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캄압/히지오키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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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대로 8시에 전화가 왔다. 전화의 내용도 카무이 녀석이 말한 내용과 같았다. 12시에 15억을 준비해서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혹시 몰라서 마련해 놓은 돈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이 제시한 금액에는 못 미쳤기 때문에 마츠다이라 선생은 현금 5억과 가지고 있던 10억원 정도의 건물 부지를 넘기겠다고 했다. 점점 가격도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며 구입했었던 그 건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놓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을 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정확한 가격을 매긴다면 그 이상의 금액이 될지도 모르는 건물이다. 돈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냐며 따졌을 때 돌아온 대답은, 저희가 의뢰를 완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셨나 보군요. 저희를 믿지 않으셨나 봐요? 미리 준비해 놓으셔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하고 말하며 비아냥댔다. 그 답을 듣고 우리 모두는 그들이 마츠다이라 선생의 재산을 조사했다는 결론 밖에는 내리지 못했다. 명의를 이전할 서류를 준비하고, 현금을 가방에 담으면서도 마츠다이라 선생과 곤도씨는 계속해서 의심했다.

"이게 함정이면 어쩌지?"
"아까 보내온 사진 보셨잖습니까. 사실이겠죠"

이 둘의 대화를 옆에서 들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곤도씨가 말이 없는 나를 보며 물었다.

"소고, 왜 말이 없어? 혹시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 거냐?"
".. 아닙니다. 저도 그냥.. 믿기지가 않아서... 그리고 불안해서 말을 아끼는 중이에요"

내 말에 곤도씨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는 고생했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었다. 

"너의 고생이 많았다. 꼭 히지카타가 멀쩡히 돌아왔기를 기다리자"

곤도씨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촉촉하다. 나는 가만히 웃어 보였다.

협상을 하는 장소엔 내가 가겠다고 우겼다. 히지카타의 상태를 확인하고 전화를 걸면 빌딩의 명의 이전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돈이 담긴 가방을 챙겨서 아래 대원 대여섯 명과 함께 확인하러 떠났다. 이상했다. 늘 히지카타의 상태를 확인했었지만 상쾌한 바깥공기와 함께 얼굴을 마주 보는 히지카타의 모습은 또 새로웠다. 멀리에서 언뜻 언뜻 보이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히지카타는 시체처럼 구급용 시트에 눕혀져서 왔다. 얼굴 위에 하얀 천만 덮여 있지 않았을 뿐이라서 혹시나 죽은 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협상 장소에는 7번대 단장이 직접 나왔다. 뒤에 멀찌감치 서 있을 뿐이었지만 위압감이 엄청나다. 바퀴 달린 카트를 성의 없이 우리가 서 있는 쪽으로 휙 밀어재꼈다. 혹시나 히지카타가 떨어질지도 몰라서 나도, 그리고 함께 왔었던 대원들도 화들짝 놀라서는 그 카트를 잡으러 뛰었다. 

"걱정 마라, 잘 묶어 뒀으니까. 치료비를 추가로 더 받으려다가, 다음번에도 또 부탁한다는 의미로 인심 썼다. 상태 확인하고 명의 이전 실행해. 하루사메 앞으로"

거만한 태도로 말하는 그 단장 놈을 노려보며 전화를 걸어서 확인했다고 전했다. 그들은 기분 나쁘게 낄낄대며 명의가 정확히 이전되었는지 확인될 때까지 우리를 위압적으로 포위하고 있다가, 거래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두말 없이 자리를 떴다. 

즉시 히지카타를 병실로 급하게 옮겨서 상태 체크를 시행했다. 다친 적이 있었는지 다친 부위를 치료한 흔적이 있었다. 혹시나 이 다친 부위 때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묻자, 다행히 상처가 아물고 있는 중이라서 아무런 이상은 없고 현재 단순 수면 상태라며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의 말에 안심해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츠다이라 선생과 쿠리코, 그리고 곤도씨가 달려왔다. 이미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는지 쿠로코의 눈과 코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히지카타를 발견하고는 끝끝내 소리를 참지 못하고는 히... 히... 히지카타씨!! 하고 히지카타의 손을 붙잡고는 목놓아 울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사람은 나 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나도 그 즉시에서 말리지는 못했다. 그 울음소리에 이상한 힘이 있는 것 같다. 그 손을 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소리칠 수 없었고.. 떨어지라며 그 사이를 파고들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참 옆에서 쳐다보다가 드디어 입을 열고 말했다.

"...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니 가시죠. 옆엔 제가 있겠습니다."
"가세요! 제가 옆에 남을게요" 

쿠리코는 훌쩍이던 눈물을 훔치며 나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꽤나 독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가시죠. 그쪽 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부장님께서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겠어요"

곤도씨는 내 말이 심했다는 듯이 내 어깨를 잡았고 마츠다이라 씨는 내 말이 맞다며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 쿠리코. 오늘은 쉬도록 놔두자. 혹시 모르는 일이 있을 때도 너보다는 저 녀석이 있는 게 훨씬 안심이다"
".... 아빠! 저는 이 사람의 부인이에요!!"
"네 마음도 다 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는 거라고 하잖냐. 거래한 집단이 그렇게 질 좋은 집단은 아니니까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자. 안정 취할 때까지는, 아니 병원에서 나와서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그렇게 하자. 어차피 곧 돌아올 거야. 게다가 매일 올 건데 잠자는 그 새벽시간도 못 버티는 거냐?"

마츠다이라 선생의 말에 쿠리코는 얌전히 자신의 뜻을 굽혔다. 자신의 아버지의 말엔 생각보다 고분고분했다. 그 와중에도 잠들어있는 히지카타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래, 지금 마음껏 붙잡고 있어. 그 손을 히지카타가 뿌리치게 되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모두 돌아간 새벽.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가벼운 바람소리가 기분이 좋다. 조금 망설이다가 히지카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것이었다. 카무이 녀석이 처음에 히지카타를 보여줬던 날이 생각났다. 그때 멀리서 히지카타의 모습을 보며 정말 발작할 뻔했었지.... 그때도 이렇게 손을 잡고 싶었었지. 

쿠리코가 쭉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 그 이유를 나도 알 것 같다.

"소고.."

히지카타의 희미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히지카타를 바라보았다. 

"어...! 히지카타...! 저.. 정신이 들어? 괘.. 괜찮아? 이제 안심해도 괜찮아, 이제 내가...! 아, 아니다. 의사를 불러야 하나? 의...의사.... "
".... 왜 이렇게 갑자기 호들갑이야? 나 괜찮아. 물 한 잔만 주라"

히지카타는 생각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떡 일어서서 물 주전자를 들었다. 일부러 몸에 좋다는 차를 끓여 놓은 주전자였는데 어찌나 물을 많이 담아 놓은 건지 손이 떨려서 주전자를 들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주전자가 무거운 게 아니라 내 손에 힘이 없었다. 겨우 물을 담을 때에도 사방에 물을 뚝뚝 흘리며 꼴사납게 바닥을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적시어 가는 바닥의 한 모퉁이에 내 눈물도 방울방울 떨어져서 섞이었다. 

".... 힘들었지?"

뒤에서 히지카타가 물었다. 

"... 힘들었겠냐? 내가? 곧 있으면 내가 네 자리... 네 자리 내가 올라가는 건데... 씨발 네가.. 네가 다시 와서... 다시..."
".. 미안해 걱정하게 만들어서"
"걱정 안 했다고 씨발!"

그리고 나는 뭐가 그렇게 서글펐는지, 어린 나이에 가장 아끼던 인형이라도 잃어버린 아이처럼 목 놓아서 엉엉 울어버렸다. 히지카타는 이런 내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을 것이다. 울음이 그칠 즈음에는 가까이 오라고 했다. 그리고는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약간의 머뭇거림을 보이며 손을 잡았다. 히지카타는 내 손을 가볍게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생각났나 봐. 그곳에 있을 때 이상하게 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아"

감동... 을 받고 싶었지만 그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 목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는 그 위치에 항상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히지카타의 마음이 나를 향해서 환청까지 들린 게 아니라.. 실제 나의 목소리였다는 생각... 되려 불안했다. 히지카타를 돌려주겠다는 일정을 늦춘 것도 나였고, 히지카타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서 혼자만 히지카타를 바라봐 왔던 것도 나였기 때문이다. 하루사메와 우리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그런 건 사실 변명에 불과하다. 조직에 알려서 대책을 간구했을 수도 있었던 문제다. 그저.. 나는 나 혼자서 히지카타를 보고 싶었고, 쿠리코와의 스캔을 조금 더 치밀하게 파고들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 퇴원하고 정상으로 돌아오면 같이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자"

히지카타는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너랑 그딴 거 먹으러 간대?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차마 입안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기분 좋게 내 손을 잡은 온기와 웃어 주는 그 눈,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모두 눈물 나게 기뻤기 때문이다. 대답 못하는 나를 보며 히지카타는, 아깐 왜 울었어? 하고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너무 쪽팔려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히지카타는 다시 소리 내서 웃으면서, 아, 여기 먼지가 너무 많아서 그런 건가? 그런 거지? 하고 가볍게 놀렸다. 죽고 싶었다. 이대로 정말 죽어버리고 싶었다. 너무 쪽팔려서,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일상적인 즐거움, 우리 둘만 있는 따뜻하고 간지러운, 이런 상황에서 죽고 싶었다. 

이상하다. 나에게 행복한 순간은 소독약 냄새와 함께 찾아온다. 왜 히지카타와 나, 둘 중 하나의 아픔과 함께 행복한 순간이 찾아올까? 길지도 않은 이 행복한 잠깐의 순간. 아픔도 뭣도 다 잊게 해주는 그런... 나비처럼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지도 못한 추한 얼굴의 나방이 음침함 속에서 빛이면 사족을 못 쓰고 달라붙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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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 너는 너무 단순해"
"그걸 이제 알았어?"
"아니, 항상 알았지, 그래도 한번 물어볼게, 이번에 그 경찰 놈 놓아줬는데 그 새끼가 돌아가서 우리가 한 짓이었다며 다 불어버릴 수도 있고, 그 만한 힘도 있는 놈인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 뭘 어떻게 해? 다 쓸어버리려고 했지"
"그럼 지금부터는 카운트다운인 건가?"
"응. 잘 세어봐. 언제쯤 올지 나도 궁금하니까"
"거봐, 이렇게 단순해. 설마 일부러 그런 건가?"
"왜 이렇게 빙빙 돌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하.... 뭐, 그래, 왜 네가 마음을 바꿨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난 네가 이렇게 평화적인 생각을 했다는 데에 뿌듯함을 느낀다."
"무슨 소리야. 공격해오길 기다리는 건데, 이게 평화적인 거야?"
"네가 퍽이나 기다리고 있겠다"

아부토는 앞에 레모네이드를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새삼스럽게 셔서 못 먹겠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으으 너무 시다. 여기 레모네이드는 절대 못 마시겠네"
"그러게 왜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래?"
"너도 변하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 사소한 것부터 조금씩 바꿔보는 거야"
"언제나처럼 최악의 선택이 될걸?"
"왠지 그럴 것 같다고 방금 생각했어. 아무튼, 내가 너를 굳이 일부러 이곳으로 부른 이유는"

그러고 보니 이곳은 우리가 항상 만나던, 카구라가 항상 찾아오던 그 카페가 아니었다. 어두운 분위기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조금 더 깔끔하게 정돈된 카페였다. 

"그러게... 왜 여기로 물렀어? 전에 가던 곳이 편하잖아. 아무 이야기나 막 해도 되고 귀찮은 일도 없는데.. 설마 이것도 변화야?"
"변화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아니겠어?"

아부토는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씨익 웃어 보였다.

"커피에서 바퀴벌레라도 나왔나?"
"커피에서 나왔으면 다행이게? 아주 한복판에서 난리를 치고 있더라. 덕분에 호출당해서 죽도록 고생했다. 야야, 이거 좀 봐. 이거 산재다? 어?"

아부토는 어깨도 결리고 얻어맞은 다리도 아프고 귀도 다쳤다면서, 온몸에 붙인 거즈와 반창고를 보여주었다. 

".... 흠.. 네가 이 정도면 그 새끼는 완전 작살났겠네"
"아니, 멀쩡해. 나는 털끝 하나도 못 건드렸다. 어쩌겠냐? 내 못난 상사 동생인데"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한다는 표정을 하는 나를 보며 아부토는 너!! 네 동생!! 하고 외쳤다. 그제야 떠올랐다. 카구라가 나에게 연락을 해왔던 때를. 내가 연락을 피하자 카페에서 난리를 쳤고, 카구라와 내가 자주 만나는 것을 목격한 카페의 상주 인원들도 함부로 카구라를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호출을 받고 아부토가 뛰어나간 듯했다.

"그랬구나.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데.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했어?"
"잘 모셨어. 그리고 보험으로도 사용했지"
"보험?"

아부토는 레모네이드를 하나 더 주문하며 말했다. 단장 네 동생. 경찰들이랑 친분 있던데, 그 경찰 놈 풀어주기 전에 미리 말해놨지. 우리와의 일, 우리 단장과 이야기했던 모든 것을 발설한다면 이 여자애는 영영 볼 수 없을 거라고. 단장의 동생이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우리가 가차없을 거라고 생각하더라고. 우리가 데리고 있으니 선택은 그쪽이 하는 거라고 이야기해 뒀어. 그 정의로운 경찰의 입장에선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했었던 이 작은 여자애가 위험에 처하는 것만은 안된다고 생각했나 봐.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랑 같이 산다면서 왜 동생이 이렇게 너를 미친 듯이 찾아?"
"... 걔가 좀.. 불안증세가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아, 그렇구나"
"동생이 또 다른 이야기 안 해?"
"무슨 이야기?"
"아니야"

아부토는 못 기다리겠다는 듯이 다시 레모네이드의 주문을 확인하며 빨리 달라고 재촉했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단장 너, 후회하고 있지?"
"뭘"
"그 경찰 놈. 그냥 죽여버릴걸. 하고"
"역시 넌 눈치가 참 좋아. 맞아. 잠깐 후회했어. 그리고 너도 원망했어"

내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원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게 의외였는지 아부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컵을 대충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 그냥 죽여서 시체로 데려오지 왜 살려서 데리고 왔을까. 그래서 왜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왜 나를 ... 후회하게 만들었을까?"
"결국은 또 내 탓이냐?"
"그럼 내가 널 탓해야지 누굴 탓해?"

아부토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나도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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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인지 모른다. 다만 주황빛 가로등 빛이 환하게 비추다가 점점 옅어지는 걸 보니 새벽의 시간 인가보다. 새벽의 시작과 끝. 아침이 밝는 시간에도 오키타는 오지 않았다. 핸드폰은 꺼져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한없이, 누나의 남자친구를 돌려준 날부터 2일 동안이나 이 새끼를 이 집에서 보지 못했다. 내가 나 답지 않게 너무 많은 것을 먼저 줘버렸나?

혼자 있다 보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원래  바쁠 때는 바빠서 힘들고, 한가할 때는 잡생각이 많이 들어서 힘들다던데 지금이 딱 그런 것 같다. 괜히 오키타 없이 이 큰 집에 있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처음 여기 왔을 때도 그렇고 엄마 아빠의 얼굴... 얼굴은 잊어버려서 생각이 안 난다. 하지만 누나의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이 난다. 오키타랑 닮았었지. 조금 더 섬뜩한 기분이 드는 느낌으로.. 그리고 나와 함께 생활하던 아부토도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아부토와 함께 생활 했을 때는 스트레스 없이 하루하루 즐겁게 지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생활이기에 별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 들어와서 잘 모르던 때에 했던 여러 가지 임무도 생각난다.. 하루사메에 들어와서 얼마 안 됐을 때였나... 우리가 치려는 조직에서 스파이를 한 명 고용했다. 나라면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을 방법이지만, 상대 조직이 꽤나 몸집도 컸고 스파이를 이용하면 이렇게 편리하게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스파이에게는 물론 상당한 대가를 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스파이가 우리가 시킨 대로 정보도 잘 빼왔고, 우리의 요구에 모든 걸 응했지만, 우리 쪽에선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난 후에 그 스파이를 죽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쓸모가 없잖아. 사냥을 끝냈으니 사냥개는 죽이는 거야. 이쪽이 더 깔끔해. 이런 놈 하나 더 있으면 나중에 껄끄럽다?

내가 단장이 된 이후로는 우리 사단에서 스파이를 쓴 적은 없다. 사냥개에 대한 동정심 이딴 거 아니고 그냥 구질구질해서. 뭐 하러 귀찮게 한 단계를 더 거쳐가야 하나? 하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가 써본 적도 없는 사냥개의 입장이 되어버린 거다. 기분이 묘하다.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열심히 사냥해다 바치는 그런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 어색하면서도 이상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닐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니야, 이 새끼가 나한테 그럴 리가 없어. 뭐가 그럴 리가 없지? 이 새끼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래도 나랑 약속도 했고... 약속? 지금 여기까지 와서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슨 의미가 있어? 이미 3일씩이나 연락도 없이 그 새끼 옆에 붙어 있다는 것 만으로 끝났잖아. 
끝났잖아. 
끝났잖아. 
끝났잖아.
끝나긴 뭐가 끝나. 내가 끝낸 적이 없는데 왜 끝나. 누가 사냥개야. 누구 마음대로 날 부려먹고 버려. 내가 언제 끝낸다고 말한 적 있어? 내가 왜 2일이나 머저리처럼 있었는지 모르겠다. 바로 나가려고 문을 벌컥 여는데 그 앞에 오키타가 졸린지 하품을 하면서 벌컥 열고 나오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가?"

오키타는 굉장히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를 지나쳐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 이 새끼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길 뿐이다. 오키타는 이불을 깔더니 누워서는 이불을 덮었다. 

"나갈 거면 얼른 나가든가"

오키타는 안대를 쓰더니 이불을 당겨서 덮는다. 홧김에 열었던 문을 다시 닫고서 이 녀석 앞에 앉았다.

"야"
"... 자려고 안대까지 했잖아"
"... 너 오랜만에 왔어. 심지어.."
"...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자"

전형적이다. 전형적으로 사냥개를 어떻게 버려야 좋을지 고민하는, 혹은 아직 버릴 타이밍이 오지 않아서 시간을 끌어야 하는 사냥꾼이다. 멍청해 보이는 안대를 쓴 이 녀석을 한참 쳐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안대를 벗겨서는 던져버렸다. 갑자기 들어오는 빛 때문에 눈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본다. 그 붉은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지금 화를 내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쏟아내려던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다가, 올라타서 거칠게 키스했다. 저항할 거라고 생각했다. 몸 부림을 치면서, 입술이라도 깨물면서 키스를 강제로 끝낸 후 나에게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라도 지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키스에는 순순했다. 이 태도에 조금 당황해서 입술을 떼자 오키타는 나를 보곤 말했다 

"이렇게나 기다렸구나... 나를.... 키스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해. 키스하면 되잖아. 근데 나 지금 계속 밤새워서 너무 힘들어. 어제 회식한대서 술도 좀 많이 마셨고.... 나 좀 잘게"
"...."
"표정 뭐야? 그럼 옆에 와서 같이 자던가"

오키타는 제 옆을 톡톡 치면서 말했다. 

"... 옆에서 끌어안고 계속 너 못 자게 할 거야"
"그건 안되는데..."

옆에 와서 자라는 말에 지금껏 생각하고 있던 모든 게 내 오해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오키타는 경찰이고, 경찰 간부가 납치되었던 큰 사건이니 더 바빴을 것이다. 곧바로 뒤에서 오키타를 끌어안고 계속해서 뒤 목을 핥았다. 뒷 목과 머리카락에서는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머리카락이 내 얼굴에 스치는 촉감이 촉촉해서 보니, 머리카락 끝이 덜 말라서 부드럽게 뭉쳐있었다. 그리고 순간, 그 촉감과 샴푸 냄새, 몸에서 나는 비누냄새, 아직 가시지 않고 남아있는 술 냄새를 확인하자마자 왜, 왜 씻고 왔지? 하는 의문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었다. 한번 가득 차있었던 생각은 쉽게 나가지 않는 법이었다. 귓볼을 반쯤 물며 물었다.

"어디서 씻었어?"
"어디긴 씨발. 둔영에서 씻었지. 밤새웠다고 했잖아"
"흐음"
"잘 거야. 말 걸지 마"

그리고는 얼마 안 돼서 잠들었는지 색색하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렸다. 자주 새벽 당직을 선다면서 늦게 왔던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샤워를 하고 집에 들어왔었고, 그땐 그 어떤 의심도 해본 적이 없다. 지금 나의 이런 태도는 내가 놓아준 누나의 남자친구에 대한 열등감이다. 

뒤로 셔츠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앞 단추를 두어 개 가만히 풀었다. 조금 더 모습을 드러내는 뽀얀 어깨와 목덜미. 혹시나 가슴 안쪽에 자국이 있지 않을까 싶어 안고 있던 팔을 풀고서 훑어보았지만 그런 흔적은 없었다. 훑어보며 안심하면서도 이상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멍하니 셔츠를 열어서 가슴과 목덜미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피식하는 웃음소리에 오키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가 웃긴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하냐? 표정을 보니 하고 싶은 건 아닌 것 같고.. 무슨 생각일까... 졸음이 반쯤 들어 나른한 눈으로 반쯤 눈을 휘며 웃었다. 그리고 나는 살며시 쥐고 있던 이 녀석의 셔츠를 놓았다. 잠깐의 정적과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 째깍째깍하고 가볍게 들린다. 그리고 오키타는 다시 눈을 가볍게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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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은 꺼놨다. 방해받고 싶지 않다. 히지카타는 입원을 한 다음 날 저녁, 바로 퇴원을 했다. 전에 있었던 상처는 이미 깨끗하게 아물었고, 단지 피곤에 쌓였을 몸을 좀 쉬어주라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히지카타답게 그동안 미뤄놓은 일을 해야겠다고 말했다. 쿠리코에게 전화를 하는 옆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쿠리코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히지카타의 말에 쿠리코는 보고 싶으니 꼭 일찍 오라며, 애교 있는 말로 졸라대었다. 전화를 끊은 히지카타는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더니 집에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평소의 나라면 당연하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겠지만 이번엔 일을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함께 둔영으로 들어갔다. 히지카타는 먼지 쌓인 자신의 책상을 닦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 그러게"

그리고는 내 책상에 아직 미쳐 다 뿌리지 못한 실종신고 전단지를 발견하고는 피식 웃으며 빨리 버려달라고 말했다. 사진은 꽤나 잘 나온 걸로 해주지 않았냐는 내 질문에 자신은 실물이 더 잘생겼다고 말한다. 저 새끼 말이 사실이라 더 짜증난다. 자리에 앉아서 서류를 뒤적이는 히지카타를 보며 말했다.

"중요한 일은 아마 곤도씨나 마츠다이라 아저씨가 다 처리했어. 이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리는 무슨, 너야말로 웬일이야? 집으로 돌아가"
"... 너 도와주고 나서 너랑 술이나 한잔 마시고 싶어서"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어?"
"아.. 나는...."

히지카타는 내 제안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분명 아까 쿠리코가 빨리 들어오라며 졸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너 찾으려고 이렇게 개 난리를 쳤는데 술 한잔 못 마셔줘?"

전단지 한 장을 들고서 눈앞에 다시 내밀었다. 내 얼굴과 전단지를 번갈아보더니,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알겠다고 했다. 

나와 술을 마시고 일찍 들어가려고 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일이 많지는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은 1시간 반 정도 후 바로 끝났다. 그리곤 전에 자주 갔던 술집으로 함께 갔다. 내가 유난히 기뻐 보였는지 히지카타가 나를 보고 자꾸 웃었다. 짜증 나면서도 이번엔 기뻐하는 내 모습을 내가 감추지 못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 실실 웃는 것이었다. 이상한 설렘이었다. 안주를 고를 때에도 들떠서 매일 봤었던 메뉴판을 다시 보며, 이거 먹을까? 오늘은 이걸 먹어볼까? 하고 대화를 하는 이 작은 순간이 좋았다.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맞다. 오늘 퇴원했는데 술 괜찮으려나? 하고 물었다. 히지카타는 어이없어하며, 그런 걸 술을 따르며 이야기하느냐면서 우리가 언제 다쳐서 술을 안 마신 적이 있었냐며 웃었다. 잘생겼다. 어떻게 이놈은 이렇게 가장 초라해 보여야 할 퇴원 이후의 순간조차 잘생겼을까. 두어 잔 술을 주고받으며 히지카타가 없을 때의 둔영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 그때 나도 모르게 곤도씨한테 대들었다니까요? 내가 막 소리 지르니까 곤도씨 표정이 아주... 야 소고, 자주 느끼는 거지만 너 반말하다가 이렇게 가끔 존댓말 쓰면 소름 끼쳐. 그럼 더 자주 해야겠다. 맨날 소름 끼쳐서 죽으라고. 참나, 그러든가. 여하튼 그때 곤도씨가 엄청 당황해했어요. 그래도 누구처럼 막 화내고 그러지 않고 나중에 막 고생했다고 위로도 해주고... 그 '누구' 가 설마 나야? 어, 맞긴 한데 노린 건 아니야. 노렸고만 뭘. 아니에요 노린 거 아니야. 술이나 먹어.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올 때쯤, 히지카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쿠리코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잽싸게 핸드폰을 낚아채고는 말했다.

"치사합니다 부국장님. 전 핸드폰도 꺼놨는데 이러기 있어요?"
"... 뭐야.. 취했냐? 이리 줘."
"싫어 받지 마. 이거 받으면 너 갈 거잖아!"
"어딜 가~ 늦게 간다고 말이라도 해놔야 걱정 안 하잖아"
"그니까아 난 핸드폰도 꺼놨는데 이럴거냐고"
"그럼 너도....."

히지카타는 뒤에 무슨 말을 하려다가 갑자기 멈추고는 한숨을 잠시 내쉬다가 말했다. 

"그래. 전화 안 받을게. 이렇게 말해도 너 내 핸드폰은 안 줄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히지카타의 핸드폰을 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가지고 있어. 우리 둘 다 전화받지 말자"
"웅. 그럴 거야"
"그나저나 너 취한 거 같아"
"안 취했어! 술 더 줘요!"

사실 지금 나는 조금 취했고, 눈이 조금 풀렸다. 히지카타는 나를 보더니 내가 내민 잔을 보더니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날 보더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조금 망설인다. 할 말이 있는데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의 히지카타의 모습을 잘 안다. 분명 쿠리코의 이야기를 꺼낼 때, 그럴 때 보통 저런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 히지카타가 입을 열면 또다시 쿠리코 이야기를 하겠지. 그러면 살짝 내가 곧 터트릴 쿠리코의 불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겠다. 히지카타는 조금 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너, 핸드폰은 왜 껐어?"
"....내 핸드폰? 그야.... 귀찮으니까"
"왜 귀찮은데? 누가 귀찮게 해?"

...이상한 질문. 뭐야 이번엔 쿠리코 이야기가 아닌 거야? 아니면 쿠리코가 나에게 전화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보는 건가?

".... 뭘 위해서 물어보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싶지 않아서..."
"그니까 그 '아무하고도' 라는 범위에 들어가는 사람이 누구냐고. 너한테 연락하기 싫어서 벌벌 떠는 너네 1번대 애들은 아닐 거고, 나야 같이 있으니까 아닐 거고, 곤도씨? 마츠다이라 선생? 아니면..."
"아, 알았다! 히지카타 너어.."

히지카타의 초조하면서도 이상하게 화가나보이는 그 표정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나랑 쿠리코랑 연락할까 봐 그러는 거야?"
"걔가 너한테 연락을 왜 하겠어? 그게 아니라..."
"하하 맞잖아. 이상한 거 느끼는 거야?"
"소고!"
"우웅?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술잔을 홀짝 마시자 내 술잔을 신경질적으로 빼앗았다. 아까워라... 술을 절반이나 흘려버렸잖아! 빼앗긴 술잔과 테이블에 흘려버린 술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아? 왜 마시던 걸 가져가는 건데에! 다 흘렸잖아! 술은 다시 담을 수도 없는데...."
"너 누구랑 살아 지금"

히지카타의 표정이 우스웠다. 뭐야, 답지 않게 나를 향해서 무서운 얼굴 하고 말이야.

"..음.. 친구랑 산다고 했잖아. 하하 얼굴 뭐야? 왜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야?"
".. 친구.. 그러니까 친구가 누구....!."
"왜애! 그런 거 전에는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지금은 왜 그게 그렇게 궁금한건데에! 내가 핸드폰을 꺼둔 게 그렇게 신경 쓰여? 이 오키타 소고가 설마하니 스토킹이라도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봐? 하하 언제부터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았어?"
"... 관심 항상 많지. 왜 그래"
"... 많았어? 다행이다...! 나도 많아... 나 히지카타 너 없어졌을 때.. 정말 죽고 싶었어요.. 대원들이고 곤도씨고 마츠다이라 선생이고 전부 다 답답하고.. 그래도 같이 있는 친구가 많이 도와줬어. 전단지 돌릴 때도 같이 붙여주고... 제보 전화는 또 얼마나 많이 왔는줄 알아? 너 닮은 실종자를 50명도 넘게 만났어. 진짜... 진짜루우...  엄청 다쳐있거나 팔 하나, 다리 하나 없는 그런 사람 들 보면 가슴이 얼마나 덜컹 했는 줄 알아? 다시는... 이렇게 내 앞에서 멀쩡하게 있는 너를 보지 못할까 봐... 부국장이 아닌 너를 보고 싶지 않아서..."
"... 그래... 고생했어. 미안하다"
"근데에 왜 이렇게 나한테 화난 표정을 지어어? 자꾸 갑자기 핸드폰 이야기하고.. 그렇게 집에 가고 싶어?"
"소고, 내가 지금 그런 말한 게 아니잖..."
"나안.. 가끔 생각나.. 너랑 나랑 둘이 살았을 때 말이에요. 너 결혼하기 전에. 내가 맨날 짜증 냈지만 그래도 나는 그때가 굉장히 좋았다고... 집에 와서 같이 이상한 요리해주는 너도.. 웃겼고....."

내 말에 히지카타는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라서 마셨다.

"어어?! 왜 혼자 마셔?!"
"소고 너 취했어. 그만.."
"그만 마시라고 할 거지? 그러지 마. 나 이렇게 너랑 술 먹고 싶었단 말이야아"

히지카타는 아무말 하지 않고 자신이 빼앗아갔던 나의 술잔을 다시 내 앞에 놓아 주었다. 나는 취했고.. 또 점점 더 취하고 있었고 어느새 어떤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 손잡아 줘. 정말 네가아 내 앞에 있는지. 갑자기 정신 차리면 없어지는 게 아닌지이.... 무섭단 말이야"
 
히지카타는 피식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아주었다.

"됐냐?"
"응 됐어! 히지카타 맞지? 정말... 정말 히지카타가... 맞지...?"

히지카타의 표정이 조금 씁쓸해 보였다. 그리고는 술 집에 걸려 있는 시계를 힐끗 본다. 시곗바늘은 어느새 2시 1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이 커다란 손. 저 시계를 몇 번 더 바라보며 히지카타는 나를 떠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시계를 두어 번 쳐다본 후에 떠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며 바쁘게 뛰어가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하얀 토끼처럼.. 엘리스는 그때 하얀 토끼를 단순하게 쫓아가는 게 아니라 죽일 기세로 뛰어서 시계를 부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토끼도 즉시 달리는 것을 멈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경험도 하지 않았겠지... 나는 술잔을 들어서 벽에 있는 시계를 향해서 있는 힘껏 던졌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부실한 시계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가 던진 튼튼한 술잔에 맞아서는 2를 가리키던 바늘이 6으로 푹 고꾸라진다. 나는 그걸 보며 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웃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히지카타는 내 손을 놓고는 바로 누군가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술값을 치르고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서 데리고 나갔다.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 이거 봐아! 너 그럴 줄 알았어... 시계.. 본 순간 너 집에 갈 줄 알았어어.."
"무슨 소리야. 얼른 가자"
"싫어. 안가"
"...."
"너도 안 갈 거야. 나도 안 갈 거고"
"가자. 점점 추워진다. 응?"
"나랑 오늘 같이 자면 안 돼?"
"... 무슨. 안돼. 집에 가자"
"싫어어어!! 그럼 나 너 따라갈 거야"
"...야.. 너 진짜"
"부탁이야. 딱 한 번만. 응?"
"너.. 아침에 깨고 나서 후회할걸?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거"
"후회는 내가 하잖아, 네가 하는 거 아니잖아! 가자. 응?"

히지카타는 내 고집에 졌다는 듯이 내가 손을 잡고 가는 데로 마지못해 끌려갔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은 그런 숙박업소에 들어갔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침대가 있는 방은 없었고, 다다미 방에 침구가 깔아진 방을 안내해주었다. 히지카타는 이게 뭔 짓이냐며 한숨을 푹푹 쉬며 얌전히 개어져 있는 이불에 등을 기대며 앉았다. 내가 우겨서 사온 맥주 두어 캔과 입실할 때 준 물 두어 병을 보더니 히지카타는 맥주를 땄다. 그리고 나에게는 물을 주었다.

"넌 그만 마셔"
"너는 왜 먹는데에?"
"먹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나랑 먹지"

히지카타의 옆에 앉아서 어깨에 살며시 기대었다. 히지카타는 나를 힐끗 볼 뿐, 맥주를 따서 한없이 들이킬 뿐이다. 피곤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술기운 때문에 몽롱하게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은 그 경계에서 기댄 히지카타의 체취에 취해서는 중얼거렸다. 쿠리코가 먼저 청혼했어?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히지카타는 맥주를 들었던 손을 멈칫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내 입은 말을 듣질 않는다. 너도 알겠지만 나 그 여자 되게 싫어요. 당연하다는 거 알지? 근데 왜 나한테 갑작스럽게 통보했어? 너도 말 못해서 타이밍 보고 있었던 거죠? 너도 말 못할 정도였다면 나 이해하지? 이해 못하면 안 돼. 넌 끝까지 말 안 할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해. 정말 그 여자 좋아해?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내가 더 비참할 것 같아서 그렇게는 물어보기 싫어. 그렇게 빨리 그 여자랑 결혼할 거면 왜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렇게 평생 옆에 있을 것처럼 굴었어... 그리고 너 내가 아직도 누나 때문에 쿠리코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물론 완벽하게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만.... 아무튼... 넌 그게 문제야.. 그런 면이... 진짜 사람 비참하게 만든다고.. 웅.. 그렇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왜인지 침구 위에 이불까지 덮은 채로 자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없었고, 내가 가져갔던 히지카타의 핸드폰도 없다. 아픈 머리를 붙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탁자 위에 쪽지 하나를 남겨두었다.

[고마워. 나를 그렇게 걱정해줘서.. 새벽까지 근무한 걸로 해 둘 테니까 오후에 나와]
​[그리고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정갈한 글자에 갑자기 혈압이 확 오른다. 하 시발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도 아파 죽겠는데.. 어제 가지고 들어왔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에서조차 술 맛이 나는 것 같다. 하지만 괜찮다. 오늘 아침에 내 곁을 비운 히지카타는 곧 쿠리코의 옆자리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괜찮다... 

히지카타가 남긴 쪽지를 주먹으로 구겼다. 힘없는 메모지가 동그랗게 모여지며 엉망으로 구겨졌다.

얼른 샤워라도 하고 집에 가서 편하게 더 자야겠다. 이제 슬슬 카무이 녀석도 지랄할 타이밍이니 들어가서 달래줘야지. 내가 마지막에 이 녀석을 버릴 때까지 이 녀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믿었으면 좋겠다.  집에서 무방비로 있다가 들이닥친 대원들, 그리고 내가 수갑을 채우기 전까지. 수갑을 차고도 나를 보며 무슨 일이냐며 말도 안된다며, 감옥에 들어가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이게 무슨 일이냐며 나를 찾았으면 좋겠다. 히지카타 때문에 자신을 화나게 하지 말라고 했던가... 히지카타 때문에 네 모든게 날아갈거야. 

너도 나와 헤어지는 순간은 순순하지 않을거지? 나 역시 순순하게 헤어질 생각은 없었나봐. 네가 당황하는 표정은 별로 본 적이 없으니 꼭 한번 보고 싶다. 어떤 표정일지 기대할게. 
하지만 너와 있었던 모든 일이 즐거웠어.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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