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혼/ing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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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잤다. 그 녀석은 내 옆에서 울다 지쳐 죽은 듯이 조용히 잠에 들었다. 무방비 상태의 이 녀석을 가까이 보아도, 체취를 맡아도 자석에 달려드는 쇠붙이 같은, 하지만 일방적인 열정은 더 이상 그 녀석에게 끓어오르지 않았다. 참 이상했다.


조용히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친 후에, 사각형 모양으로 깨끗하게 쌓여 있는 옷 하나를 꺼내어 입었다. 이 공간과의 이별. 마지막 인사 겸 다시 한번 쭉 이곳을 한번 둘러본다.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 보이던 레몬빛의 밝은 빛은 한 줌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이곳이 고아원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내가 여기를 떠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 일 것이다. 가져갈 것이 있나 하고 대충 둘러보다가 고아원 같은 메마른 냄새를 풍기는 이곳에서 무엇 하나라도 들고 나선다면 마치 역병의 저주받아 몰락한 왕릉의 물건을 도둑질해가는 것과 같은 찝찝하고 불쾌한 마음이 들어, 나에게 떨어져서는 안되는 우산만을 들고서 밖으로 나섰다. 문을 조용히 열고 나갔을 때에 혹시나 그 미친 새끼(누나의 남자친구)가 아직도 죽치고 있으려나? 하는 생각에 징그러운 마음이 들어 묵직한 문을 조금은 조심스레 살살 열면서 조심스레 문틈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는 초조함이 보이는 담배꽁초 여러 개를 짓눌러 남겨놓고 자리를 떴다. 만약 아직도 그 새끼가 앞에서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나는 징그럽다 못해 혐오스럽고, 무섭기까지 한 그의 집착에 참지 못하고 그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밖에 나와 천천히 옆을 지나가다 보니 누나가 떨어진 그곳에 하얗게 사고가 난 곳을 그려놓은, 돌이 가득한 정원, 그래서 곧 사라질 그 정원, 그리고 그곳을 지나가며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주민들, 그리고 학생들, 곧게 서 있는 나무, 시들어서 더럽고 추해진 꽃들.... 그런 자질구레한 풍경을 감상하며 느리게 걸었다. 떠나기에 적합한 날이었다.


이곳을 떠난다고 생각을 하니 뜬금없이 아부토가 생각이 났다. 마지막 인사는 해야겠다는 의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무엇도 아닌 감정으로 그의 거처를 찾았다. 뜬금없이 두드리는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고 나온 아부토는 잠을 자고 있었는지 그렇지 않아도 부스스한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채로 문을 열고서는 조금은 황당한 표정을 짓고서 나를 보았다.


".... 뭐야?"


문 앞에 서서 멀뚱하게 나를 바라보는 녀석을 지나쳐 안에 들어가서는 매트리스에 턱하니 걸터앉았다.


"이 녀석아, 뭔데?"


"집을 나왔어"


"가출?"


"응"


"... 그래서 언제 돌아갈 건데?"


아부토는 길게 하품을 하고서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안 갈 거야"


"뭐?"


"왜 놀라?"


"전엔 생각 없댔잖아"


"음..."


아부토는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나는 그런 그와 잠시 눈을 맞추었다가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네"


웃어 보이는 나를 보고 아부토도 덩달아 피식 웃어 보였다.

아부토가 내 옆에 와서는 저도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나를 잠시 보더니 내 주위를 둘러보고는 짐도 안 가져왔어? 하고 물었다.


"짐이 왜 필요해??"


하다못해 돈도 없을 거 아냐 너? 하고 아부토는 황당해했고 나는 아부토에게 너한테 다 뜯어먹으려고 널 찾아온 거야, 네가 와도 좋다며? 하고 말하면서 웃어 보였다. 아부토는 귀찮은 녀석을 맡았다고 투덜대면서도 배가 고프진 않냐고 물었다. 이상하게 먹을 것이 땡기지 않았던 나는 아부토가 내미는 쿠키 한 조각 정도를 물고서 매트리스에 누웠다. 낡은 매트리스는 삐걱하고 작은 신음을 했다.


"학교는 갈 거야? 학교에 가긴 좀 그런가? 아무래도 찾아올 테니까"


"찾아온다니?"


"집을 나갔다면 널 찾으러 올 거 아니야"


"그럴 사람 없어"


"가족들은? 가족들 이야기 할때 유별나던 새끼가..."


"...없어 이제"


내 말에 아부토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피곤해.. 난 좀 잘래.."


"... 그래"


아부토는 매트리스의 아래에 앉아서 나를 보고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조금은 화가 났지만.. 다른 것 따위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나는 형광등이 너무 밝아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끄집어 올리고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자마자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스르르 수면 속에 잠기었다. 그리고 컴컴하고 흐릿한 미지의 공간 안에는 두고 온 그 녀석이 보였다.

그 공간 안에서의 나는 아직도 그에게 끝없는 설레임을 느끼며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사다리로 연결되어 있는 위쪽에서 비릿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는 그 녀석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다리를 잡고 올라간 나는 전처럼 빛을 받으면 레몬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과격하게 움켜쥐고 허겁지겁 입을 맞추었다. 그 녀석의 입술, 입안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부드러워서 소름이 돋았다. 내가 살짝 입술을 떼고 그 녀석을 바라보자 그 순간 근처에 누나가 나와 그 녀석을 지켜보면서 환하게 웃어 보이다가, 이내 하얀 빛으로 파스스 바스러지며 공중으로 빛 가루가 되어 날아갔다. 그 작은 빛들은 내가 우산 없이 쏘이기엔 치명적이었는지 그 녀석을 움켜잡고 있던 내 손가락의 살갗에 검은 얼룩을 새기고, 그 얼룩 모양은 이내 타오르면서 이 녀석이 나에게 쏟아부었던 염산보다도 더 끔찍하게, 꿈틀거리면서 나를 서서히 잠식해간다. 나에게 잡혀있는 그는, 까만 얼룩에 물드는 나와 그 빛 사이에서 제 입에 묻은 내 타액을 새빨간 혀로 햘짝 햘짝 핥아 보이며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바스라들어 사라지는 그 순간에도 나를 향해 악랄하게 웃어 보이는 그가 어찌나 사랑스러워 보이던지.. 딱 한 번만 더 키스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나에게 있어, 언제까지나 내 우위에 위치한 채로 눈이 부셔서 쳐다도 보지 못할 치명적인 빛을 두르고, 속에 어둠을 숨긴 채로 있어야 했고 나는 그런 그와 연결되어 있는 금기라는 이름, 천국의 계단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면 타 죽어버리는 그런 운명이었다... 그러나 내가 끌어내린 것인지 네가 내려 온 것인지, 우리의 위치는 네가 더욱 나의 아래로 내려가는 것으로 변해버렸고 타 죽어버리는 것은 네가 되었다. 아마도 그 녀석과 나의 상하 관계가 처음과 같은 자리에서 유지되었다면 나는 너를 지속적으로 사랑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내 심경의 변화는 아마도.., 우리의 정사를 지켜보던 누나의 마지막 저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꿈속은 너무 깊고 어두워서 조금은 나를 추위에 떨게 만든다.












-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본 것은 히지카타의 얼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면서 뭐지 하는 생각에 눈을 비비려 손을 올렸다. 무언가 조금 불편한 이물감이 느껴져 팔 쪽을 보니 올린 손에 줄줄이 따라오는 링갤 선들. 히지카타는 내 얼굴을 감싸고서는 내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정신이 들었냐면서 내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숨 막혀..! 나는 그에게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히지카타는 자꾸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겠냐, 와 같은 너무나 기본적인 질문을 해댔고 나는 가볍게 욕을 지껄였다. 그 모습에 히지카타는 다행이라며 다시 나를 껴안았다. 그의 품에서 겨우 빠져나와 그를 보니 어째서인지 히지카타의 모습은 전보다 약간 달라져 있었다.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들이닥친 간호사들과 의사는 내 눈에 빛을 비춰보거나, 열을 재보거나, 혈압을 체크하는 등등 분주하게 나를 실험체마냥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리고는 다행히 모든 게 정상적이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혹시나 이상이 있다면 말해달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시 내 앞으로 다가선 히지카타. 아, 알았다. 그가 달라진 점은 그가 경찰 제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 히지카타.. .. 그거 경찰 제복 아니야?"


"아, 어쩌다 보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선생님은 별로 적성에 맞지 않아서"


그는 약간 서글퍼 보이는 미소를 내 앞에서 지어 보이고는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는 나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내 곁을 지켜주다가 집에 돌아가던 히지카타는 삼일 정도 지나자 잠깐 걸을 수 있어? 하고 물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옆에 있는 링거 거치대를 가리켰다. 그러자 히지카타는, 내가 너냐 이런 걸 모르게? 네가 걸을 수 있냐고 묻는 거야. 하고는 또다시 조금 슬픈 눈으로 나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누가 보면 내가 다리라도 잘린 사람인 줄 알겠다. 나는 보란 듯이 아무렇지 않게 바닥에 다리를 내리고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날따라 왜인지 당연히 아무렇지 않게 서야 할 내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만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상하게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


갑자기 당황해하는 나를 보고 히지카타는 풋 하고 작게 웃고서 나를 일으켜 부축을 하고는 휠체어에 나를 태웠다. 뭐지. 휠체어에 앉아 그가 끌어주는 대로만 가야 하는 이런 수동적인 기분은 별로였다. 바람을 쐬자면서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갔다. 바깥공기가 시원했다. 간만에 보는 빛이라 그런지 너무 눈이 부셔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마나 지났는지 안 물어봐?"


"... 얼마나 지났는데?"


"5개월"


"...?"


나는 놀라서 내 뒤에서 내 휠체어를 끄는 히지카타를 돌아보았다.


"기억 못할 것 같다고는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로 5개월이 지났어"


그 말에 나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어 달력을 보려 했다. 하지만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나에게 핸드폰이 있었을 리가 없었고, 히지카타는 제 말을 증명해 보이듯 제 핸드폰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5개월 전에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히지카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상상을 해보려 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전에.. 그전에 나는 어째서 기억을 잃었을까. 그리고 이내 번뜩 떠오르는 경찰의 한 마디. 


'누나로 보이는 분이 자살을....'


그리고 나서 떠오르는 새하얀 천, 그리고 하얀 얼굴.. 


".... 나.. 다쳤어?"


"아니"


"그럼?"


히지카타는 한숨을 한번 쉬고, 하늘을 한번 보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서 물었다가 아차 싶었는지 다시 담뱃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 형은 어디에 있니?"


형...?


"전날 뻔히 나와 이야기도 했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네"


한숨을 잠깐 쉬는 히지카타를 잠시 보다가 말했다.


"... 그...그 새끼는 그렇다 치고.... 나는 우선 내가 기억 못하는 날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


"나중에..."


"지금 해줘"


"알겠어. 그니까 나중에..."


"지금 당장 해줘!!"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히지카타는 한참의 말없이 있다가 씩씩대는 나를 한번 보고 말했다.


".... 지금 이런 말을... 해도 될진 모르겠다만..."


히지카타는 이 말을 띄워놓고 한참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무겁게 입을 뗐다.


"네가 나에게 그랬어, 미츠바가 자살을 했을 리가 없다고, 누나가 나를 두고 이렇게 무모하게 갈 리가 없다면서 거의 실신에 가깝게 나를 붙들고.... 어.. 그래 아무튼 나도.... 내가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을 했어. 하지만 정황상 자살이래... 그리고 나에게도 뭐 이상한 질문을 하는데 그런 질문들에 어느 것도 해당이 되지 않아서 더 미치겠더라."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멍한 정신 상태로 이야기를 들었다.


"경찰 말로는 네 형이 제일 처음으로 경찰서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갔데. 그 녀석도 똑같이 슬픈 표정으로, 누구보다 우울한 표정으로 그럴 리가 없다면서, 그날 자신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더라. 그다음에 도착한 너와 나는 부검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경찰의 말 때문에 다음날같이 오자면서 집으로 돌아왔어. 내가 너 집에 데려다준 것은 기억나? ....역시 못하는 것 같네. 널 데려다주고 나서 네가 너무 걱정이 되서 다시 찾아갔었어. 근데 너와 함께 있던 네 형이 나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이야기하더라. 예민한 상황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밖에서 좀 기다리다가 학교에서 급하게 찾는 일이 있어서 잠깐 자리를 떴어. 분명히 나는.. 그때 자리를 비우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나중에 했고... 그리고..."


"그리고?"


"아냐."


"계속 말해줘"


"...... 그 이후로 다음날에도 문을 두드려도 네가 아무 말이 없는 거야. 진짜 안되겠다 싶어서 문을 당겼더니 전엔 잠겨있었던 문이 그냥 스르르 힘없이 허무하게 열리더라. 그리고 네가.. 흰색 셔츠만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서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로 샤워실에 쓰러져 있더라고... 내가 그때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 나 혼자 있었어?"


".. 응"


순간적으로 누나는? 하고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이제야 확실 알았다. 누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충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나 보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질끈 물었다. 


"네가 쓰러져서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 했던 것은 아니야. 눈도 떴고 나와 드문드문 이야기도 했어. 근데 제정신이 아니었을 뿐이지. 이제야.. 정신을 찾았나 봐."


"..."


".... 미츠바는 내가.. 잘.. 보내줬어. 다음에 같이.."


"아냐. 혼자 갈 거야. 어딘지만 알려줘"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히지카타는 내가 울고 있는지 어쩐지 몰랐을 것이다. 내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는 히지카타에게 이런 꼴사나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눈물을 닦지도 않고 그저 흐르게 두었기 때문이다. 


히지카타는 어째서 인지 몇 번이나 카무이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지만 나는 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히지카타도 내게 네 형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하고 물었다가, 아니.. 혹시 갈 만한 곳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 거야. 하고 질문을 고쳤다. 하지만 나는 그 녀석이 갈 만한 곳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본능적으로 그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혹여나 찾는다고 해도 그가 다시 내 옆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였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히지카타에게 말했다.


"찾지 마. 그 녀석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아니 나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는 거야. 그래서 떠난 거고"


"... 떠나?"


"응. 그냥 그런 확신이 드네"


"아니, 나는 그저 좀 알고 싶은 게..."


"찾지 마. 아마 찾지 못할 거야. 나 역시 알고 있는 것도 없고."


단호한 나의 말에 히지카타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다음날 병원에서는 곧 퇴원을 해도 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고 했다. 처음엔 후들후들거렸던 다리도 이내 다시 전처럼 회복되었고.. 히지카타는 내게는 없는 부모처럼, 누나처럼 항상 나를 찾아와서는 괜찮으냐고 묻고, 내 상태를 묻고 날 챙겨주었다. 그 모습이 나는 또 괜시리 심통이 나서,


"이제 누나도 없는데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뭐야?"


하고 심술궂게 묻거나, 이제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괜한 신경질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히지카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 자신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조바심이라는 것을.


히지카타가 돌아가고 나서 혼자 있는 병실에서 바깥의 풍경만을 보면서 생각했다. 차라리 여기에 있는 게 나을수도 있겠구나. 집에 돌아가면 그 큰 집에 내가 혼자 있게 될 것이고, 선생님도 아니고, 누나의 애인도 아닌 히지카타는 더 이상 나와 만날 이유도 없을거야. 지금이야 만나고 있던 전 애인이 죽었다는 데에서 오는 죄책감 때문에 나를 찾아주고 있는 것이겠지만...



신이 있다면 누나까지는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너무 순진했고 자기중심적이었다. 신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너무 성급하고 멍청하게 소원을 빌었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신은 그저 내 소원에 충실하게 소원을 이루어 주려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의 바람을 이뤄주기에 신은 단 하나였고 모든 사람의 소원을 모두가 충족할 만한 방안을 찾을 만큼 신중할 수 없었기에 이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빌었던 그대로 히지카타는 어쨌든 누나와 헤어진 형태가 되어버렸고, 내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그 녀석 역시 홀연히 나를 떠났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탓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멍한 상태를 유지할 수 밖엔 없다.






히지카타는 내가 퇴원을 하자마자 내 집이 아닌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뭐 축하 파티라도 해주려나 싶어서 잠자코 따라갔는데, 그런 것을 할 정도로 자상한 새끼는 아니다. 이 녀석의 집도 딱히 달라진 것이 없다. 누나가 선물로 사주었던 시계도 그대로 시간을 가리키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뜬금없이 나에게 말했다.


"이제 나랑 같이 살자"


........?


"다시 학교도 다니고.. 조금 뒤처져 있지만 병 때문이라고 해놨으니까..."


"... 안 갈래, 학교"


"왜"


"그냥 싫어"


학교에 돌아가면 다시 또 떠오르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의 잔상이 끊임없이 나를 따라다닐 것이고, 무엇을 하던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잔인하리만치 아름다웠던 우리 집 앞에 나도 모르게 서 있을 것만 같아서. 


히지카타의 온갖 반대를 전부 다 모르는 척하고서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우리 집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히지카타와 살게 된 것도 싫지만 집에 가는 것도 싫어..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히지카타는 오늘도 출근을 했다.












-

한참을 아부토의 집에서 뒹굴다가 아부토에게 몸담고 있는 조직에 나도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시치미를 떼고서 어딜? 하고 묻는 이 새끼. 전에 몇 번 이야기했던 적이 있잖아? 하고 말하자 아부토는 딱 잘라서 안된다고 말했다. 


"왜? 내가 네 위가 될까 봐?"


"그러겠냐? 여튼 안돼"


이런 대화가 종종 이어지고 끊어지고 했지만 나의 끈질긴 부탁과 협박에 가까운 투정에 결국 아부토는 두 손을 들며 항복을 표하고서 나를 딱 한 번만 구경시켜주겠다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리고 그 날 바로 발탁이 되어 7사단에 들어가게 된 나, 돌아오는 길 아부토는 걱정이 되는지 자꾸만, 다시 생각해봐 넌 너무..... 여길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지금이 아니면 힘들어. 하고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이미 잔뜩 강한 어떤 놈들과 싸울 기대에 부풀어 그런 말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이름은 하루사메. 정부에서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몸집이 큰 조직이었고, 그렇게 나는 햇빛과 동떨어진 생태로 차차 숨어들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적응이 빨랐던 나는 아부토와 내가 몸담고 있던 7사단의 단장이 되어 내 아래의 단원들이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광경을 본다. 무언가를 쫓고, 쫓기고, 죽이고, 은폐하고, 가끔은 수상한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감금하고, 때로는 빼앗고, 고문하고... 이렇게 재미있는 것들을 내 자유로 휘두르면서도.. 그럼에도 가끔 메워지지 않는 허전함은 나를 또다시 쓸쓸하게 만들었고 허전함이 찾아왔을 때의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마냥 불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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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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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했던 낮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게 날씨가 어둑어둑해지면서 조금 쌀쌀해졌다. 뺨을 간지럽히는 바람도 갑자기 거세게 할퀴고 지나갔고 나는 그런 바람의 손짓에 뺨을 한번 어루만졌다. 유난히 섬뜩한 느낌이었다.


항상 불길한 일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고, 뜬금없이 모르는 번호로 연락을 해온 경찰은 무슨 대단한 말을 할 것처럼 뜸을 들이다가 나에게 다짜고짜 찾아오라고 했다. 무슨 일 때문이냐고 물어도 전화기 너머의 경찰은 자꾸 말을 더듬거리면서, 음.. 우선, 다른 연락은 아무것도 못 받으신 거죠? 혹시 누나 되시는 분과 함께.... 있었나요? 흠... 우선 잠시 방문해주시겠어요? 00경찰서입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나는 별생각 없이 야마자키를 괴롭히면서 놀다가 곧바로 헤어져서는 경찰서로 향했다. 가는 도중 히지카타에게도 두어 번 전화가 왔지만 또 잔소리 따위를 늘어놓을 것을 알기에 받지 않았다. 경찰서라.. 조금 무섭기도. 내가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혹시 한참 전에 그 녀석에게 부어버린 염산 때문에? 그 새끼가 혹시나 지금에 와서 뭔가 말한 것일까? 에이,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뭐 밝힐게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약간의 불안함에 떨다가 누나에게 문자를 했다.


[누나, 오늘 바깥은 날씨가 급격히 안 좋아요]


답장은 없었다.


찾아간 경찰서에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내 정보를 말하자 어떤 경찰이 아는 체를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고릴라를 닮은, 턱에 있는 약간의 수염이 조금 꼬질꼬질해 보이기도 하는 아저씨였다. 그리고는 나를 불러 놓고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음.... 조회를 해보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셨더라고.... 그래서 남자친구라는 분에게도 연락을 드렸는데.. 혹시 연락은 받았니?.."


무슨? 남자친구라니, 히지카타를 말하는 건가?


"음.. 남자친구요? 누나의 남자친구 말씀하시는 건가요? 히..히지카타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연락은 왔는데 받진 않았어요"


"그래.. 그럼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구나"


"뭐가요?"


그 경찰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입안에 나에게 할 말을 잔뜩 물고 뱉지 못한 채로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다가 무언가 괴로운 듯이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가 다시 말했다.


"누나...로 보이는 분이 자살... 을 했어"


"네?"


"혹시 우울증이나 정신병이라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하... 아니,... 우선 확인을.."


그는 나를 어디론가 안내했다. 내가 무엇을 보든 간에 앞으로 보게 될 것은 나와는 절대적으로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을 하고, 무언가의 오류가 있다고 단정 짓고서 당당하게 그를 따라나섰다. 그를 따라가면서 엄마와 아빠의 장례식 전에 보던 그 차가운 영안실의 오싹한 기운이 내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와서 온몸이 덜덜 떨리었다. 설마.. 누나까지..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신이 있다면.. 신이 있다면 나에게 하나 남은 누나까지 빼앗아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들어간 곳에 몸채가 작은 한 명이 엄마와 아빠처럼 흰 천을 덮은 채 누워 있었고 그 흰 천을 걷어 올려 마주한 그 얼굴은 정말로 하얀 누나였다. 엄마와 아빠와 마찬가지로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옆에 놓인 피가 튄 하얀색 신발, 즐겨 입던 파스텔 색상 옷, 부서져버린 핸드폰, 작은 진주가 박힌 귀걸이 등등 모든 것들이 내 앞의 그 시체가 누나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맞나요?"


"..... 아..... 네.."


혼이 나간 것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경찰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며 함께 하자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들었음에도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한참을 넋이 나간 상태로 서 있었다. 


"소고!"


어떤 목소리가 나를 반사적으로 돌아보게 만들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곳에는 히지카타가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면서 나에게로 황급히 달려왔다. 이상하게도 이 녀석을 보자마자 참으려 해도 참아지지 않는 눈물이 왈칵 솟구쳐서 앞에 오자마자 망설임 없이 나를 와락 품에 끌어안는 이 녀석의 품에서 한참을 격하게, 더럽게, 미친 듯이 울었다. 하지만 내가 왜 울고 있는지, 왜 우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멍청하게 아무런 정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멍했다. 나의 뒷머리를 쓰다듬는 그 커다란 손의 감촉을 느낌과 동시에 주변의 소리가 안개처럼 번지고 심하게 변형되더니 서서히, 서서히... 사라졌다.












-

소파에 누워서 나른하게 잠을 자고 있다가 집 문 앞에 울리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왔다. 그 녀석은 반쯤 정신이 나간 표정을 짓고서 집 앞으로 힘 없이 돌아왔을 것이다. 누나의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지 문 밖이 시끄러워서 저절로 인상이 찌푸러진다. 소고, 그러지 말고 일단 나랑 같이 있자.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래. 아.. 아냐 가봐요 바쁠 거 아냐. 안 바빠, 그냥 우리 집에 같이 있자. 싫어. 나... 지금 일단 혼자 있고 싶어. 가. 못 가겠어. 가요. 못 가겠다니까? 진짜로 내가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요. 제발... 그냥 가주세요. 내일, 내일 와요 그러면. ...그래? 응. 진짜로. 그래.. 그럼 내일 다시 올게. 무슨 일 있으면 꼭... 꼭 연락하고.... 네가 전화하면 나 바로 뛰어올 테니까..


저 지루한 대화의 반복이 한참을 반복하고 질질 끌다가 드디어 끊어졌고 오키타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누워있는 나를 인식하지도 못했는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방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그리고는 침대의 한 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서 얌전히 흘러내려 있었다. 누나와 그 녀석의 눈치를 보던 나로서는 누나가 없는 지금은 최적의 환경이었고 여태껏 참아왔던, 나 답지 않게 눈치를 보던 그 불쾌한 감정이 모조리 날아가는 그 폭발의 순간이었다. 침대의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웅크린 그 녀석은 내가 가까이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듯 잠자코 앉아 있었다. 


"... 오키타"


그를 살짝 부르고는 그의 옆에 붙어 앉았다. 귀를 살짝 덮고 있는 모래색 머리칼을 한번 넘겨주었다. 귀바퀴가 동그란 해서 예쁜 모양이다. 그는 반응이 없었다. 귓바퀴를 혀끝을 들어 슬쩍 핥아도, 귓볼을 입술로 가볍게 깨물어도. 고개를 돌려서 그의 얼굴 앞으로 내 얼굴을 디밀어 눈을 맞춰도 초점 없는 그 흐린 눈동자엔 내가 비치지 않았다. 상관은 없지만..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너는 모르겠지만.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설렘과 함께 떨리기도 하고, 무언가 조심스럽기도 해서 조금 벌어진 입술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려 다가가는 그 짧은 순간이 한 컷 한 컷 끊어지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살짝 맞댄 입술이 도톰했다. 하지만 입술도 살갗도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그렇게 차게 식어있어도 입안은 따스했고 내가 먹는 그 어떤 것보다 맛있어서 그렇게 한참을, 인형같이 두 눈을 뜨고서 멍하니 허공을 헤매는 이 녀석의 머리칼을 한 손으로 움켜잡고 (손을 놓으면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인형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한참 동안 그를 빨아먹었다. 조금은 숨이 차는지 미세하게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금, 아, 이 녀석 깨어있구나. 나와의 키스에 숨이 가빠하는구나, 하는 희열에 볼을 맞대고 그의 이마, 눈, 코 끝으로 차례로 입술을 가볍게 맞추고서 곱게 펼쳐있는 하얀 시트 위로 그를 짓눌러 눕혔다. 힘없는 목각인형이 선반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듯이 그는 내가 눕히자 손을 톡 떨구며 시트 위로 힘 없이 내가 조종한 대로 쓰러졌다. 초점 없이 게슴츠레 뜬 눈은 입맞춤만으로 한껏 흥분해버린 창녀같이 비추었다. 항상 나를 미치게 만들던 그 순간이 정말로, 정말로 찾아온 것이다. 입고 있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려갈 때도 믿기지 않는 흥분과 희열에 몸이 미세하게 떨리었다. 드러난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갑자기 집의 초인종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올 사람도 없는데 뭐, 하고 완전히 무시를 하고서 이 녀석의 조금은 식은 상태의 온기만을 느끼고 있을 즈음, 초인종을 누르다 누르다 열받았는지 정체 모를 미친 새끼는 다소 과격하게 문을 발로, 그리고 주먹으로 쾅쾅 내리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소고! 소고!! 잠깐 문 좀 열어봐. 소고!!"


특유의 낮은 저음의 목소리, 그리고 이 녀석을 소고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마자 문 밖에 있는 녀석이 누나의 남자친구라는 것을 알았다. 이 녀석과 헤어질 때의 대화에서도 끝까지 이 녀석을 잡아두고 싶어 했던 것을 보면 걱정이 되어 이 녀석을 데리고 가기 위해서 다시 돌아온 듯했다.


"소고! 안에 있지? 문 좀 열어봐! 아무래도 너무 걱정이 돼서ᅳ"


내 아래에서 흐릿한 눈, 그리고 손목을 떨구고서 쓰러져 있는 그를 한번 보고, 그리고 밖에서 문을 요란스럽게 두드리는 그를 한 번 생각하다가 문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갔다. 조금 화가 나 있었다. 누나도, 누나의 남자친구라는 이 새끼도 비슷하게 나를 방해하는 똑같은 부류였기에 절대로 내가 그와 얼굴을 마주할 생각도 없고 오키타 녀석을 보여줄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문 앞에 서서 잠깐 뜸을 들이다가 그에게 말했다.


"... 누구세요?"


"뭐야, 장난해? 나야 소고! 잠깐... 잠깐.. 문 좀 열어봐"


"오키타는 지금 자고 있어요"


"... 누구..?"


"그쪽은 누구세요?"


"아.. 미안. 전에 미츠바와 소고가 말했던 소고의... 소고의,  형이구나 맞지?"


"아, 형?..... 뭐... 네."


"미츠바의.. 남자친구야.. 소고는 괜찮은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


"자고 있어요"


소고, 소고, 소고.. 시끄럽네.


"그래 알았어. 근데 잠깐 문 좀 열어줄래?"


"왜요"


"아니, 나는, 소고 녀석이 너무.. 너무 걱정이 돼서―"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괜찮아요 돌아가세요"


"... 내가 너희를 도와줄게. 나는 소고와 너를 ..."


"필요 없어요. 오지 마세요. 그리고 더 이상 문 이렇게 시끄럽게 두드리지 마세요. 시끄러워서 정신분열이라도 일어날 것 같아요"


그 말을 하고 혼자서 작게 킥킥 웃었다. 


"... 저기, 지금.. 상황이 예민해서 그런 것 같은데.. 너무 적대심을 품지는 마. 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시는 거예요?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어요. 나는"


그 말을 마치고 다시 우리의 침대로 돌아왔다. 내가 뒤돌아서 돌아올 때에도 그는 무어라고 말을 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듣지는 못 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말을 더 이상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명확히 했기 때문인지 그는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도, 소리를 지르면서 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 앞에서 자꾸만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가 혹시라도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같이 미세한 발자국 소리를 남기며 집 문 앞을 배회했다. 그 소리가 퍽이나 거슬려 청각을 곤두세우면서 예민해졌지만 다시 나의 모든 신경을 잡아 끈 오키타는 침대 위에서 그 어느 것도 듣지 못하는지 내가 막 풀어 해쳤던 셔츠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 떨궜던 손 모양까지도 그대로 보존하고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얌전한 모습은 전에 그가 내 앞에서 잠에 들었을 때나 별다를 점은 없었지만 그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나의 기분은 완전하게 달랐다. 일단 이 더러운 창녀 같은 표정이 나를 꼴리게 만든다.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마저 풀어 헤치고 작게 위치한 유두를 손끝으로 건드리면 미세하게 반응하며 솟아오르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입안에 가득 담으면 작게 굴려지는 것도 좋아. 하얀 속살, 가슴, 옴폭한 배꼽,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면서 목덜미에서 희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체취가 너무 달아서 모두 마셔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축축한 혓바닥으로 목덜미를, 쇄골을 달콤한 사탕을 핥아먹듯이 한참을 게걸스럽게 핥았다. 단단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비틀자 텅 빈 눈을 한 그는 약간 몸을 움찔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움찔하는 그 반응을 자꾸만 보고 싶어서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괴롭혔다. 그러자 그 녀석은 작은 야한 소리를 조금씩 힘없이 뱉으며 하지 말라는 듯이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잡았다. 하지만 힘이 하나도 없어서 나를 저지할 의사가 없다고 느꼈다. 


힘 없는 그의 다리를 벌리고서 누나의 방에서 집어온 로션을 잔뜩 손에 들이부었다. 툭툭 떨어지는 미끄덩하고 차가운 감촉, 그리고 나와 이 녀석 사이로 퍼지는 누나의 향기. 옆에 누나가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참을 수 없는 배덕감과 내 아래에 깔려 곧 내가 가지게 될 이 녀석의 음란한 육체에 내 몸이 찌릿찌릿 울리며 안달이 난다. 


이 녀석은 퍼지는 누나의 향을 맡자마자 느리게 반응하고서는 무의식 안에서도 슬픔이 가득 찼는지 울었다. 누... 누나.. 누나.. 하고 더듬거리며 중얼거리면서 얼굴 옆선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는지 얌전한 태도로 그저 그렇게 흐르게 내버려 두었다. 눈물도 꽤나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다리 사이의 구멍으로 손가락을 한개 집어넣자 그는 아앗.. 하고 짧은 교성을 냈다. 하지만 저항할 힘은 없는지 그 답지 않게 순순했다. 전에 나에게 염산을 들이부을 생각을 하면서 즐거워하던 그런 영악함과 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거친 모습도 없었다. 손가락을 세 개까지 늘려 그의 안을 헤집어도 그는 야한 교성만을 내지르면서 시트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서 여전히 소리를 죽여 울면서 손끝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하다못해 욕설이라도 지껄일 줄 알았는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침대 위에서는 이런 모습인 것일까? 하는 의외성에 조금은 놀랐다만, 이미 잔뜩 젖어버린 그 녀석에게 나를 어서 집어 넣고 싶은 마음만이 앞서버렸고 이미 모든 근육이 풀려 쓰러질 것 같은 이 녀석의 허리춤을 붙잡고 접촉시켰다. 들어간 그 녀석의 내부는 굉장히 따스했다. 고통에 파르르 떠는 이 녀석의 다리 근육을 한번 쓸어주었다. 질척거리는 야한 소리와 함께 억제되지 않는 충동에 속도를 붙이자 그는 숨이 넘어갈 듯한 헐떡임과 함께 끊어지는 신음 소리를 드문드문 내면서 그만하라는 가장 연약한 표시로써 나에게 손을 뻗었다. 


아앗!..아...아파...요... 그...그만....그..만....아...아파...요 아아!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얼굴 모를 어떤 사람에게 강간을, 아니 강간이 아닌 그저 알 수 없는 고통 만을 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과 헐떡이며 몰아쉬는 숨이라던가, 드문드문 내지르는 교성이라던가.. 분명 그가 내는 소리는 야했지만.. 야하면서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이 녀석을 가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고 줄곧 이렇게 하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알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그..만.. 아앗! 하..아악.... 아..아파요...! 그..그마안... 하악...!. 


일방적인 정사가 끝나고 그 녀석의 살갗에 진득한 흰 액체를 흘리고 나서는 그 녀석의 텅 빈 눈, 그리고 나에게 쓰는 답지 않은 존댓말에 조금은 허무함을 느꼈나 보다. 행위의 끝에서 쾌락 후에 찾아온 허무함은 잔인할 정도로 나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분명히 나도 처음이고 이 녀석도 처음 임이 틀림없는 행위였기에 아직은 좋다는 생각 만을 하기에는 이른 것이었을까? 이 녀석이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오는 서운함이었을까? 추욱 처져 있는 그 녀석 옆에 얌전히 누워서 아직도 채 가시지 않은 고통에 숨을 몰아쉬며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녀석의 뺨을 쓸어내렸다. 뺨에 슬그머니 닿은 내 손길에 갑자기 조금은 정신이 드는지 흐릿한 눈동자에 초점이 살짝 돌아오며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쳤다. 돌아온 눈빛을 보고 이 녀석이 나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드디어 이 녀석이 옆에 있는 나를 알아본 것이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움찔했다. 이 상황을 인식하고서 무어라고 이야기를 해올까? 눈물 가득한 눈으로, 채 닦지도 않은 상태로, 게다가 조금은 상기되어 발그레한 얼굴로 나에게 욕설이라도 한다면 나는 잠깐 느꼈던 허무함 따위는 바로 잊고, 흥분을 참지 못하고서 한 번 더 하고 싶어 막무가내로 덮쳤을지도. 하지만 그가 한 말은,


"... 나는.... 네가.. 있어서..."


"나?"


".....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 엄마는.. 누나는.. 본인들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알고서... 너를 데리고 오자고 했을까?"


세상에, 이 녀석이 나를 알아보고서 한 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내 정액 냄새와 누나의 화장품 냄새를 뒤집어쓰고서 하는 말이 저딴 말이라니. 너무 실망스럽다 못해서 좆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내가 아는 네가 아니었다. 얌전해서 재미없어. 왜 이렇게 깨져버린 거니? 나는 네가 나에게 햇빛을 빼앗아갔을 때도 아무렇지 않게 덤덤했잖아. 그러면 너도 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똑바로 서 있어야지. 이제야 우리는 완벽하게 동등해졌는데..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위에 올라타서는 전에 그 녀석이 나에게 행했던 것처럼 양손으로 목을 서서히 조였다. 그러나 그는 켁켁 대기만 할 뿐,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하지 못 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서 서서히 차오르는 죽음이 나에게 보였다. 사실 나는 신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죽음에 관여하고 손짓하는 신. 너에게도 가져다줄 죽음. 하지만 이미 다 깨져버린 너의 모습에는 죽여야겠다는 흥미조차 가지지 못해서 이내 손을 풀고 곧 갉아먹어 올 어둠의 그림자로 내던졌다. 


하지만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 그래서 나는 너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가졌고, 그렇게 끝냈다. 
















-

조금 짧다고 느끼는건....아마도..기분탓...일거예요...ㅠㅠ

카무오키 행쇼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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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허공에 매달린 아빠를 본다. 경직된 표정과 추욱 처진 모습은 꽤나 괴기스럽다. 눈을 히번득하게 뜨고 있어서 나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꽤나 높은 곳에 매달려 있어서 끌어내리는 것도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올려다보고 있을 때에 마침 전날 무얼 두고 온 게 있다며 허겁지겁 달려온 A가 급하게 문을 급하게 열고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열린 엄마의 방문, 그리고 낙지의 형상으로 매달린 아빠, 그리고 그런 아빠를 올려다보는 나를 경직된 모습으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양손에 잔뜩 들고 있던 짐들을 모두 떨어 트린 채로 주저앉아서 그 어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하얗게 질려서는 벌벌 떨었다. 사... 장님..... 뭐... 뭐.... 하고 귀머거리가 말하듯이 말을 더듬으면서 숨을 헐떡거린다. 그리고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지 나를 쳐다보더니 뜬금없이 나에게로 달려들어서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무... 무서웠지?"


나를 와락 안은 A는 너무 심하게 떨고 있어서 무서웠느냐고 물은 것은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본인에게 하는 말인 듯했다. 나는 되려 아무렇지 않게 두 눈을 깜빡이고 있었으니까.


A의 신고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집안을 살피다가 옷장에 숨겨져 있는 엄마를 보고는 욕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고 A는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떨었다. 그 직후 나와 그녀는 경찰에게 끌려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진술을 했다. 나에겐 많은 질문은 하지 않고 간단하게 '혹시 엄마와 아빠가 사이가 좋지 않았니?'라던가 '엄마와 아빠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지는 않았어?' 하고 물어보긴 했지만 나는 거의 모르겠어요, 모르겠어요 하는 말을 반복했다. 결국 나는 운명의 이끌림처럼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왔다.


경찰을 통해 대충 사건의 진상을 들은 원장은 다시 돌아온 나를 보고는 머리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어서 들어오라면서 나를 다시 안내했다. 내가 없었던 짧은 기간 동안에 고아원은 꽤나 많이 변했다. 처음 보는 얼굴도 많았고, 후원을 꽤 잘 받았는지 시설들도 많이 변했다. 뜬금없이 생각나서 물어보니 전에 내가 때렸던 그 남자아이는 결국 나무의 삶을 끝내고 흙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엄마와 아빠에게 그런..... 일이.... 안타깝구나.."


"네"


"이제 어떻게 할래?"


"뭘요?"


"넌 여기를 굉장히 싫어하지 않니?"


이 늙은 여우 같은 원장은 이런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은 굉장히 빠르다.


"... 얌전히 있을게요"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원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허탈함에 가까운 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그렇게 웃을 줄도 알고.. 입양을 갔다 오더니 많이 변했구나?"


사람은 변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나 보다.


원장은 내가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뤄졌다. 나는 8개월 후에 또다시 입양에 선택되었던 것이다. 이번에 온 부모와 옆에 있는 누나는 딱 보기에 조금은 껄렁껄렁해 보이는 분위기였지만 원장의 눈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나 보다. 원장은 나에게 그들을 아주 친절하고 좋은 분들이라면서 소개해주었다. 새로운 엄마와 아빠는 둔해 보이는 뚱뚱한 외모, 그리고 누나라고 소개한 여자는 부모와는 반대로 깡마른 외모에 눈두덩이를 까맣게 칠해서 마치 박쥐 같았다. 가기 전에 또다시 원장은 나를 붙잡고, 과거의 일에 대해서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 다시 한번 조언했다. 나는 웃으면서, 네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다.


전의 엄마와 아빠에 비하면 돈이 많은 집도 아니었지만 전과는 다르게 대화는 많았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도 내내 시끄럽게 수다를 떨었고, 내 옆에 앉은 누나는 나에게 새빨간 체리 맛 사탕을 하나 주었다. 누나는 나보다 나이가 꽤나 많았고 보라는 듯이 가슴이 깊이 파인 검정색 옷을 입고 있었다. 


"몇 살이야?"


내가 대답하지 않자 뾰족한 손톱이 달린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꾸욱 누르면서, 귀엽네. 하고는 길다란 눈 꼬리를 휘며 웃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도착한 집은 조금은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옷들이 널려 있었고 휴지통을 비우지 않아서 휴지통 안에 쓰레기도 한가득 있었다. 내가 전에 정말 좋은 집에서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엄마와 아빠가 죽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기도 했다. 음... 아빠는 내가 죽인 것일까?


엄마가 소박한 밥을 해주고, 아빠는 늘어진 셔츠를 대충 입고서 티비를 보고, 누나는 매니큐어를 바르면서 오후를 보낸다. 평범한 집들은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 달 정도가 지났다. 내 방은 햇빛이 많이 들지 않는 작은 방이었는데 밤마다 밖에서 고양이가 울어대는지 고양이 울음소리가 묘하게 앵앵대서 시끄러웠다. 묘하게 기분 나쁜 소리여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에 들었다. 


누나는 엄마와 아빠보다 나에게 조금 더 말을 자주 걸었다. 


"내가 네가 좋다고 했어. 뭐라고 해야 하나.. 처음 봤을 때 뭔가 덤덤한 것 같은 웃음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건가요?"


"... 응? 아,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그랬다고"


첫인상부터 지금까지 쭉 그녀가 하는 말은 사람을 유쾌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계속 밤마다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더불어, 하루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누나의 방에서 울리는 날카로움에 가까운 울음소리와 삐걱대는 마찰음, 살갗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듯한 찰싹대는 소리에 열려 있는 방문을 빼꼼 쳐다보았다. 그 안에서는 낯선 남자와 누나가 맨살을 맞대고서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이 처음 보는 광경이어서 꽤나 많이 놀랐다. 그리고 누나와 눈이 마주치자 누나는 그 어느 때처럼 가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을 보자 그 행위가 누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혐오에 가까운 불쾌감이 엄습해 그대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서 앉아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집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연속으로 들리고서 그 이상한 행위가 끝났는지 누나가 나의 방문을 두드렸다. 


"카무이, 방에 있지?"


나는 누나가 더럽게 느껴져 문을 열지 않고서 대답만 했다.


"... 네"


"나와볼래?"


"왜요?"


"미안해, 누나 남자 친군데.. 놀랐지? 이제 갔어! 조금 있다가 잠깐 누나 방으로 와"


누나는 그 말을 내 문 앞에서 일방적으로 쏟아내고는 콧노래와 함께 사라졌다. 잠시 생각을 하다가 누나의 방으로 찾아가자 누나는 여전히 옷을 입지 않고 수건 하나를 몸 위에 걸친 채로 침대에 나른하게 추욱 처진 채로 누워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고서 다리를 양 옆으로 쩍 벌리더니,


"궁금하지?"


하고 물었다. 뭐가요? 하고 대답을 하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멍하니 있을 때 누나는 제 음부에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내 앞에서 자위를 했다. (그때 당시에는 무얼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한참을 제 음부를 쑤시며 교성을 지르며 풍선같이 말캉한 가슴을 주무르다가, 젖꼭지를 건드리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더니 밤마다 들리는 고양이 같은 울음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그리고는 음부를 쑤시던 손가락을 빼어서 입안에 넣고는 쪽쪽 핥았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가와서 내 턱을 잡고는 입술을 맞추었다. 그 맛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맛 보았던 그 어떤 맛보다 최악이었고, 맡았던 그 어떤 냄새보다 역해서 반사적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서 구역질을 했다. 내 모습을 보고 누나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앞에서 웃는 이 여자를 한 대 처버리고 싶다고 생각해버렸다.










-

접시 나르는 것을 도와준 그날 이후로 누나는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치면 여전히 싱긋 웃어주는 척을 했고 나도 그럴 때면 같이 웃었지만 분명히 변했다. 무슨 연유인지 나를 감시했다. 내가 뭘 하든 간에 자꾸 눈치를 보듯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았고 그럴 때에 느끼는 그 오싹함은 전에 엄마와 아빠가 살아계실 때의 그 다정한 느낌이 아니었다. 되려 나를 싫어하는 것을 대 놓고 표현하는 오키타가 더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찜찜했다.


"요즘 누나에게 무슨 일 있어?"


내가 묻자 오키타는 고개를 갸웃하고 생각하더니 이내 없을걸? 하고 대답했다.


"근데 요즘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


"음.... 잘 모르겠는데?"


그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서 나에게 말했다. 


누나에게 커다란 고민이라도 생긴 것일까? 아니면 이제 나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일까? 정말 나에게 이제는 떠나라는 말을 하려고 준비를 하는 것일까? 최근 들어서는 부쩍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도 하고.. 어째서인지 외출도 부쩍 줄었다. 그러면서도 심부름을 시킬 일이 생기면 전에는 나와 오키타를 시켰다면 이제는 오키타를 혼자 보내거나 본인이 간다면서 나에게 함께 가자면서 요구를 했다. 그럴 때에 순순히 따라나서기는 한다만.. 나를 싫어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나를 관찰하는 그 눈빛은 나를 호감으로써 보이는 눈빛은 아니었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한 부분이었다. 


오키타 녀석이 나가고 없는 어느 날, 누나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조금은 떠보기 위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청소할 겸으로 본인의 물건을 차분하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도와드릴까요?"


"... 응? 어, 그래 그래주면 고맙네"


누나는 다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감출 수 없는 불안이나, 경계가 아직도 투명하고 물컹하게 우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리는 가까이 있어도 서로를 볼 수 없을 터였다.


"요즘 고민 있으세요?"


"고민이라... 항상 있지 뭐"


누나는 그렇게 내 말을 미끄러지듯이 피해 갔다. 그리고는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말했다.


"카무이도 고민이 있니?"


"있죠 저도"


"의외네 없을 것 같은데... 고민이 뭘까? 말해줄 수 있어?"


누나는 꽤나 치사한 사람. 자신의 이야기는 할 생각도 없으면서.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내 말에 누나는 다시 잠깐 행동을 멈추고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눈동자가 무서웠다. 오키타 녀석도, 나도 누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항상 웃는 누나가 표정을 굳히는 순간에 급격하게 찾아오는 짓누름이라고 생각한다. 누나가 전에 이야기할 때 '천사는 때로는 아주 무서운 존재'라고 말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아직은 말하기가 조금 그렇네? 다음에 말해줄게"


하고는 다시 웃어주었다. 웃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웃음이다. 날씨가 참 좋네- 하고 창밖을 바라보더니 나를 보고 말했다. 


"빨래가 다 되어서 옥상에 널을 건데 같이 갈래?"


"네"











-

가족이란 다 비슷비슷하다. 집안에서 남자친구와 추잡한 짓을 벌이던 박쥐같은 누나만큼이나 엄마와 아빠 또한 추잡한 족속들이었다.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는 집 거실 한가운데에서 추한 모양새로 옷을 벗어재끼고 떡방아를 찧는 듯한 행위를 해댔다. 옆에는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즐비해있는 것을 보니 집에 와서 또 마셔댄 것 같다. 흥분해서 던지기라도 했는지 몇 병은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하는 시퍼런 단면을 뽐내며 나뒹굴고 있다. 내 앞에 바로 떨어져 있었다면 나도 모르게 집어 들고 엄마와 아빠를 찔러버렸을 수도. 늘어진 살들이 추욱 처져 움직일 때마다 셀룰라이트가 드러나며 떨리는 살갗들은 징그럽기 짝이 없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가랑이 사이로 보이는 둘의 검은 털이라던가 접촉부 사이로 흐르는 투명한 액체라던가.. 우웩


박쥐같은 누나는 나를 더 재밌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자주 놀려대듯이 괴롭혔다. 나를 끌고 방으로 들어가서는 가슴을 내 보이면서 아가, 이리 와 젓 먹을래? 하고 물어본다거나 전처럼 내 앞에서 자위를 했다. 남에게 내보이는 것에 대한 이기적인 성도착증이 있는 것 같았다. 


"카무이는 누나가 좋지?"


"싫어요"


"남자친구는 나에게 공주 같다고 그러던데"


누나는 안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일 것 같은 짧은 반바지를 입고서 발가락에 매니큐어를 바르며 말했다.


"공주? 누나는 박쥐예요"


내가 키득거리면서 말하자 누나는 바르던 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더니, 박쥐는 거꾸로 매달려 있잖아. 어지럽게.. 게다가 쥐 아니야? 날개도 이상하구.... 하고 입을 삐쭉 내밀면서 툴툴댔다. 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정말 저런 모습이 공주같이 보였을까? 


대략 두세 달 있다가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굳이 찾자면 더 이상 나를 성도착증의 재료로 쓰지 말아줬으면 하는 것이라던가, 박쥐가 사는 동굴 안의 습한 공기를 더 이상은 맡고 싶지 않았다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떠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쪽과 엮여 있는 것은 없었으니까.


떠나는 날 아침에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누나가 나가려는 나를 두 눈을 휘둥그레 치켜뜨고 쳐다보면서 물었다.


"어딜 가니?"


"음... 우선은 고아원이요"


"방문하는 거야?"


"돌아갈 거예요"


"돌아가? 고아원으로? 왜?"


".. 글쎄요. 그곳이 그리워졌으니까요"


"잠깐만, 가지 마"


누나는 나를 필사적으로 잡고서는 가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왜 인지 속눈썹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있어서 당황했다. 내 팔을 아플 정도로 붙잡은 길다란 손가락을 보자마자 제 검은 구멍에 집어넣던 그 괴랄스러운 장면이 다시 떠오르면서 누나가 내 입에 맞추어 왔을 때의 역함이 순간 올라오면서 나도 모르게 있는 있는 힘껏 뿌리쳤다. 그 순간에 나는 고아원에서 때려서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한 그 녀석이 동시에 떠올랐고, 누나는 그대로 계단 난간에 한 쪽 발이 걸려 거꾸로 매달린 형상으로 양 팔을 박쥐 날개의 관절처럼 딱딱하게 꺾으며 계단 아래로 피 웅덩이를 만들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

하늘에 구름 하나가 없어서 나에게 있어서는 최악이었다. 우산을 쓰고서 옆에 앉아 있자 누나는 나를 보고는 그제야 생각났는지 미안하다고 했다. 순간 햇빛을 쉽게 보지 못한다는 것을 잊었다면서.


하얀 이불 시트나, 수건, 옷가지 등등을 길다란 세탁 줄에 하나씩 거는 모습, 더불어 투명한 피부까지 눈알이 깨져버릴 것 같이 환해서 아팠다. 누나와 그 녀석은 겉모습은 닮았지만 오키타에게는 이렇게 환한 빛은 없다. 그 점이 약간 다르다. 닮았다는 것은 참 신기하다.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는 오키타 녀석만큼 나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그 녀석만큼 강할까? 그 녀석만큼 재미있을까? 그 녀석만큼 귀여울까? 그 녀석만큼.... 사랑스러울까? 


"누나, 결혼하실 거예요?"


한참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결혼? 하하, 글쎄... 하긴 하지 않을까?"


"아이도 낳으실 거죠?"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상상만으로도 좋은지 누나는 간만에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짓는 웃음은 진심이었다. 


"결혼하는 모습, 빨리 보고 싶어요"


"... 내가 결혼하면 혼자 있을 수도 있는데 무섭지는 않니?"


"혼자라뇨? 오키타 녀석하고 저, 둘이 있을 텐데. 누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내 말에 누나는 다시 또 행동을 멈칫하고는 나를 돌아보면서 나에게 물었다.


"... 카무이에게 소고는 어떤 사람이니? 소고를 어떻게 생각하니?"


"하하 어떻게 생각하다뇨? 당연히 그 녀석은 저와 '가족'이잖아요. 조금 까칠한 동..생이죠"


일부러 가족이라는 말은 조금 더 강조하는 듯 힘주어 말했다. 


"... 가족?"


누나는 그 말에 잠깐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조금은 참으려고 한 번 더 생각하는 듯하더니 앞에 두었던 빨래 바구니에 집었던 하얀 빨랫감을 내려놓고는 다시 말했다.


"하나 물어볼게 있는데.."


"네"


나에게 물어볼 것이라는 게 무엇일까? 누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뜸을 들여서 고민을 하다가 조금은 결심한 듯한 모습을 하고서는 나에게 물었다.


".... 보통은... 아무리 호기심이라지만 가족에게, 그것도 남자가 남자에게 키스...라던가 몸을 쓰다듬는 행동을 하니?"


누나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온몸이 주체되지 못할 정도로 덜덜 떨렸다. ..... 봤구나. 얼마 전에 집에서 내가 그 녀석을 애무할 때에 그 행위를 보고서 나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을 막기 위해서였는지 더 이상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인지, 그 때문에 나를 불러내어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 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마른침을 힘겹게 삼키었다.


"... 누나가 잘못 본 거니?"


변명할 거리도 찾지 못했고 한참을 고민을 했다. 햇빛을 막아주는 우산을 들고서 멍하니.. 막을 수 없는 벌이 내려치기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죄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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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누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지 그 녀석은 빠르게 다시 제 위치를 찾았다. 주인이 없는 그 방은 아직도 정리하지 못했고 누나는 그저 문을 닫아두었다. 정리하다가 멈춘 그 황량한 내부가 부모님의 죽음을 더 실감 나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의 문이 닫혀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우리는 평소처럼 돌아왔다. 사실은 평소처럼 돌아온 것이 아니라 돌아온 척했다.


누나의 앞에서만 활달하고 밝은 그 녀석은 가끔 혼자서 있을 때에 본인의 침대의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어둠 속에서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은 전에 없었던 불운한 음울한 기운이 스며들어 있어서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다. 마냥 슬퍼하는 눈도 아니고, 마냥 우울한 눈도 아니다. 무엇이든지 원망하고 있는 듯한 맺힘이 가득 있어서 보이지 않는 눈물과 함께 살기가 옅게 시려 있었다. 막 살인을 마치고 나와 피비린내를 감추지도 않고 당당하게 시체의 옆에 앉아 있을 법한 살인자의 눈동자. 


흉악한 것과 온순한 것이 함께 있을 때 내가 지나치게 흥분하나 보다. 거칠고 위험한 것들이 조금은 순해 보이는 듯한 것과 있을 때 발산하는 그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이 그 녀석이었다. 그 녀석을 보면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다'라는 표현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핥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너무 사랑스러워서 다 집어삼켜버리고 싶은 기분. 당연히 온순하지 않겠지만 평소보다 더 고분고분하지 않고 거칠게 발버둥 쳐줬으면 더 좋겠다. 평소보다 더 거칠게 쏘아봤으면,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드문드문 나올 때까지 소리를 질렀으면.. 그런 상상을 하면 곧바로 앞이 부풀어 오르는 야릇한 기운이 든다.


나로서는 딱히 힘들다거나 불편한 사항은 없었다. 그 녀석도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보다는 나에게 잘했고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학교에서 만나서 올 때 가끔 마주쳐도 전처럼 나를 벌레보듯이 혐오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밥 먹으러 가자고 이야기를 할 때도 있을 정도로 우리의 사이가 조금은 순화되었다.

 

좋아, 다 좋지만 조금 짜증 나는 부분은 누나의 애인이라는 그 사람과 종종 연락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전에 나에게 질투라는 감정을 가지게 한 유일한 사람이어서 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그 사람은 이 녀석에게 종종 전화를 걸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신경질에 가깝게 칭얼칭얼 댔다. 입으로는 죽어, 네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연락하지 마 등등 부정적인 단어를 남발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부정적인 마음을 담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았다. 그래서 나는 누나의 애인이라는 반듯하고 날카로운 그 사람이 더욱 싫어졌다. 그 녀석이 옆에 있는 나보다도 그를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싫고, 누나와 그와 내가 셋이서 있을 때 나는 공감하지 못하는 그의 이야기를 할 때는 더욱이 싫다. 하지만 그는 누나의 얌전한 입술은 훔쳐보았을지언정, 이 녀석의 달콤한 입술까지는 탐해보지 않았을 것이니 그것에 대한 우월감으로 나 혼자서 마냥 위로하고 있었다.


내 성격을 말하자면 꽤나 제멋대로에 숨기거나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실제로 학교에서도 선생이던 옆에 사람이던 눈치 따윈 하나도 보지 않고(왜인지 나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수업시간에 그냥 나가버릴 때도 있고 시험시간에 옆에 앉은 아부토에게 대놓고 답을 물어보기도 했다. 황당해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생각난다. 아부토는 나와 선생님을 번갈아 보고는 눈치를 살폈다. 너무 당당해서 그랬는지 선생은 그저 나에게 약간의 주의를 주는 것을 끝냈다. 끝난 후에 아부토는 부럽다고 비꼬아서 말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네 생각만 하냐면서 골치 아파했다. 그런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하고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 녀석에게 입을 맞춰 올 때는 숨는 걸까? 왜 이렇게 비겁하고 소심한 것일까? 왜 이 녀석이 알아차리지 못할 때에만 애정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동안 고민을 했고, 그 고민에 대한 내 멋대로의 결론은 이 녀석이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나를 버릴까 봐, 누나와 그가 정말로 나에게서 멀어질까 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더욱이 그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는 것 외에는 없다고 단정 지었다. 지금의 이 균형을 절대로 유지시켜서 나에게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알게 모르게 나를 감싸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개 같은 습성은 고아원에서 자라온 환경 탓이겠지. 어쩔 수 없이 그 구더기 더미에서 함께 자라왔기 때문에 그 생태를 몸에 익혀버린 것을 깨닫고 그날은 뭔가 더러운 오물이라도 뒤집어쓴 것 마냥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샤워를 했다. 타올로 몇번이고 불결한 몸을 문질러 닦아도 자꾸만 남은 찝찝함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하긴.. 고작 이런 방식으론 이미 몸속 깊숙히 스며들어버린 것이 닦아질 리는 없겠지.

 









-

"누나랑 결혼할 거야?"


부 활동을 마친 후에 음료수를 사달라고 졸라 들어간 어느 카페에 앉아 물었다. 뜬금없는 내 말에 히지카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다시 물었다.


".. 아니...."


내가 이런 말을 꺼낼 것이라는 것을 몰라서 그랬겠지만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띠꺼운 표정으로 다시 말을 했다.


"음... 너랑 누나랑 결혼하면 난 혼자 있는 건가?"


내 말에 히지카타는 또다시 한참 말없이 있다가 말했다.


"..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히지카타는 내 눈을 잠시 피했다가 신경 쓰였는지 다시 말했다.


"... 걱정하지 마. 혹시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너를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거야"


"혹시라도? 뭐야, 너 결혼 안 할 거야? 헤어질 생각하는 거야 너? 엉?"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니야 새끼야. 난 하고 싶지 근데.."


"근데 뭐"


까칠한 내 표정을 보고 히지카타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대답을 피했다. 누나가 히지카타와 결혼을 한다는 것.. 은 물론 싫다. 지금 내가 히지카타에게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현 상황에 누구보다 힘든 누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히지카타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나가 짊어진 우리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가장 적절한 사람은 히지카타가 아니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 그가 확실하게 덜어준다면, 나는 괜찮다. 그가 누나와 하루빨리 결혼을 해서 누나가 조금이라도 편해진다면.... 나는 누나가 짓는 행복한 웃음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누나가 결혼을 하면 난 혼자가 될 터이지만...


카무이 녀석이 떠날 의사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가 내 옆에 계속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혹시나, 정말로 만약에 있어준다고 하더라도 내 쪽에서 거절을 할지도. 잠시 이런저런 일 때문에 잊고 있었지만 그 녀석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면의 시간에 내 몸에 장난을 치는 변태 새끼였고, 나는 그 새끼의 그런 변태적 행위와 그에 대한 악감정을 참지 못하고서 그 녀석에게 염산테러를 가한 범죄자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싱글거리면서 내 주위에 있다는 것. 나 때문에 햇빛도 보지 못하고 우산을 쓰고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면 나를 원망해야 할 텐데. 그래서 나는 그가 무섭다. 우리는 절대로 사이가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찝찝함. 그 녀석에게 갚을 수 없는 커다란 빚을 진 것 같은 답답한 죄책감을 가져서 편하진 않다. 요즘 들어서는 사과를 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문제도 아닐뿐더러, 내 자존심에 그 말은 목구멍 아래서 항상 맴돌기만 할 뿐, 음성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어느 날 저녁, 누나는 맛있는 것을 먹자면서 우리를 밖으로 불렀다. 전에 부모님과 함께 갔었던 식당은 아니었다. 저 멀리에 있는 어느 레스토랑이었는데 고급스러운 분위기라기보다는 약간 캐주얼한 분위기로 장식되어있는 그런 식당이었다. 벽에는 목각인형이 아무렇게나 장식되어있었다. 그 꼴이 꽤나 우스웠다. 누나는 자신이 맛있는 메뉴를 안다면서 혼자 콧노래를 부르면서 메뉴를 주문했다,


"토시로씨와 함께 왔었는데 맛있더라고. 오자마자 너희들과 함께 와보고 싶었어"


"그 새끼..."


나는 습관적으로 그 녀석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누나는 히지카타의 이야기가 나오자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소고, 너는 토시로씨 이야기만 나오면 싫어하더라? 토시로씨는 네 이야기하면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건 그 녀석이고, 나는 그 녀석이 싫어요! 맨날 잘난 척만 하고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어딨니? 어딨긴? 어느 곳에 나 있고말고요. 그 정도 녀석은 말이야.


".... 누나의 애인은 어떤 사람이에요?"


나와 누나가 장난식의 말다툼을 할 때 잠자코 물을 마시던 그 녀석이 물었다.


"아, 토시로씨?"


"네, 얼굴은 몇 번 본 것 같지만 전 잘 모르잖아요"


그 녀석이 웃으면서 말했다.


"완전 개새끼"


내가 옆에서 내 편이 되어달라는 듯이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나는 그가 평소의 표정처럼 웃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나서 나를 홱 돌아보면서 한 그 녀석의 말은,


"넌 누나의 애인을 참 좋아하나 봐"


이건 또 뭔 개소리래. 그 말을 할 때 그는 평소에 웃고 있는 얼굴을 잊어버린 것인지 웃고 있다거나 하지 않아서 내가 흠칫 놀랐다. 그래서 나는 순간적으로 다음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잠깐 굳은 나와는 달리 누나는 그의 말에 강한 긍정을 하면서 꺄르르 웃었다.


"카무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쟤가 너무 툴툴거리긴 해도 그나마 가까운 사람은 토시로씨 밖엔 없다니까? 이제 카무이가 옆에 있어주면 되겠다"


누나는 환히 웃었고, 그 녀석도 곧 누나를 따라 하듯이 웃어 보였다. 그 둘의 사이에서 나는 혼자서 웃지 못하고 내 앞에 놓인 물컵을 들고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뭐야 아까 그 표정, 괜히 신경 쓰이게.


누나는 나보다 카무이를 더 가까이 두고, 더 챙겨주는 듯했다. 전처럼 그 녀석을 미워해야 했지만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녀석이 누나의 옆에서 나보다 더 잘 따랐다는 것이 사실이라서... 최근 들어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방황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나의 앞에선 밝은 척하는 것도 지겨웠고, 그냥 다 귀찮아. 우리 집은 텅 비어 있어서 돌아가기도 전에 내 안이 깊이 파여있었다. 약간의 투정이었다. 어차피 돌아가 봤자 나를 반기는 사람은 누나밖에 없잖아. 이제 더 이상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없잖아! 하고 허공에 잔뜩 화를 내고 있다. 


아직도 가끔 나는 엄마와 아빠가 없다는 걸 잠깐이나마 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그것이 그저 잠깐 자각하지 못한 현실이라는 것이 뼈 시리게 닿아와서 나는 집이 싫다.


"이사 가자"


누나는 우리에게 말했다. 자꾸 함께 했던 기억이 떠오르기에 이사를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슨 마음인지 나는 그렇게 집에 오는 것을 싫어했으면서 막상 집을 팔아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려 생각을 하니 혹시나 내가 정말로 엄마와 아빠를 잊으면 어떡하지.. 내가 나이를 먹고 나서, 몇 년이 지나고 몇 십 년이 지났다고 그런 한낱 시간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 가족의 빛나던 생활을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나는 딱 잘라서 싫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일로 누나와 또 다투었다. 누나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나의 말투나 까칠한 행동이 문제였다는 것은 나도 안다. 누나가 어떤 말을 해도 싫다고 했다. 나를 설득하려 '소고,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볼래?' 하고 나를 달래어도 들을 의향도 없이 강력하게 부정했다. 이사는 절대로 싫다고  끝끝내 고집을 부리자 누나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내가.. 너무 힘들어"


그 말엔 내가 고집을 꺾었어야 했는데.. 그 말에도 딱히 나의 생각을 꺾을 생각을 하지 못했고 정말이지 말 그대로 생각 없이 말했다.


"누나, 나도 힘들어. 누나 혼자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 그만해. 지겨워 나도. 부모 행세도 그만해. 누나가 어떻게 말해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이사는 안 갈 거야"


부모 행세. 누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앞에서 바로 울었다.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어도 이미 나는 또다시 누나를 울렸고 누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서럽게 울면서도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

학교는 재미가 없어서 아부토와 종종 학교를 빠졌다. 빠졌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어디를 갔다가 왔냐고 물으면 아팠다고 한마디만 하면 그냥 넘어가 주었다. 특히나 우리 반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기에 사실 큰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아부토는 제 집에 나를 곧잘 초대해서 먹을 것을 주곤 했다. 그날은 어제 라면을 많이 샀다면서 라면을 끓여주었다.


"전에 가출 이야기 하지 않았어? 조금 잠잠해졌나 봐?"


"가출?"


나는 그런 말을 한 것도 잊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기억해내고는 다시 말했다.


"아, 잊고 있었네. 생각 없어 이제"


"네 집은 어디야?"


"알아서 뭐 하게"


"너 맨날 우리 집 와서 거덜 내고 가잖아. 네가 나 좀 초대해봐"


"안돼"


"왜?"


"음.. 누나랑 동생이 있어"


"누나? 그리고 동생도 있어? 말한 적이 있었었나? 어쨌든 의외네"


"왜 의외야?"


"몰라 그냥 없을 것 같아"


"뭐, 없을 수도? 하하"

아부토가 내 앞에 막 끓여서 내려놓은 라면을 먹음직스럽게 내 앞에 덜어 놓으면서 말했다. 아부토는 한 입도 손대지 않고 앞에 앉아선 내가 먹는 모습을 턱을 괴고는 쳐다본다. 항상 이렇다. 다 먹고 나서 내가 한 개 더 먹고 싶다고 말하자 아부토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넌 어떻게 한입이라도 먹어보라는 말도 안 하냐?"


"네가 먹고 싶다고 안 했잖아"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하고는 내 말에 한 개를 더 끓이려 일어섰다. 아부토는 가끔 멍청하고, 가끔 아둔하고, 가끔 나를 너무나 생각해준다는 느낌으로만 본다면 엄마 같다. 아부토에게 억지로 뜯어내서 라면과 다른 먹을 것들도 잔뜩 뜯어 먹고서 돌아가겠다면서 나왔다. 아부토는 뒤에서 너, 내가 다시는 우리 집 데려오나 봐라! 이 자식아! 하고 소리쳤다. 저렇게 말하고서도 학교에서 나와 갈 곳이 없을 때에 제 집으로 가자고 말하는 쪽은 본인이면서.


혹시나 누나가 왜 일찍 왔냐고 물어보면 무어라도 답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몇 개 다른 신발들 속에 그 녀석의 신발이 신발장에 놓여있었다. 학교를 가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 녀석도 나와 같이 학교 중간에 빠져나왔는지 방으로 들어가자 그 녀석이 침대에 똑바로 눕지도 않고 가로로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가가서 내려보다가 옆에 걸터앉아 그를 조금 흔들었다. 그러나 미동도 없는 것을 보니 깊이 잠들었나 보다. 옆에 누워서 잠들어 있는 그 녀석을 한참 쳐다보다가 속삭였다.


"..... 왜 내 앞에서 이렇게 허술하게 있어"


그러면 내가 집어삼켜버리고 싶어지잖아. 오키타와 누나의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나는 또 다시 그 녀석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간이 찾아오자 숨겨두던 본능이 다시 눈을 슬그머니 떴고 바짝 다가가서 입고 있는 셔츠 안 쪽으로 손을 넣어 옆구리를 슬쩍 쓰다듬었다. 따뜻한 살결. 그리고 나도 모르게 올라가는 손이 그 녀석의 심장 쪽으로 올라가고 톡톡 뛰는 생명을 손 바닥으로 느낄 때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가벼운 샴푸 냄새, 몸에서 은은하게 품어지는 체취에 부드러운 귓불을 한번 물었다가 목을 한번 혀로 핥아보기도 하고 쇄골의 파인 부분에 혀를 담가보고 싶기도 했다. 바스락거리는 침대 시트 소리에 괜스레 겁을 먹어가면서 그 녀석을 조금씩 맛보는 것은 꽤나 즐거웠다. 순간적으로 옷을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기가 힘들다고 생각을 하며 입술을 가까이 마주했을 때, 뜬금없이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카무이, 잠깐만 와볼래?"


몸이 흠칫하도록 놀랐다. 누나가 있었나? 조심스럽게 그 녀석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아쉬움을 가득 남긴 채로 놓으면서 나는 조금은, 아니 사실은 조금 많이 화가 났다. 왜 이 시간에 누나까지 집에 있었던 거야,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소리가 들렸던 부엌 쪽으로 가니 누나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누나가 나를 부른 이유는 고작 접시를 옮기는 것을 도와달라는 정도의 가벼운 것이었다. 


"누나가 있는 줄 몰랐어요"


내가 약간은 불만 있는 말투로 말했다.


"나도 네가 있는지 몰랐어. 학교에서 왜 이렇게 빨리 왔니?"


"아파서요"


"소고도 아파서 왔다던데, 저렇게 곤히 자는 걸 보면 정말 몸이 안 좋은가 봐" 


"그런가 보네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한참 옆에 서 있다가 어제 둘이 다투었던 것을 생각하고는 말했다.


"오키타 녀석, 요즘 엄청 예민한가 봐요"


"... 카무이는 참 이상하다"


내 말에 누나는 본인이 들고 있던 그릇을 살짝 내려놓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물었다.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공격적으로 경직된 듯한 모습이었다.


"제가요? 뭐가요?"


"우린 가족인데 왜 소고를 부를 때 남처럼 오키타라고 부르니?"


...

왜긴, 우린 사실 가족이 아니니까요. 특히 그 녀석에 대해선 별로 가족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옆에 빌붙어 그와 함께 있으면서 언제쯤 그를 집어삼킬 수 있을까 노리고 있으니까요. 


"... 아, 그 녀석이랑 저, 조금은 어색하잖아요. 딱히 친하지도 않고.. 요즘은 좀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 녀석이 저를 엄청 싫어하기도 하고.."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고는 누나는 평소처럼 웃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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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오키] Jacob's ladder 9

2016. 3. 11. 09:45

9.











-

장례식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게 시작되었다. 많지 않은 친척 몇 명이 왔다 갔다 했고, 나머지는 크게 부르지 않았다. 부를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흘러내려 앉아있었고 누나는 그 와중에 냉정했다. 처음에 흘렸던 눈물을 소매로 쓰윽 닦고서 그 이후로는 울지 않았다. 누나는 남자인 나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누나에게 있어서 다행인 면이라면 히지카타가 제 일처럼 찾아와서 누나를 돌보아주고, 챙겨주었다는 점이다. 


영정사진 같은 것을 찍어두었을 리 없는 엄마와 아빠의 사진은 누나의 지갑 안에 있었던 가족사진을 확대해서 썼다. 우리 거실에 항상 걸려있는 사진. 엄마와 아빠의 옆엔 내가, 그리고 누나가 있었던 그 사진이었다. 사진 주위에 가지런히 장식된 꽃더미를 보면서도 내가 이곳에 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이 종종 찾아오기도 했다. 억지로 확대를 해서 화질이 좋지 않은 그 사진을 보면서도... 검은색 상복을 입고서 친척들의 위로를 받을 때에도... 그런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시 한번 깨닫고서 넋이 나가있었다. 


짙은 향냄새와 후덕지근한 공기가 너무 더워서 밖에 나가자, 안에 들어오지 않고 장례식장 밖 화단에 앉아있는 그 녀석을 발견했다. 이 녀석도 충분히 슬픔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은 그에게서 평소에 내가 느끼고 있었던 이상하고 옅은 살기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짙은 향냄새에 질식할 정도로 중독이 되어서 느끼지 못 했을 수도 있지만, 여튼.. 그냥.. 그렇게 느꼈다. 


"왜 밖에 있어?"


"... 들어가기 싫어서"


몇 없는 친척들은 그의 존재를 몰랐다. 한 명 정도에게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친척은 나와 비슷하게 이 녀석의 입양에 대해 거세게 반대를 했었던 사람이어서 엄마도 아빠도 그의 입양에 대해서 친척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친척들에게 그를 보이는 것이 그렇게 좋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에게 하마터면 엄마와 아빠는 언제 오신데? 하고 물어볼 뻔도 하였다. 하지만 말이 밖으로 나가기 전에 아, 지금 그 엄마와 아빠의 장례식이 진행 중이지.. 하고 깨달았다.


정신없는 장례식이 끝났고 그 녀석은 그저 먼 발치에서만 지켜보다가 발인 날에는 따라오지도 않고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하거나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녀석 역시 근처로 다가올 수 없는 괴로움을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를 이해하려는 나를 보고 내가 놀랐다. 진한 향냄새에 의해서 미쳐버린 게 틀림없어.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누나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우리를 학교에 가야 한다면서 깨우고, 아침밥을 차려주고 오늘도 열심히 하라면서 밝게 웃어 보였다. 너무 밝아서 정말로 이상한 웃음이었다. 본래 엄마의 역할을 누나가 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본래 5명이 있어야 할 이 집이 갑작스럽게 너무나 넓어져버려서 마음이 자꾸만 아프다. 


그 녀석이 오기 전, 엄마와 아빠가 외출을 해서 없을 때에 나는 종종 엄마와 아빠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넓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침대가 한결 더 따뜻하고 포근해서 꽤 좋아했다. 그 침대에서 엄마의 베개를 베고서 잠이 들면 한결 더 편하게 잠이 들었었다. 그 습관이 남아버렸는지, 돌아와서 엄마와 아빠가 쓰던 방의 침대에 누워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장례식 전의 우리 가족이 아무렇지 않게 이 집에서 밥을 먹으면서 우스갯소리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꿈을 현실이라고 착각을 하고서 엄마와 아빠의 품에 안겨서 평소에 보이지 않던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상해! 진짜 이상해요 엄마랑 아빠가 죽었다고 그러잖아. 아니죠? 하고 묻자 엄마와 아빠는 웃으면서 '우리가 장난 좀 쳐봤어' 하고는 걱정하지 말라면서 나를 평소처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나는 안도감에 꼬옥 끌어안고서 너무하다고, 어떻게 그런 장난을 칠 수가 있느냐면서 투정을 부리면서 계속 흐느껴 울었다. 그럼 다시 오는 거야? 빨리 와! 다 기다리잖아! 하고 꿈 안에서 목이 메일 정도로 울어서 그 흐느낌에 의해 숨이 막혀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면 그제야 엄마와 아빠의 침대에 누워있는 나, 그리고 이제 주인 없는 그 방의 공간을 다시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실감하는 것이었다. 


이 일에 의해서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이 사건 이후로 몽유병이 사라졌다. 그래도 깊은 잠에 들지는 못 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꿈에서 흐느끼다가 그 흐느낌에 의한 목메임에 새벽에 몇 번이고 깼다. 하지만 잠든 와중에 일어나는 기억 없는 방황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나는 학교에서 항상 피곤해하면서 졸게 되는 일은 더 심각해졌다. 



".... 미츠바가 많이 부담이 되는 것 같아"


히지카타가 나에게 저녁을 사주겠다면서 불러서 한 말이었다. 물론, 알고 있어. 요즘 너무 웃고 있잖아. 그렇게 밝을 수 없는 상황인데. 


"그래도 미츠바가 그렇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너와 네 형 때문이야.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네 형은 보지도 못했네"


".... 그 녀석은 친척들도 그렇고 해서.. 그냥 밖에 있었어"


"그랬구나"


"응"


"너도 생각보다는 멀쩡해 보여서 다행이야.. 사실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래도 누나도 있고, 형도 있으니 힘내야지.. 그래야 누나도 힘낼거야. 언제든지 힘든 일이 있다면 연락해"


".... 그 녀석 나랑 동갑이야. 형 아니라니까? 그리고 힘든 일 같은 거 없어. 그니까 네놈에게 부탁할 일도 없고"


내 말에 히지카타는 잠시 나를 쳐다보니,


"그런 건방진 말을 하는 거 보니 내가 조금은 안심이 되네.."


하고는 다행이다, 하고 덧붙였다.











-

무엇보다 먼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은 어이없음, 그리고 황당함이었다. 전에도 엄마와 아빠가 죽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장례식은 처음 와본 것은 아니었다. 참나, 하늘도 너무하셔.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가족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렇게 저에게서 데리고 가시는 거예요? 내가 운다거나, 하지 않아서? 아니면 나의 이기적인 모습 때문에 내가 행복해지면 불공평해서? 


장례식에는 향냄새도, 그리고 그 특유의 음식 냄새도 맡고 싶지 않아서 밖으로 나와 화단에 앉아 있었다. 귀신소리처럼 들리는 울음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슬픔은 사람을 쉽게 물들이고, 꽤나 범위 넓게 장악하는 힘이 커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감정이다. 특히나 장례식장의 슬픔은 손아귀가 너무 거세고 눅눅해서 끔찍하다. 눈물이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슬펐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했던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다는 생각이 함께 든다. 그리고 나서,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지? 누나와 오키타 녀석은? 부모님이라는 고리가 사라진 것,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도 가족이 될 수 없었다는것, 그리고 슬퍼하는 그들.. 나는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이 둘이 만약 나에게 그만 여기에서 각자 갈 길을 가자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걱정. 혼자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


발인 날에는 홀로 집으로 돌아와서 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에서 엄마와 아빠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집이라는 생각이 왜인지 자꾸만 들어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했다. 그 동시에 생각나는 사람이 아부토밖에 없어서 뒤돌아서 바로 아부토를 찾아갔다. 불쑥 찾아온 나를 보고 아부토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왜 학교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학교에 오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나는 웃으면서 꼭 가야 하나? 가기 싫으면 안 갈 수도 있잖아 하고 웃어 보였다. 아부토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아부토, 너는 혼자 살아?"


"집에 와봤잖아. 혼자 살지"


"아 그렇구나"


"왜?"


"혼자 살면 어때?"


"아, 좋지.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네 나이 또래들이 가장 많이 부러워하더라. 왜 너 혼자 살고 싶어서? 사춘기냐? 엉?"


사춘기라.


"그런가봐"


내가 웃어 보이자 아부토가 말했다.


"너희 나이 또래들은 혼자 사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한다니까? 어디에 있을 건데? 아무것도 없는 새끼들이 말이야"


아부토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자기가 나이가 많다는 것에 우쭐한 듯이 이야기한다.


"게다가 특히 너는 왠지 혼자 두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혹시나 집을 나올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 집으로 와. 며칠 가출할 생각이면 받아줄게. 너 같은 놈은 내가 받아줘야지"


가출? 그 말에 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 가출도 집이 있는 사람이 나왔을 때가 가출이지. 아부토는 뭐가 웃긴 거야 너? 하고 황당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나의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했다. 누나는 정말 무섭게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전보다 더 엄격해졌다. 눈을 위로 치켜뜨고서, 도도하게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고아원의 원장을 연상시켜서 전의 어릴적 있었던 구더기 소굴 같은 고아원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이런 일을 겪고서 이렇게 멀쩡하게 있을 수 있는 부분은 특히나 나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되어서 소름이 돋을 정도. 하지만 오히려 강하다고 생각했던 그 녀석은 눈에 보일 정도로 심한 동요를 보였다. 

누나는 우리를 혼내는 일이 잦아졌다. 조금만 늦어도 왜 이 시간에 오냐, 어째서 연락은 하지 않았냐 등등 조금은 피곤하게 굴었지만 (이 모습조차 어쩜 이렇게 원장과 똑 닮았는지) 그렇게 우리를 신경 쓰는 행동을 보고 누나는 나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껴서 약간은 안심했다.


"누나는.. 너희들에게까지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정말로 못 살 것 같아. 그니까 너희는 다치지도 말고.. 무슨 일이 있어서도 안돼. 알겠니?"


나와 그 녀석의 손을 잡고서 한 말이었다. 그 녀석은 울 것 같았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나는 걱정 마세요. 하고 웃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누나는 그 녀석보다는 나를 조금은 의지하는 듯했다. 한 번은 그 녀석이 나갔을 때 나에게 말했었다.


"카무이는 소고보다는 어른이구나"


누나는 무섭고 강했지만 눈치가 빠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어른이라기보다는 어린애보다 더 어린 상태인데.


"그럴리가요"


"이렇게 말하는 것부터가 그렇지"


누나는 웃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장례식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눈물을 내 앞에서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이 원장과는 달라서 나는 누나가 다시 좋아졌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꼬옥 잡으면서 말했다.


".. 힘들다.. 나도.. 하지만 소고 앞에서는 울 수가 없어. 남자친구 앞에서 울 수도 없고.. 내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걱정할 거잖아. 네가 있어서 나도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


미세하게 떨리는 가녀린 어깨가 그날따라 더욱 약해 보여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누구라도 이런 천사 같은 여자가 내 앞에서 흐느껴 울고 있다면 할 말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녀석이 이렇게 우는 것을 한번 보고 싶기도 하였다. 그 녀석은 천사 같은 녀석은 아닌지라 이런 성스러움에 가까운 신성함 따위는 없겠지만 그래서 그것대로 매력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있어서 누나는 정말 다행이야"


누나는 정말로, 정말로 이상하게도 나를 의지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나의 행동을 보고 내가 슬픔을 견딜 줄 아는 강한 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이 둘보다는 이겨내는 것이 거셀지는 모르나, 그것은 이 둘이 너무나 안일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겨우 입을 열고 그렇게 말했다. 누나는 나의 말을 듣고 눈물을 닦으면서 마지못해 웃어 보였다. 그것 역시, 내가 본인을 걱정할까 봐 짓는 미소였다. 그녀가 조금은 가엽다고 느껴지면서 오키타는 이렇게 자신을 보호해주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에 부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누나를 그 녀석처럼 사랑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지금 이대로의 나, 그리고 나와 다른 환경의, 하지만 나와 닮은 그 녀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은 내가 잠깐 내 앞의 그녀가 흘리는 성스러운 분위기라는 마약에 잠깐 홀렸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누나는 원장의 사악함과 천사의 성스러움을 동시에 가진 무서운 사람이네요. 이렇게 나를 쥐락펴락하는 걸 보면.


내가 사랑하는 그 녀석은 아쉽게도 이제 더 이상 나와 2층 침대에서 잠들지 않고 부모님의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전의 그 병도 사라져서 조금은 아쉬웠다. 지금의 나는 더더욱 그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그가 나를 조금은 유순하게 쳐다보던 눈빛, 그 눈빛을 한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이제 나에게 전과 같은 큰 악의를 드러내지 않는 면은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얼굴에 염산을 들이붓던 녀석이 지금은 나름 나를 가족으로 인식하고서 가끔은 나를 챙기는 그 이중성이 미치게 사랑스럽다. 그와 살갗을 한번 맞대어 보고 싶다는 생각, 그의 목덜미를 다시 한 번만 내 입술로 지그시 눌러보고 싶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날이 많았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기에 더 그랬다. 

주인이 없는 방에 다가가서 잠든 그를 멍하니 쳐다본 적도 있다. 틈새의 바람 때문에 반투명한 커튼이 간지럽게 휘날리는 날. 달빛에 이 녀석이 하얗게 빛나고 있어서 곤히 잠든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손을 슬며시 잡아보다가 그냥 돌아왔다. 그에게 이 이상으로 손을 대면 안될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손을 잡은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는지도. 











-

갑자기 엄마와 아빠가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기는 힘들었다. 누나와 그 녀석이 있었고, 엄마가 여행을 간다면서 나갔기 때문일까? 그냥 평소처럼 나는 거의 잊고 지냈다. 문득 생각날 때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누나와 그 녀석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냥 청소를 하고 있었다면 아무렇지 않겠지만 엄마와 아빠가 있었던 그곳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우두커니 서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옷장의 옷을 모조리 꺼내는 누나의 팔을 홱 잡아챘다.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청소하잖아"


"청소라니? 이것들.. 어디에 둘 거야?"


"어디에 두긴, 버려야지."


누나도 가슴이 아프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나는 내 감정이 앞섰고 누나의 감정 따위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나는 누나에게 다시 한번 대들었다.


"버려?"


"침대는 사람을 불렀어 조금 있다가 와서 가져갈 거야"


"... 제정신이야?"


"제정신이야"


누나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을 짓고 씩씩대는 나를 보고 표정 없이 말했다. 누나 역시 슬프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지만 저런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하면 나는 누나가 슬픈지 어떤지 알 수가 없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난다.


"... 누나는 엄마와 아빠의 흔적조차 전부다 지워버릴 셈이야?"


"지워야지"


"...."


"너는 언제까지 살아있다고 생각하면서 살거니?"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가 있어. 누나가 나에게, 지워버린다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할 수가 있어.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해야지. 게다가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거냐고 묻는 건 뭐야?  


말다툼이 신경이 쓰였는지 그 녀석도 하던 행동을 멈추고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누나에게 크게 화를 낼 수 없는 나는 그 녀석을 보자마자 괜시리 폭팔해서 소리쳤다.


"넌 또 뭐야 이 새끼야! 넌 뭘 하는 거야?"


다가가서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채고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사실 나는 그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누나에게 화가 난 것을 풀고 있었다. 그 녀석은 제 멱살을 잡은 나를 한번 보고는 약간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웃겨? 너는 정말로 네가 형인 것처럼 구는구나"


침착한 모습의 이 녀석, 그리고 누나.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고, 그만하렴."


누나가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누나의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나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실린 듯하다. 누나의 말이면 나는 이 이상으로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를 붙들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 녀석을 잡았던 손을 신경질적으로 놓고서 밖으로 나갔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저곳을 그대로 계속 놔두어봤자, 저것들을 계속 끌어안고 있어봤자 더 힘들어지는 것은 우리라는 것을. 그리고 아마 누나가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기까지도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정말로 마음을 먹은 이유는 내가 자꾸만 엄마와 아빠의 침대에서 잔다는 것 때문이라는 것도.


결국 누나 역시 침대 외에는 버리지 못 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침대는 가져갔는지 없었지만 다른 물건들은 내가 나가기 전의 상태에서 그대로 내려놓아져 있었다. 나에게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으면서도 누나 역시 힘들었다는 것, 그리고 누나도 울었을 거라는 것을 알고서 닫혀있는 방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지만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안다. 닫혀있는 문 앞에 서서 말했다.


"누나, 죄송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아무 말이 없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지금도 울고 있나 보다. 그 앞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참 멍청하게 서 있다가 걸음을 돌렸다. 사실 무슨 말이라도 누나는 말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평소의 누나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도 무슨 대답이라도 해줄 것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누나는 정말 심하게 울고 있는지 끝끝내 말이 없었다. 나는 정말 나쁜 동생이야..











-

누나는 나에게 눈물을 보인만큼 내 편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침대를 버리겠다니. 이제 그 녀석은 다시 나의 곁으로 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뻤다. 누나는 그 녀석이 나에게 화를 내고 나가버리자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에 침대를 해체하러 온 인부 두어 명이 들이닥쳤고 누나는 문을 열어주었다. 들이닥쳐 급하게 조임을 푸는 드라이버 소리가 진동했고 곧 침대는 샅샅이 분리되어서 판자 여러 개와 매트리스 하나가 되어서 집을 나갔다. 버리려고 상자에 쌓아둔 엄마와 아빠의 옷들을 한번 보고서 누나는 말했다.


"오늘은.. 조금 피곤하네. 그냥 다음에 정리하자. 카무이 너도 들어가서 얼른 자렴"


잘 시간이 아니었는데.. 누나도 이 녀석의 말에 굳은 결심이 흔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뒤돌아서 걸어가는 그 걸음이 무거웠고, 뒷모습에 얼핏 보이는 날개가 추욱 처진 것이 보이는 걸 보니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갔던 그 녀석은 한참 후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시 우리의 공간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말했다.


"내가 이제 1층 쓸래. 네 녀석이 올라가"


"왜?"


"... 그냥 싫어"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면서 말하는 그 모습에서 나는 그의 생각을 읽었다. 2층의 침대에서 생활해왔던 부모님이 생각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선 내 베개를 가지고 올라갔다. 위에 올라가서 잠시 누워 있다가 침대 아래를 홱 내려다보고는 물었다.


"무섭지 않아?"


"뭐가"


"전에 네가 그랬잖아. 만일 침대가 무너질지도 모르니까 살기 위해서 2층을 쓰겠다고"


내 말에 웃기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내 말에 웃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쾌활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것대로 좋았다.


"내가 죽겠어? 그러기 전에 내가 널 죽일 거야"


"아하, 너라면 그럴 것 같기도 하네"


그 녀석 다운 대답에 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말에 그는 잠시 무언가 생각난다는 듯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 떠날 생각, 하고 있어?"


응? 예상 못한 말에 나는 조금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잠깐의 침묵. 나에게 지금 떠나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조금은 놀라 하는 게 보였는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떻게 보면 네가 이 곳에 있을 이유는 더 이상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나가라는 거야?"


"오해하지 마. 네 생각을 묻는 것뿐이야"


"그럼 함께 있자는 건가?"


"... 생각을 묻는 것뿐이라고 하잖아. 어떤 의미도 없어"


"나도 네 의사를 묻고 있는 거야. 넌 내가 떠나길 바라니, 아니면 남아있길 바라니?"


당황한 듯이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홱 돌리고는 말했다.


"그 어떤 의미도 없다니까 새끼가.. 심심하면 잠이나 처 자던가"


거친 입버릇은 여전하다. 전이라면 당연히 꺼져버리라고 대꾸했을 텐데 이렇게 이야기해주는 게 기뻐. 너도 나와 함께 하고 싶구나? 


내가 위층으로 올라온 것은 좋았다. 언제라도 이 위에서 그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과, 언제라도 내려가서 그에게 입을 맞출 수 있다는 점이 특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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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커다란 정원이 있는 그곳. 그 정원에는 빨래를 널거나 가벼운 공놀이 정도를 즐기는 용도로 쓰인다. 연둣빛으로 빛나는 잔디는 보는 사람들도 기분 좋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 있어서 마치 따스한 봄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 모이는 고아원이었고, 어둠을 간직한 아이들이 모인 고아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밝아도 밝을 수 없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원장은 자주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러댔고 어린아이들은 모두 그 원장을 무서워했다. 신앙심이라는 수녀의 가면을 쓴 그 원장은 찾아오는 부모들에게만 가증스러울 정도로 친절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가차없어서 그녀가 항상 입고 다니는 회색 옷자락만 봐도 다들 질색을 하였다. 원장은 본인이 믿고 있는 신이라는 존재를 본인이 대행하듯 행동했고 우리에게 원장은 곧 법이자 우리를 심판하는 악마였다.

  

가끔 찾아오는 봉사자들은 하루 일을 해주고 밝게 웃어주면서 놀아주고는 돌아가서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것을 너무도 많이 봐와서 여기의 아이들은 그들에게 정을 크게 주지 않았다. 나는 그 사람들의 가식이 너무 싫어서 말조차 섞지 않았지만, 나의 동생은 나와 다르게 꽤나 정이 많아서 그들의 방문을 항상 좋아했고 떠날 때마다 슬퍼하면서 꼭 다시 와주세요 하고 말했고 그들은 정말로 다시 올 것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다시 오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쉽게 생각하고 걸었던 그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버려야 할 것이다. 카구라는 와줄 거라고 믿으면서 기다렸으니까. 동생은 꽤나 활달한 성격에 여자아이 같은 다소곳한 면은 별로 없다. 장난도 좋아해서 남자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는 성격인데, 쓸데없이 감수성이 풍부해서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종종 보였다. 앞에 이야기한 매일 바뀌는 자원봉사자에게 정을 주는 부분에서 특히나. 


원장은 나에게 고아원에서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은 긍정적인 면은 동생이 있었다는 점, 어쨌든 가족이 있었다는 점이라고 했다. 나는 그 점이 어째서 다른 아이들보다 낫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동생은 나를 좋아했다. 오빠 나랑 같이 자자, 오빠 나랑 같이 가, 손잡고 가자 등등 항상 오빠, 오빠 하고 불러댔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꽤나 귀찮은 점으로 작용될 때가 꽤 있었다. 동생은 잘 울었고, 시끄러운 그 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꽤나 힘들다. 


커다란 방에서 10명 정도가 같이 자는 침실은 구더기들의 집합 공간 같아서 싫었다. 딱히 누구와 말도 섞지 않았던 나는 조용했고 그나마 말을 했던 상대는 동생 정도였다. 모두와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들도 나에게 딱히 다가오지 않았다. 저 아이들과 섞이면 정말로 나는 구더기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그들을 증오했다.

 



어느 날, 어떤 고아원의 남자아이가 자신의 사탕을 빼앗아갔다면서 심하게 울어댔고 절대로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아서, 그 녀석을 찾아가서 때려주었다. (그 녀석은 종종 카구라에게 말을 건다거나, 따라다니면서 장난을 치면서 괴롭히던 녀석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카구라의 울음소리에 기분이 좋지 않아서 조금은 과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래도 이미 그 녀석이 삼켜버린 사탕을 되찾을 수는 없었고 계속해서 서럽게 옆에서 울어대는 카구라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서 혼자 뒤돌아왔다. 되돌아가는 나를 울면서 쫓아오는 것은 더 싫어. 

그리고 얼마 후에 내가 그 아이를 때린 것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아이는 몸이 아픈 상태였고 내가 그 아이를 과하게 때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과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카무이, 동생이.. 저 아이 때문에 울어서... 동생을 지켜주려고 한 것은 좋아. 오빠답네. 하지만 저렇게 애를... 때리면... 문제가 심각해진단다.. 지금 네가 어리고 저 아이가 부모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본래 소리를 지르던 원장은 그날은 침착하게 나를 불러다 놓고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에게 맞았던 그 아이는 그대로 저 정원에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있는, 아무것도 못하는 상태의 나무가 되어버렸다.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힘겨운 호흡기를 장착하고서 나무의 얼굴을 한 그 녀석을 보고 카구라는 또다시 울어댔다. 짜증나게. 죗값으로 나는 매일 넓은 고아원을 청소를 해야 했다. 성실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고아원 내의 법으로 작용하고 있는 원장의 눈빛과 회초리가 어렸을 적엔 무섭게 작용되어서 설렁설렁 청소를 했다. 카구라는 그럴 때마다 몰래 다가와서 도와주었다. 


"오빠... 고마워"


"뭐가?"


"그냥.. 다.."


"..."


".... 나는 오빠랑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


끔찍한 소리.


"... 입양이 되어도 안 갈 거니?"


"응! 나는 오빠랑 같이 간다고 할 거야!"


"그래? 난 혼자라도 갈 건데"


왜? 오빠도 나와 함께 가자, 싫어. 왜?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근데 왜.. 나는 혼자가 좋아. 나한테 화났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 때문에 벌 받아서 화난 거구나 그렇지? 아니라고. 청소를 하다 말고 복도에 서서 목소리를 낮춘 채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카구라는 내가 화가 났다고 믿었고 나는 진실로 화가 난 적은 없었기에 아니라고 말하는데도 자꾸만 도리질을 하며 믿지 않았다. 답답하게. 나는 다시 침착하게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같이 갈 수 없어. 그니까 너도 나에게 너무 의지하지 마."


알게 모르게 나에게 기대하는 그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 무겁게 작용하고 있었기에.

나의 말에 카구라는 조금은 멍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 시기에 몽유병을 한창 앓고 있었던 카구라는 그날 밤안개처럼 나를 스쳐 지나갔고, 그 말다툼을 마지막으로 카구라는 실종이 되었다. 그 무거운 짐에서 조금은 벗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함께 하던 청소는 그날이 마지막. 그리고 벌로 받았던 청소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나는 입양이 되었다.











-

고아원의 아이들을 쭉 훑어보는 그 눈초리. 선택을 받는다는 아래의 입장이 싫었지만 별수 없는 구조였다. 딱히 잘 보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런 건방진 태도가 그들을 나에게로 이끄는 것인지 그들은 나를 골랐다. 선홍색 머리색과 파란색 눈이 조금은 튀어서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카구라가 없다는 것은 꽤나 다행이었다.


처음 마주한 엄마와 아빠는 느낌이 별로였다. 엄마는 아주 희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고 있었지만 우울함에 잔뜩 젖어 칙칙했고, 아빠는 목석같이 표정이 없었다. 고아원 원장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꽤나 돈이 있는 집안이라고 했다. 하기사, 입양을 하는 조건에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과 부모가 멀쩡하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마는 말이 없었고, 아빠는 딱딱하게 네. 네. 하고 차가운 말만을 했다. 상담을 거의 마칠 때쯤 짐을 챙기라는 말을 하면서 원장은 급히 나를 뒤따라와서 말했다.


"카무이, 앞으로 절대로 누군가를 때리거나 하면 안 돼. 그리고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도... 절대로 비밀이야. 명심해야 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해 알았니?"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을 챙겼다. 드디어! 나는 이 지긋지긋한 고아원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너무 들떠서 이곳을 나가면서 건조한 목재로 지어진 이 건물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카구라는......"


그 뒷말은 듣지 않았다. 나의 짐은 많지 않아서 짐을 챙기는 시간이 빨랐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나와 함께 있는 차 안에서도 둘은 일절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딱히 말은 하지 않았다. 아빠의 운전은 꽤나 거칠어서 차 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도착한 집은 15층이나 되는 고층이었고 들어가자마자 압도적인 크기의 집안에 놀랐다. 높은 천장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돈이 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지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각자의 방으로 휑하니 들어갔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거실의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러자 집안일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다가와서는 옷을 갈아입으라면서 옷을 가지고 왔다. 아침 일찍 아빠는 일을 가는지 나갔고 엄마는 10시쯤 나갔다가 2시쯤 들어왔다. 엄마와 아빠와는 말 한마디 해보지 못했고 집안일을 하는 여자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원래 두 분은 말이 없으신가요?"


"음.. 뭐.. 그렇죠."


"왜요?"


"사이가 안 좋으시거든요. 음식은 입에 맞으세요?"


"네"


"어때요? 좋아요?"


"뭐가요?"


"이곳에 온 거, 좋아요?"


"잘 모르겠어요. 조금 심심하기도 하고"


그 여자는 자신을 A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여자였지만 정을 주는 척 주지 않는 이상한 타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아원같이 아이들이 바글바글 거리는 곳에 있다가 온 이곳은 확실히 너무 지루했다. 아직은 어색한 이 공간에서 하루 종일 무얼 하나 하고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해서 하늘하늘하게 휘날리는 커튼이 예뻐서 그 광경을 마냥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먼저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도 몰랐고, 사실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사는 데엔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별 상관은 없었다. 학교는 집안을 돌봐주는 A가 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학교에 가는 길은 별로 복잡하지 않았다. 길을 건너면 바로 보였기 때문에 편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그날은 A도 쉬는 날이어서, 전날 만들어 놓은 음식을 냉장고에서 꺼내먹으면 되었다. 손을 씻어야겠다 하고 생각하고서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공중에 두터운 무언가가 있어서 무엇인가 하고 올려다봤을 때, 항상 잿빛 얼굴을 하던 엄마가 목을 매달 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욱 처진 그 몸뚱어리와 길게 흘러내려와 있는 혓바닥, 손끝이 나 발끝이 검붉은 색으로 변한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멍하니 그 매달린 형상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엄마였던 형상이다. 그 모습이 무섭다기보다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곳에서 튀어나온 것에 놀라서 한참을 진정시키다가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내 방으로 돌아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그와 동시에 왜 나를 데리고 왔을까? 하는 생각이 한참 나를 뒤집어 파고들어 한참을 헤매었다. 

저녁이 되어 돌아온 아빠는 나를 거들떠보지 않고 휙 지나쳐 간 후에 화장실에 매달린 그것을 발견했는지 벌벌 떨면서 우악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는 '이런 개 같은..... 미친년이.. 왜 이런 데에서 죽고 지랄이야. 기분 나쁘게...' 하고 진정되지 않는 목소리로 미친 사람처럼 말을 더듬으며 중얼거리다가 늘 관심 없게 지나쳤던 나를 처음으로 과격하게 찾아와서 내 어깨를 마구 흔들어 대면서 말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응?"


"... 뭐가요?"


"넌 어째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엉?!"


하고 겁을 주려는 듯 소리를 질러대면서 화풀이를 했다. 어째서 아무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난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하는지? 



아빠는 그 사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는지 엄마였던 시체를 끌어내리고서는 옷장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 누구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옷장 안에 넣으면 다시 전처럼 돌아오나요?"


나의 말에 아빠는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무것도 모르고 밝게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온 A는 어제는 아버님하고 식사를 하셨나요? 하고 발랄하게 물었다. 하지만 어제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먹지 않았다. 먹은 게 있다면... 엄마를 옷장에 넣으면서 욕지거리를 하던 아빠의 광기 어린 욕설?


A는 평소와 다름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식사를 차려주었고, 빨아 두었던 옷을 꺼내주고 짐을 챙겨주었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사모님은 어디 가셨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나는 아빠가 말을 하지 말라는 당부를 생각하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모님은 어디 가셨나요?"


이틀 정도 지나고 A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요?"


"네"


".. 옷.."


"옷?"


"잘 모르겠어요"


내 대답에 A는 내가 엄마와 아빠와 교류가 없다는 걸 이제야 생각해냈는지 머쓱하게 웃으면서, 미안해요 제가 연락을 해봐야겠네요 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집안에서 울리는 핸드폰을 발견하고서 폰도 두고 가셨나 보네. 하고는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었다.


"사모님이 원래부터 그렇게 말이 없으신 건 아니었는데."


A는 후식으로 주스를 앞에 놓아주면서 말했다. 원래는요, 사모님 하구 사장님하고 사이가 엄청 좋으셨어요. 근데 하나 있는 아들이 사고로 죽으면서 사모님이 과한 우울증에 시달리신 거죠. 그 아들을 두 분께서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는데.. 그분은 정말이지 뭐든지 잘하는 그런 아이였거든요. 우울증 치료를 받으라고 조언을 해도 자신은 그런 게 아니라면서 화만 내시고... 사장님은 그런 사모님이 재미가 없으셨는지 다른 여자를 찾아서 떠돌아다니셨어요. 그렇게 몰래 연애를 하는 게 오래가겠어요?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은 잡혀서 사모님이 이혼을 하자고 요구하셨어요. 근데 이 재력이 다 사모님의 집에서 해준 거라서 사장님 입장에서는 죽어도 헤어져선 안되는 입장인 거였어요. 그래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빌다가 자신에게 있는 관심을 조금 분산시킬 생각을 하셨는지.. 아니면 우울증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을 하셨는지 입양을 제안하신 거예요. 근데, 어째서 이렇게 무관심한 걸까요? 먼저 웃으면서 말이라도 걸어보지 그래요? 

A는 그렇게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상대가 웃고 있으면 누구나 기분이 좋잖아요. 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갑자기 아차 하는 표정으로, 미안해요 제가 앞서 한 말 무슨 말인지 잘 못 알아듣는 말이죠? 하고 웃었다. 무슨 소리, 고아원에서 저런 말은 죽도록 들으면서 자랐기에 어린 나이에도 고아원의 모두는 저런 말을 전부다 알아듣고 있다고요. 분명히 A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A는 나보다도 세상을 잘 모르는 듯.



A가 돌아가고 나서 아빠가 엄마를 우겨넣었던 옷장을 열어보았다. 엄마 특유의 화장품 냄새가 잔뜩 베인 그 옷장에서 검붉은 손과 발을 한 엄마가 희번득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 어쨌든 나는 엄마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채로 엄마를 마주한 것이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저녁엔 용기를 내서 아빠에게 웃음을 보였다. 아빠는 약간 당황한 듯이 나를 쳐다보고는 그대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수상쩍었는지 다시 나와서, 무슨 일 없었니? 하고 물었다. 효과가 있었나? 네, 없어요. 근데 A가 엄마를 물어봤어요. 그래서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래? 잘했어. 잘했어 라는 말을 듣게 된 나는 지나치게 흥분상태가 되어서 설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도 엄마는 다시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내가 아무리 웃어 보여도 희번득한 눈알만을 굴리고서 기다란 혓바닥을 추욱 늘어트리고 있었다. 나를 원망하는 것일까? 그리고 점점 그 옷장은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며 잔뜩 어두운 기운을 풍겼다. A에게는 그 방의 출입을 금지시켜서 A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엄마가 옷장 안에서 차갑게 누워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악취가 새어 나왔을 때는 음식물을 버려도 어째서 냄새가 나는지 모르겠다면서 청소를 더욱 과하게 할 뿐이었다.


아빠는 그 방안의 옷장을 보면서 고민하는 일이 많은 듯, 당황한 듯이 방안을 돌아다니면서 머리를 감싸고 괴로운 듯이 신음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멀리서 그런 자신을 지켜보는 나를 보더니, 괴상하게 한번 웃어주고는 나에게 와보라며 친절하게 손짓을 했다. 그 방엔 엄마가 매달려 있었던 것과 같은 장치를 해두고 그 아래에는 다소 불안정해 보이는 의자를 세워 놓고는 말했다.


"카무이, 여기에 올라가 볼래?'


"왜요?"


"아빠랑 재미있는 거 하자"


아빠의 웃는 모습이 섬뜩해서 우스웠다. 삐에로 같았다.


"여기에 서서 이 고리에 이렇게 목을 걸어봐, 몇 초나 버티나 보자. 오래 버티면 아빠가 맛있는 걸 사줄게"


세상에, 나를 바보 천치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빠.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배는 영악하다고요.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내 말에 아빠는 시범을 보여주듯이 의자에 올라서서는 그 고리에 자신의 머리를 끼워 넣고는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하고 말하면서 씨익 웃어 보였다. 나는 한참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듯이 다가가서 웃어 보이는 아빠를 한참 바라보았고, 아빠는 착하지? 하는 악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정말이지.. 고아원에 있는 원장보다 더한 히스테릭과 괴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빠는 그 새로운 여자와 새로운 시작을 할 생각을 한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를 자살로 위장시켜서 엄마와 함께 컴컴한 옷장 안에 넣어 둘 생각을 하고 있는듯하였다. 아빠아.. 나는 비록 11살이지만 자살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정도는 대충 아는 나이라고요... 


그리고 나는 그대로 아빠가 밟고 있는 의자를 발로 차버렸다. 철렁, 하고 엄마와 똑같이 매달려 버린 아빠는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는 그 굵은 고리를 붙잡고,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려 발버둥을 쳤다. 그 발버둥으로 인해서 매달린 아빠는 엄청나게 흔들흔들거리고 켁.. 케엑... 하는 숨이 넘어가는 괴상한 소리를 드문드문 내지르면서 나에게 의자를 다시 세워달라면서 눈알이 빠져나올 것처럼 치켜뜨고서 말을 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빤히 쳐다보다가, 웃어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으니 나도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주기 위해서 아빠에게 웃어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빠를 매달고 있는 고리가 혹시나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면서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아빠도 엄마와 똑같이 추욱 처진 낙지 같은 형상으로 매달렸다. 저렇게 추욱 쳐지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구나.


내일이면 아빠도 옷장에 넣어줄게요. 엄마와 같이 사이좋게 그 공간에서 편히 쉬시길.











-

택시를 잡았다. 기사 아저씨는 친절하게 어디까지 가세요? 하고 묻는다. 내 옆에 그 녀석은 OO병원이요. 하고 말했다. 이 녀석도, 누나도 이상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죽음이라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추상적인 단어 일 뿐, 나와는 관계가 없는 단어라고.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고?"


그 녀석은 창밖을 바라 볼 뿐 말이 없었다. 도착한 병원은 작고 완전히 한가한 병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하고 쳐다보는데 그 녀석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가 아니야. 저쪽"


그 녀석이 가리킨 곳은 장례식장. 그 안에서는 귀신들의 웃음소리 같은 으스스한 소리가 울리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자 훅 올라오는 향냄새, 그리고 분주한 경찰들, 그리고 사람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복도에 기대어서 멍하니 서있는 누나. 누나는 고개를 돌려서 우리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누나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것이 처음, 그리고 마지막이었다. 

나는 다가가서는 왜 우느냐고 누나의 어깨를 잡고서 물었다. 현실이 분간이 되지 않아서 머리가 핑핑 아팠다. 장례식이라는 공간의 공기가 무거워서인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기분조차 들었다. 조사를 위해서 다가온 경찰을 보고 나는 그 경찰을 붙잡고 물었다.


"아니에요. 이상해요. 신원확인은 한 거예요? 보여주세요. 어디에 있어요?"


내가 묻자 누나는 나를 잡으면서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이미 다 확인을 했다면서 나를 와락 안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누나를 밀쳐내고서 다시 물었다.


"빨리. 내가 확인해야겠어. 어디에요? 어디에 있어요?"


별수 없이 나를 데리고 간 그 영안실에는 시체 두구가 흰 천을 이불처럼 덮고서 누워 있었고 메말라 붙은 검붉은 핏자국이 얼굴에 묻어 있었다. 그리고 옆엔 벗겨낸 핏자국이 흥건한 옷들. 분명히 내가 본 적이 있는 엄마와 아빠의 옷 들이었다... 죽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나는 잠든 듯이 누워 있는 엄마와 아빠를 흔들어서 깨울뻔했다. 하지만 흔들어도 깨지 않을 그 상태의 엄마와 아빠. 죽음. 치료 같은 것은 필요 없는 상태. 죽음. 다시는 볼 수 없음. 죽음..... 나는 그제야 조금은 우리 엄마와 아빠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서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나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너무 놀라서 그저 몸이 조금 미세하게 떨릴 뿐이었다. 경찰이 조사를 위해서 간단하게 물어볼 것이 있다면서 우리에게 다가왔고 누나는 눈물을 닦고서 경찰에게 갔다. 멍하니 서 있는 내 곁에서 그 녀석이 나에게 잠시 앉으라면서 의자로 데리고 갔고 털썩 앉으면서 흐릿해진 시야로 그 녀석을 한번 보았다. 그 녀석 역시 표정이 어두웠지만 생각보다 침착했다. 아, 그렇지. 너는 우리의 가족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렇게 침착할 수 있는구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이 녀석이 밉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녀석을 미워할 정신이 남아있지 않아서 그런 것일지는 모르겠다만 어색하게 옆에 앉아 내 손을 잡아주었을 때도 손을 뺄 생각을 하지 못 했다. 내가 이 녀석이 있다는 사실에 약간은, 아주 약간은 안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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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오키는 인간적으로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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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오키] Jacob's ladder 7

2016. 2. 18. 09:1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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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쳐다보자마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이 밝았다. 그날따라 햇빛이 뜨겁게 비추어 사막처럼 마냥 건조하고 텁텁하게 보였다.


다음날 나는 붕대를 풀었고, 누나와 부모님의 걱정과는 전혀 다르게 내 상처는 깨끗했다. 그저 조금 깊었는지 아직도 낫지 않은 조금의 타박상 자국 밖엔 없었다. 의사는 내 상태를 보고는 기적에 가까운 재생력이라며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면서 나를 데리고 가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실행했다. 대략 7개에서 8개 가까이의 검사를 실행했고 나는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검사에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하품을 했다. 여유가 넘치는 나와는 다르게 검사가 끝날 때까지 엄마와 누나는 마음이 편하지 않은지 손을 꼭 붙잡고는 초조해하며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정말... 이상할 정도입니다.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렇게 멀쩡하다니..... 이상할 정도네요. 흉터가 없이 나은 건 정말 다행인 부분이지만.. 몇몇 검사를 해본 결과 심한 햇빛 알러지로 보이는 증상이 보입니다. 약을 처방해 주겠지만.. 햇빛 알러지는 치료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엄마와 누나는 기뻐했다. 너무 다행이라면서 나를 끌어안고서 다시 한번 울었다. 얼굴 가득 있을 뻔했던 흉터가 없게 된 것은 정말로 잘 된 일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쉬움이 남아 멍하니 창밖을 봤다. 병원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 그리고 내가 다시는 쐬지 못할 햇빛이 주황빛으로 하늘을 물들이며 서서히 아래로, 더 아래로 잠기고 있다. 


욕심이 많은 너는 더 이상 빼앗을 것도 없는 나에게서 빛조차 빼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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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놈은 뭘 해도 된다고, 카무이 녀석은 내 앞에 당당히도 얼굴에 조금 난 생채기에는 거즈 조각을 드문드문 붙이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멀쩡하게 우리 집에 다시 들어왔다. 피부의 상태가 도저히 염산을 뒤집어쓴 새끼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나는 들어오는 그 녀석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치켜뜨고 있었다.


"다행이지? 엄마는 정말이지... 내가 죽는 줄 알았어... 다행이야 우리 아들"


아들 같은 소리.

엄마는 카무이 손을 잡고서는 몇 번이나 중얼거렸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그 녀석의 눈빛에 나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서 똑바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거 참, 다행이네"


얼마나 재수가 좋으면 저 새끼는 염산을 뒤집어써도 멀쩡해? 재수도 좋은 저 개새끼. 

엄마는 그 녀석에게 보라색 우산을 사다 줬다. 나는 그 우산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저 이런 햇빛 쨍쨍한 날에 웬 우산? 하고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이다. 설마 멀쩡해 보이는 저 녀석에게 쨍하고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볕이 쥐약이 되어 다시는 평범하게 햇빛을 쐬지 못하는 결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이상하게도 그 녀석의 얼굴에 염산을 붓는 잔혹성을 내보인 것도 나였으면서 그 녀석이 햇빛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말에는 약간, 아주 약간은 죄책감을 느꼈다. 저 새끼가 너무 멀쩡하게 내 앞에 나타나서 그런 거야. 흉측한 피부를 하고 나타났다면 예쁜 것만을 사랑하는 인간의 특성상 저 녀석에게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을 텐데. 가족들 역시 붕대를 하고 있을 때 슬퍼하던 모습은 다 집어던지고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었을걸? 


어쨌든 돌아온 저 새끼는 보살인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히고서도 모든 것을 다 용서라고 말하는 예수인지.. 그 이후에 나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둘이 있다고 해도 그 사건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실 없는 농담 따위 정도? 그렇다고 나를 향한 원망이라던가, 살기가 강력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여전히 전과 비슷하게 알듯 모를 듯한 은은한 살기만을 띄고 있었다. 그런 점이 나를 더 무섭게 만들었다. 이 녀석은 나를 공격하는 완벽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소나기처럼 거세게 비가 내렸다. 여름도 아닌데 소나기도 아닌 장대비가 예고 없이 내렸다. 우산이 없었던 나는 히지카타에게 태워달라고 졸라볼까 하다가 그날은 그 녀석도 바빠 보여서 비를 맞고서 집에 가기로 했다. 비가 오면 행동이 제한되어서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막상 옷이 젖어드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으면 편해진다. 어릴 때 엄마가 집에 있을 때는 우산을 직접 가지고 학교를 찾아왔었던 일이 생각난다. 학교를 마치고 밖에서 노란색 우산을 쓰고 서 있는 엄마를 보면 엄마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집에 가는 길이 참 즐거웠었는데.. 요즘엔 딱히 오라고 말하지도 않고, 남자인지라 엄마 역시 알아서 오겠지 하고 생각하는 부분이 큰 듯하다. 사실 이 나이를 먹고서도 학교 끝날 시간에 맞추어 엄마가 우산을 직접 가져다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광경은 남자아이로써는 조금 창피하기도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서 들이붓는 듯이 쏟아지는 빗 줄기를 보며 나가려는데 익숙한 옆 학교의 검은 교복, 그리고 보랏빛 우산이 눈에 확 띄었다. 


"비가 많이 와서 집에 가려다가 들렸어"


....


"너희 학교가 조금 더 빨리 끝났던 것 같아서 오늘은 조금 빨리 나온 거야 정말 고맙지?"


그렇네, 내 덕에 저 녀석은 항상 우산이 있었다. 나를 일부러 불편하게 만들으려는 속셈이겠지만 일부러 이렇게까지 와서 우산을 씌워주겠다니.


"... 됐어, 그냥 갈래"


"같이 써. 일부러 왔잖아 내가"


"와달라고 한 적은 없어"


"뭐, 그건 그렇지. 하지만 네가 감기에 걸리면 내가 곤란해"


"왜?"


"나도 감기에 걸릴 테니까"


나는 그 녀석의 말을 무시하고 새하얀 안개와 함께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걸었다. 내 뒤에서 그 녀석은 조금은 으슥하게 질퍽이는 빗소리를 묻히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도는 알았다. 웃고 있겠지 뭐.


"그렇게 나와 같이 쓰기가 싫다면 네가 쓸래?"


이미 젖을 데로 다 젖어서 나에겐 우산이 필요 없었다. 뒤에서 말하는 것에도 대꾸하지 않고 가는 와중, 그가 한 다음 말에 나는 우뚝 멈춰 섰다.


".... 이럴 때가 아니면 나는 평생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잖아, 아 그렇다고, 원망하는 건 아니야"


뒤돌아 봤을 때 녀석은 우산을 접고서 나에게 내밀었다.


"네가 쓰고 가"


능청스럽게 받아써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받을 수 없었다. 저 새끼는 지금 이렇게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반응을 보여올지 다시 한번 알짱대면서 지켜보는 것이다. 나는 그런 수 엔 걸려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내가 너에게 한 짓으로 인해서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그런 것으로 괴로워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일을 실행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멍청아.


우산을 내밀었던 손을 확 밀치고 지나가자 뒤에서 그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뭐가 우스웠는지 다시 달려가서 묻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더러웠다. 시끄러운 비와 땅의 마찰 소리, 그리고 길가의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는 요란스러운 차소리와 바람소리,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소리 등등 온 세상의 잡음이 한꺼번에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나는 묵묵히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러면 무얼 하나. 집은 나의 피난처가 아닌 것을. 어차피 이곳으로 잠시 피난을 왔다고 해봤자 곧 있으면 그 녀석도 이곳으로 우리 가족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나를 쫓아올 텐데.











-

창가에 앉았던 나는 햇빛이 들지 않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른 아이들도, 아부토도 우산을 쓰고 다니는 나를 이상해하지 않았다. (나를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내 앞에서 표현을 못한 것일지도) 이제 옥상에 올라가더라도 나는 우산의 그늘 아래에만 서있어야 했다. 하늘이 우중충한 날이면 가끔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가능했는데, 어쨌든 고개를 들고 내가 볼 수 있는 하늘은 항상 어둡고 칙칙하고 음침한 모습뿐이어서 조금은 아쉬웠다...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아. 괜찮아. 


아부토는 나에게 엄마, 아빠와 누나가 말했던 것처럼 신기하다고 말했다. 어떻게 염산을 뒤집어쓰고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느냐면서 나에게 '너도 당하는 쪽은 아닌가 보다. 남을 해치는 쪽이지' 하고 농담을 하듯이 말했다. 그 말은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상처는 받는 쪽보다는 상처를 주는 쪽이 더 편하니까.


아부토가 나를 저의 집으로 초대했다. 자신이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나 뭐라나.. 여튼 혼자 궁시렁대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혼자 사는 집이라서 그런지 그 큰 덩치의 그 녀석과는 정 반대로 모든 것이 비좁았고, 정리 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낡은 싸구려 장판은 떨어질데로 떨어져서 이곳이 밖인지, 실내인지 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지하는 아니였지만 햇빛이라고는 하나도 들지 않아서 내가 있기에는 가장 적합한 장소일 거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구석에 침대로 보이는 낡고 낮은 매트리스에 걸터 앉아 있자 그가 나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넌 운이 좋은거야. 나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니까. 널 그렇게 만든 그 새끼에게 복수 하고 싶다면 도와줄게"


"복수?"


"응.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서? 갚아줘야지"


"글쎄..... 딱히.."


아부토는 신난 듯이 온갖 갖가지 종류의 총이며, 칼이며, 등등을 꺼내어 잔뜩 늘어놓았다가 김이 팍 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너 엄청 착한 녀석이구나?"


"아냐, 착한게 아니라.. 일단은.. 뭐라고 해야하지? 기다림? 응 그래, 기다리는거야"


"뭘 기다려? 사리 나오겠네"


아부토는 특유의 걸걸한 말투로 대꾸하고는 늘어놓았던 갖가지 무기들을 다시 제 자리에 놓았다. 저렇게 정리를 할 정신이 있다면 나는 장판을 다시 깐다거나, 도배를 새로 한다거나 아니면 매트리스를 다시 주문하거나 했을 것이다. 


매트에 나란히 누워 있을때 아부토는 나에게 시덥잖은 질문을 해왔다. 술은 마셔봤냐, 담배는 피워봤냐 가출은 해봤냐 등등..

담배는 간접 흡연으로 연기에 숨이 막혀 질식할 만큼 피워봤고, 술은 마셔본 적은 없지만 술병이 깨졌을때 얼마나 뾰족한 단면을 드러내면서 깨지는 것인지는 안다. 가출은.... 해본거라고 해야 맞겠다.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집을 나간적은 많으니.


"담배....는 싫어. 술은 안 마셔봤고... 가출...은....."


"착실하네"


"... 자꾸 착하다고 말하지마. 그러면 삐뚫어지고 싶어지잖아"


내 말에 아부토는 크게 웃었다. 아부토는 이상하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그는 내가 자신과 비슷한 것 같아서 좋다고 말했다. 나도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에게 끌리는 것과 비슷하게 그에게 끌리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았다.

 

시계 바늘이 여덟시 즈음을 가리켰기에 집으로 돌아가려 나왔다. 바깥은 이미 해가 져서 까만색. 밤의 공기는 낮보다 차갑고, 반투명한 구름이 달을 살짝 덮고 있어서 뭔가 으슥한 날. 이런 날은 괜시리 들뜨기도 하고, 쓰읍 하고 밤 공기를 깊게 들이키면 부풀어 오르는 가슴에 설레임이 가득 담긴 것 같아서 좋아. 우산을 써야할 이유도 없어 홀가분하게 길을 걷다가 놀이터를 지날 때, 나의 사랑스러운 그 녀석이 그네에 홀로 앉아서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며 늘 끼고 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서 가만히 그네를 흔들면서 앉아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그 녀석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지켜보는 꼴이 되었다. 조금은 암울하게, 기운없이 기다리던 그 녀석은 차를 가지고 나타난 키가 큰 어떤 녀석을 보고는 급 생기를 띄었고 조금은 활달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차를 타고 사라졌다. 처음엔 누군지 몰랐었는데 그를 데리고 사라진 그는 누나의 남자친구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곧 기억해 냈다. 내 앞에서는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적이 없는 그 녀석, 사실 나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늘 까칠한 저 자식이 순순히 차에 올라탄다거나, 다른 누군가가 오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거나 하는 모습에는 조금, 아니 조금 많이 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그 감정이 질투라는 것을 알았다. 


질투라...

그것은 내가 경험해 본 몇 가지의 감정 중에 가장 기분 나쁘게 달라붙는 추하고도 비참한 감정이었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 나는 그 녀석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얼마나 다정하게 그 녀석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지에 대한 생각에 내내 사로잡혀 미치광이가 될 것만 같았다. 질투라는 감정이 꼭 그 상대와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그 이상의 짓을 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감정은 아니었다. 누나의 남자친구이고 서로 타액을 섞을 법한 상대로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저... 그저 나는 네가 우리 가족 외의 상대에게 조금의 호의를 보이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

우리 엄마도 아빠도 괜찮고, 누나도 괜찮아. 네 녀석이 다정해도 내가 아무렇지 않은 상대는 우리 가족 뿐이야.


질투라는 감정에 휩쌓여 허우적대고 있을때, 엄마는 나를 보고는 무슨일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분명히 표정만으로는 내 감정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임이 분명했던 것인데.. 엄마가 그렇게 물어와서 나는 약간 놀랐다. 그리고는 이내 그럴리가요, 하고 다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엄마는 자기 자식이 조금 안 좋은 일이 있는것 같다거나 감정이 조금 상한 모습 쯤은 뒷모습만 봐도 아는 법이야"


"정말로 아무일도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 뭐 좀 먹을래?"


엄마는 과일을 이것 저것 깎아주면서 소고는 이런 걸 줘도 많이 먹지도 않는데, 카무이는 항상 웃으면서 잘 먹어서 정말 좋아. 하고 웃으면서 내밀었다. 건네주는 과일을 하나씩 받아서 입에 넣으면서 나는 그 순간은 그 녀석을 잊을 만큼 엄마라는 달콤한 존재에 젖어있었다. 내 감정까지 이렇게 사소하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라니. 이런 사람이 엄마라는 존재구나 하는 존재자체의 신성함에. 


"소고는 아직도 아이 같아서 나와 둘이 있으면 네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해"


"제 이야기요?"


"응"


엄마는 그리고는 우스웠는지 잠깐 작게 웃다가 말했다.


"엄청 유치한 질문을 그렇게 많이 해대는거 있지? 예를 들어서, 카무이랑 나랑 물에 빠지면 누굴 먼저 구할거야? 같이 어이없는 질문"


귀여워. 나도 그 말을 듣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고 엄마도 함께 웃었다. 


"그래서 답은 뭐라고 하셨어요?"


"엄마는 힘이 아주 쎄니까 둘다 거뜬히 구할 수 있다고 했지!"


하고 엄마는 웃어보였다. 나도 같이 웃었다. 내 이야기를 한다는 그 녀석이 지금 앞에 있었다면 꼬옥 끌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좋았고, 엄마가 나를 그 녀석과 정말로 동등하게 생각해준다는 것도 기뻤고.... 

봐, 역시 엄마 역시 강한 사람이었어. 그래서 강한 우리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나도 그렇고, 오키타도 그렇고.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엄마를 사랑하는 거예요.





함께 비를 맞고 걸어 왔던 날, 흠뻑 젖어 흰 셔츠 사이로 비치던 속살이 눈앞에 잔뜩 아른 거려 미칠 것 같았던 그 날에는 아쉽게도 증상이 일어나지 않아서 기다리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틀 사이로 보이는 그 녀석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용기내어 손을 뻗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한번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것이 윗층에서 자고 있는 그 녀석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내가 직접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엔.. 몰라, 그저 뭔가 두려웠다.


그리고 오늘 질투심으로 나를 비참하게 만든 그 사랑스러운 녀석은 오늘이 지난 새벽 나에게 더욱 포옥 안겼다. 비오던 날의 회포를 풀어주듯이 그 날따라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갗이, 그리고 그 체취가 나를 짐승처럼 만들어 버렸다. 하이에나가 뼈다귀를 핥듯이 그의 피부를 핥고, 굶주린 떠돌이 개가 음식 냄새를 맡고 흥분한 듯이 킁킁 거리면서 그의 체취를 맡았다. 처음으로 이 녀석을 내 아래에 두고 돼지처럼 함부로, 거칠게 범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잠에 들어 있는 이 녀석이 아닌 멀쩡한 상태의 이 녀석을 원했기에 실행을 하지는 않았다. 




다음날은 일요일이라서 다들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나는 이상하게 일찍 일어나 옆에 있는 그 녀석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서 베란다로 나가서 새벽 이슬의 서늘한 기운을 받았다. 촉촉해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했다. 그때 막 일어났는지 엄마와 아빠가 거실로 나와서는 일찍 일어난 나를 보고서 일찍 일어났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늘 엄마와 아빠는 놀러갈거야. 아마 월요일 오후에 올 것 같아. 월요일에 오면서 너도 호적에 등록하고 올거야"


하고 엄마는 웃었다. 딱히 상관없다고 말했었지만 그 이후로도 엄마는 계속 신경을 썼나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웃어주었다. 

엄마가 아침을 먹자고 깨워도 그 녀석은 그냥 더 자겠다고 칭얼대면서 내 침대 안에 파고들어 계속 잠을 잤고 부모님과 나, 그리고 누나 넷이서 아침을 먹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과일 샐러드는 정말 맛있다. 아마 그 맛을 흉내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나갈때서야 그 녀석은 귀엽게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서 인사를 했고 엄마와 아빠는 갔다가 오겠다면서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났다. 누나는 남자친구와 약속이 있다면서 집을 비우고, 나는 누워서 전혀 흥미 없는 TV를 보고 있었다. 오키타는 다시 제 침대로 올라가서는 음악따위를 들으면서 누워있었다. 집엔 가득히 TV에서 흘러나오는 기괴한 가식적인 웃음소리. 그리고  나, 그리고 너. 아마도 네 귀에 울리고 있을 알아듣지 못할 속삭임들.


그 한없는 고요함의 전야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지 몰랐다. 갑자기 전화기가 정신없이 처량하게 울었다. 

저녁의 고요함을 깨고서 울린 집의 전화기에서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더불어 말소리가 드문드문 들렸고, 나는 계속 네? 뭐라고요? 하는 말을 두어번 반복했다. 안 들려요 뭐라구요? 네? 다시 말해 주세요. 잘못 걸려온 전화인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수화기를 내려 놓고나서 30분 쯔음 후에 두 번째 적막을 깨트린 전화는 누나의 전화였다. 전화기 너머의 누나는 왜인지 엉망으로 울고 있었다. 나는 누나의 그런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이상한 말을 했다..


.....카무이니?....소고는?....


방에 있어요. 누나 왜그러세요?


...아.. 그렇구나.......엄마가... 아빠가......


네 누나 왜그러세요?


아.......아니.... 그게......


왜 그러세요?


도... 돌아가셨...데.....


........... 무슨 뜻 인지 모르겠어요. 뭐라고요?


그 이후에는 누나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정신없이 떨고 있어서 내가 누나, 누나 왜 그래요 하고 몇 번이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돌아가셨다..라니. 그 단어는 나를 순싯간에 멍하게 만들고 내가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게 모든 회로를 막아버렸다. 여보세요? 누나, 왜 말이 없어요. 뭐라구요? 모르겠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구요. 뭐라구요? 

누나의 전화에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만 조금은 멍한 태도로 답하고 있어서인지 그 녀석은 무슨 일이냐면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본 나에게 뭐야 그 표정? 하고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표정이 약간 정신나간 새끼 같다고 중얼거리면서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누구나 자신이, 혹은 제 주변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난다는 것은 상상하지 않는다. 그걸 나는 때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달콤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 미지근한 행복이라는 그늘에 가리어져 그 사실을 망각했고.. 사람이 이렇게 황당하고 갑작스럽게, 그리고 예고도 없이 떠나간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아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진즉 알고있다고 하더라도 별 수 없다. 데려가시겠다는 신의 뜻을 내가 감히 어찌 막을 수 있겠어요.. 예고없이 떨어지는 사형선고에는 몸이나 움츠리고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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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무오키] Jacob's ladder 6

2016. 2. 10. 22:4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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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망친 나는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았다. 실수에 의한 공포가 첫 번째로 나를 너무나도 떨게 만들었고 그다음으로는 돌아갔을 때 나를 바라볼 가족들의 눈초리가 두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떨며 외진 골목길의 구석에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이성을 찾으면서 머리를 굴렸다.


혹여나 내가 그에게 그런 짓을 했다고 하나, 친 자식인 나를 버리면서까지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 녀석의 편에 서 줄까? 잠깐 동안 나에게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몰아세워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지금 이렇게 떨면서까지 걱정할 정도로 엄마는 나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그 자식이 아무리 사람의 탈을 쓴 흉악한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렇기에 나의 부모님도 모성이라는 숙명을 별 저항 없이 따르리라는 것도. 그 새끼가 엄마에게 이런 짓을 나에게 당했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그 녀석은 결국 우리와 어긋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엄마가 그 녀석을 좋아해서 그 녀석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이 정도로 사이가 틀어져 버린 우리 둘을 그대로 붙여둘 수 없을 것이고, 만약 나를 더 믿어서 그 녀석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더더욱 우린 같이 살 수 없는 관계가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녀석이 나를 봤다는 것은 실수였어도 실수가 아니었다. 되려 나를 도와주는 사건의 전조였다. 


이내 이성을 찾은 나는 떨림이 멈추고 다시 내 모습을 찾았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누나에게 오늘은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면서 핸드폰 배터리가 없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누구에게 가야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히지카타는 위험하니 야마자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짜고짜 재워달라는 말에 야마자키는 당황해했지만 어차피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녀석인지라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 주소를 확인하자마자 핸드폰은 그대로 꺼버렸고 홀가분하게 야마자키의 집으로 향했다.


그날은 몽유병의 증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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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그 녀석의 모습에선 나와 눈을 마주친 것에 대한 당황함이 느껴져서 귀여웠다. 바닥엔 내가 뒤집어쓴 액체인지, 아니면 내 피가 흐르는지 모르는 시뻘건 액체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면서 내가 지나온 길을 알려주고 있었고 교복이며 가방이며 온통 엉망의 상태로 나는 태연히 집으로 걸었다. 얼굴은 그 녀석과 내가 접촉했을 때처럼 데인 듯이 뜨거웠다.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기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더럽다는 점이다. 목으로 액체가 흐르는지 목덜미까지 스르르 붉은빛이 번지고 나는 표정 없이 걸었다. 생각할수록 그 녀석은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귀여운 녀석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관심도 없다. 한참을 걷는데 지나가는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귀가 찢어질 듯이 비명을 지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는 무슨 병이라도 있는지 몸을 덜덜 떨면서 되려 나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너무 이상하리만치 몸을 떨고 있어서 오히려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건 내 쪽이었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지른 괴성 때문에 놀라서 잠깐 발걸음을 멈추긴 했지만 이내 나는 내가 향해야 할 집으로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자 나를 본 엄마가 말을 잊지 못 했다. 길에서 만난 여자처럼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나를 보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있다가 손을 덜덜 떨면서 이게... 무슨.... 하고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내 앞에 서서는 한참을 덜덜 떨다가 숨을 거칠게 쉬어대면서 내 손과 어깨와 얼굴을 뒤덮은 피를 다시 찬찬히 한번 보더니 이내 나의 앞에서 오열했다. 왜 이대로 집에 왔냐면서 어서 병원 먼저 가야 한다면서 나를 잡아끌었고 눈물이 범벅된 엄마의 얼굴에 사실 약간은, 조금은 감동해서 엄마, 울어요? 하고 물었다. 엄마는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고는 나를 옆에 태우고, 차가운 수건을 허겁지겁 가지고 와서는 나에게 응급처치로 우선 상처에 대고 있으라면서 허겁지겁 시동을 걸었다. 


"엄마, 그러다가 사고 나요"


엄마는 자꾸만 눈물을 훔치면서 한 손으로는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대기 바빴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래.. 조심할게.. 하고 자꾸만 울었다. 신호등은 그날따라 고맙게도 빨간 불이 자주 켜지지 않았다.


도착한 응급실은 모든 정신 나간 사람들의 집합소 같았다. 간호사던 환자들이건 모두 다 허겁지겁 돌아가고 있었고, 그곳은 팔이 하나 잘린 사람, 온몸에 화상을 입은 사람,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실신상태로 실려온 사람 혹은 나 같이 피를 잔뜩 뒤집어쓴 사람이 많았고 물론 정말 작은 상처로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작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피를 뒤집어쓰거나, 팔 다리가 하나 없거나 한 사람들을 보고서는 그냥 돌아갈까.. 하는 풀 죽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나를 보고 소리를 지른다거나 하지 않는다. 엄마가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나를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내 상태를 본 간호사들은 덤덤하게 이쪽으로 들어오라면서 급하게 어떤 병실을 내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와서는 나를 눕히고 간호사에게 어떤 것을 성급하게 지시하고는 치료를 시작했다. 잠시 후 나는 미이라의 형상처럼 온통 얼굴, 목, 손에 칭칭이 붕대를 감았고, 의사는 그런 나에게 안정을 취하라면서 우선 누워 있으라고 말했다. 내가 미이라라면 이 병원은 스핑크스 정도는 되려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병원의 하얀 벽에 그로테스크한 벽화들이 스르르 살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곳의 폭군 정도 되겠네. 나는 혼자 생각하고는 키득키득 웃었다.  


문 밖에선 희미하게 엄마와 의사의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얼굴에 염산을 뒤집어쓴 것 같은데요.. 사실 눈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입니다. 흉터...는.. 지금은 응급 처치 수준이지만 피부의 상태를 보면 남지 않을 수가 없는 것쯤은 아시겠죠? 피부가 녹아내린 상태여서.. 더 큰 병원으로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가서도 아주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지만.."


의사는 꽤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엄마는 계속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른 방법은 없는 거냐면서 자꾸만 물었고 의사는 더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만 반복했다. 


얼굴 전체를 가득 뒤덮은 흉터라.. 조금의 흉터라면 조금은 위협적으로 보여서 멋있어 보이기라도 할 텐데 쭈글쭈글한 화형 흉터와 물이 흐른 듯 녹아내린 피부의 흐른 흉측한 자국을 평생 달고 다니는 것은 사양...이지만 돌이켜보면 시력이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도 맞다. 조금은 화는 났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는 내 앞에선 더 이상 울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고 애써 나를 안심시키려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고는 애써 웃어 보였다. 하지만 눈에는 눈물이 샘물처럼 솟아서 곧 떨어질 것 같은 구슬처럼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엄마 나 괜찮아요.


내가 말하자마자 엄마는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소리 죽여 울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침을 힘겹게 삼키는 모습, 그리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감각이 엄마가 울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그 순간 나는 퇴행하여 나 역시 엄마의 품에 폭 안겨 기대었다. 엄마에게서 나는 희미한 화장품 냄새와 눈물에서 풍기는 살짝 습습한 냄새가 기분이 좋았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누나가 정신없이 뛰어왔고 누나 역시 나를 보고는 어떻게 된 일이냐면서 울었다. 누나는 그 녀석에게 전화를 시도해 보다가 조심스럽게 나와 엄마에게 소고는 오늘 연락이 연락이 안 돼요.. 하고는 작게 말했다. 오늘은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했다고도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는 그 녀석의 연락 따위는 우선 신경 쓰기 싫다는 듯, 귀찮다는 듯이 알겠다고 넘기고서는 붕대로 감싸고 있는 내 손을 꼭 잡고서 주문을 외우듯이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오키타, 너 뭐 해? 그렇게 두려운 표정을 지어놓고서는. 무서웠으면 당장 내 앞에 나타나서 날 보면서 초조해하고 있어야지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을 줘? 혹시 내가 말하길 기다리는 거야? 


내 손을 감싸고 있는 우리 엄마. 

엄마는 강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고아원에서 나를 선택해서 데려온 것부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키타 녀석도, 누나도 모두 강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오키타는 나와 너무도 흡사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나를 즐겁게 만든다. 그리고 그만큼 사랑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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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야마자키와 학교를 등교하자 나를 발견한 히지카타가 내 팔목을 잡고는 급히 가야 할 곳이 있다면서 다짜고짜 나를 끌고 갔다. 친절하게도 차에 타라면서 직접 태워다 주기까지? 차에 타면서 알았다. 그 새끼가 다쳤다는 걸 이 녀석도 아는구나 하고. 묘한 긴장감에 온몸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가족에게 나는 평범하고 조용한 착한 아들이 아니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조금 아쉬웠다.


"나도 어제 늦게 들었는데 네 형이 다쳤데. 내가 간다니까 절대로 오지 말라고 하더니 너 학교에서 보면 바로 좀 데려와 달라고 말하더라고.. 많이 다친 모양인데.."


"... 다쳐?"


일부러 나는 조금은 뜸을 들이며 놀란 척 이야기를 했다. 


"응.. 미츠바가 많이 울더라. 병원 1층에서 잠깐 보긴 했는데 엄청나게 힘들어하더라고.. 가서 위로해주고 왔어 그래도 병문안이니까 가겠다고 해도 절대로 안 된다면서 거부하더라. 뭔진 모르겠지만.. 여튼...."


히지카타는 본인이 당한 일처럼 매우 마음 쓰고 있었고 표정도 엄청나게 초조해 보였다. 


"누나가 오지 말라는데 가긴 왜갔어?"


"울고 있는데 오지 말라고 한다고 어떻게 진짜로 안가? 엄청 다그쳐서 어디냐고 물었지. 암튼.. 이럴 때 가족들이 가장 중요하니까 가서 잘 위로해줘.. 왜 하필 어제 집에 안 들어간 거야 너."


나는 그의 말에도 딱히 동요 없이 표정을 감추기 위해서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 괜찮아?"


히지카타는 내가 고개를 돌리고 있자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설마 우는 줄 아는 건가.


"뭐가, 그냥 창문을 보고 있는 거야"


나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거든.





나를 병원에 내려주고서 히지카타는 학교의 수업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를 내려주면서까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누나와 엄마를 잘 돌봐주라는 말을 마지막까지 말했다. 나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병원으로 들어갔다. 알려준 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5층의 6호실 문을 열자마자 울고 있는 엄마가 나를 홱 돌아보더니 다가와서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소리 내어 울었다. 나에게 안긴 엄마의 어깨 뒤로 온통 붕대를 감은 그 녀석이 새파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그 녀석을 보고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그 녀석도 그런 나를 보고는 웃었다. 


"아.. 많이 다쳤네.."


나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녀석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조금 떨어져 앉아 있었고 엄마는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는 물었다.


"어디에서 이런 일을 당한 거야? 혹시 누가 그랬는지 봤니?"


각오를 했다지만.. 곧 다쳐올 무거운 침묵의 순간은 나를 바짝바짝 마르면서 두렵게도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말해, 어서 말해, 내가 그랬다고 말해, 순간 입을 잠깐의 타격은 힘들겠지만 너는 이대로 우리와 떨어지게 되는 거야.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 것을 보면 내가 오길 기다려서 말하려고 기다린 거잖아 너? 나는 분명히 그 녀석보다 한 수 위였다. 그리고 운명이 나의 편이라는 확신에 자신감이 잔뜩 부풀어 있었던 것도 맞다. 그 녀석은 대답을 대신해서 나를 한참을, 정말이지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 몰라요. 못 봤어요"

 

"잘 기억해봐, 그럼 어디에서 당한 거니? 장소는?"


"기억이 안 나요 누군가 실수로 떨어트렸나 보죠"


엄마는 눈치채지 못하는 그의 덤덤한 듯한 소름 끼치는 말투와 보란 듯한 당당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말했고 나의 계획은 그의 예상치 못한 그 발언으로 덮여버렸다. 신이 나서 엄마에게 일러바칠 줄 알았는데 이 새끼는 도무지 나의 생각을 따라주지 않는 한 명이었다. 아니, 혹시 나를 보지 못한 것일까? 나를 봤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엄마는 어제 하루 종일 잠도 못 이룬 듯 얼굴이 반쪽이 되어있었다. 사실 엄마나 누나가 이렇게까지 슬퍼할 줄은 몰랐다. 그 녀석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그를 보다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 들어가세요 내가 있을게."


이 녀석의 속을 알고 싶기도 했고, 엄마가 이 녀석에게 이렇게 신경 쓰고 있는 것도 보기 싫어서. 엄마는 절대로 안 된다고 이야기하다가 결국 그 녀석이 엄마, 나 진짜 괜찮으니까 들어가 보세요. 하고 말하자 그 말에는 알겠다고 했다. 뒤돌아서면서도 몇 번이나, 나에게 잘 보살펴주라고 당부를 하고 혹시나 안 좋으면 의사를 먼저 부르는 게 우선이고 그다음에 자기에게 꼭 연락을 하라면서 몇 번이나 강조를 하고서야 사라졌다.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이.


나와 둘이서 병실에 남았을 때 그는 재밌다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함께 재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붕대 안쪽은 어떨지 궁금하네"


내가 조금은 가까이 앉아서 말하자 그도 나를 보면서 말했다.


"어떻긴. 다 녹아버려서 엉망진창이겠지. 누구 덕분에 말이야"


알고 있었네.


"왜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네 녀석이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아서"


미친 새끼.

그의 말에 나는 그의 얼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선 말했다. 


"다음번엔 걷지도 못하게 해 줄 수도 있는데.."


그 녀석의 얼굴을 한 손으로 콱 잡자 손끝의 자국대로 허연 붕대에 붉은빛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그 녀석은 아프다는 내색도, 그렇다고 나를 저지하려 하지도 않은 채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새파란 눈동자가 덤덤해서 기분이 나쁘다. 내 손끝에 촉촉이 묻은 그 핏자국을 옆에 있는 휴지로 대충 닦고는 쓰레기통에 휙 던져서 버리고는 나와버렸다. 짜증 나. 저 새끼는 내가 행하는 행동에 괴롭다는 그 어떤 표현도 없다. 그저 덤덤하고 때로는 그런 나를 관찰하는 듯 싶기도 하고.. 내 행동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새끼는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든다. 재수 없는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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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한지 삼 일째. 병문안이라면서 아부토가 과일 바구니를 사들고 왔다. 아부토가 친구라면서 병문안을 오자 엄마는 이상한 눈으로 아부토를 쳐다보았고 나는 저렇게 보여도 친구가 맞다면서 엄마에게 웃어 보였다. 엄마는 나의 친구라면서 과일바구니까지 사온 그를 꽤 반기긴 했다. 나이가 많아서 의아해 하긴 했지만.

이야기하라면서 엄마는 잠시 자리를 피해주었다.


"... 뭐야 생각보다 심각하잖아? 어떻게 된 거야?"


"방심한 거지"


내가 말하자 아부토는 어이없어했다. 네 새끼가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다면서. 하.. 그러게 말이야.. 나도 내가 저 녀석에게 이렇게까지 당할 줄은 몰랐지... 그래서 나도 그 새끼 때문에 미쳐버리겠다니까? 너무 사랑스러워서..


"방심이라니? 원한 있는 누구한테 당하기라도 하셨나?"


"그랬나 봐"


"누군지 감 오는 사람 있어?"


아부토는 나를 대신해서 복수라도 해줄 요량으로 적의를 잔뜩 가지고는 물었다.


"음.. 알고는 있어. 누구인지."


그 녀석의 마지막 모습, 내 얼굴을 한 손으로 쥐고는 살기 넘치게 쳐보다 보던 그 눈빛.. 다시 떠올리고는 나는 살짝 웃었다.


"하지만 괜찮아. 원래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엔 본인을 지키려는 발톱이나 가시가 있잖아."


아부토는 또다시 내 말을 듣고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부토는 나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듯하다.






아부토가 돌아가고 나서 한참 뒤,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는 누나가 왔다. 아부토가 사온 과일 바구니를 보고는 친구가 왔던 거야? 하고는 사과 하나를 들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깎아주겠다며 쟁반을 무릎에 올려놓고는 과도를 들고는 익숙하게 사과를 깎았다.


"소고는 또래 친구가 별로 없더라고.. 실제로 본 적도 없고.. 그나마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내 남자친구 정도인 것 같아서 걱정이야. 그래도 너는 이렇게 병문안을 와주는 친구가 있구나?"


"음... 네 뭐.."


"그래서 나는 네가 처음 왔을 때 소고와 친한 친구가 되어주길 바랐거든. 근데 그게 소고에겐 쉽지가 않은가 봐."


누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


"오늘 소고 왔었다며? 좀 위로는 해줬는지 모르겠네"


"네. 많은 걱정을 해줬어요. 그 녀석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은근히 마음은 쓰고 있잖아요"


'마음은 쓰고 있잖아요'라는 부분을 조금은 강조해서 말했다.


"그렇게 네가 이해해주고 있다면 다행인데.. 워낙 부모님이나 내가 아니면 표현도 안 하는 녀석이라서..."


누나는 그렇게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깎은 사과 한 조각을 내밀었다.


"곧 붕대 풀어서 본다는데..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더 큰 병원으로 옮겨서라도 흉터도 하나도 없도록, 깨끗히 나을 수 있도록 할 거야. 가족을 위해서인데 뭘 못하겠어"


누나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촉촉한 눈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많이 미안해 하셔.. 우리 식구가 된지 얼마 안 돼서 이런 일을 겪은 게 다 우리 탓인 것 같다면서.. 우리가 더 주의 깊게 보살폈어야 했는데..."


"제 나이가 몇인데요."


누나는 너무 하얘서 똑바로 쳐다보면 눈이 너무 시리다 못해 따갑다. 누나는 분명히 등에 숨은 날개가 자라고 있을 것이었다. 누나가 사과를 다 깎아서 놓자 내가 말했다.


"누나는 천사 같아요. 혹시 천사를 눈앞에서 본다면 누나같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내 말에 누나는 나를 보고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을 가리고는 수줍게 웃었다.


"천사? 천사는 때로는 아주 무서운 존재야"


".. 그러니까요"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누나는 다시 수줍게 웃어 보였다. 


누나, 누나는 정말로, 정말로 천사 같아요. 그래서 오키타 녀석도 누나에겐 꼼짝 못하는 것이고, 나도 누나의 앞에선 나름 고분고분 한 것일 거예요. 누나의 앞에선 나도 조금은 깨끗해지는 기분을 받기도 해요. 뭔가 조금은 숙이게 된달까..?


누나는 분명 하늘도 자유롭게 날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무언가 전해주려 이 곳에 온 것 같아.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 등 뒤에는 펴주길 기다리는 커다란 날개가 움찔움찔 거리고 있을 것이여요.... 


누나는 한 떨기의 꽃처럼 연약하게 웃어보여도 천사처럼 이면에서는 무섭고 강한 존재였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6년에도 역시! 밍나 카무오키파고 함께 천국으로.....이쿠욧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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