻게 지냈어? 음... 조금 막연한 질문인가? 다시 만났네, 반가워! 이렇게 말할까? 반가워..라는 말은 조금 어색한 거 같기도 하고... 많이 변했네? 이런 말은 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으려나? 


시간이 어서 빨리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침대에 누웠다. 아부토는 조금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티비를 켰다. 물론, 그가 나를 보고 좋아하지 않을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고, 바라지도 않지만 다시 만났을 때 그의 반응이 어떨지에 대해 막연한 상상을 펼쳤다. 그와 헤어지기 직전에 누워 끈적한 살갗을 맞대었던 감촉, 따스한 그 녀석의 안, 2층 침대의 1층, 드문드문 꺼져버린 방 안의 야광 별들, 조용한 집 안, 빈 공간을 가득 메우던 녀석의 숨소리... 


베개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다시 한번 그저 옆에 누워 있어보고 싶다. 다시 한번 침대 시트 사이로 그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다.  

누군가를 없애기 위해서 대기를 할 때에 느끼는 두근거림이 아닌 색다른 설렘과 더불어, 누군가를 기다리는 달콤함이었다. 분명 그를 떠나면서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그날 당일. 아부토는 나를 데리러 왔다. 심장이 자꾸만 쿵쾅거려서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도착한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본 얼굴은 항상 보던 대머리와 평범한 녀석, 그리고 처음 보는 한 명이 들어온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다른 한 명은?"


"오늘은 세명이서 왔데. 원래 세명이나 네 명이서 오거든"


세명이 오던 네 명이 오던 관심 없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그 새끼가 맞는지 확인을 하려던 거지 저딴 멍청한 낯짝을 보려고 한 게 아니라고!


나는 표현하기 힘든 실망에 화가 나기까지 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아부토에게 물었다.


"어제 이렇게 왔었나?"


"몰라 나도 맨날 바뀌어서."


"... 한 명 더 있지 않았나요?"


질문을 그들에게 던졌다. 그들은 내 질문에 서로를 잠깐 쳐다보다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한 명은 왜 안 왔는지 궁금해서."


"... 임시 대비 인원이어서 항상 오는 멤버가 아닙니다"


"아 그래? 음.... 그럼 그 한 명 이름을 좀 알려주겠어요?"


내 말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아부토는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고 대머리는 나를 한참 보다가 말했다.


"그게 왜 궁금하신지.."


"별거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작은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그쪽에게 저희 팀 인원의 신상을 알려줄 의무는 없습니다. "


건방지게 눈 치켜뜨고 쳐다보는 것 좀 봐. 


"... 아저씨는 참 말이 많네요?"


꼴에 내가 어려서인지 어이없어하는 대머리와 약간 졸은 듯한 평범한 녀석. 아부토는 옆에 있다가 놀랐는지 내 어깨를 힘주어 움켜잡고는 작게 말했다.


"이렇게 시비 걸려고 불러달라고 한 거야?"


"아니, 뭐 좀 확인할게 있어서...."


"뜬금없이 없는 놈 이름은 왜 궁금한데?"


"음.. 아니... 뭐..."


우리 둘이 속닥거리고 있는 게 조금 신경이 쓰였는지 그 대머리가 책상에서 일어나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별거 없으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무엇이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안에 그쪽하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인연이 있었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앞으로도 쭉 관심을 꺼주셨으면."


....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대답하지 못하는 나와 아부토를 뒤로하고 그들은 밖으로 나갔다. 저 새끼는 정말 운이 좋아. 조금이라도 내가 흥미를 보일만한 부분이 있었다면 이 방을 살아서 나가지는 못 했을 텐데 말이야. 쾅 닫히는 문을 보고 아부토도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었고 나도 작게 웃었다.


"됐어 이제? 저쪽은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우리도 마찬가지고.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우리 사단의 부하들이라고 생각하면 좀 곤란한 상황이 벌어져. 그니까 앞으로도 쭉, 제발 이런 일은...."


"아니 앞으로는 나도 같이 참석할래. 재밌네"


그 대머리 새끼의 도발에 내가 넘어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오지 않은 그 녀석이 내가 찾는 녀석이 맞던 아니던 내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왜인지 이곳에 있으면 언젠가 그 녀석이 올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녀석이 내가 생각하는 그 녀석이 맞던 아니던 나를 멈추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은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재밌을 것 같은 강한 느낌을 받았거든. 


네가 어떤 형태로든 내 앞에 다시 올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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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오키 제발 겨론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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