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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는 정말 밝은 성격이었다. 감정 표현이 아주 확실해서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바로바로 말해주는 타입의 여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말빨로는 져본 적이 없는 내가 처음으로 기가 눌려서 말문이 막혀버릴 정도로 말도 잘하는 데다가, 가끔 욱하는 성질이 나오게 되면 무서워서 내가 눈치를 봐야 할 때도 많았다. 한마디로 나는 이 여자에게 완전히 잡혀버린 것이다. 뭐..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런 약한 여자 한 명을 이기려고 애쓰려는 것 자체도 웃길뿐더러, 여자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여자친구는 항상 옳은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사랑에 빠졌던 것은 강한 이 여자의 뒷면에 상당히 크게 자리한 은근한 감성의 여린 마음을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그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나는 여리면서도 강한 그 모습을 사랑했다.


여자친구는 나와는 조금 달랐다. 가끔은 주말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돌봐주는 봉사활동을 나가기도 하고 미술 선생님이라는 직업 특성상 그림을 잘 그려서 재능 기부랍시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불우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나 혼자 살기만이 바쁜 (사실은 게으른) 나에게 이런 모습이 조금 신기해 보였고, 모브와 있을 때 300엔이라는 동전을 쥐여주면서 일을 시켰던 때가 생각나면서 조금은 과거의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여자친구는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모브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나에게, 그 애기가(여자친구는 모브가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너무 귀엽다면서 애기라고 불렀다) 선생님도 아닌 스승이라고 부르고, 손편지까지 써주면서 지금까지 계속 찾아주는 것 자체를 고마워하라면서, 더 자상하게 해주라며 나를 가끔 꾸짖었다. 성장기의 아이에게 스승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데! 그 애기가 작은 손으로 스승님~ 하면서 편지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귀엽고 안쓰럽고 잘해주고 싶고 그렇지 않아? 아.. 무.. 물론 그... 그렇지.. 근데 이 정도면 엄청나게 잘해주는 거 아닌가?



얼마 전엔 모브에게 문자가 왔다. 스승님 저예요 시게오에요 하고. 반가운 마음에 문자로 어! 모브 잘 지내니? 보고 싶다! 하고 재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보냈다만 그 문자에 답장은 없었다. 아직 핸드폰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모브의 편지는 좋게 말하면 신기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상했다. 고민이 너무너무 많아서 나에게 고민 상담을 한다기보다는 며칠 동안 겪은 일을 즉석에서 조금씩 조금씩 쓰거나, 기억에 남는 사건을 나누었던 대화까지 세심하게 기록해서는 나에게 전해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보다 보면 오늘은요~ 오늘은요~ 하는 것이 몇 번이나 나오기도 했다.

이번에 받은 모브의 편지는 2주의 간격을 두고 왔다.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에 한 통이 또 온 것이었다. 두 번째 편지에도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 해서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포 이면지의 하얀 표면 위에, 어이 모브 잘 지내냐? 난 잘 지낸다, 하고 한 줄을 쓰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모브가 도대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동생 녀석이 초능력이 생겼다는 두 번째 편지에 대해서, 이야 동생도 초능력이 생겼구나, 역시 모브의 동생이네! 굉장해! 괜한 걱정 마라. 너의 동생은 너에겐 친절하니까 분명 괜찮을 거다~ 하고 성의 없는 문장 한 글자를 찌끄려놓고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앞 전에 모브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여자친구가 다른 학생들을 상담해 주는 모습을 보고서 그 모습을 모방해서 편지를 썼었다. 여자친구는 자기가 대신 써줄 수도 있다며 편지를 보여달라고 한 적도 있었지만 이 편지에 잔뜩 쓰여 있는 초능력자와 초능력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모브나, 그걸 받아주고 있는 나나 정신병 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보여주진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이건 모브와 나의 강력한 유대라서 보여줄 수는 없어! 내 말에 여자친구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네네 레이겐 스승님 어련하시겠습니까~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웃었다. 다행히도 끈질기게 보여달라고 하진 않았다.

모브와 모브의 동생 이야기는 여자친구에게 한 번 꺼낸 적이 있었다. 엄청나게 우수한 동생과 엄청나게 별 볼일 없는 형. 평소의 나에게 하는 행실이 자상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형에게는 자상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여자친구는 웃으면서, 그거 그냥 단순하게 레이겐씨를 싫어한 게 아닐까? 하고 웃었다.

맞아.. 그 동생 녀석 나 엄청 싫어했어.. 단순히 그런 거였구나.
왜인지 모르게 레이겐씨는 그런 우수한 아이들이 싫어할 거 같은 타입이야.
하아... 나는 어린 엘리트들에게도 경멸 받는 타입이구나...
하하 장난이야, 근데 그렇게 우수한데도 형에게 잘하는 거 보면 역시 가정교육이 잘 되어있는 거 아닐까? 부모님이 딱히 성적 만을 가지고 둘을 비교하지 않고 형을 더 치켜세워주면서 키운다거나...
흠.. 편지 보면 그렇지도 않던걸? 실제로 어머니는 둘을 자주 비교하는 것 같았고... 뭐, 형 쪽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지만 동생 쪽이 그런 것을 보고도 우월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건 나도 좀 신기해.
대단하네, 그런 경우 거의 없는데 말야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와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음에 써줘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뒷부분은 이렇게 썼다.

[네 동생은 여러 가지 분야로 정말로 대단하지만 초능력의 사용법에서는 네가 더 위일 테니 네가 초능력에 대해서 잘 말해주렴! 내가 전에 가르쳐 줬던 대로 말이야. 아, 아직 모르는척하고 있다고 했지? 그래도 곧 알려주지 않겠니? 그럴 때에 네가 잘 알려줘라 넌 그 녀석의 형이잖아!
그리고 얼마 전에 문자 했었는데 너, 내 문자에 답장도 안 하더라? 뭐 이번 한 번은 내가 봐줄게. 나도 요즘 바빠서 이번엔 길게 편지를 쓸 여유가 별로 없어. 다음번에 길게 써줄게.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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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잘 지내시죠?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은 스승님의 문자를 다음날 봐버려서 그랬어요. 아직 핸드폰을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없거든요. 하지만 이걸로 저희 둘은 비긴 거예요. 스승님도 답장을 엄청나게 오랫동안 보내지 않으셨잖아요.


스승님, 전에 이야기했던 리츠를 좋아했던 여자 말이에요. 정말 사귀고 있었던 게 맞았나 봐요. 리츠는 뚜렷하게 이렇다 저렇다 하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둘이 집에 같이 가는 것을 몇 번 봤어요. 이상하게 저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면 몸을 숨기곤 했지만요. 하지만 리츠가 정말 좋아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여자애는 리츠에게 잔뜩 엉겨 붙어서는 리츠군~ 나 오늘 말이야~ 이러면서 혀 짧은 소리로 이야기를 해대곤 하는데 리츠는 별 반응이 없었거든요. 그런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자니, 갑자기 리츠가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요즘 조금 좋아진 점이라면 요즘엔 집에 일찍 일찍 와요. 그래도 저와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렇겠죠?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요. 리츠는 오늘 학생회 회의가 있어서 늦는 날이구요. 비가 오는 날은 운동장을 뛸 수 없기에 실내에서 근육 트레이닝을 마치고서 아침에 챙겨간 검은색 우산을 쓰고 집으로 왔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산을 쓰고 있어도 옷이 잔뜩 젖을 정도에요. 바람도 엄청나게 세게 물었거든요.


리츠와 사귀는 그 여자애는 항상 리츠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던데 그날은 기다리지 않았나 봐요. 회의가 일찍 끝났는지 리츠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왔거든요. 하지만 비를 잔뜩 맞은 채로 홀딱 젖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기다렸다가 우산을 같이 쓰고 오는 건데... 리츠의 모습을 보고 놀란 제가 수건을 가지고 달려가서, 얼굴을 닦아주면서 미안해.. 내가 기다려줄걸.. 미안해... 미안해 리츠... 하고 말했어요. 그러자 리츠는 제가 들고 있던 수건을 잡고는 아냐, 형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하고 오랜만에 전처럼 자상하게 말하고는 조금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어요. 요즘 알 수 없이 서먹한 관계의 우리였지만 그렇게 자상하게 한마디 해주는 것을 듣자마자 마음이 따스했어요.

리츠는 다음날 아침 심한 감기에 걸려버렸어요. 엄마는 리츠가 아픈 것을 보고는 학교에 바로 전화를 해서 하루 쉬겠다고 전화를 걸고 아침 일찍 약을 사러 갔다 온다면서 나갔어요. 저는 학교에 갈 준비를 다 마치 고서, 침대에서 땀에 젖어서는 앓아누워 있는 리츠를 한참 쳐다보다가 학교에 나섰어요. 쉽사리 그칠 비가 아니었는지 비는 계속 오고 있었고요. 하늘도 바닥도, 빗물도 전부다 맑은 검정색으로 번져서 저까지 우울해지는 것이었어요. 축축한 공기가 잔뜩 뺨을 스치고 지나가서 기분이 별로인데다가 비의 마찰 소리를 극대화하는 자동차 경적소리, 물소리 등등이 저를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고요. 빗방울이 거세서 소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쏴아아 하고 내렸어요. 하지만 소나기는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내렸거든요.

학교에서 저는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요. 원래도 집중력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리츠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요. 집에 혼자 있으려나.. 약 먹고 잘 자고 있으려나.. 혹시 비가 와서 추우면 어쩌지.. 엄마도 아빠도 다 출근을 했을 텐데... 하고 한참 멍하니 검은 칠판을 쳐다보다가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갔어요. 선생님께는 몸이 좋지 않아서 조퇴를 해야겠다고 가서 말했어요. 평소 말도 없고 조용해서 땡땡이를 칠 깡도 없이 보였는지 다른 아이들이 조퇴 이야기를 했다면 절대 안 된다며 꼬치꼬치 캐묻었을 텐데 저에겐 별말은 없었어요. 그저 어디가 아프냐며 걱정하는 눈길로 저를 쳐다보면서, 어서 병원이라도 가보렴! 하고는 되려 저를 걱정해 주셨어요. 그렇게 순조롭게 학교에서 빠져나온 저는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어요.

집 문을 벌컥 열자 리츠는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학교에 있어야 할 제가 숨이 턱까지 차서는 집으로 달려온 것에 대해서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었어요.

저... 리츠, 몸은 괜찮아?
.... 뭐 약을 먹으니까 좋아졌어. 형은 왜 온 거야? 왜 그렇게 뛰어왔어?
네가 걱정돼서
응?
네가 걱정돼서 왔어

전에 제가 이야기 한 적 있었나요? 어릴 적 제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 해서 리츠가 다쳤었던 이야기.. 저는 그래서인지 리츠가 다치는 것도 아픈 것도 무서워요. 아파서 누워 있는 모습만 보면 다 제 탓인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제가 너무 아파요. 게다가 요즘 조금 서먹했기 때문에 제가 더 조급하고 불안했었나 봐요.

내가 뭐 애기도 아니고. 단순한 감기야 감기. 형은 학교에서 조퇴까지 하고 온 거야?

하고 웃었어요.

아... 뭐..
기왕 조퇴까지 한 거 형도 푹 쉬어. 난 좀 더 자려고.

리츠는 그 말을 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한참 소파에 앉아 있다가 리츠의 방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어요. 리츠는 곤히 잠들어서 새액새액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요.
리츠의 깔끔하게 정돈된 방엔 익숙한 리츠냄새가 있어요. 저는 그 향을 무척 좋아합니다. 침대 옆에 앉아서 리츠가 자는 모습을 보면 어릴 때 다쳤던 모습과 자꾸만 모습이 겹쳐져서 혹시나 나를 떠나버리지 않을까 무서워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는 리츠가 잠들어 있을 때 리츠의 체온이 느껴지는 목이나 뺨에 손을 살짝 얹어보기도 해요. 혹시나 차갑진 않을까 하고요.

그리고 리츠의 핸드폰이 울렸어요. 분명 친구들인가 봐요. 열어보니까 사귄다고 생각한 그 예쁜 여자애가 문자를 보냈더라구요. 하지만 사귀고 있지는 않았나 봐요. 리츠는 아직도 번호를 저장해두지 않았거든요.

[리츠, 아프다며? 많이 아파? 너무 걱정돼서... 게다가 어제 그만하자니 그건 무슨 소리야?]
[웃기지도 않아 정말]
[나와 사귀고 싶다고 한건 분명 너였다고?]
[오늘 집으로 찾아갈게. 만나자]

저는 그 문자를 보고 답장을 했어요.

[미안한데요 리츠는 자고 있어요.]
[어?! 리츠의 형이신가요?]
[네. 자고 있으니까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저 학교가 끝난 후에 집으로 찾아갈게요. 저 리츠가 너무 걱정돼서..]
[오지 말아주세요. 저 이번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답장이 없었어요. 스승님 저 못된 사람인가요? 저 역시 인기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네요...


저는 리츠의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어요. 뭐랄까 마음이 편했어요. 리츠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 좋고요. 침대 시트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체온도 좋았고요.. 리츠가 제 옆에 있다는 기척 자체가 좋았어요.
리츠는 잠에서 깨서 혹시나 환영인지 아닌지 확인하듯이, 침대에 기대 있는 제 어깨를 살며시 잡았어요. 제가 돌아보면서 리츠, 일어났구나! 하고 말했더니 살짝 웃었어요. 그리고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왜 여기에 있어?
네가 걱정돼서..

리츠는 그런 저를 보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어요.

형은 나를 지나치게 걱정한다니까...
그야 당연하지..! 리츠는 내 동생이고...
형, 나 할 말이 있어

그니까.. 나.. 초능력이 생겼어
그렇구나! 축하해
형은 알고 있었지?
에쿠보가.. 아, 아니 어쩌다 보니 짐작만.. 조금...
그래? 왜 아는 척하지 않았어?
네가 말해주길 기다렸어. 축하해. 리츠는 역시 뭐든지 해내는구나. 나는 그래서 리츠가 정말 부러워
나는 형이 부러운데

리츠는 말을 정말 예쁘게 한다니까요? 이런 제가 어떤 면이 부럽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리츠가 정말로 고맙게 느껴져요. 리츠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저는 정말로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커다란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정말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나를 부럽다고 해주다니.. 나는 얼마나 이 사람보다 완벽한 걸까...! 하는 그런 생각. 잠시나마 신이라도 된 기분... 아, 이런 거 에쿠보에게 말하면 엄청 좋아했겠네요. 에쿠보는 이런 기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저에게 신이 되어보자고 속삭이는 건가 봐요.


스승님 그거 아세요? 손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를 만지면 그 체온 때문에 따뜻하잖아요. 하지만 입술과 입술이 닿으면 따뜻함을 넘어서 뜨겁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손으로 입술을 만졌을 때와는 조금 달라요. 물론 손으로 만졌을 때도 부드럽지만요...  혹시 살아 있는 꽃잎을 한 장 뜯어서 만져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감촉과 굉장히 비슷해요. 촉촉한듯하면서도 부드럽잖아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 내 입술에 한 번 닿아보고 싶다 하고 새하얘진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가볍게 제 이마를 스치는 머리카락도 부드럽고요, 뜨거운 뺨의 맞닿는 솜털의 간지러움도 너무너무 기분 좋아요.

엄마가 돌아오기 전, 아픈 리츠가 약에 취해 잠든 9시 47분, 그 여자아이는 정말로 찾아왔어요. 저.. 리츠의 친구인데요.. 하는 작은 유령 같은 목소리로 어두운 하늘과 검은 빗방울과 두텁게 닫힌 문 앞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생각만 했어요. 대답도 하지 않고요.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하는 가냘픈 목소리에도요. 달칵달칵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 초인종 버튼을 눌러대는 것 같았지만 미리 초인종은 꺼뒀었어요. 리츠가 깰까 봐서요. 거칠게 눌러대는 작은 소음과 함께 저는 이 밖의 예쁜 여자애가  더 이상 예쁜 여자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가끔 나타나서 심술을 부리는 악령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거든요. 이런 쓸데없는 고집까지 완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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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출장을 가셨어요. 그래서 집에 엄마와 저희밖엔 없어요. 하지만 엄마도 요즘 일이 바쁘셔서 많이 돌아다니고 계시구요. 그래서 엄마를 마주 볼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어요. 저녁밥도 아침에 엄마가 차려주고 간 것을 데워서 먹거나 외식을 하라며 두고 간 돈으로 저희 둘이 나가서 사 먹거나 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가 스승님과 갔었던 라면집이 생각나서 거기에 다녀왔어요! 여전히 맛있어요. 스승님도 가끔 생각 나시죠?

에쿠보는 제 옆에서 떠다니다가, 그 라면집에 간 것을 보고는 여기, 레이겐이랑 왔었던 곳이지? 하고 물었어요. 에쿠보도 기억하고 있나 봐요.
리츠가 능력이 있어서 에쿠보를 볼 수 있다고는 해도 에쿠보와 리츠는 별로 말이 없었어요. 셋이 있을 때는 저만 에쿠보와 이런 식으로 잔잔한 대화를 했고, 리츠는 별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에쿠보를 직접 소개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츠, 이거... 보이지? 에쿠보라고 해.
응 풍선 같다고 생각했어
악령이라서 위험하지만 내가 우리 집안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허튼 짓은 하지 말라고 해뒀어. 그래도 나름 착한 애야. 에쿠보는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가끔은 도움도 주니까.. 리츠도 친하게 지내.
그렇구나. 그래 친하게 지낼게

조금 어색해 보이지만 문제는 없어 보여요. 에쿠보는 은근히 붙임성이 좋잖아요.

며칠이 지났지만 리츠와 에쿠보는 친하게 지내고 있진 않아요. 제 앞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뭐.. 딱히 상관은 없지만요. 근데요 스승님,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에쿠보를 약간 신경 쓰고 있어요. 이상하게 요즘, 에쿠보의 시선이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거든요. 아무 생각 없던 그 눈빛에 대해서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에쿠보는 날 따라다니면서 나의 사소한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구나. 하고 의식되어버린 거예요. 물론 에쿠보가 저를 항상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혹시 모르죠. 눈에 보이지 않게 모습을 감추고서 저를 지켜볼지도. 여튼, 이상하죠? 


어째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드디어 생각해 냈어요. 저에게, 에쿠보에게조차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생겨버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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