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무오키] 융해점 6

2015. 9. 30. 22:10

 



히지카타.

 

간만의 꿈에 죽어도 싫은 히지카타가 나왔다. 개새끼. 씨발새끼. 하지만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꿈에서라도 나는 그들과 함께여서 좋았다. 이상하게 꿈에서도 느껴지는 히지카타의 담배향과, 지겹게만 들리던 그 목소리가 나를 자꾸만 그 꿈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하지만 꿈이 그렇듯이 그것은 그냥 잠시 눈앞에 어른거리는 환상이기에 아무런 힘이 없다.

눈을 떴을 땐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현재 나의 동료인 악당과, 떠들석하게 우리 이야기로 정신없는 뉴스의 아나운서. 우릴 잡으려고 하면서도 우릴 두려워하고 있는 정부. 이것이 나의 현실이었다.

전보다 내가 약간은 의기소침해졌는지 악당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해?"

"아무 생각도 안해"

"나랑 싸울래?"

답지 않게 내 의견은 왜 물으시나. 싸우고 싶으면 먼저 공격하면 되잖아. 나는 그냥 멍하니 그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냥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귀찮아"

악당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다물었다. 범죄자 신분인 우리는 명성에 맞는 악당답게 꽤나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고, 아무도 우리를 범죄자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하기사, 주황색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이 녀석만 있지도 않을 뿐더러, 겉보기에는 그냥 나이 어린 소년 둘 정도 밖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신문을 보고나서 이후로 마음이 복잡해진 나는 그냥 멍하니 생각하는 일이 많아져, 어디에나 있을 법한 대형 커피숍에 가서 초점 없는 눈으로 지나다니는 사람 따위를 몇 시간이고 쳐다보기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토해내고 싶어 하아 하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옆에 앉아서 시킨 스무디를 쪽쪽 하고 소리내어 빨아먹던 녀석이 나의 한숨을 흉내내듯이 옆에서 저도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 넌 왜?"

 

"그냥"

 

가벼운 대답 후에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 * *

  

  

 

  

'사람의 본성은 다 악해.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내보이고 사느냐, 누르며 사느냐 하는 것은 이후의 환경이야'

 

곤도씨가 말했었다. 완전히 공감하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나쁜 짓은 언제나 재밌고 즐겁다. 들키지 않으려는 그 조마조마함이 재밌잖아. 나는 히지카타에 비해 일을 제대로 하지는 않는 불량한 경찰이고, 실제로 다소 과격한 행동도 많았다. 게다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나에게 히지카타를 옆에 붙여 놓았던 것은 나의 가시를 억눌러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히지카타는 나를 잘 억눌러 주었고.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그 녀석이 없으면 나 혼자서는 억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나봐. 그리고 실제로 그랬는지도.

 

내가 지루해 한다고 생각했는지 내 옆에 있는 악당이 나에게 말했다.

 

"재밌는 거 할까?"

 

"...재밌는 거?"

 

"응"

 

"뭔데?"

 

"따라와"

 

그는 나에게 손짓했다. 엘리베이터 단추를 누르고는 꼭대기 층으로 향하는 56층 버튼을 눌렀다. 빨갛게 불이 들어감과 동시에 56층입니다 하는 기계음이 들린다. 도대체 옥상에 올라가서 뭘 하려는 짓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마 같이 죽자, 뭐 이딴 개소리를 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네"

 

피식 웃었다.

 

"넌 착하고 싶어 하잖아"

 

핑- 하는 울림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가 그 말을 하며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그의 뒤를 바짝 쫓으며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한번쯤 착해주겠다 이 말씀이야. 이 몸께서"

 

그는 씨익 웃더니 가방에 들고 있던 돈을 꺼내들곤 말했다.묶여있는 종이끈을 툭 잡아 떼더니 그대로 허공에 흩날렸다. 얼마 단위로 묶어놓았는지 모를 지폐 더미가 바람에 의해서 가득 휘날렸다. 바람에 따라서 이리 저리 팔랑대는 종이 쪼가리가 햇빛에 받아서 오묘한 색상으로 휘날렸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런 짓은 처음 해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돈을 학종이 날리듯이 날리는 짓을 할 정도로 내가 그렇게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도 물론 처음이었다.

 

"돈이 있으니까 재미가 없어"

 

그는 우리가 훔쳐낸 그 돈을 전부다. 손으로 집어서 닥치는 대로 주저하지 않고 허공으로 던졌다. 나는 그런 그의 옆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 기이한 광경을 쳐다보면서 미친놈.. 하고 중얼거리고는 한참 웃었다. 훔쳐낸 돈이 10억 정도였다고 해도 쓴 돈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이 장소에서 우리는 그 나머지 돈을 전부다 소진했다.

 

"봐, 착한했지? 저 아래 사람들은 이거 가지려고 난리 칠껄?"

 

그는 킥킥 웃었다.

 

"이딴게 없어도 당당할 수 있잖아."

 

 

그랬다. 돈이 있어서 당당한 것도 아니었고, 범죄를 말리려고 그에게 한 말이 오히려 범죄를 덧씌워버린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 어긋나는 상황에 나는 약간의 짜증이라도 솟구쳤던 것일까?

 

 

그렇게 우린 다시 처음의 원점의 상태로 돌아왔지만, 나는 처음의 상태의 내가 아니었다. 이 녀석은 다시 종종 사람을 죽였지만 집단은 아니고 소소하게 한 두명 정도만 죽였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말려야 할 자격도 없었을 뿐더러, 그가 이러는 이유는 나와 제 자신을 위해서 였으니까. 예를 들어서 잠을 자려고 할 때도, 뭘 먹으려 할 때도 우린 처음엔 명령에 가까운 부탁, 그리고 거절하면 죽였다. 우리가 가는 여관은 구석에 있는 허름한 곳이었고, 늦은 시간엔 항상 그런 여관을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 정도여서 처리는 간단했다. 그리고 나는 점점 내 힘을 사용하는 여러가지 다양성에 대해서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데 말고 좋은데 가보고 싶어"

 

악당이 말했다.

 

"가자 그럼"

 

나는 그의 옆에 누워서 말했다.

 

"안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악당이 누워 있는 나를 턱을 괴고선 쳐다보며 말했다.

 

"나도 가고 싶어"

 

내가 말했다.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내 머리칼을 손 끝으로 쓸어내렸다.

 

"뭐야?"

 

"그냥"

 

악당은 그렇게 말하고는 얼굴에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 입술에 제 입술을 살짝 가져다대었다. 도톰한 느낌도 따뜻함도 다른 인간들과 다르지 않았다. 혀로 내 입술을 할짝 핥아 대는 게 강아지 같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나도 거부감 없이 그에게 다가가서 입을 맞추었다. 우리 둘의 벌어진 입술 틈으로 교차하는 혀 끝이 맞닿을때.. 설레임이라고 느껴질 법한 무언가가 가슴 속에서 꿈틀대었다.

 

그 날 밤 우리는 밤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길은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키스를 했다. 살짝 맞닿는 뺨의 솜털이 간지럽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지금 이 느낌이 좋아서 그와 서로 끌어안고 정신없이 그의 온도를 느끼려 했다. 신센구미는 나를 버리려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난 버려져버렸고, 나의 외로움을, 쓸쓸함을 달래줄 상대가 옆에 있는 이 녀석 뿐이라고 생각해 버렸나봐. 그 원인을 제공한 녀석도 이 악당이라는 것도 잊고서.

 

그 키스가 동족이 되는 의식이라도 된 것 마냥 그 이후로 나는 그 어떤 일에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그와 동화했다. 원래 나의 모습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누르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나를 옭아매던 죄책감을 녹여주는 적절한 온도가 그 악당의 입술의 따스함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도록. 그는 아이 같았지만 저가 느끼는 일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어서 같이 있으면 즐거웠다.

 

나는 경찰 내부의 사람이라서 경찰이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경로를 거쳐서 오는 지 정도를 잘 알고 있었고, 그 만큼 우린 꽤나 순조로웠다.

 

이 악당은 꽤나 거칠었고, 무식한 괴력이 특기였지만 어이없게도 가끔 여자와 아이는 잘 죽이지 않았다. 이유는 여자는 강한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있고, 아이는 커서 강해질 가능성이 있어서 라나 뭐라나... 하지만 살육을 즐기는 그는 싸움을 하려 쉽게 달라 들었다. 반대로 나는 싸움은 되도록 피하려했고, 웬만하면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했지만, 필요할 때면 어린 아이고 여자고 상관없이 죽였다. 한번은 내 칼을 훔치려 들던 어떤 거지 꼬맹이를 죽이려고 칼을 휘두를 때, 악당이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너 완전 악당이잖아? 아이는 봐 줘. 더 강해질 수 도 있잖아"

 

내가 악당? 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어조를 뱉고 그를 쳐다볼 때 눈치 빠른 잽싼 거지는 도망쳤다. 악당은 그냥 내 옆에서 웃었다. 나는 악당이 아닌데......

 

틈틈히 신문도 확인했다. 우리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얼굴은 확인 하지 못한 것 같다. 워낙 시골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런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그 뒤에 집단 살인은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범죄란 쪽 기사를 주의 깊게 읽고 있으면 가게의 주인들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세상이 너무 험난해졌다면서 나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나예요 나. 여기서 살인귀라면서 지껄이는 2인 중 한 명이 나라고요.

  

 

 

  

* **

  

  

  

 

  

“자 이거 쓰고다녀”

  

이 악당이 내 머리에 커다란 갓을 씌워 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맨 얼굴로 당당히 다니면 언젠간 잡힐 거 아냐”

  

그는 그렇게 말하곤 키득키득 웃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범죄자의 신상을 따지는 바로 옆에 항상 <신센구미의 1번대 대장 오키타 소고 실종> 이라는 긴 기사와 나의 사진이 떡하니 붙어 있었으니 혹시 그런 범죄에 관심 있는 사람이나, 사람의 얼굴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안심했다. 커다란 갓의 뒤에 얼굴을 감추고서 맘껏 휘두를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어째서 안도감을 느끼냐고 묻는다면 정확히는 나도 뭐라 대답을 해야 할 지 망설여진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썩 좋아하진 않았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내가 택한 방법을 이 악당 녀석은 웃으면서 ‘미친, 니가 더 잔인하잖아?’ 하고 말하면서 웃었다. 나도 그와 같이 웃었다.

  

내가 택한 방법이 내 생각엔 더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서 무엇을 가지려 다가갔을 때, 거부하는 상대에게 힘의 차이를 느끼게 해주면서 우리의 말을 고분고분히 들을 때까지 손가락을 하나하나를 자르는 것. 보통 평범한 사람은 한 개째에서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말하게 된다. 이 것은 초기 단계였는데, 나중엔 점점 과격해져서 한번 잡은 상대는 절대로 그냥 순순히 놓아주기가 싫었다. 살려줘.. 살려줘.. 살려주세요..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 정도를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가장 흥분해서 상대를 가지고 놀았을 때, 내 눈 앞의 상대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잃고서 몸뚱이만 묶여있는 상태로 흰 자를 보이면서 말라비틀어진 입에서는 음산한 신음 소리만을 띄엄 띄엄 내뱉는다. 하지만 나는 결코 죽이지 않았다. 악당이 아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의 취미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악당이 아닌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그 모습을 보고, 얼굴에 잔뜩 튀겨져 있는 피를 보면 이 악당은 나에게 다가와서, ‘얼굴이 더러워 졌어’ 라고 말하면서 내 얼굴을 혀로 살짝 핥는다. 내가 그 녀석을 쳐다보면서 희미하게 웃으면, ‘괜찮아. 이 모습이 좋아.’ 하고 말하면서 다시 한번 감미롭게 혀를 뒤 섞었다.

  

그 때부터는 더 이상 신문을 쳐다보지 않았다.

  

  

  

 

  

* * *

  

  

 

  

구석의 허름한 여관을 전전하던 우리가 말했던 호화로운 호텔. 그 곳은 내가 전에 호위를 하러 문 앞까지만 들어 갈 수 있었던 호텔이었다. 사치의 대명사. 모든 서민들의 꿈이라고 일컫어 지는 그런 호텔. 이 호텔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그런 호텔이어서 그런지, 도시와는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하루에 묵는 손님을 많이 받지도 않는 곳이라고 알고 있다. 심지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콧대 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콧대가 높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호위로 이 곳에 와 본 만큼, 나는 그 보안을 어느 쪽에서 담당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았고, 악당에게는 너무 난리치지 말고 키를 받으라고 말한 후 보안을 담당하고 있는 그 곳을 총 책임자 한 명만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다 죽였다. 그 총 책임자 한 명은 살려주었는데, 온 몸을 묶고, 눈과 입을 막고서 그의 무전기만을 빼앗은 후에 돌아왔다. 당연히 프론트에서는 키를 주었을 리도 없고, 그 악당이 난리를 치지 않았을 리도 없을 것이라는 내 예상과 같이 그가 서 있는 프론트는 괴기스러운 팔, 다리와 검붉은 피로 호화로운 장식들이 물들어 있었다.

  

“아.. 이러면 호화롭지 않잖아”

  

나는 말하고서 그가 쥐고 있는 키를 받아들고 호수를 확인한 후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무전기로 청소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말했다.

  

[프론트가 더러워. 청소 좀 해]

  

그리고 한참 후 놀란 듯한 목소리의 무전.

  

[저...저 이거.. 시...시체...시..신고..르....ㄹ]

  

[알아. 알아서 할 테니까 우선 치워]

 

 

들어가 보지도 못했던 그 호텔. 다른 것 보다는 그냥 한편의 호기심이었다. 그 곳은 정말 돈을 쳐 발랐구나. 하는 느낌이 확실하게 드는 그런 곳이었다.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깔려 있는 대리석 바닥과, 호화로운 침대. 모든 것이 눈이 아플 정도로 반짝이는 걸로 가득한 그런 곳이었다. 창문에 서서 보니 바다가 철썩 철썩 하고 우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린다. 우리는 단순히 재미였고, 이것이 오래 갈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그냥 처음 보는 광경이기에 구경을 했다.

  

“뭐, 당연히 알고 있지? 우리의 이런 시간. 길어봤자 오늘 하루야”

  

“왜?”

  

“곧 사건을 조사한다면서 경찰들이 올 테니까”

  

“다 죽여 버리면 되잖아”

  

악당, 나는 악당이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니까?”

  

내 말에 악당은 키득키득 웃더니 알겠다고 순순히 말했다.

  

그 곳 창문에서 바라본 밤의 바다의 부서지는 파도는 계속 쳐다보아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파도는 일정하지 않고, 밀려오는 길이도 다르고, 부서지는 소리도 다르며, 싣고 오는 것도 달랐기 때문에. 내가 한참 쳐다보고 있자 악당이 옆에 와서 창 틀에 기대어 섰다. 나는 어쩌다가 이 녀석에게 실려 왔을까.

  

거대한 욕실에서 따스한 물로 피로 얼룩진 몸을 씻어 내고나서 왠지 모를 노곤함에 큰 침대에 몸을 털썩 뉘였다. 좋네. 잔잔하게 파도 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지는 공간에서 무방비에 가까운 상태로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공포가 약간은 잠재하고 있는 이 상황. 악당이 샤워를 마치고 나와선 누워 있는 내 옆에 털썩 같이 누워선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려 다가왔다. 왠지 모를 장난끼가 올라와 일부러 뒤로 얼굴을 슬쩍 빼면서 약을 슬슬 올렸다. 항상 그의 키스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반응했던 나였기 때문에 그 악당의 표정엔 살짝 당황한 기색이 보인다. 살짝 입술 끝에서 닿을락 말락하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장난을 치자 이 악당이 몸을 일으켜 나를 위에서 확 누르면서 뭐야? 하고 한쪽 입 꼬리를 씨익 울리면서 물었다. 나는 그냥 이 모든 상황이 웃겨서 소리 내어서 웃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그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한참을 타액의 마찰음으로 끈덕진 소리가 이어지고 키스가 끝났을 때 이 녀석은 내 목과 쇄골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한참 내 살을 빨아들였다 놓았다 했다.

  

“..좋다”

  

내가 말했다. 그는 내 말에 잠시 나를 한번 올려다 보더니 다시 하던 행동을 계속 한다. 맞닿은 살결이 데일 듯이 뜨거웠고, 그의 거친 숨소리와 나의 숨소리가 뒤섞이면서 나는 그날 이 악당과 사치스럽기 짝이 없는 그 호텔에서 한껏 뒤엉켜 섹스를 했다. 섹스란, 사랑이라기보다는 그저 외설스럽다는 말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해왔었지만, 좋았다. 악당과 나의 잠깐 크게 타오르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일시적인 감정과 관계 일 수 있겠지만 알게 뭐야. 난 지금이 좋으면 됐어.

  

하얀 액체가 튀어오르는 것으로 관계가 끝나고 서로 나란히 누워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았다.

 

  

너 눈이 빨간색이라서 그런가? 햇빛이 비출 때 옆에서 보면 눈동자 속이 비어 있는 것 같아

뭐야 그거. 눈동자 속이 비어 있는 것 같다 라는 말은 처음 들어봐 무슨 의미야?

투명해 보인다고

그니까 그거 무슨 의미냐고 묻잖아

...딱히 별 의미 없는데?

악당인 니가 그렇게 이야기 하니까 눈알이라도 뽑아서 줘야 될 것 같아

그럴 리가. 계속 지켜볼 수 있도록 옆에 있어.

  

 

큰 영양가는 없는 대화였지만, 그 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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