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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에게 느끼는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영원히 그 대상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없다. 열등감이란 가장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굉장히 끈적끈적하고도 투명해서 자신 안에 그런 괴물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그걸 알아챈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기 힘들다. 인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내가 누나의 남자친구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어릴 적 부터 있었던 감정이다. 괜히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자. 그렇게 하면 편해질 거라고 생각 했기 때문이었지만 역시나 변하는 건 없었다. 변하는게 없다면 항상 저 새끼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이렇게 초라하게 있어야 하나? 그래, 이런 감정은 영원히 나에게 자라는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초라해? 내가?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모든 것은 그 시간과 상황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나를 향해서 웃어주는 게 당연하잖아? 내가 초라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일시적이고, 현재 상황이 맞지 않는 것 뿐이야.




아부토와의 상의 없이 내 멋대로 오키타에게 누나의 남자 친구를 풀어주겠다고 이야기했었기 때문에 아부토에게도 우선 이야기를 해야 했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면서, 소파에 피곤한 듯 털썩 앉아있는 아부토의 맞은편에 앉아서 말을 꺼냈다.

"그 경찰 놈, 5일 후에 전화해서 풀어주자"

"그래 어디로 나오라고 할까? 돈은..."

"돈은 네가 알아서 받아"

"단장이 직접 할 거야?"

"뭘?"

"현장에서 죽이겠다며"

"아..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그냥 살려서 보내자"

"왜?"

"그냥 귀찮아서"

"네놈이 귀찮다는 이유로 살려주기도 한단 말이야?"

할 말이 끝났다며 무심하게 일어서서 나가려는 내 어깨를 붙잡고 아부토는 물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아부토가 납득할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 단장, 너 지금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거지?"

아부토는 내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살려주자"

아부토는 그 말을 뒤로하고 단원들에게 말을 전하려 걸음을 옮겼다.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렇게 순순하게 납득하는 모습은 수상하다. 보통이라면 왜 그러느냐면서 더 물었어야 할 텐데.

"아부토!"

내가 부르자 아부토가 뒤를 돌아본다.

"불필요한 잡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래"

"단장, 너 지금 이상하다?"

"...내가?"

아부토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 이유를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말하는 게 좀 수상한데? 어차피 단장의 명령에 따르는 게 내 역할인데"

아부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게.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그대로 내 방의 소파에 털썩 누웠다. 5일 후, 그리고 달라질 나의 태도와 오키타의 태도.... 오키타는 벌써 변하고 있었다. 누나의 남자친구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나의 확신에 찬 말투와 설득, 그리고 매일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조건에 그간 기생하고 있던 우울의 기운을 모두 토해낸 것 같았다. 아침에 나갈 때 여전히 전단지를 한 묶음 들고나가면서 무엇이 즐거운지 갔다 오겠다며 활달하게 집을 나섰다. 그렇구나. 그 놈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너의 감정은 저렇게 생기를 띄는구나. 하지만 이상했다. 여유 없이 불안한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서 히지카타를 놓아주겠다고 했던 나였지만, 진짜로 눈에 띄게 활달해진 모습을 보니.. 기분이 전부 꼬여버린 실타래 같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머리가 아프다. 복잡함을 앓고 있을 때, 카구라가 카페에 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항상 나도 모르게 나갔었지만 이번의 연락에는 나를 움직이는 힘이 사라졌다. 가면 또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같이 살자는 둥, 연락을 피하지 말라는 둥, 그런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을 게 뻔하다. 핸드폰을 옆으로 던져놓고 스르르 잠에 빠져든다. 핸드폰의 전화 소리는 꿈속까지 침범해서 내 옆에서 계속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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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5일. 길지 않은 시간동안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최대한으로 괴롭힐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모든 대원들에게 그 여자에게 연락이 왔는지를 물었다. 거의 모든 대원들이 한 번씩은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어제 쿠리코와 카페에서 만난 이후에도 연락을 받은 대원이 두어 명 있었는데, 가장 연락을 많이 받는 대원에게 물었다. 

"쿠리코, 아, 아니 그래, 형수님께서 뭐라셔?"

"...네? 아.. 아니.. 그냥.. 뭐 추가로 나온 건 없냐고 물어셨습니다"

"또 다른 말은 안 해?"

"....아.. 다른 말은... 그냥.. 뭐 자기가 괴롭히려고 연락하는 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 그래?"

언뜻 이 대원을 쓱 훑어보니, 전엔 잘 몰랐었는데 키가 훤칠했다. 게다가 살짝 긴 검은 흑발에 옆으로 매력있게 째진 눈이 약간 히지카타와 유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물론, 히지카타가 옆에 있었다면 보이지도 않았을 외모였지만 히지카타가 없는 이 순간, 가장 비슷한 인상의 대원에게서 히지카타를 찾고 있는지도 몰랐다.

"혹시 만난 적도 있어?"

"아.. 있지만..."

"따로 만난 적도 있단 말이야?!"

내가 약간 눈을 빛내며 묻자 이 대원의 낯빛이 심각하게 어두워 지기 시작했다.

"대장. 오해십니다. 둘이 만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항상 같이 있는 대원과 함께 나갔었어요. 그리고 간단히 차 한잔 정도 하고 바로 돌아온 것뿐입니다.."

"누가 뭐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왜 그래 너 혼자?"

내 말에 옆에서 듣던 다른 대원들이 다 키득키득 웃었다.

"왜, 영화에 많이 있잖아. 남편을 잃은 형수님의 부재를 달래주는 부하직원. 이런 거 스릴 넘치고 좋은데"

"...맹세코 대장님이 상상하시는 그런 일, 없습니다"

"그래 알았어. 그냥 물어본 거야"

뒤돌아 나가려는데 수군대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 야야, 오키타 대장 미친 거야? 왜 저런 소릴 해? 부장님 이야기 나오면 웃지도 않고 항상 찾은 증거가 이것 밖에 없냐고 개지랄 떨던 사람이 갑자기 표정도 갑자기 변하고.. 완전 무서운데... 혹시 이제 대장도 지친 게 아닐까? 부장은 이제 못 찾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마츠다이라 선생과 곤도씨의 서재 앞에서 조용히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마침 둘의 대화는 히지카타였다. 둘이 내 쉬는 한숨소리에 무게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게 지난번에 마츠다이라 선생은 하루사메에게 히지카타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하며 신센구미에 있는 눈먼 예산들을 모조리 꼴아박았다. 내가 알기로도 이제 남은 예산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곤도씨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말했다.

"토시를 찾는다면.. 지불할 금액에 대해 고민하고 계시는 거 다 압니다. 그렇다면 저희 대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아니다. 내 딸의 간곡한 부탁이고, 이제 내 사위인데.. 나에게 있는 재산을 처분해서라도 돈 마련해야지"

내가 알기로 마츠다이라 선생은 꽤나 부자였다. 오랫동안 위쪽에 빌붙어 있으며 아래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먹은 양이 꽤나 많아서 자신의 명의가 아닌 마누라나 쿠리코 명의로도 건물이 꽤나 여러 채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아니뗀 굴뚝에 연기는 나지 않는 법이다. 

"저.. 그놈들이 얼마를 요구할지.. 만약 찾는다면 아마 기고만장해서 더 요구할 겁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우선 찾기를 기다려 보자고"

쿠리코가 제 아빠에게 내 이야기를 하진 않았는지 내심 궁금했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나 보다. 만약 했다면 마츠다이라 선생이 나에게 어떻게 행동을 할지도 궁금했었는데.... 재미없네. 그 이후엔 재미없는 신센구미 내부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순찰이 끝날 때 쯤, 일부러 히지카타와 쿠리코의 집이 있는 쪽을 돌면서 혹시나 그 여자가 밖에 나오지는 않았을지 돌면서 찾았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 이 얼마나 로맨틱한가? 아무리 만나려고 기를 써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도, 역시 내가 이 여자에게 하는 이런 행동은 하늘의 뜻임이 분명했다. 두 번 정도 그 근처를 배회하다가 쿠리코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무언가를 사오는 중이었는지 작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차의 장문을 열고 반갑게 인사를 건냈다.


"형수님! 어디 갔다 오시는 길입니까? 무거워 보이는데 태워다 드릴까요?"


내 말에 쿠리코는 이제는 혐오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차를 가장 느리게 밟으며 바짝 따라가며 계속 말을 걸었다.


"왜 무시하세요? 안들리셨나? 타세요. 제가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게요. 제 상사분의 아내분이시면 저의 가족 아닙니까"


내 말에 쿠리코는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왜 저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죠? 그냥 가세요"

"좋은 의도로 말한 건데 그런 식으로 쳐다보시면 저도 상처 받아요. 기껏 형수님이라고도 불러드렸는데"

".... 그냥 가세요"

"아하, 알겠다! 제가 히지카타와는 닮지 않은 분위기라서 그런 거구나"

"......?"


내 말에 쿠리코는 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저희 대원들에게 연락하고 계시던데, 그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긴.. 이름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녀석 꽤나 히지카타와 닮았죠? 그 녀석에게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생각해봤어요. 남녀 사이에는 절대 라는 말이 없다고들 하잖아요. 형수님 혹시 히지카타를 핑계로 둘이 은밀하게 만나고 있는 거 아닌..."


내가 말을 끝내지도 않았을 때, 쿠리코는 조수석 차 문을 화난 듯이 벌컥 열었다. 차 문이 혹시 떨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차 문을 잡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하, 차 문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이제 저희 내부에 돈도 없는데 차 문 이라도 날아가면 다 형수님이 물으셔야 한다구요. 타세요. 모셔다드릴게"

"야 이 미친 새끼야!!! 참는 것에도 정도가 있어..."


쿠리코는 차 문을 열고 지금까지 들어 본 그녀의 목소리 중에 최고로 크게 소리질렀다. 그리고는 본인도 지쳤는지 씩씩 대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 애교 많던 눈에는 눈물마저 고인 듯 촉촉하게 젖어있다.


"참으라고 한 적 없는걸요?"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나도 참지 않을 거야!!"

"참으라고 한 적 없다니까요? 아니 전 형수님이 너무나 걱정이 되서 하는 말이죠. 이대로 히지카타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재혼이라도 생각하시라는 말이에요. 제가 마냥 비꼰다고 생각하지 마시죠~ 전 단지 형수님이 걱정되서 그래요. 이대로 평생 혼자 사실거에요?"

"... 미친새끼"


쿠리코는 차 문을 쾅 하고 닫고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불안하지? 내가 눈치를 챘기 때문에..... 저 재수없는 새끼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혼자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붙잡고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을 거다. 집으로 돌아가서 그 대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감추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집안을 서성이면서......어떻게 하면 감출 수 있을까. 어떤 핑계를 대면 자연스러울까. 히지카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내기엔 자신 역시 힘들었다며 스스로를 위로 하면서...





둔영으로 돌아와서 아까 연락을 취했다던 대원을 급하게 다시 찾았다. 그 대원은 다시 불안한 눈빛을 하고서 내 앞에 섰다.


"이름이 뭐였지?"

".. 마츠다 입니다"

"그렇구나.. 마츠다.. 오전에 내가 너에게 했던 말은 장난일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나 원래 그런 말 잘하잖아"

"...네 알겠습니다"

"오다가 형수님을 만났는데 말야. 엄청나게 불안해 보이시더라고. 참... 걱정이야. 이러다가 병이라도 걸리시는건 아니신지... 내가 집까지 태워다 준다고 해도 끝끝내 거절하시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오는 길에 일부러 구입한 커다란 핑크색 장미로 되어 있는 꽃다발을 마츠다에게 내밀었다.


"이거 전해주고 와. 내가 줬다고 하면 또 안 받으신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네가 샀다고 하고. 뭐 이 정도의 심부름은 할 수 있지? 마츠다이라 선생님의 따님이시자, 부장의 아내인데 우리가 챙겨야 하잖아. 그렇지?"


내가 내민 꽃다발을 가만히 쳐다보던 마츠다는 나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형수님께 연락이 와도 절대 받지 않겠습니다"

"....? 죄송하다는 말 듣자는 거 아닌데"

"저에게 일부러 이러시는 거 다 보입니다. 무슨 속셈이신지는 몰라도 빤히 보이는 덫에 걸릴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차라리 벌을 주시죠"


건방진 새끼가.... 지금 이딴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정중하게 나에게 고개를 숙인 이 녀석을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그럼... 어떤 벌을 주지?..... 이 꽃을 산 건 아깝고... 내가 드리면 절대로 안받으실텐데..."

"..."

"그래, 네가 정 그렇다면 내가 드려야지 뭐. 가서 일이나 해"


나는 별 일 아니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마츠다는 나에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이야기하고 가는 것을 보며 작은 카드에 간단한 편지를 썼다.


[형수님, 이제 연락은 힘들 것 같아요. 이 꽃다발로 마음을 대신 전합니다... -마츠다 올림-]


퇴근 할 때에 지나가는 꼬맹이 한 명을 붙잡고 쿠리코의 집 앞에 놓아주라고 하면 그만이다. 저 꽃다발을 받은 쿠리코는 바로 마츠다에게 연락을 해오겠지? 그럼 그 증거를 붙잡으면 그만이고. 5일 안에.. 아니 히지카타가 돌아오는 날, 히지카타가 정신을 차린 날. 그래서 출근을 하면서 바로 예전처럼 자신의 자리를 찾는 그날 바로 이혼..... 아니, 이혼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마츠다이라 선생이 자신의 돈을 들인 것을 어필하며 히지카타에게 이혼만은 참아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이혼은 절대로 할 수 없게 된다면.. 그렇다면 같이 살더라도 저 여자와 같은 침대를 쓰는 일은 없게 해주시옵소서..


둔영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서 쿠리코가 그 꽃다발을 발견하고 집어드는 장면, 그리고 카드를 보는 장면까지 모조리 사진을 찍게 만들었다. 그리고 둘이 어디에서 만났는지 마츠다와 친한 대원에게 은근슬쩍 물어 어떤 카페에서 쿠리코를 만나는지도 다 알아냈다. 그리고 그 카페의 CCTV를 확보 하여 만나서 이야기 하는 장면까지. 마츠다가 하는 말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다른 대원을 포함해서 셋이 만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둘이서 만났던 날이 꽤나 자주 보인다. CCTV안의 쿠리코는 여전히 훌쩍이는 듯이 어깨를 미세하게 떨고 있었고, 이 대원은 근심이 가득한 듯 한숨을 쉬며 이야기 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둘의 데이트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최근에 쿠리코의 집을 드나드는 마츠다와 쿠리코가 찍힌 CCTV를 확보했다. 조금 머뭇거리는 마츠다와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는 쿠리코... 아.. 불쌍한 히지카타.. 나에게 평생을 감사해야해.




바빴다. 늦은 저녁엔 잠들어 있는 히지카타를 잠깐이라도 만났다. 처음에 발견했을 때는 그 난리를 치며 눈물까지 쏟았지만, 이제는 그 조바심보다는 나만이 히지카타가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이상한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꼈다. 이대로 신센구미에 돌아가지 않고, 나 혼자서 히지카타를 독점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래서 실제로 납치까지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함과, 이렇게 잠들어 있는 히지카타가 아닌, 히지카타 스스로가 나에게 걸어오도록 하고 싶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히지카타는 내 상사로서 나를 이끌어주며 나를 질타하는 그런 모습의 히지카타이기 때문에.. 그런 너를 다시 보고 싶다.


아침엔 똑같이 전단지를 들고 출근, 그리고 오후엔 돌아올 히지카타가 제일 먼저 접할 이슈, 즉 마츠다와 쿠리코의 스캔들을 정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리고 이렇게 바쁜 게 즐거운 적도 처음이었다. 이 증거 자료들을 보고서 갇혀 있다가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즐길 틈도 없이 충격에 빠진 히지카타, 그리고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마츠다와 쿠리고의 놀란 표정... 이혼만은 안된다며 매달리는 쿠리코와 마츠다이라 선생.. 히지카타는 그때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 결혼 따윈 부질없고, 결국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때는 누나의 옆에서 나와 함께 있었을 때였으며, 누나가 없는 지금은 내 옆에서 영원히 머물러야 함을..





카무이는 집에 없었다. 겉 옷을 벗어 놓은 것을 보니 멀리 간 것 같지는 않은데.. 전화를 걸어보니 옥상에서 바람을 쐬고 있다고 했다. 조금 쌀쌀하다며 나에게도 올라오라고 조금은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새끼 겉 옷을 챙겨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카무이는 아래의 검은 도시 야경을 보며 답지 않게 깊은 생각을 하는 듯이 서 있었다. 내가 옆으로 가서 겉옷을 가져다 주자, 옷을 가져오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받아 입었다.


"내일이네"

"... 그러게"

"몇 시쯤 전화한다고 했어? 그 시간에 맞춰서 놀란 연기라도 해야 하니까 준비해야겠어"

"... 저녁 8시쯤 한다고 했던 것 같아. 12시에 나오라는 내용으로"

"...고마워"

"...내가 잘 하고 있는 걸까?"


카무이는 이번엔 굉장히 다운되어 있었다. 나 혼자서 이상하리만큼 밝게 이야기하다가, 조금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나한테 이런 정보 주는 거 걸릴까 봐 그래?"

".... 아니, 그런 문제라면 별로 상관 안 해"

"그럼?"

".... 그냥"


카무이는 조금 이상하게 웃었다. 상태가 평소와는 너무 달라서 조금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찬 바람을 맞고 있는 옆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깨에 살며시 기대었다. 내 이상행동에 카무이는 조금 이상하게 나를 바라보고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가만히 있었다.


"...내가 말 했던 조건... 꼭 지켜"

"....아, 알았어. 히지카타 때문에 널 화나게 하지 말라는 거였잖아. 꼭 지킬게"

"...."

"..절대..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나는 어깨에 기댄채로 중얼거렸고 카무이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의 옆으로 보이는 얼굴에서 얼핏 비치는 불안의 감정이 재미있었다. 이 새끼를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나에게 보여준 첫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안심시켜야 한다고 느꼈다. 


"너 오늘 기분 안 좋지?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없어"

"근데 지금 기분 안 좋잖아"

"너 지금 재수 없다. 내가 왜 기분이 좋지 않은지 알고 물어보는 거잖아 너"


그 말엔 조금 당황했다. 끝까지 감정을 숨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이 새끼와 숨긴다는 단어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당당하게 질문해온다.


"무슨 소리야? 모르겠는데.. 왜 그래 너? 난 그냥 기분 안 좋아 보여서 술이나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술? 술... 그러게, 마실까?"

"응 먹자. 내가 살게"


집에서 마실까, 밖에서 마실까를 고민하다가 카무이가 밖에서 마시자고 말했다. 귀찮은데 집에서 먹자는 내 의견에 오랜만에 밖에서 먹고 싶다고 했다. 전에 요시와라 앞에서 궁상떨면서 혼자 맥주 한 잔 다급하게 마시고 있었잖아, 하고 비꼬는 말까지 잊지 않으면서. 


나는 조금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술집을 가자고 했고 카무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술집을 가자고 했다. 오늘은 저 녀석에게 맞춰주려고 했기 때문에 이 녀석의 의견에 억지로 동조해주는 척하며 물었다.


"아니, 분위기도 좋고 깔끔하고 안주도 맛있고 술도 맛있는데 왜 일부러 다른 곳에 가자는 거야?"

"....거긴 너무 개방적이잖아. 게다가 우리가 그런 곳에서 분위기 잡으면서 술 먹을 일도 없고.."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시나?"

"네가 경찰이니까 네가 나를 담당하면 되겠네"

"아, 체포 준비하라는 건가?"

"그러시던가"


이 새끼가 안내한 술집은 꽤 구석에 있었고 어두운 조명에다가 북적북적했다. 빨간색 레터 조명으로 '라케시스' 라고 쓰여 있었다. 생긴지는 꽤나 오래되었는지 레터 조명이 깔끔하게 빛나고 있지는 않았다. 덩치 크고 험악한 인상에다가 문신까지 전신에 까맣게 새겨놓은 아저씨들이 많이 보이는 걸보니 뒷 세계에서 거래 장소로 종종 사용하는 그런 곳인가 보다. 카무이에게 가장 유명한 요리를 물었더니 두부요리가 맛있다며 이미 주문을 해뒀다고 했다. 네 입맛이 아닌데? 하고 말하자 가끔은 이런 것도 먹는다며 투덜투덜거렸다. 


자리는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원목에 검은 칠을 해 놓은 데다 붉은색에 가까운 전등불이 분위기가 있기도 하고, 어째 조금 으스스하기도 했다. 그런 기분이 드는 이유는 밖에서 들리는 문신한 놈들의 소란 피우는 소리까지 더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안주나 나오기 전에 술을 한잔 마셨다. 쨍하고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앞에 앉은 이 녀석은 내가 한 잔을 비울 동안 이상하게 말없이 3잔을 연거푸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고서 입을 열었다.

"후회했어"

"뭘"

"왜 알면서 물어봐? 알잖아 너도"

"왜 자꾸 내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그런 새끼잖아"

"그렇긴 하지"

".... 내가 왜 너에게... 히지카타 그 새끼가 있는 곳을 안다고 말했을까"

벽에 몸을 살짝 기댄 채로 작은 술잔을 집어 들며 흐릿한 말투로 말하는 카무이의 눈빛이 왜인지 외로워 보였다.

"... 그야, 네가 나를 좋아하니까"

조금 분위기를 바꿔볼까 하는 생각에 약간의 침묵 후, 최대한 밝게 말을 던졌다. 내 말에 카무이는 우습다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좋아한다고..?"

"..."

"그런가..."

"..."

"그럼 너는? 나를 좋아해?"

"당연히 좋지"

"정말?"

"응"

"이제 거짓말도 잘하네"

"이제 잘하는 게 아니고 원래 잘했어"

"...개새끼"

"히지카타가 돌아와도 변하는 건 없어. 너도 알잖아?"

"응. 알아. 그리고.... 그 새끼가 돌아와도 변하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너는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을 거라는 것도"


반박을 못하겠다.

나도 이 녀석도 침묵을 지킨 채로 한참을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소음이 다행스럽게 우리의 침묵이 어색하지 않도록 매꿔주었다.


"안주 나왔습니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며 주인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음식을 들고서 들어왔다. 


"오늘은 다른 분이랑 오셨네요? 늘 부단장님과..."

"그만, 오늘은 그냥 놓고 가. 나 본 것도 비밀로 해줘"

"....아. 네 알겠습니다"


꽤나 자주 오는 곳인가 보다. 두부요리와 더불어 성게알을 올린 계란말이와 예쁘게 장식되어 있는 사시미까지 이름 모를 현란한 요리들이 놓였다. 서비스라고 하기엔 조금 과했다.


"자주 오는 곳이야? 서비스가 과한데?"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다른 알바생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가 서비스를 전해드리라고 했다며 보기에도 고급스럽게 보이는 술과 예쁘게 각이 져 있는 술잔 두개를 두고 갔다.


"... 자주 온다기보다는"

"아, 거의 사는 곳인 건가? 혹시 친하다는 그 친구가 하는 술집이야?"

"그런 거 아니야"


카무이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나도 덩달아 술 잔을 입에 가져갔다. 몇 잔을 말없이 비우다가 내가 침묵을 깼다.


"나도 지금 후회해"

"뭘?"

"그냥 집에서 먹자고 할걸 하고"

".. 뭐야 집에 가고 싶어?"

"아니, 술 먹으니까 하고 싶어서"


원래라면 이 정도 술 들어갔을 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눈이 반짝했을 텐데 오늘은 별 미동이 없다.


"뭐야, 왜 이렇게 싱겁냐?"

"... 이렇게 될 까봐 밖에서 먹자고 한 거야"

"너도 거짓말 잘하네 내가 가자고 한 곳은 개방적이라거 싫다며? 그래서 이렇게 룸으로 되어 있는데 온거잖아?"

"...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거잖아. 후회를 자주 하고 싶지 않으니까"

카무이는 다시 평소처럼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 익숙한 미소를 보고서 안심했다.


"이리 와. 옆에 앉아"

"귀찮은데"

"이미 섰잖아?"


발로 앞에 앉은 이 새끼의 발목부터 위로 훑어가자 내 얼굴을 보며 술을 한잔 따라서 마셨다.


"그만해 여기서 하기 싫어"

"왜? 더 스릴 있고 좋은데"


그 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서서는 카무이의 옆에 앉았다. 나는 안다. 내가 옆에 앉으면 이 녀석도 결국엔 뿌리치지 못한다는 걸. 그리고 실제로 그랬다. 가까이에 다가온 나를 뿌리칠 정도의 힘은 없었던 것이다. 옆에 앉자마자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뺨을 만졌다. 그리곤 허리를 끌어당겨서 더 바짝 다가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급하게 키스하고 허겁지겁 목에 입술을 묻는다. 몽롱하게 올라오는 술기운과 더불어 따뜻한 온기가 더해져 오는 게 기분 좋다. 단추를 푸르며 가슴 팍에 손이 내려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 손을 부드럽게 잡으면서 말했다.


"... 하아... 여기서.. 안 한다며"


카무이는 대답 없이 잡은 내 손을 뿌리치곤 다시 내 목에 입술을 묻으며 집요하게 키스했다.


"...자국.. 남는다... 흐으..ㅅ.... 조...조심해"


점점 나를 붙드는 손에서 다급함, 그리고 자제하려는 망설임이 느껴진다. 그렇게 첨엔 안 한다던 놈이 이렇게 나오니까 재밌다. 목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이 녀석의 얼굴을 들어서 나를 보게 만들었다. 키스를 하려고 했다고 생각했는지 들이미는 입술을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그만하자. 집에 가자"


내 말이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가로막는 손을 치우고는 내 턱을 붙잡고는 입술을 맞대었다. 가볍게 맞닿은 후 다시 뒤로 빼며 다시 말했다.


"집에 가자"

"...뭐야, 장난 그만해"

"...너도 여기서 할 생각 없었다면서. 가자"

".....응..?"

"날도 좋은데 걸어가자 30분 정도면 갈 텐데"


단추를 잠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 말에 이 새끼 표정이 묘하게 열 받은 것 같기도 하고 내 말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계산하는 듯 묘하게 일그러졌다.


".... 장난 그만하고 이리 와. 여기서 마저..."

"장난 아니라고 했는데"

"그럼 나가자. 근처에..."

"이 근처에 숙소 싫어. 다 낡은 곳이잖아. 이렇게 좋은 술 먹고 그런데 가면 기분 더럽잖아"

".....너 왜 하지도 않던 짓을 해?"

"재밌잖아"

"그래 나가자"


내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에 나는 다시 앞에 앉아서 말했다.


"우선 앉아. 지금은 안 갈래. 술 더 먹고 천천히 가자"

"......너.."

"자, 한 잔 마셔"


술을 가득 따라서 한 잔 내밀었다.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받아들고는 신경질적으로 홀짝 받아 마셨다.


".... 오늘따라 왜 이러지?"

"그러게, 기분이 왔다 갔다 하네"


카무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잡아 달라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 녀석 손에 내 손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그리곤 나도 똑같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하고 물었다.


"그러게, 나도 이상하네"


카무이는 내 말에 약간의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에선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불안의 원인이 나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동시에 이제 어떻게 헤어져야 할지 생각했다. 히지카타가 쿠리코의 불륜을 알아챈 다음, 히지카타가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다며 나에게 올 때. 확실해졌을 때 헤어지자. 그런데... 어떻게 헤어지지? 집을 팔아버릴까? 이제 혼자 있고 싶어졌다고 할까? 아냐, 너무 막연해. 깔끔하게 그만 만나자고 할까? 아냐 아냐, 그렇게 말하면 분명히 난리를 치겠지. 깔끔하게 말하지 말고 나 답지 않지만 착하게 말해볼까? 착한 아이 증후군에 걸린 사람처럼, 난... 경찰이고.. 넌 범죄 조직에 있잖아.. 내 옆에 계속 있다면 너도 위험할 거야... 하고 눈물이라도 흘릴까? 생각만으로 토 할 것 같다. 카무이는 완전히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면서, 뭐야? 연예인이라도 할 생각인가? 하고 웃으면서 물어보겠지. 어째 헤어지는 것으로 이렇게 고민을 해야하나....? 아...! 그렇지 죄를 뒤집어 씌우자. 10년에서 15년 정도 감옥에서 살다 오는 것도 좋겠다. 죄 명은.... 가장 적당한 걸로 하면 되겠네. 



'경찰 간부 납치 사건 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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