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텁석에쿠] 석양볕

2016. 12. 5. 09:54










스산한 공기가 기분 나쁠 정도로 무겁다. 게다가 몸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작은 촛불 따위를 끄려 후 하고 불면 그 작은 입김만으로 영원히 소멸할 것 같았다. 시게오에게 영소의 대부분이 날아갔고, 그 후에 그것도 모자라서 왠 금발의 꼬맹이에게는 소멸당할 뻔도 하였다. 최악의 상황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게오와 그 금발 꼬맹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다. 에쿠보는 티끌만 한 크기로나마 간신히 영체를 유지하고서는 길을 걸었다.


순탄치 않았다. 가는 도중 돼지, 개, 심지어 작은 쥐의 영에게도 도망쳐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고 잔뜩 지쳐있었다. 저보다 작은 생물의 움직임에 반응을 보이는 소동물들은 에쿠보가 도망치는 그 움직임에 호기심을 품고는 쫓아왔다. 저리 가! 따라오지 마! 살려줘! 하지만 뒤에 있는 거대한 생물체들은 아무 생각 없이 거대한 앞발로 그를 밟으려 내딛고, 에쿠보는 그 커다란 그림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쳐다보지도 않던 가축의 영들에게 쫓기는 처지라니.. 상급 악령으로 기세등등했던 자신의 모습이 마냥 그립기만 하였다. 


끝났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이쪽으로 와! 하고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턱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벼룩을 타고 다닐 정도로 작은 영이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그 작은 손을 허겁지겁 잡고서 벼룩의 등에 올라탔다. 잔뜩 지친 에쿠보는 그제야 눈에 맺혀있던 눈물을 닦았다. 그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 작은 영은 그를 위로해주듯, 이제 괜찮을 거야 하고 어쭙잖은 위로까지 건네었다. 그 말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성기 때엔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것들.. 지금은 이런 녀석에게 구해질 정도로 하찮아진 자신의 처지가 너무 애석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기에 그런 위로도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난 텁석부리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에쿠보"

"그렇구나 잘 부탁해"

"..그래"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돌았다. 조금은 불편한 듯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 텁석부리는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텁석부리가 워낙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에 에쿠보도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살아생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영은 많지 않다. 텁석부리도 살아있는 시절의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그냥 사라지기 싫었을 뿐이고.. 이승에 무슨 원한이나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니고.. 목적도 없이 세월만 훠이훠이 지나가더라..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난 죽어도 딱히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언제나 혼자 하루하루를 살고 나서 왜인지 영이 이렇게 작아졌어"


"아.."

"에쿠보 너도 그렇지?"

"음.. 글쎄.."

"같은 처지에 잘 지내자"


텁석부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쿠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무기력한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텁석부리는 오랜만에 본 에쿠보가 반갑고 좋았다.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신을 보며 귀찮은 듯이 바라보는 눈도, 초록색 빛을 발하는 영체의 빛과 양 볼에 귀엽게 자리한 빨간 반점도 마냥 귀엽게만 느껴졌다.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만 말도 통하지 않는 벼룩 노치와 함께 작고 허름한 오두막에만 누워있는 것은 조금은 외로운 일이다. 사람이 정말로 죽을 때는 외로울 때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이미 죽어서 영이 되어버린 텁석부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외로움을 덜어주는 상대를 만난 것은 그에게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되었다. 살아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혹시 살아있을 때 꽤나 가까운 인연으로 닿아있었던 사람은 아닌가 하고 혼자서 상상하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조급해 보이는 에쿠보를 보고서 텁석부리는 근처에 같이 산책이라도 가자면서 에쿠보에게 제안했다.


"웬 산책?"


반응이 조금은 떨떠름했다.


"음.. 아니 네가 조금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뭘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

"산책.. 그래 할까?"


텁석부리가 자신을 조금은 생각해준다고 생각한 에쿠보는 크게 가고 싶진 않았지만 그 의견에 순응했다.

그렇다고 해봤자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잡초 풀, 그리고 떠돌아다니는 소동물의 영들, 조금 올라와 있는 황폐한 언덕, 척박한 자갈밭..


"저쪽으로 가면 호수도 있어. 작지만."


조금은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는 텁석부리를 보고 에쿠보는 조금은 그에 대한 경계가 풀어졌다. 

텁석부리의 안내에 따라서 함께 간 그 호수는 그렇게 맑고 깨끗한 곳도 아닌 데다가 근처의 풍경이라도 해봤자 드문드문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까맣게 문드러진 나무가 으스스하게 서있고 정리되지 않은 잡초만이 무성하게 자란 곳이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서 청결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기만 하다고 생각했던 텁석부리가 이런 곳까지 찾아서 안내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텁석부리는 잡초가 별로 많지 않은 곳을 찾아서 안내하고서는 이곳에서 조금 기다리면 해가 진다며 그 광경이 꽤나 예쁘다고 했다.


"살아 있을 때에도 무기력했겠지만.. 그래도 나는 이 광경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한 후에 꼭 이렇게 해가 지는 이 광경을 보고 헤어졌을 거야. 나는 오늘 너와 영체가 되고 나서 첫 번째 데이트를 하는 거야. 사람의 영과는 온 적이 처음이거든!"


"데이트 같은 소리.."


에쿠보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덧 하늘이 비치어 파랗게 빛나던 호수가 붉은색 잉크를 떨어트린 것 마냥 점점 붉은빛으로 불붙었다. 잡초들도 나무도 붉은빛을 발했다.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이었다. 텁석부리는 옆에 앉아 있는 에쿠보를 바라보았다. 초록색의 영체에도 붉은빛이 반사하고, 눈동자 역시 붉은빛이 맺혀서 반짝이는 하나의 구슬 같았다. 늘 혼자 봐왔기에 몰랐던 눈동자에 맺힌 주홍빛은 정말이지 감동적이었다.. 텁석부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야 그는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에쿠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커졌다. 가축들의 영에 잡아먹히지 않을 만큼이 되었을 때 그런 에쿠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텁석부리는 말했다.


"에쿠보.... 어쩐지 너 조금 커지지 않았어?"

"응, 하지만 아직 멀었어"

"어째서 커지려고 하는 거야? 우린 죽었어!"


텁석부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며 꽤나 흥분한 듯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조금은 화난 듯 보이기도 했다. 에쿠보는 그런 텁석부리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텁석부리가 그와 자신을 동일하게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몹시 언짢았다. 그는 상급 악령이다. 그런 벼룩의 영과는 다른 차원의 악령인 것이다.


".. 텁석부리.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이 몸은 너와는 달라. 어째서 너는 너 자신을 나와 동일시하는 거야?"


"에쿠보.. 너나 나나.. 이미 죽었잖아.."


"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에쿠보는 말했다. 이 몸은 신이 될 몸이야! 이런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아니라 이거야! 돌아가서 시게오를 마음껏 이용하고 틈을 봐서 몸을 차지한 다음에 세상의 신이 될 거라고!


"신...?"


텁석부리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있다니? 게다가 신이라니.. 그래서 에쿠보는 그렇게 쓸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텁석부리는 다시금 외로워졌다. 운명의 상대를 찾았다고 생각했고, 충분히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 상대가 신이라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니.


그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에쿠보는 조금씩 몸이 커져가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처음에 맞잡았던 에쿠보의 손을 이제 다시 맞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자신의 양 손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자신의 손은 이렇게나 작은 것일까?..





자꾸만 커지던 에쿠보는 어느 날 새벽 떠나겠다면서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텁석부리 지금까지 돌봐줘서 고마웠어"

"..."


점점 커지는 에쿠보를 보면서 언제 떠난다고 말할지 불안해 떨고 있었던 텁석부리였지만 예상을 한다고 해서 슬픈일이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텁석부리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미 눈물을 가득 삼키고 있기도 했고, 돌아보면 다시 혼자가 되어버렸다는 외로움이 더더욱 실감이 나서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인사도 안 하는 거냐? 왜 그렇게 서운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험한 상황에 이 몸을 살려준 은인이잖아. 고마웠어. 잘 지내."


에쿠보는 뒤도 돌아보지않고 그대로 길을 떠났다. 그는 전혀 서운하다거나, 미련이 남은 듯한 한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이미 해는 지고 어두운 어둠이 무겁게 깔려있다. 조용한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리고, 벼룩의 영인 노치도 잠이 오지 않는지 뒤척이며 바스락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텁석부리는 한참을 이불을 적시다가 결심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노치의 등을 탔다. 


노치! 어서 가자! 에쿠보에게 가야겠어!


노치는 마치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등을 내주었다. 노치가 그렇게 열심히 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잘은 몰라도 노치도 에쿠보에게 조금은 정이 들었던 것이 아닐까?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서 말갛게 빛나는 에쿠보의 초록색 영체가 보였다.


에쿠보!!!


텁석부리는 크게 외쳤다. 하지만 에쿠보는 돌아보지 않았다. 너무 커진 몸집 탓에 이제 자신의 모습과 목소리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었다.


에쿠보!!! 에쿠보!!


그는 다시금 힘차게 외쳤다. 그의 격정적인 외침이 들렸는지 에쿠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 돌아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그는 어째서 자신이 에쿠보를 필사적으로 쫓아왔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그 자신의 외침이었다. 아! 나는 에쿠보의 일부가 되고 싶었구나..! 에쿠보와 처음이자 마지막의 데이트에서 본 붉은 석양을 늘 함께 보고 싶다...! 핏빛 석양이 빛나는 그의 눈동자의 일부가 되고 싶다...!


에쿠보...! 나를 흡수해줘...! 나도 함께 데려가 줘....! 제발 부탁이야...!


텁석부리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어찌나 크게 외쳤는지 머리가 띠잉하고 울릴 정도였다.


에쿠보....! 제발!!! 나를 흡수해줘...! 나도 너와 함께 가고 싶어...! 난 너무 작아서 너에게 커다란 도움 같은 건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 아냐, 그만둬. 돌아가...!


어째서 그러는 거야! 나를 흡수해줘...!제발...!


에쿠보는 맹렬히 쫓아오는 그가 무서웠다. 작은 그의 푹 패인 검은 눈에 이상하게 광기가 서려있었고 너무 크게 소리를 쳐서인지 목소리 조차 기괴하게 갈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에쿠보는 자신이 커지기 전의 작은 상태에서 저런 광기어린 텁석부리를 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만둬.. 왜 그러는 거야...


에쿠보...! 나.. 난 너의 일부가 되고 싶어...! 나도 데려가 줘....!!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음을 느낀 에쿠보는 곧바로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흡사 쫓고 쫓기는 관계였다. 에쿠보도 텁석부리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텁석부리도 살면서 어떤 존재를 이렇게 필사적으로 쫓아본 적이 처음이었고, 에쿠보다 이렇게 작은 존재를 피하려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도 처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렸을까? 뒤를 돌아보니 텁석부리는 없었다. 에쿠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역시 무기력한 그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쫓아오다가 그의 본 모습을 되찾고는 에라 모르겠다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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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치도 텁석부리도 커다란 에쿠보가 달리는 것을 쫓기엔 무리였다. 텁석부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다. 흡수해달라는 그의 소원마저 매정하게 뿌리치고 간 에쿠보를 원망했다. 처음부터 그를 구해준 것이 잘못이었을까? 다시 혼자 남아버린 텁석부리는 자신을 동정했다.. 다른 누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는 이미 에쿠보를 만나기 전의 자신과는 또 달라져버린 것이다. 이제 내일의 외로움은 더욱 커져서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텁석부리는 한켠의 허한 가슴을 움켜잡고 계속해서 울었다.. 눈물이 뜨겁게 그의 볼을 타고 내려왔다. 이제 그는 다시는 석양을 보러 가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일어난 텁석부리는 조금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에게 이상한 징조를 느꼈다. 왜인지 갑작스럽게 답답함을 느꼈던 것이다. 뭘까? 이 답답함. 텁석부리는 바람이라도 쐴 겸 산책이라도 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선 노치를 불렀다. 


노치, 어딨니? 산책하러 가자


노치는 멀리서 달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노치를 탈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다가온 노치는 너무나 작아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노치를 바라보면서 노치가 맞느냐고 물었다. 노치도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평소에 앉아 있던 머그컵 잔으로 달려가보았다. 항상 앉아 있던 그 머그컵. 평소엔 그 머그컵의 안을 내려다보려면 낑낑대며 기어올라가야 했던 그 머그컵을 이제는 발꿈치를 들면 안을 내려다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텁석부리는 깨달았다.


아...! 나도 살아있구나...! 


에쿠보와의 만남으로 그는 조금은 변화하고 살아있게 된 것이다. 그는 점점 더 커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에쿠보가 어째서 그렇게 커지고 싶어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쿠보가 신이 된다는 야망을 품었다면.. 그는 에쿠보와 석양을 볼 두 번째 데이트를 상상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텁석부리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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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쓴거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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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모브] 데이지  (0)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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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에게는 그만하자고 통보를 했다. 조금은 일방적일 수도 있으나 에쿠보의 억지스러운 행동과 나에게 속삭이는 말들 모두가 A에게는 정말로 소름 끼치는 일이 될 것이기에 나는 가장 현명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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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비를 많이 맞아서인지 감기에 걸렸다. 형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의 형의 반응을 보면 역시나 형은 나에게 조금의 의심도 하지 못한 채 나에 대해선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며 조금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지만 에쿠보의 이름을 한번 언급한 걸 보면 에쿠보가 조금은 언지를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더 이상 이런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서 형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나는 조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편안했다. 조금 신경 쓰이는 형의 이상한 행동을 빼고는.


집착에 가까운 형의 행동은 정말로 이상하다. 감기에 걸린 내가 걱정된다며 갑자기 학교에서 조퇴까지 하고는 뜬금없이 나에게 달려온다거나, 자고 있는 나의 침대 옆에 바짝 붙어 멍하니 앉아 있다거나 .... 일어난 나와의 대화 이후에 갑작스럽게 입을 맞춰온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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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A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핸드폰에 형이 A와 문자를 나눈 것을 한참 후에 발견하고서야 A가 어쩐지 학교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도 큰 관심을 둘 이유가 없는 나는 귀찮은 일 하나를 덜어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며 하교를 할 때에 사복 차림의 수상한 한 명의 남자가 교문 앞을 서성이더니, 하교하는 내 앞에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다.


안녕? 카게야마 리츠가 맞니? 경찰이란다. 뭐.. 너무 무서워하지는 말고.. 간단히 조사를 할 것이 있는데 잠깐 함께 가줄 수 있겠니? 


경찰 신분증을 보여주기에 따라간 경찰서에는 분주한 다른 사람들과 고개를 푹 숙인 범죄자들, 그리고 대낮인데도 술에 잔뜩 취해서 뻗어있는 노숙자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어째서 경찰들이 나를 불렀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감이 잡히는 것이 없었다. 자리에 앉자 경찰이 부드럽게 나에게 A의 이야기를 꺼내며 A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다시 물었다. 


A가 며칠째 행방불명이란다. 알고 있었니?

...행방.. 불명이요..?

음.. 아직 몰랐구나? 마지막 연락을 한 사람이 너였어. 그래서 혹시나 뭐 아는 게 있나 해서..

제가.... 아는 거... 라면...

조사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문자 좀 보여줄 수 있니?


경찰은 내 핸드폰에 A와 나눈 문자를 한참이나 읽어보고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마지막 연락은 네가 아니구나?

저는 그날 아파서 자고 있었어요.

A랑 무슨 관계였니?

문자 보시면 대충 아시겠지만.. 음.. 잠깐 만났던..

네가 이 날 헤어지자고 해서 충격이 컸을까?

...아마도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이 문자를 주고받은 날 A를 만났니?

낮에는 학교에서 만났지만 저녁엔..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에요.

형은 이 A와 아는 사이니?

아니요 전혀요.. 같은 학교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딱히..

그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거네?

네.

CCTV를 봤는데 너희 집으로 가는 길의 모습은 포착되어 있어. 하지만 돌아오는 길 쪽의 CCTV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는 게 없더라고. 뭐.. 그렇게 빡빡하게 촬영되고 있는 근처는 아니었으니까 찍히지 않는 곳으로 갔는지도 모르지만... 

....

그럼 이 여자애는 평소에 어떤 성격이었니? 아니면 혹시 원한을 살만한 누군가가 있었니?


이런 것을 물어보는 것에는 실종, 납치, 혹은 자살의 가능성을 두고 말하는 것인데 그 질문에 나는 알고 있는 데로 대답했다. 얼굴도 예쁜 편인데다가 성격도 활발해서 여자들도 남자들도 모두가 좋아하는 인기 있는 사람이었고, 원한이라고 해봤자 학교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여자들의 시기 어린 가벼운 질투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고. 


경찰은 순순히 나에게 알겠다고 말하며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혹시나 뭐든 생각나는 거라던가, 뭔가 A가 갔을 만한 장소라던가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연락 달라면서 핸드폰 번호를 적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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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떠들썩했다. 선생님도 학생들도 모두가 이 A의 실종사건에 대해서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모두가 무서워했다. 나에게 다들 A가 어떻게 된지 아냐며 슬쩍 묻기도 하고, 나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거라며 나를 위로해주기도 하고..

모두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A에 대해서 납치가 아니냐, 살인사건이 아니냐 하고 수군거리며 알 수 없는 범죄의 그림자에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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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나에게 에쿠보가 내민 것은 한 쪽면이 이상하게 찌그러져버린 A의 플라스틱 명찰이었다. 


받아들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집 앞에 떨어져 있었다고 말하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집에 찾아왔었던 걸까? 하고 생각하기도 전에 에쿠보가 말했다. 아, 조금 안타깝네 이 여자애, 시게오에게 완전히 소멸당했다고. 우리가 이용하기도 전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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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형은 무서워.. 나 또한 이렇게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릴 거야.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형은 나 또한 이렇게 죽여버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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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보는 나에게, 시게오가 너를 좋아해 하고 말을 꺼냈다.

 

레이겐에게 보내는 편지를 언뜻 훔쳐봤는데 네 이야기를 가장 많이 써서 보내고 있어. 너, 아팠을 때 너에게 입을 맞췄었다며? 봐, 너에게 조금 이상하고 유별난 감정이 있다니까? 너도 실은 알고 있잖아? 


뭘 알고 있다는 건지.. 그런 감정이 뭔데.. 우린 가족이자 형제인데. 모든 걸 떠나서 가족끼리는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야. 내가 반박하고 나서자 에쿠보는 안심하는 듯이 기분 나쁘게 웃었다.


다행이다 리츠, 혹시나 네가 시게오에게 정말로 마음이 있어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 가장 쉬운 길로 가자고 우리. 너도 널 지켜야 하잖아? 나는 너의 편이야 릿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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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워. 이건 내가 행한 그 어떤 일보다 더럽고 추악했다. 동시에 나를 믿고 있는 부모님에게 죄를 짓고 있다는 죄책감과 형에게 느끼는 공포심이 조금씩 조금씩, 하지만 조금 강하게 압박되어서 조금의 자극으로도 나는 터져버릴 듯한 상태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형은 학교에 자자한 A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나는 형에게 그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는 위치였다지만 형 역시 주위 사람들이 수군 거리는 이야깃거리에 정말이지 놀라울 만큼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요즘 학교에서 학생회가 실시하는 방과 후 학교의 보안에 대해서도 신기해했다. 어떻게 이렇게 떠들썩한 이런 분위기를 모를 정도로 무신경한 것인지, 정말로 모르는 것은 맞는지, 혹시 형은 일부러 A를 죽인 것은 아닌지, 나도 모르게 이상한 생각을 했다.


주머니 안에 넣어둔 경찰이 건네주었던 명함을 늦은 밤에 꺼내어 보면서 결론이 없는 고민을 했다.

결국은 찢어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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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었다고 하기엔 너무.. 더럽다


형과의 관계가 더럽고, 나를 괴롭게 한다지만 그 육체적인 관계가 마냥 싫기만 하진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 자신을 경멸하게 만들었다. 형과의 이상한 관계에서 크진 않더라도 약간의 괘락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더러워서 형이 잠든 깊은 밤에 화장실에서 하루 종일 토했다. 이미 뱃속에 아무것도 없어 누런 위액만 캑캑대며 뱉어낸다고 해도 형과 나의 뒤섞인 비릿한 정액 냄새가 코 끝에 머물며 나를 끊임없이 따라다니고.. 형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 리츠! 하고 조금은 떨리는 듯이 부르는 그 목소리가 자꾸 귀에 들리기도 하고 뒤에서 껴안아오는 그 기분 나쁘리만치 따스한 가슴이 자꾸만 내 옆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며 적당히 괴롭게, 적당히 견딜만큼 내 목을 움켜잡고는 놓아주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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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에쿠보를 나에게 소개했다. 악령이지만 내가 내 주위 사람들에게 이상한 짓을 하지 말라고 했으니 괜찮을 거야~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에쿠보와 나는 서로를 한참 쳐다보다가, 서로 이 상황에서 아는 척을 하면 안 될 거라는 강한 직감이 통했는지 우리 둘은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에쿠보도 나와 비슷했다. 에쿠보도 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형을 두려워하는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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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겐씨가 형에게 사기를 치는 어른답지도 못하는 이상한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어른은 어른인가 보다. 덕분에 나도 약간은 브레이크를 지그시 밟는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다음부터의 일기는 모브가 편지에 썼던 스즈키라는 녀석의 이야기가 쓰여있었다. 하지만 앞에서도 보이는 불안함의 증폭 때문인지 글씨도 엉망이고, 문체조차 엉망으로 쓰여 있어서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어서 몇 번이나 다시 읽어야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대강의 내용을 보면 스즈키라는 녀석이 초능력 기운을 쫓다가 동생 녀석을 발견했고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소년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모브에게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자세히는 쓰여있지 않지만 동생 녀석의 공포심을 조금은 달래주는 녀석이 이 스즈키라는 녀석이 아니었나 싶다. 답지 않게 스즈키라는 소년에게 모브와 있었던 일들과 자신의 일들, 그리고 에쿠보에게 있는 두려움까지 모두 다 털어놓았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덧붙여 본인도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런 녀석을 어떻게 믿고서 다 털어놓을 수 있는지 조금은 의아해했고 스즈키를 더 빨리 만났으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고 쓰여있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약간은 편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일기에 쓰여있는 스즈키의 성격은 모브와는 완전히 다르게 외향적이고, 동생 녀석에게 남다른 호감을 표하면서 다가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런 과정이나 이 녀석의 조언을 듣고서 움직여왔다는 것을 보아 동생 녀석이 모브에게로부터 숨어야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도 스즈키라는 녀석의 도움과 조언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놀랐던 사실은 에쿠보의 이야기였다. 에쿠보의 존재에 대해 스즈키는 동생 녀석에게 에쿠보를 유인해서 함께 자신에게 오게 한 뒤에, 동생 녀석의 동의나, 생각조차 들어보지 않고 없애버렸다고 쓰여있었다. 이러한 제멋대로의 행동에 놀라고 당황해서 크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스즈키는 '왜 화를 내는 거야? 이 녀석이 두렵다며? 네 옆에서 사라지면 다 해결되는 문제잖아.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하고 덤덤하고 침착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모브의 친구이기에 에쿠보가 사라졌을 때에 시게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섭다며 일기에 또다시 느끼는 두려움을 잔뜩 써놓기도 했지만, 그 다음 장의 일기장에는 또 아무렇지 않게 스즈키와의 일상에서 조금은 안정된 모습을 찾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에쿠보가 정말로 사라진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살아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정말로 소멸해버렸을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동생 녀석의 일기를 봐서는 에쿠보라는 령이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일기는 [스즈키는 나에게 '리츠, 나와 함께 있으면 걱정할 거 없어.' 하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는 이 녀석이 형보다 더 강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 말에 안심을 한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녀석 특유의 확신에 찬 말투에 안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라는 문장으로 끝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런 것을 알아버린 나의 심정은.. 한때 모브의 스승이었다고는 하나, 나도 모브의 동생 녀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에 모브가 나에게 화를 냈던 때에도 느꼈던 공포감이 다시금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모브가 무서워지고 두려워졌다. 모브는 나에게 이런 것을 알려줘서 무얼 하려는 걸까. 나는 이런 것에 무어라고 답을 해야 하나? 의미 없이 일기장의 남은 공백부분을 휘리릭 넘기다가 뜬금없는 중간에 '스즈키 xx-xxxx-xx' 하고 번호로 보이는 낙서수준의 글씨를 하나 발견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이 이상으로 나는 모브에게 직접적으로 연락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동생 녀석이나 여기에 적어져 있는 스즈키라는 소년에게 무어라고 말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오지랖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 역시 모브에게 이런 내용을 전해 듣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해결하는 데에 약간의 힘을 보태었다는 정신적 안도감을 얻어야 했다.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번에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으면 그 동생 녀석이 다닌다는 학교에 전화를 걸어봐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며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방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어? 저기... 여,여보세요?

[...]

응? 안 받았나? 아, 아닌데? 받은 것 같은데..? 저.. 스즈키.. 군? 아닌가?

[누구?] 

아, 역시 받았구나. 안녕? 난 세기의 영능력자...

[...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까칠하네.. 카게야마 리츠와 이야기를 하고 싶..

[... 리츠의 형?]

아냐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니고.. 음... 뭐랄까... 그.. 동생 군에게 레이겐 아라타카..라고 하면 알 텐데...


내가 이름을 말하자 한참을 말이 없더니 본인에게 물어보고는 답을 주겠다고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요즘 꼬맹이들은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버릇이 없어?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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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연락은 항상 늦게 온다고 하였던가? 다음날 저녁에 갑작스레 울리는 핸드폰을 발작적으로 받아 들었을 때는 생각지도 못 했던 어릴 적 고향 친구가 야!! 레이겐!! 오랜만이다야!! 하고는 핸드폰 너머로 빼액 소리를 질러댔다. 내가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간만에 맥주 한잔하자며 호탕하게 웃으며 친구들도 모두 온다고 했으니 보자면서 친근하게 말했다. 뭐, 할 일도 없고 오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은 전화를 멍하니 기다리느니, 친구들이나 만날까 하는 생각에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은 생각보다 드라마틱하게 변한 놈은 없었다. 다 거기서 거기였다. 뭐 어떻게 지냈냐, 우리 만난 지가 벌써 15년 만이다, 여자친구는 있냐 등등 수많은 질문 세례를 던지며 나를 맞아주었다. 맨날 중학생 어린 새끼들만 보다가 다들 커버린 사회 안의 현실적인 친구들을 만나서 그렇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나누었지만 조금은 움츠러드는 느낌을 받았다.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이미 결혼을 했고 결혼을 안한 친구는 나와 어떤 한 친구뿐이었다. 다들 나에게 여자친구도 있다면서 왜 결혼을 안 하냐면서, 우리 나이는 이제 슬슬 결혼을 해야 하는 나이야! 하고 다들 나에게 장황한 설교를 시작했다. 내가 모브에게 어쭙잖게 설교를 할 때의 모습이 이런 꼴이었을까?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레이겐. 여자친구 선생님이라면서? 프러포즈는 했어?

프러포즈? 아니 그게.. 아직...

그래? 그럼 우리가 도와줄게. 차일까 봐 못하는 거야?

그런 것도 없진 않지만.. 사실 아직 프러포즈까지는 생각도 못했어.

그럼 이제 생각해봐. 우리가 도와줄게. 역시 프러포즈는 평범하게 하는 것보다는...


그러더니 다들 본인이 했던 이벤트의 이야기들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뭐, 차 트렁크에 풍선이랑 케이크, 그리고 반지를 넣어서 세팅을 해 놓은 다음에 뭐 좀 꺼내달라고 하며 유도했더니 여자친구가 보고 깜짝 놀라 하며 좋아했다는 녀석도 있고, 어느 장소로 오라고 한 다음에 촛불을 하트 모양으로 켜 놓은 다음에 세레나데를 불러주며 프러포즈를 했더니 여자친구가 울어버렸다는 녀석도 있고.. 아 정말 다들 왜 이렇게 하나같이 오그라드는 짓들만...


재미도 없고, 프러포즈라는 것을 해도 절대로 이 녀석들이 말하는 것 같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은 하기도 않을 것이기에 맥주를 반 잔 정도 마시다가 취했다는 핑계로 집으로 돌아왔다. 저렇게 멋드러진 프러포즈에도 다 주인공이 있는 법이다. 나같은 사람이 저런 겉만 번쩍번쩍한 이벤트 같은 것을 하면 정말이지 우스운 꼴로 보일 것이다. 나는 나대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서 청혼을 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프러포즈.. 그러고 보니 요즘 어머니도 나에게 슬슬 결혼을 물어보시기도 하고.. 나도 이제 정말 결혼을 해야 할 때가 되기도 했는데.. 하지만 지금 내 여자친구는 정말이지 나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여자가 아닌가...!


취기가 살짝 올라오는지 조금은 알딸딸해지는 정신으로 침대에 누워서 정말 여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해도 괜찮을까, 혹여나 여자친구는 나를 그렇게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생판 처음 보는 전화번호지만 이런 늦은 시간에 웬 스팸전화인가 싶어 수상쩍은 생각을 하며 받아드는 동시에, 아..! 그 동생 녀석이 전화를 했구나..! 하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모브 동생이니?

[... 네]

와 정말 전화해줬구나. 하하 이렇게 연락을 하는 건 처음이지? 잘 지냈어? 정말로 연락이 올 줄은 몰랐어. 이 번호는 뭐야? 처음 보는 번호..

[다른 사람 핸드폰이에요]

아 그렇구나 전학 갔다던데 여전히 공부는 잘하고 있어? 요즘 날씨가..

[저와 연락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뭐죠? 스즈키의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용건만 간단히 하세요]

어.. 그니까... 대충 짐작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새벽에 핸드폰 너머로 듣는 동생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도 건조하고 불안함과 초조함을 최대한 감추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여서 최대한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지금까지의 사정을 대충 이야기했다. 


모브가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알고 있지? 내가 모브에게 너희 관계에 대해서 조언한 것도 말이야. 모브가 네 일기를 보내줬어.. 훔쳐본 것은 미안해.. 아, 일단 화내지 말고 들어봐. 우선 스즈키라는 친구의 번호도 그 일기장에서 우연히 본 거고.. 모브는 이 번호까지는 보지 못한 것 같아. 내가 너와 연락을 하고자 한 이유는 모브가 너를 무척이나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렇게 마냥 피하지만은 말고 연락이라도 취해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연락을 했어.

[형에게요?]

그래, 나에게도 너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수차례 이야기했었어. 네가 다닌다는 학교에 전화도 하고 말이야. 너에게 그 학교 담당이 전해주진 않은 것 같지만.. 너의 심정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넌 가족이잖니? 평생 안 보고 살 거야? 너 지금 너무 극단적이야.

[레이겐씨]

응 이야기 하렴

[전 형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

[그러니 레이겐씨도 같잖은 스승 행세 같은 거 그만두세요. 제가 레이겐씨에게 조언이나 충고 같은 거 들을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용건이 이게 전부라면 끊을게요]








[레이모브] 데이지

2016. 11. 24. 01:30











초능력자라도 하더라도 중학생은 어쩔 수 없는 중학생이었다. 시게오는 손님이 없는 영등등사무소에서 책과 노트를 꺼내어 놓고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어른이라는 면모를 조금은 과시해볼까 하는 생각에 레이겐은 시게오의 머리를 살짝 톡 치면서 물었다.


"뭐 풀리지 않는 거라도 있니?"


"음... 이 책을 읽고 생각해보라고 하셔서요..  근데요, 너무 어려워요. 스승님이라면 해결해주실 것 같아요!....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 보셨나요?"


"완전히 명작이잖아. 봤지"


"데이지가 어째서 개츠비를 버리고 떠났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라는데 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아요"


시게오는 평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했다. 이럴 때일수록 어른답게 설명을 술술 해준다면 좋았겠지만 레이겐은 그런 복잡한 문제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을 꼼꼼히 읽지 않았고 너무 오래전에 읽은 탓에 내용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음... 숙제니?"


"숙제는 아닌데요. 그냥 생각해보라고 하시고 수업을 끝내셨어요. 근데 저도 궁금해져서요."


"그건 말이야 개개인마다 느끼는 게 답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러니 이런 건 나에게 묻지 말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 볼 것! 알겠니?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해줄래? 정답인지 아닌지 내가 평가해 줄 테니까"


"...네.."











*


"28살 레이겐 아라타카...... 15살 어린아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원래부터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알바라는 명목으로 어린애를 사무실에 들인 겁니까?"

"레이겐씨? 이미 다들 알고 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터뷰하시죠"


파란만장한 28살. 지금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집 앞에 모인 수많은 무리의 방송 기자들은 각자 신나서 플래시를 터트리면서 사무실 겉을 찍어대면서 그를 관찰하고,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앞에서 수 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레이겐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집어 들고는 손을 떠는 탓에 담배 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해 안간힘을 쓰다가, 겨우 붙여서는 한입 깊게 빨아들이고는 내뱉었다. 담배연기마저 아련하게 서서히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시게오를 만나게 된 이후로는 손에 잘 대지 않았었던 담배였지만 지금은 결국 그 녀석 때문에 다시 손을 댄 것이다. 레이겐은 다시금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아, 내가 이래서 처음부터 싫다고 한 거였는데...




처음 시게오와의 만남은 몇 년 전, '저기요 고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하는 앳된 목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 손잡이를 낑낑대며 열고 들어온 것부터 시작되었다. 첫인상은 정말로 엉뚱했다.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안다는 이상한 말과 함께 아무것도 모르는 순한 얼굴을 한 괴짜 초등학생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만남의 순간부터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몰랐다. 초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말에 눈을 빛내면서 쳐다보는 그 순진함을 이용하려 한 나쁜 어른.. 처음부터 단호하게 그런 힘 같은 건 모른다며 솔직하게 거절하고서 돌아가라고 했어야 했다는 것을 지금 깨달으면 무엇을 할 것이란 말인가?


그 이후로도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시게오는 중학교 2학년으로 항상 검은 가쿠란을 입고서 들락 나락 거리게 되었다. 키도 많이 컸고,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서 얼굴의 젖살도 많이 빠졌다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이 벗겨지지 않은 완전한 애기였다. 일방적으로 레이겐이 연락을 해서 불러낸 적도 많고, 그래서 불만을 표시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런 자잘한 일에도 친구하나 없는 레이겐의 옆에 이렇게 오랜 시간 곁을 지켜주는 것을 레이겐은 참 고마워하고 있었던 것도 맞다. 담배를 피우며 옛날 일을 회상을 하며 밖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플래시와 기자의 외침에 구석에 몰린 레이겐은 소리치고 싶었다. 


이 레이겐은 결코 먼저, 결단코 먼저 아이를 꼬여낸 것도 아니며, 수 없이 거절했었고, 분명히 수차례 거리를 두려 했지만 나는... 아니,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이 서로를 사랑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믿어주십시오... 


피해자의 신분은 감추어 주겠다고 단단히 약속을 했는지 시게오의 이름이나 행적은 나오지 않았다. 레이겐은 잠시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이내 본인이 약간 속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언론에서 공개되고 있는 내용은 무서웠다. 뉴스에는 중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기꾼 영능력자라는 이름으로 언제 찍혔는지 모를 희미한 사진에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뉴스에 보도되고 있었다. 아마도 레이겐을 아는 주변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그 사진을 보고 레이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처음에 마음을 고백한 것은 시게오였다. 한 겨울, 제령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매섭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시려워, 조금의 미안한 마음으로 레이겐은 본인이 하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그 목도리가 지나치게 따뜻했을까? 인적이 없는 새까만 하늘 아래의 새하얀 눈길에서 시게오는 말했다.


"저... 전부터 생각했었는데... 스승님은 정말 좋으신 분 같아요"

"하하, 물론 맞는 말이지만 또 마냥 좋은 사람만은 아니다?"

"그럼 나쁜 사람인가요?"

"음.. 그것도 아니지만.. 네가 그렇게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고 나에게 좋으신 분 같아요, 하고 말하면 뭔가 부담된다고"

"부담이요?"

"어른들은 어린애들이 모르는 그런 복잡한 사정들이 많은 법이니까"

"...음.. 저 스승님, 뜬금없이 질문해서 죄송한데요. 혹시 연애 같은 거.. 하고 계세요?"

"연애하고 있으면 이런 추운 겨울에 제령 하러 나왔겠니?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을 거다"


추우니 사무실에서 몸이나 녹이고 가라면서 그 저녁에 사무실에 붙잡아 놓은 것도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저 이렇게 추운 날 데워지지 않은 방구석으로 들어가서 혼자 외롭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있기는 싫었을 뿐이었다. 난로를 틀고서 추우니까 데운 우유나 한잔하고 가라면서 우유를 데워주고, 자신은 몸을 덮인다며 미량의 알콜이 들은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옆에 붙어 앉아서는 티브이의 삼류 영화 따위를 봤다. 정말이지 더럽게 재미가 없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배우가 나왔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영화였다. 별 감흥 없이 멍하니 티브이를 보다가 시간이 늦었으니 데려다주겠다며 이만 나가자는 레이겐의 말에 시게오는 정말로 엉뚱하게, 분위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어붙은 퀴퀴한 겨울의 사무실에서 조금은 우물쭈물하면서 말했다.


스승님, 저... 그니까.... 스승님이 좋아요. 음.. 이 말은요, 좋은 사람이어도 호.. 혹시나.. 그.. 그럴 리는 없겠지만, 스승님이 나쁜 사람이어도.. 같이 옆에 있고 싶다..라는 뜻이에요. 음.. 그니까 스승님이 추운 겨울에 제령을 제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자친구.. 의 역할을 제가 하고 싶다...는 말이에요. 전 여자는 아니지만 말이에요.


얼굴을 붉히며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대놓고 엄청나게 비웃으며 조금 더 크고 와라~ 하고 농담을 받아주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시게오의 그런 고백이 아예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레이겐은 그 이후에 자신이 시게오를 보는 시선이 조금은 변했다는 것을 느끼면서, 머릿속으로는 전화도 해선 안되고 불러내어도 안되고, 함께 다니는 것조차 조절했어야 했다는 것을 그저 300엔의 값싼 몸값으로 부릴 수 있다는 이유로 애써 신경 쓰려 하지 않았다. 시게오는 그 전과는 달리 불평도 불만도 없이 전화가 오면 네 스승님! 하고 몹시 들뜬 목소리로 달려왔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일하기도 수월했다는 점이 꽤나 편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스승님 스승님 하고 따르는 그가 꽤나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을 때는 이미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그때의 그는 '늦었다', '혹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곤두박질 쳐버린 것이다. 


시게오가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도 저 좋아하시는 거예요? 아니. 내가 미쳤냐? 거짓말. 안 좋아해. 거짓말이잖아요. 나 너랑 그러면 안 돼. 왜요? 너 너무 어리고... 저 하나도 어리지 않아요! 저도 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 정도는 저도 파악할 줄 알아요. 


시게오는 그렇게 말하고서 웃었다. 레이겐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부터... 바로 그 순간부터 자신이 최면에 걸렸다고 믿는다. 이 녀석이 강력한 초능력으로 자신의 사고까지 바꾼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죽어도 안된다고 하고 거절을 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레이겐은 그 순간에 마냥 시게오가 좋았고, 심지어 입술을 맞대는 그 순간에는 '잘못됐다'라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에 취해버려 마냥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하고 허겁지겁 파고들며 품에 안기는 것도, 옅게 풍기는 달콤한 우유 냄새, 그리고 특유의 아이의 맑은 눈동자도..... 이미 썩어버린 제 나이 또래의 누구에게도 볼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그 순수함..! 바로 그 순수함이 레이겐의 발목을 잡고 끌어내린 것이다. 


똑같이 순수했다면 정말로 좋았을 터인데... 이미 욕정의 맛을 알고 있는 28살의 욕정은 너무나 더러운 것이었다. 시게오의 맑은 눈동자의 옆에 있으면 그 악취를 감추지 못할 정도로 추악했다. 





"그.. 오늘 같이 자.. 자고 갈래?"


그 말을 꺼낸 것은 시게오와 처음 입을 맞춘 이후 2달이 조금 넘었을 즈음이었다. 레이겐의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하면 시게오를 안을 수 있을까 하는 조급함, 그리고 어떻게 하면 안에 들어가서 겁에 질리지 않은 상태로 부드럽게 옷을 벗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통의 또래 여자들이라면 자고 가자는 말에서부터 다 알아채고선 뭐야, 벌써 이러는 거야?라던가, 단호하게 지금은 별로야,라고 하던가, 아니면 눈동자를 굴리며 재빠르게 모든 행동을 계산을 할 터인데 시게오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 어떤 것조차도 생각하지 못 했다. 

시게오와 같이 외박을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시게오는 전화로, 엄마 오늘 스승님댁에서 자고 갈게요 하고 말하자 오늘은 바쁜 거니? 레이겐씨와 함께 있는 거야? 하고 간단한 것을 묻고는 곧바로 허락했다. 아무래도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레이겐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근처의 싸구려 모텔, 아니 그보다 더 싼 허름한 구식 여관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 여관은 밖에서 자기엔 돈이 나름 넉넉한 노숙자 정도가 와서 잘 법한 정도의 공간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싸구려 공간에서의 섹스라니, 장난하냐면서 단호하게 뺨을 한대 때렸을 정도로 허름했다.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구식 노란 장판은 이음새도 제대로 맞질 않아서 드문 드문 떨어져 있고, 보일러의 열 때문에 울어버려 중간중간은 부풀어있는데다가 침대 시트나 배게, 이불에는 빨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얼룩이 약간 묻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위생적이지 않았다. 

섹스가 목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시게오는 왜 스승님의 집으로는 가지 않는 거예요? 굳이 이런 숙박업소를 이용하는 이유가 뭐예요? 하고 물었다. 그야 당연히 나는 집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참을성이 좋지 않거든!이라고 말하려던 것을 입안으로 삼키며, 우리 집이 지금 좀 많이 더러워. 하고는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레이겐은 이미 아무도 볼 수 없는 한 공간 안에 둘이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욕정이 부풀어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있었다. 화장대로 보이는 거울 앞에는 구식 여관이지만 신경 써준답시고 콘돔이 두어 개 놓여있었다.


시게오는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비싼 여관이라면 반 투명 유리로 언뜻 언뜻 실루엣을 비추도록 해놓는 서비스도 있었지만 이런 싸구려 모텔은 묵직한 나무 문이 멋이라곤 하나 없이 닫혀 있을 뿐이다. 시게오가 샤워를 시작하려는지 쏴아아 하는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렸다. 레이겐은 상상했다. 시게오의 작은 어깨, 하얀 피부에 더 하얀 거품을 묻히는 모습, 머리카락이 물이 젖어서 흘러내리는 모습, 솟아 있을 젖꼭지, 목덜미, 허벅지.. 상상만으로도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는 문을 두드렸다.


"저, 모브"

"네 스승님, 저 좀 늦죠? 빨리할게요"

"아, 아니 내가 좀 도와줄까 해서"

"네엣? 아.. 아니 저.. 괜찮은데.."

"왜 그래? 도와줄게"


시게오는 문을 잠그는 정도의 치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문은 당연히 열려 있었다. 손잡이를 비틀어 열고서 들어가자 하얀 욕조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겐은 웃으면서 왜 그래? 내가 씻겨줄게, 하고 능글맞게 말하면서 다가갔다. 뜨거운 물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모르나 홍조 띤 얼굴에 다시 한번 아랫배에 뭉친 욕정이 확 끓어오른다. 하지만 시게오는 죽어도 싫다면서 웅크린 몸을 절대로 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달래도 싫다면서 도리질을 쳤다. 이 상태라면 오늘 밤은 무리인가..? 하는 불안감도 잠시 들었다가, 그래 그렇게 부끄러우면 혼자 씻고 나와, 하고는 침대에서 앉아서 여유 있게 기다리기로 했다.


시게오는 옷까지 다 입고서 욕실에서 나왔다. 역시 어린아이는 아이라고나 해야할까? 레이겐 역시 샤워를 마친 후에 나가자 시게오는 불을 끄고서 너무 어둡다고 생각했는지 티브이를 틀어놓은 채로 침구를 꺼내어 다 펼쳐 놓고는 얌전히 누워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난 것이다. 샤워 가운을 걸친 채로 옆에 털썩 누웠다. 시게오는 웃으면서 스승님, 춥지 않아요? 하고 물으며 먼저 가슴팍에 안겨왔다. 이렇게 먼저 안겨왔다면 다음은 쉬웠다. 천천히 입을 맞추어 나가고, 목덜미를 핥으면서 깨물고, 분위기에 맞추어서 가슴의 돌기를 살살 문질러 주면서 티셔츠를 벗겨나가는 것이다. 레이겐의 행동은 이미 성나 있는 아랫도리만큼이나 성급했고, 시게오는 갑작스러운 스승의 행동에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처음 느끼는 이상한 쾌락에 저.. 스... 스승님 저.. 자.. 잠시만요 하고 작은 손을 뻗었다. 왜? 싫어? 나는 모브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온몸에 키스해주고 싶어. 아뇨, 저 시... 싫은 건 아닌데.... 저 좀.. 이.. 이상해서.. 스승님과 함께잖아? 무서워? 아.. 조.. 조금.. 괜찮아. 천천히 할게 응? 조금은 무서운지 품에서 미세하게 떠는 시게오를 보며 레이겐은 안심시켜 주듯이 이마에 키스를 했다. 


그다음의 기억을 레이겐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음날 생각 나는 것은 시게오가 아아.. 스.. 스승님, 아.. 아파요.. 하고 덜 자란 아이의 목소리로 신음을 내뱉는 것이 흥분되어서 그도 모르게 입을 막는 시게오에게 더 해줘, 소리 듣고 싶어. 하고 귀에 속삭였던 것, 그리고 좁은 시게오의 안에 저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난폭하게 휘저어버린 것, 그만해달라는 그의 말이 또렷이 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어서 조금만, 조금만 참자, 응? 조금만... 하고 설득했던 것이 생각났다. 마지막에 그의 뽀얀 배에 하얀 액을 잔뜩 토정해 버린 것 또한. 끝에 닿는 시게오의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끝나고서 시게오는 레이겐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스승님, 사랑해요.. 하고 중얼거리면서. 


관계 후에는 모든 게 쉬웠다. 설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처럼의 두근거림보다는 안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 더 앞서서 시간이 될 때마다 영등등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지퍼를 열었다. 시게오는 그런 레이겐을 보고서 작게 웃어주며 저항하지 않았다. 레이겐은 문득, 혹시나 자신과의 관계를 다른 누구에게라도 말할까 봐 무서워 시게오에게 종종,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털어놓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시게오는 항상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둘의 관계는 사랑에 두근거리는 관계보다는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범죄를 들킬까 봐 무서워 조마조마하기만 한 관계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레이겐은 잠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게오와 자신이 서로 사랑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시게오가 어린 것이 조금 문제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무책임한 심정으로 그저 한순간의 불장난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게오를 건드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것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었다. 


레이겐은 다시금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보세요, 나는 결백하건데... 절대로 강제적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유혹도 제가 아닌 그 아이가 먼저였으며 관계 후에 사랑한다는 말까지 주고받았습니다. 저는... 강제성을 띠지 않았습니다. 저와 시게오는 분명히 사랑했습니다.











*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연락이 뜸해지면서 평소에 하지도 않던 문자로 아프니 당분간 사무실에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고서 2주 정도가 지났을 때에 레이겐은 잠결에 경찰에게 전화를 받았다. 주차 문제나 이런 자질구레한 문제 정도일 거라는 생각으로 적당히 네네 하고 전화를 끊은 후, 뒤통수를 긁다가 무심코 컴퓨터를 켰을 때 인터넷 메인에 뜬 자신으로 보이는 사진을 보고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아니겠지, 그저 비슷한 사람일 거야, 하고 애써 위로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스멀스멀 기어 오는 불길한 기운에 시게오에게 전화를 해봤지만 그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조사를 해야 하니 경찰서로 오라는 경찰의 말에 레이겐은 창밖을 한번 내다보았다. 여전히 기자들은 징그럽게 우글 우글대고 있었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레이겐은 한숨을 푹 쉬고서는 검은색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쓴 다음 경찰서에 가려 집을 나섰다. 나가자마자 잔뜩 몰리는 기자들과 마을 사람들의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레이겐씨!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정말로 13살이나 어린 중학생을 사랑하신 겁니까?"

"레이겐씨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기자들은 서로가 앞다투어 사진을 찍고 기사를 내려고 다들 바쁘다.


"... 미친 새끼"

"세상에 13살이나 어린 중학생이랑 도대체 뭘...."

"세상 흉흉해서 참.. 저딴 새끼는 볼 것도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죽여야 되는데"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마을 사람들의 욕설과, 끈질긴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경찰서에 겨우겨우 도착했다.


분주한 경찰서의 경찰들은 그가 도착하자 모두 경멸의 시선으로 잠시 침묵했다. 경찰은 레이겐을 앉혀 놓고선 피해자의 인터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 들어볼 것도 없어요. 저흰 명백하게...."

"... 이 사람이 진짜... 한번 들어보세요"


경찰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시게오 특유의 나른하고 앳된 목소리의 인터뷰 목소리가 나왔다.


-성폭행.. 을 당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니? 

-네..

-그 사람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거야?

-레이겐씨와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났어요... 저에게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관계를 계속.. 유지했었고요... 그런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얼마 안 됐어요. 

-지금 가해자는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니?

-사랑이요?... 아.. 아니에요.

-힘들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땠는지 조금만 말해줄 수 있을까?

-... 처음으로 당한 여관은요. s 여관이에요. 조금 허름한... 샤워를 한 후에 오.. 옷을 벗고.. 제 옷 속에 손을 넣어서... 아... 저... 저 자.. 자세한 건 말 못하겠어요... 하....... 저 너무.....

-그래. 그럼 그다음에도 쭉 성폭행을 당한 거니?

-... 흐윽... 네 이후에 장소는.. 주로.. 영등등사무소였고요.


여기까지가 피해자, 즉 시게오와의 인터뷰였다고 한다. 레이겐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경찰 내부에서도 수군대며 저 쓰레기 새끼, 나이 처먹었으면 그 나이 또래 여자들이나 만날 것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생을 꼬셔? 단단히 미쳤어, 하고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저기..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증거라면 또 있어요"


경찰은 핸드폰 문자 내용이라면서 종이에 출력을 해 주었다.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분명히. 시게오와 주고받은 문자였다.


-모브, 오늘 올 때 콘돔 좀 사가지고 올래? 너 콘돔 안 하고 하는 거 싫다며 내가 깜빡했어

-콘돔이요? 

-안에다 하면 배 아프다며? 옷에 묻는 것도 싫고.. 은근 까다롭다니까? 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뭐 할 말 있으신가요?"

"...."


완전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순수함이라는 덫에 걸려서 맑은 눈을 한 사냥꾼을 알아보지 못 했던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던 모브가 어째서 이렇게 돌변해서 행동을 한 것인지 레이겐은 몰랐다. 레이겐은 경찰에게 물었다. 저.. 혹시.. 만날 수 있나요? 누굴요? 그.. 피해..자..라는 이 인물 만날 수 있나요? 연락을 안 받아서....... 이쪽이 만나려고 하겠어요? 재판장에서라면 모를까. 경찰은 완전하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레이겐에게 말했다.











*

변호사는 레이겐에게 정말 사랑했다는 증거가 있냐고 물었지만 문자를 자주 하지도 않았던 둘 사이에서 그런 증거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전화가 아닌 문자로는 사랑한다, 같은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던 것도 레이겐이었기에.. 그의 말에 변호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볼펜을 탁 놓으면서, 그럼 콘돔을 사 오라는 말은 왜 문자로 남겼습니까? 하고 비꼬듯이 물었다. 그거야.. 점점 사이를 숨기는 것이 너무 느슨해지기도 했고.. 평소에 문자도 안하던 놈이 전화는 받을 상황이 아니어서 묻는구나 싶었습니다.. 하고 레이겐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를 보며 변호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잠시만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변호사는 핸드폰을 들고서는 밖으로 나갔다. 어째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변호사의 자리에 놓인 두꺼운 법전과 유사 사례 모음집 등등이 책상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것을 보고는 레이겐은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본인도 담배가 급 땡겨와선 담배를 들고 나섰다. 


밖에서 그 변호사는 줄 담배를 피우는지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하, 씨발 내가 이런 인간 같지도 않은 아동 성범죄자를 변호하려고 변호사가 됐냐고... 생긴 거? 생긴 건 멀쩡해. 이런 새끼들이 더한다니까? 내가 죄를 짓는 기분이야. 내가 왜 이런 놈들을 ... 아 모르겠다. 맘 같아선 그냥 최고 형량 받게 해버리고 싶어."


레이겐은 그대로 다시 사무실에 돌아와서 앉았다. 한참 후 돌아온 변호사는 레이겐에게, 설령 사랑이라고 주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이 완전하게 뒤집어지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하고 절망적인 척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그 피해자가 사랑이 아닌 강제성을 띤 성폭행이고, 강력한 처벌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는 데까지 해보겠지만 힘이 듭니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레이겐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형량을 받던 어쨌든 본인은 이제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동 성범죄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변호사 책상의 낡은 거울에 얼굴이 비치었다. 그 거울에는 28살의 레이겐 아라타카가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너 왜 그랬니. 왜 그랬어. 그 어린애 상대로 왜 그랬어 이 미친 새끼야.. 물론.. 당연히 들킬 줄 몰랐고 이런 식으로 신고할 줄은 몰랐지.. 


집으로 돌아오니 집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지 집 문에는 날계란과 쓰레기를 잔뜩 던져 놓아서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로 '사기꾼 새끼'. '미친 아동 성범죄자'라고 커다랗게 쓰여있었다. 한참 그 글귀를 멍하니 보다가 문을 열고 들어간다.


꺼둔 핸드폰을 켜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음성메세지를 남겼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떻게 된거니? 정말 네가 그런 거 맞니? 아니지? 하고 우는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레이겐. 그래도 극단적인 선택은 안된다. 나는 그래도 언제나 아들 편이야' 하고 다시 울음을 참으며 제발 연락 좀 달라며 울고 있었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 누나도 소식을 들었는지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미친 새끼. 영능력사무실인가 뭔가 하는 웬 이상한 사기꾼 같은 일을 하더니 이제는 아동 성폭행이니? 딱히 할 말이 없다. 그냥 너랑 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정말 끔찍해. 앞으로 내 얼굴 마주 볼 생각하지 마.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야.' 


그 와중에 사무실 건물의 건물주와 살고 있는 아파트 건물의 건물주에게도 연락이 왔다. 둘 다 동일한 내용이었다. 

[아동 성범죄자가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주민들의 공포가 극심하고, 집값 하락의 원인이 될 수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이사를 가주시길 바랍니다]





재판 당일. 법정에서 시게오를 만났다. 시게오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엇이 복잡한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옆에는 동생이 시게오를 토닥이고 있었고, 또 다른 옆에는 시게오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시게오의 작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레이겐은 멍하니 시게오를 불렀다.


"저... 모브.."

"... 저 새끼가 지금 무슨 낯짝으로 시게오를 불러? 이 미친 새끼가 감히!"


시게오의 어머니는 레이겐의 입에서 나오는 모브라는 단어에 참았던 이성을 잃고서 흥분해서는 달려들었다. 이 미친 새끼!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 새끼야? 이 개새끼! 그런 이상한 곳의 수상한 알바를 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 죽일 놈! 찢어질듯한 소리가 재판장을 가득 매웠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게 퉁퉁 부은 시게오 어머니의 눈물 범벅이 된 모습을 보니 레이겐은 갑자기 본인이 잘못했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옆의 사람들은 우선 진정하라면서 달려들어서 금방이라도 죽일 듯한 눈빛을 한 시게오의 어머니를 말렸다. 하지만 말리는 사람들조차도 레이겐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정했고 싸늘했다. 


재판의 결과는 떠들썩한 사회의 이슈가 된 것치고는 가벼웠다. 초범인데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것으로 형량 9년에 출소 후에도 평생을 넷상에 모든 신상을 공개하고 사는 것이었다. 레이겐의 변호사는 재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자리를 떴다. 저런 새끼는 평생 감옥에서 썩어도 모자란데... 우리 시게오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시게오의 어머니는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고 있었고 시게오는 동생인 리츠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얼굴 한 번을 들지 않고 가족과 함께 자리를 떴다. 레이겐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는 경찰들과 함께 이동을 했다.












 *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교도소의 삶도 조금은 익숙해져서 처음의 답답함을 느끼던 고통과, 사랑을 한 것도 죄가 되는 것인가 하는 허탈함과 원망은 무뎌졌다. 재판소에서 자신을 죽일 듯이 달라들려 하던 시게오의 어머니의 얼굴이 잠깐은 떠올랐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교도소가 과하게 억압적이지만 천성이 악하다거나 거칠지 않았던 레이겐은 다른 수감자에 비해서 고분고분하게 규칙을 잘 따랐기에 교도관들도 레이겐을 과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수려한 말빨로 교도관들과도 꽤나 친분을 쌓아서 이젠 서로 농담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야, 어때? 어린애랑 하면? 좋았냐?"

"... 아, 그런 농담 좀 그만하세요. 뭐.. 저 이제 거의 포기했지만 저 진짜 생각할수록 조금은 억울하다고요"

"뭐가 억울해? 이 새끼야, 여기 들어온 사람치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새끼 한 명도 없어!"

"아니.. 전 정말로... 아 아닙니다 다 됐어요 이제..."

"좋았냐고 물어보잖아~ 좋았어?"

"당연히 좋았죠~ 하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거부하는 건데. 하는 생각은 아직도 계속 드네요"

"거부는 무슨, 범죄자 새끼가. 성범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지금 네가 하는 말이야. 상대 쪽이 먼저 유혹했습니다! "


교도관은 피식 웃으면서 피던 담배를 깊숙이 빨고선 반절 정도 남은 담배를 끄지 않은 채로 내려놓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레이겐은 교도관이 내려놓은 그 담배를 허겁지겁 주워들어서는 깊숙이 빨아들였다.



레이겐의 어머니는 한때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한참을 나가지도 못하고, 방 구석에서 하염없이 울며 지내다가 요즘에는 조금 마음을 고쳤는지 성당에 다니시면서 항상 기도를 한다고 했다. 거기에 참회의 뜻으로 시게오의 부모님을 찾아가서 무릎까지 꿇으면서 아들의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시게오의 어머니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한 번만 더 찾아온다면 경찰에 신고하겠다면서 무릎까지 꿇은 어머니를 본 척도 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수차례를 찾아갔었는데 최근에는 이사를 가서 그 장소에 없었다고 했다. 레이겐에게 어머니는 항상 편지에 괜찮아, 벌 다 받고 나와서는 착실하게 다시 시작하자. 하고 긍정적인 말들을 위주로 써서 보내주었다. 면회도 가끔 와주었는데, 그때마다 레이겐의 얼굴만 보면 어찌나 눈물을 흘리는지, 그 모습이 너무 찡해서 레이겐은 앞으로는 이럴 거면 오지 말라는 말이 입안에서 돌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가 없이 어머니와 자신의 사이에 있는 유리에 가만히 손끝을 대고 죄송합니다..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98714, 면회다"


얼마 전에도 면회를 오셨던 어머니인데, 또 오신 것일까? 레이겐은 대충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고는 면회 장소로 향했다.


끼이익-하고 신음하는 철문이 열리고 유리 벽 사이에 작은 체구와 검은 머리카락이 언뜻 보였다. 어머니의 실루엣이 아님을 눈치챈 레이겐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금 면회 온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침착하게 다가갔다. 다소곳이 앉아 있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닌 시게오였다. 레이겐은 시게오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순간 잘못 본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하였다.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닌 시게오가 면회를 직접 와줄 거라고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천천히 투명한 유리 앞에 앉은 레이겐은 헛웃음 만을 허탈하게 내뱉고는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아.. 안녕? 잘 지냈니? 모ㅂ.. 아니, 시..시게오?"

"..네"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맴돌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주변도 조용했다.


"...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 잘 지냈니?"

"스승님은 잘 지내셨나요?"

"뭐.. 덕분에"


한참 눈앞의 이 어린아이를 바라보던 레이겐은 시게오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먼저 물을 용기가 없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니? 하고 마음속으로만 몇 번이나 질문을 했다. 그 마음속의 질문을 들었는지 시게오는 묵묵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돌이켜보니.. 그래도 스승님을 사랑했어요"

".. 그렇구나"

"...."

"...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니 지금 와서"

"... 스승님도 저를 사랑하셨나요?"

"... 하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지금 와서..."

"한동안 스승님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무서웠는데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떠올랐어요. 아, 그래도 역시 나는 스승님을 사랑했었구나. 하고요"


레이겐 앞의 모브는 그 말을 하면서 조금 알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한다거나, 혹은 슬프다거나, 그렇다고 속이 후련해하면서 기쁘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으로 보이지 않는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은 약간의 존경, 이상한 우러러봄이 느껴지기까지 하여 레이겐은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 나를 신고한 이유는 뭐였니?"


레이겐은 마음속에 수없는 질문 끝에 결국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냈다. 시게오는 레이겐의 말에 갑자기 이유 없이 눈을 빛내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스승님! 스승님이 그러셨잖아요. 힘들면 도망쳐도 된다고.. 어른에게 모두 맡기라고 하셨잖아요...!"











*

카게야마 리츠에게 형인 시게오는 항상 남들에게 이용당하면서도 그런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답답한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신이 형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영등등사무실의 레이겐은 처음 시게오가 알바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부터 항상 주시하고 있었고, 시게오에게 수차례 조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조언에 시게오의 대답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리츠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잘 알겠어. 항상 고마워! 하지만 스승님은 나에게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을 주고 계시는 좋은 분이야. 좋은 사람은 무슨, 형에게 나쁜 사람의 기준은 뭐야? 실제로 형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 있지! 티브이나 뉴스를 보면 자주 나오잖아 범죄자들이라던가.. 내 주위에 없을 뿐이야. 난 운이 정말 좋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리츠는 그런 시게오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순수함을 내보이면 그 순간부터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여린 마을을  어떻게 이용할지 눈알을 굴리며 다가오리라는 것을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어느 순간부터 시게오가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밤중에 불려나갈 때에도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시게오가 레이겐씨와 오늘 함께 자고 온다고 했어, 하고 아무런 의심 없이 웃으면서 말했다. 리츠는 그 말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무엇인지 몰랐다.


고민이 있다면 들어줄게. 하고 말을 건네어 봐도,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것도 아냐 리츠 하고 웃어 보이는 그 웃음에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 무력함이 조금은 지쳐갈 무렵, 핸드폰이 고장이 난 그는 시게오의 핸드폰을 빌렸다. 누군가에게 급한 연락이 오지 않는 한 별일이 없다고 생각한 시게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선뜻 핸드폰을 빌려주었다. 크게 누구에게 연락이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침 그때에 딱 맞추어 전화를 걸어온 것이 레이겐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가 왔고, 그가 말하는 이상한 단어. 콘돔?.. 콘돔 없이 하는 건 네가 싫어하잖아. 사가지고 와. 리츠는 몇 번이나 제 눈을 의심하면서 문자를 다시 읽었다. 한참을 그 자리에서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그날 저녁 밤새 레이겐이 부들부들 떠는 그의 형을 상대로 더러운 아랫도리를 꺼내어놓고는 사정을 하는 상상, 사람의 인적이 그리 많지 않은 영등등 사무실에서 형에게 옷을 벗게 한 후 자신의 몸을 핥으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혹시 협박하려고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었는지도 모른다, 등등 온갖 추잡한 그 모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끊이지 않는 불안함과 화가 치밀어 잠을 이루지 못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게오는 다음날 아침 웃으면서 리츠, 잘 잤어?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눈망울을 하고 물었다.



그는 그대로 포착한 증거를 가지고 경찰에 신고했다. 리츠는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한치의 망설임이나 혹시나 하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시게오에게 이 문자에 대해서 설명해보라고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시게오가 그런 짓을 당했다는 것은 정말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레이겐이 그런 짓을 행했다는 것은 의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츠에게 레이겐이라는 사람은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경찰에 증거와 함께 신고를 한 후에도 가시지 않는 분노 때문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더불어 지금까지 고작 300엔이라는 소정의 금액을 받으면서 제령을 하는 일과 더불어 레이겐이라는 사기꾼 새끼에게 몸까지 굴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후에 시게오를 데리고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게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리츠가 갈 곳이 있다는 말에 따라간 시게오는 경찰서에서 레이겐과의 관계를 묻는 경찰의 물음에 처음엔 단순한 스승님이라고 대답하다가, 리츠가 증거로 제출한 문자 내용을 보여주며 추궁해오자 그제야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을 더듬으면 답했다.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 눈치가 보였는지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경찰도 리츠도 시게오의 대답을 믿지 않았다. 리츠는 그 대답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사기꾼 새끼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을리가 있는가? 


형이.. 성격도 조금 서투르고.. 레이겐 이라는 사람이 형이 어릴 때부터 사기를 워낙 많이 쳐서 쉽사리 인정을 못하는 것 같아요.. 레이겐이라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기꾼이거든요.


경찰은 리츠의 말을 믿었다. 실제로 영등등사무소를 조사했을 때에 수상한 흔적도 많았고 무얼 하는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데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글도 꽤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시게오가 정신적으로 아직 다 털어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서, 천천히 조금씩 털어놓으라고 말했다.


리츠는 모브에게 말했다.

"형.. 나는 너무 슬퍼.. 형이 이런 일까지 당하고 있을 때 나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구나.. 내가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는데... 미안해... 힘들었지...? 이제 다 괜찮으니까..."


리츠는 시게오를 안고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모브는 리츠가 어째서 우는질 몰랐지만 본인이 무언갈 잘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챘다. 이후에 부모님이 아셨을 때도 엄마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는 한참 소리 내어 울고, 당장 그 레이겐이라는 사람을 만나야겠다는 걸 리츠와 아버지가 일단은 진정하라면서 겨우겨우 말리는 것을 보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레이겐과 저의 관계가 미치는 영향력이 주변 사람들을 이렇게나 슬프게 만들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래도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몇 번이나 슬퍼하는 리츠에게도 조사하는 경찰에게도 '사랑'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한참 시게오를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오늘도 컨디션이 안 좋은가 보네.. 그 사기꾼이 그저 사랑이라고 말하니까 그냥 그대로 믿어버리는가 보구나.. 불쌍하게도...




"리츠, 나는.. 정말로 스승님과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그런 게 아니었던 거야?"


"형.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그 사람은 그냥 그렇게 말하면 형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행위에 순순히 응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한 거야. 형을 속인 거라고"


"... 그런 건가.."


경찰도, 리츠도, 엄마도 레이겐이 시게오를 속였다고 말했다. 레이겐이라는 놈은 정말로 사기꾼이었던 거야! 시급 300엔도, 힘이 없으면서 힘이 있는 척했던 것도... 침착하게 생각해봐! 모두가 외쳤다. 그런 말들을 계속해서 듣다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시게오에게 있던 레이겐과의 하얗게 반짝이는 아름다운 추억들이 한순간에 거뭇하게 썩어들어가는 것이었다. 시게오는 이런 모두의 말들과 압박에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해도 기록을 하지 않는 경찰, 옆에서 더불어 정신을 차리라며 한없이 슬퍼하는 리츠.. 모두가 시게오를 향해서 레이겐 아라타카가 저를 강간했습니다! 라고 외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거짓을 말할 수는 없어, 아냐 하지만 리츠가 슬퍼하잖아,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지? 정말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시게오는 문득 레이겐의 말이 떠올랐다.


'힘이 들때는 어른에게 맡기고 도망가도 된다'




경찰이 드디어 시게오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는데 사실이니?

-.. 네...


도망치기로 마음먹은 시게오는 반복되는 모두의 말들에 완벽하게 세뇌되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는 정말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피해 증상마저 비슷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괜히 밤에 무섭다며 리츠에게 같이 잠을 자자면서 침대 옆에 기어들어와서는 꼬옥 붙어서 잠을 잤고, 레이겐에 대한 소문들이라던가, 이야기만 나와도 갑작스럽게 덜덜 떨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 리츠는 가슴이 아프면서도 뭔가 안심이 되는 듯한 안정감이 들기도 했다. 본인에게 생기는 이상한 안정감이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두려움에 벌벌 떠는 시게오를 보면서 본인이 지켜주겠다며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 시게오는 리츠.. 하고 조용히 중얼거리며 품에 파고드는 것이다. 시게오는 리츠의 체온에 비로소 안심하며 잠에 든다. 시게오의 밤은 리츠와 함께한 침대 안에서야 조용히 흘러간다.











*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도망이라니...."

".. 그렇지만, 힘이 들 때는 도망쳐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레이겐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기력도 없거니와 무언가 조금 이상한 낌새에 이런 것을 캐내더라도 자신의 처지가 쉽사리 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망이라는 단어에서 레이겐은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들킨 시게오가 쉽게 자신으로부터 도망쳤다는 것을. 


"그래... 무슨 말인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자. 근데... 왜 찾아왔니?"

"심리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스승님이 궁금해졌어요. 잘 지내고 계시려나.. 하는 막연한 호기심 있잖아요. 게다가 저, 스승님이 전에 내주셨던 숙제를 했어요. 그래서 찾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숙제?"

"네! 데이지가 어째서 개츠비를 배신하고 떠났을까.. 이후에도 계속 생각했거든요.."

"...."

"이제야 알았어요 스승님! 데이지가 개츠비를 배신한 이유요. 그건... 데이지도 어린이였기 때문이에요. 그런 엄청난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어린이요!"


칭찬을 바라는 듯이 눈을 빛내며 쳐다보는 유리창 너머의 옛 제자. 자신을 배신하고 벼랑으로 몰아넣은... 데이지와 다름없는 눈앞의 한 어린이를 보고 레이겐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정답일지도 모르겠구나"


시게오는 레이겐이 듣거나 말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시게오의 동네 사람들은 시게오가 그런 일을 당했다고 감히 상상하지 못하고, 어떤 여학생이 당했다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게오에게 그 여자애가 누구냐고 종종 물었다고 했다. '레이겐'이라는 이름에 덜덜 떠는 모브를 보고 모두 다 '믿었던 스승님이 그런 일을 행했다는 게 충격이었구나..' 하고 모두 동정했다고 했다. 피해자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도 지쳐서 결국은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갔다고 말했다. 스승님 제 동생 기억하시죠? 리츠는 여전히 똑똑하고 성실해요! 하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여전히 사이가 엄청 좋은지 잠도 같이 자고 밥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떠서 먹여주기도 한다며 꺄르르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제가 힘이 들 때 리츠가 절 많이 도와줬거든요.. 리츠는 제 부탁이면 무리한 부탁이라도 잘 들어주니까... 오늘도 제가 졸라서 같이 왔어요.. 지금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하고 갑작스레 불안한 듯 울적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레이겐을 향해 두려운 표정을 짓고는 이만 돌아가겠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잘 지내라는 이상한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이 돌아갔다. 



레이겐은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기 그저 돌아가는 시게오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기만 했다.





어린아이의 책임이란 그런 것이었다. 

본인이 그렇게 도망쳐도 된다면서 짐을 덜어주려 했던 말이 이렇게 제 발목을 옭아매올 줄은 잡아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시게오는 어린아이였고... 레이겐 본인이 말한 대로 책임을 져야 할 필요도 없으며, 나머지는 어른인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해버린 책임의 무게가 이렇게 크고 고통스러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면회 시간 끝났다.


교도관의 목소리가 텅 빈 면회장소에 울렸다. 레이겐은 그 말을 듣고서야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겐은 마지막에 자신을 쳐다보는 시게오의 두려운 표정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아마 그 위대한 개츠비도 마지막에 눈을 감으면서 데이지를 조금은 원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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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레이겐 좋아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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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텁석에쿠] 석양볕  (0) 2016.12.05



09











깔끔하진 않았다. 중간중간에 노트를 뜯어낸 흔적들이 많이 보이는, 조금은 거친 느낌을 주는 그런 일기장이었다. 조금은 그 동생 녀석 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앞뒤로 한번 훑어보다가 맨 앞장부터 천천히 봤다. 대충 훑어봤을 때의 글씨는 남자아이의 글씨 치고는 깔끔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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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 없는 노력만큼이나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언제나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생각은 딱히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조금씩 지쳐간다는 것은 요즘 조금 실감하고 있다.

기준점이란 각자 다를 수밖에 없기에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런 남들의 생각 따위 상관없이 내 기준점은 형이 가진 이상한 힘에 있다.

오늘도 내 손에 든 숟가락은 무슨 수를 써도 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몇 년 전부터 시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누구나 완전히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초능력..? 그런 거 영화에나 나오는 거잖아? 하고 말하겠지만 영화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이상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모두가 나를 이해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기에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것뿐.


트라우마로 인해서 놀이기구를 못 탄다거나, 무엇을 먹지 못한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의 상처이기 때문에 본인도 어째서 그런 것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 힘들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다른 사람들의 경우, 놀이기구를 무서워하면 놀이동산에 가지 않으면 되고, 무언가를 먹지 못하는 트라우마가 있다면 먹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 트라우마라는 덫에 걸려서 떨어질 수도 없는 상태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는, 항상 목 옆에 닿을 듯 말 듯하게 있는 시퍼런 칼날을 바라보면서 침착하게 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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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의 시선에서의 형은 엄청나게 온순하고 존재감이 없는 데다가 감정 표현도 서툴러서 모두가 무시하기 딱 좋은.. 그래서 괴롭힘도 당하지 않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존재다. 형은 항상 조용하고 운동도 못하는 데다가 체력도 없고, 성적도 항상 바닥을 쳐서 엄마가 기대도 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지만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자신도 모르게 힘이 방출되어버려서 내 손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구부러지지 않는 숟가락이 형 손에서는 완전히 녹아버린 찰흙 점토처럼 추욱 구부러지고 만다. 그 능력을 이상할 정도로 신경 쓰지 않는 엄마는 숟가락이 또 엉망이 되어버렸다며 형을 야단치고, 옆에서 얌전히 있는 나를 본받으라며 잔소리를 한다.
형은 곧바로 그러게, 리츠는 정말이지 대단하다니까.. 하고 말하며 나에게 리츠, 공부 좀 가르쳐줄래? 하고 말하는데, 그 목소리에 긍정적인 대답 밖엔 할 수 없는 나의 선택지는 항상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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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마음먹어서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것도 나의 커다란 장점인 것인데.. 얼마 전에 엄마와 아빠는 나와 형이 잔다고 생각했는지 식탁에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리츠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시게는 어째서 그 모양인지.. 하지만 요즘 느끼기에 공부를 잘하는 것도, 운동을 잘하는 것도 무조건적인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모양이야, 그렇게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라고 해야 하려나.. 어쨌든,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게도 그런 거겠지.. 시게는 다른 장점이 많으니까.. 뭐.... 시게도 동생인 리츠가 저렇게 뛰어나서 더 힘들어하고 있을 거야.. 하고 한탄 섞인 말투로 말했다.

노력만으로는 안되는 벽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공감하고 있다. 어릴 적, 형의 폭주로 인해서 다쳤던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노력을 해도 그 어떤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그 캄캄한 막막함을 인정하기 싫은 나의 억지스러운 고집이 나를 채찍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쳐갈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다가가지도 못할 힘을 어째서 내 옆에 두어서 탐나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나는 왜 엄마와 아빠처럼 형의 이상함에 대해서 덤덤할 수 없을까?

초능력이 있다고 해서 내 생활이 지금에 비해서 나아진다거나, 없다고 내가 열등감과 비슷한 이상한 감정에 시달릴 이유 같은 건 전혀 없지만.. 단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더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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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행동에는 원인도 없고 특별한 계기도 없다.



이 이다음에는 뭘 쓴지는 몰라도 일기장이 몇 장이 조심조심 뜯은 것도 아니고 심하게 잡아서 뜯은 듯이 거친 흔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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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보라는 초록색 영을 만났다. 형의 친구라고 해서 이야기를 조금 들어볼까 해서 대화를 했는데 역시나 생긴 것만큼이나 기분 나쁜 녀석이었다. 첫 만남부터 리츠, 하고 친한 척 부르는 것도 그렇고 이미 나를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해대서 날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당연히 시게오의 친구니까 잘 알고 있지! 이 몸은 시게오의 옆에서 딱 붙어 다니고 있는 친한 친구란 말씀이야! 관찰 결과 넌 정말 재수 없게 성실한 타입이더라고?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덧붙여서, 나를 볼 수 있는 건 초능력이 생긴 거야. 아직 서투르니까 나와 손을 잡는 건 어때? 시게오를 뛰어넘어보는 거야.

형에게 무서움을 느끼고 있었던 내가 에쿠보의 말에 솔깃했던 것은 사실이다. 쉽사리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이것저것 물어보니, 에쿠보는 나에게 지금의 생활에 거슬리는 나쁜 짓을 하는 것이 나의 초능력 각성에 도움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학교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짓을 벌이고, 썼던 일기장을 찢어서 버리기까지 하면서 잊으려고 노력하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정말 에쿠보의 말이 사실일까?

나는 형과의 나란한 평행선에 서고 싶다.



-
형은 내가 초능력자라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알았다면 형의 성격으로는 나에게 와서 리츠! 축하해! 하고 나에게 바로 말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쿠보의 말에 의하면 다른 초능력자는 보자마자 알았다고 하던데.. 에쿠보는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너무 약해서 그럴 거야. 나와 처음 만났을 때의 시게오도 내가 악령이고, 내가 초능력으로 조금의 환각을 심어놓은 것을 몰랐어. 나에게 너무 약해서 몰랐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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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가르쳐 주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우습게도 나는 형을 가르쳐주면서 나만의 장점을 형이 빼앗아갈까 봐 두려웠다. 형이 육체개조부에서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그렇고, 하지도 못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그렇고.. 형은 정말 굉장하다, 하고 웃으면서 말하면서 내심 속으로는 형이 초능력을 평소에도 사용하지 않는 점이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형이 초능력을 사용하며 모든 것을 이루고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더더욱 형을 우러러보면서 억누를 수 없는 열등감에 절대로 이렇게 웃고 있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멍청한 것은 참 다행이다.

나에게 초능력이 있다면 절대로 형처럼 이렇게 아깝게 사용하지 않을 텐데.

공부를 가르쳐줄 때의 형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기본적인 질문을 해올 때가 많다. 이런 것을 물어볼 때에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질문에 웃으면서 답해줄 때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 형을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그런 나에게 스스럼없이 순수한 형의 모습 때문에 갑작스러운 죄책감이 들었다.

형이 하나 가진 그 재능이 부러워 발버둥 치는 나와 다르게 형은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웃으면서 가르쳐달라고 할 수 있구나..

그렇게 나 자신이 욕심이 많은 것 같다고 생각해서 잠시 뉘우쳐봐도 마지막의 나에게는 허무한 마음과 비참함, 그리고 그 어떤 말로도 녹아내리지 않는 열등감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속으로 형을 그렇게 무시하고 짓밟고 경멸하다가, 잠시 조금의 미안함을 느낀다고 해도 내면의 나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형의 존재에 덜덜 떨고, 겉으로는 형에게 그 어떤 심한 말조차도 꺼낼 수 없는 이 굴욕감과 패배의식에 잔뜩 젖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서 나는 더더욱 형을 깎아내리고, 비난하고 난도질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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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보는 나에게 강도를 올리자고 했다. 더 이상 학교 안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됐어. 너도 딱히 이 정도로는 괴로움 같은 거 느끼지 않잖아? 하고 물었는데, 정말로 어느 순간 그렇게 괴로워했던 학교 안에서의 일들이 어느새 당연해지고, 딱히 죄의식 같은 것조차 느끼지 못하며 편안해지고 있었다.

에쿠보는 나에게, 여자를 한번 사귀어보는 게 어때? 그럼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아. 너 좋다는 여자도 많잖아? 전에 보니까 집 앞에도 찾아오고 그러던데?

에쿠보의 비아냥 대는 말투는 항상 나를 거슬리게 만든다. 어쨌든 나는 그 제안에는 거절했다. 에쿠보는 내 거절을 무시하고서, 그렇다면 시게오가 좋아하고 있는 츠보미를 공략해보지 않을래? 하고 물었다. 그 말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에쿠보가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면서, 역시 시게오가 무섭구나? 하고 웃었다.
 

..이 새끼는 내가 힘을 다룰수 있게 되는 시점에 없애버려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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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보가 나에게 여자 이야기를 한 그 시점 전부터 나를 조금 이상하게 따라다니는 A라는 여자애가 있었다. 그 애는 실제로 인기도 많고 학교에서 유명한 여자애였는데 너무나 당당하게, 내가 감히 저를 거절할 거라고 생각을 못했는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직설적으로 나에게 고백을 했다. 잠시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거절을 했더니 구경하던 모두도, 그리고 A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알았는지 핸드폰으로 하루 종일 연락을 해대고, 교문 앞에서 기다린다거나 학생회 회의 앞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해댔다. 너무 이상하고 귀찮아서 넌 자존심도 없어? 하고 묻자 정말로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는 그날은 그대로 돌아갔다.

늦은 저녁 책을 읽고 있던 시점에 갑자기 형의 노크에 거실로 나가자 그 A가 버젓이 소파에 앉아서는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정말로 자존심이 없는 여자애였다. 형은 옆에서 첫눈에 반한 듯한 발그레한 표정으로 뭔가 잔뜩 설레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A는 벌떡 일어나서는 카게야마군.. 저... 아무리 연락을 해도 받질 않길래.. 하고는 평소의 당돌한 모습이 아닌 조금은 수줍어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색한 그 모습에 한숨을 크게 쉬고서 나가자고 팔을 잡아끌자, 형은 데이트하는 거냐면서 물었지만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는 끌고 나왔다.

나와서 A는 말했다. 형하고 너, 꽤나 다르네? 형은 너무 찌질해 의외다 하하
형 이야기 함부로 하지마 돌아가.
내가 집에 오는 게 싫다면 네가 연락을 잘 받아주면 되잖아?
하고 웃어 보였다.

늦었는데 나 저기까지는 데려다줄 거지? 하고 팔에 제 몸을 감아오는 그 감촉이 징그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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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에 가까운 수차례의 전화는 보지 않아도 A. 번호만 구역질이 난다. 문자로는 반협박과 취조에 가까운 듯한 질문 세례. 정말이지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는 엄청난 장점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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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과 함께 하교를 하던 길에 A를 만났다. 형은 부탁을 받은 것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또다시 얼간이처럼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를 본 A가 하는 말은,

착각하지 마, 내가 용건이 있는 건 네가 아니고 네 형이야.

모든 것이 다 상관없다지만 나를 앞에 두고 형을 찾는다는 점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유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더러운 그런... 열등감을 가진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형이 아닌 내 근처 다른 친구와 있을 때에 이렇게 말을 했어도 이 정도로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것 같다. 아니 그랬다면 피식 웃으면서 넘겼을 수도 있을 가벼운 농담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단순하게 A가, 아니 A가 아닌 누구였어도 형과 나를 두고 내가 아닌 형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내 열등감을 창으로 찌른 것 마냥 자극한 것이 되었다. 애써 알겠다, 고 대답하고 돌아가려는 나, 그와 동시에 나에게 제발 가지 말아달라는 형의 손과 내 눈치를 살피는 눈동자.. 그리고 형의 부탁에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형의 옆에 앉는 나.

 
나는 이렇게 열등감에 미칠 것 같은 상황에도 가지 말라는 형의 말에 화를 내지도 못하고 형의 앞에서 다시 또 터질듯한 열등감을 느끼며 웃음 짓는 것이다..

자기 전에 핸드폰을 보니 다행히 이 여자애에게 몇 통의 문자와 함께 이제 그만하겠다는 내용의 문자가 와 있었다. 이 문자들은 내가 보기도 전에 모두 읽음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형은 자꾸만 이상하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감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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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애는 나에게 문자로 웃기지도 않는 이상한 말을 문자로 보낸 이후에 옆 반의 어떤 남자애와 사귀고 있었다. 인기가 굉장히 좋은 애였으니 당연할 거라고도 생각하긴 했는데, 다른 남자애와 사귀고 있다고 하자 이상하게 조금은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나는 그 남자애도 이 여자애도 한창 좋아 보이는 그 무렵에 이 여자애에게 다시 접근해서 이 둘을 헤어지게 만들고 결국 나와 사귀자는 말까지도 당당하게 했지만 결국 그 후엔 또다시 흥미를 잃어버렸다. 잠시 생겼던 흥미도 결국엔 도둑질로 인한 만족과 비슷하게 누군가에게 있는 무언가를 빼앗는 것에 대한 도취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에쿠보는 이 여자애와 사귀는 나를 보고는 웃으면서, 잘했어. 이제 내 조언을 들을 마음이 들었구나?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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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실한 이미지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 씌운다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다거나 하는 짓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나는 초능력을 혼자서는 거의 다룰 수가 없었기에 남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부분은 에쿠보와 함께 행했다. 에쿠보는 이런 면모에선 은근히 쓸모가 있는 녀석이어서 나에게도 꽤나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에쿠보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의 하나는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일방적으로 들러붙는 이 여자애에 관한 일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말이어서 웃음까지 나올 정도였다.

키스는 해 봤으려나? 하고 웃으면서 묻더니, 대답 없이 쳐다보는 내 표정을 본 다음은 섹스가 뭔지 알기는 알아? 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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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빙의를 하는 것은 나의 허락과, 내 몸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었지만 에쿠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몸을 가지고 노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쯤이었던 것 같다.

에쿠보가 얼마 전에 말하길, 가장 최악이자 최고의 죄책감은 강간이라고 생각해. 하고 말하며 나에게 어때? 하고 물어본 것에 대해서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에쿠보는, 왜 무서워하는 거야? 이런 정도의 범죄면 확실해! 내가 보증하지! 하고 말했다. 아냐, 나는 그런 짓은 못하겠어. 하고 말하곤 그대로 뒤돌았다. 에쿠보는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을 반복한다. 에쿠보는 그런 나를 보고는 좀 있다가봐, 난 시게오에게 갔다가 올게! 하고는 사라졌다. 형은 저런 에쿠보와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 에쿠보는 형을 대할 때는 어떻게 행동할까?
 

후에 시작된 수업시간에 문득 바라본 밖의 하늘은 너무 파랗고 또 너무 깊어서 왜인지 모르게 그 순간 울컥 나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갑작스러운 허무함이 잔뜩 몰려왔다. 그만할까, 어차피 나는 그렇게 노력해도 형처럼은 될 수 없을 거야. 하고 멍하니 생각할 때에 내 생각을 깨우며 선생님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서 씨익 웃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릿쨩♡ 무슨 생각해? 조금 있다가 그 여자애를 만나러 갈 거지? 너무 걱정하지 마 이 몸이 함께 하잖아?

놀라서 홱 올려다 본 선생님은 조금은 비열한 듯한 눈빛을 하고선 나를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에쿠보는 이렇게 자주 내 주위 사람들에게로 갑자기 들어가서는 제 말을 소곤소곤 전하곤 했다. 나는 형도 무섭지만 에쿠보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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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는 나를 미친 듯이 쫓아온 이 여자애는 나를 붙잡고 화를 냈다. 나랑 뭐 하는 거야? 왜 피해? 하고 거의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 생각했어. 하고 말할 때에 이 여자애의 눈빛은 갑작스럽게 홱 돌변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릿쨩?레파토리가 아니잖아. 이 몸이 설계해준 것은..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우린 파트너잖아?

그리고는 이 여자애에게 빙의된 상태로 나에게 안기면서, 자, 나라고 생각해. 이 애는 지금 의식이 없잖아? 끝나고 나서 이대로 버리고 가면 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이런 짓은 안 해
왜? 어째서? 리츠, 나 사랑하지 않는 거야?

하고 이 여자애처럼 몸을 배배 꼬아대며 제 웃옷에 손을 대며 단추를 풀으려 했다.

그 몸에서 나와. 더하면 진심으로 없애버리겠어.
우와 설마 그거 협박이야? 전혀 무섭지 않은데. 시게오라면 모를까 네가 이 몸을 어떻게 없애겠다고?

손을 뿌리치고 돌아가는 뒤에서 웃어대는 그 웃음소리가 너무 소름끼쳐서 온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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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에게는 재능의 한계라는 것이 있다. 형이 죽도록 노력해도 내가 가진 재능의 벽에 결국은 부딪칠 수밖에 없듯이, 내가 죽도록 노력해도 형의 재능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아버렸다. 다 털어놓고 그저 이 정도의 열등감과, 이 정도의 감정으로 형을 부러워하고, 이 정도의 힘에만 만족할 거야.
이것만으로도 나는 형과 나란히 선 것이 아닐까?

 

 








 



08








여전히 모브는 나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이 지겨워서라도 전화를 받을 법도 한데 정말로 나의 연락에는 답하지 않기로 했나 보다. 동생에게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그 어떤 것도 털어놓지 않겠다고 말했다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것까지 편지에 써서 보내는 건 도대체.... 뭐,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게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중에 제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마땅히 없고, 습관적으로 내가 자신의 고민을 반드시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아직 믿고 있는 듯했다.

끊임없이 전화를 하다가 문자를 보냈다.

[모브. 왜 전화 안 받니? 편지는 보냈던데.. 우선 전화 좀 받아볼래? 그래야 나랑 무슨 이야기라도 하지 않겠니?]

[내가 편지에 그런 내용을 써서 보냈다고 화가 난 거잖아? 네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냐? 엉? 다 좋으니까 우선 나랑 이야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달래는 듯한 말투로 문자를 해도 모브는 답장이 없었다.
분명히 나는 틀린 말을 한 적이 없고, 내 표현이 격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모브에게 틀림없는 현재 사회의 시선과 도덕적 기준을 일러준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상으로 모브에게 연락을 한다거나 편지를 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옆에 있지 않은 대상에게 끈질기게 연락을 해대면서 조언을 할 정도로 나는 훌륭한 스승도 아니며, 해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동생 녀석이 내가 쓴 편지를 읽고서 그만하자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그래도 내 말을 알아듣는다는 거니까.. 괜찮겠지. 뭐 하면 옆에 에쿠보도 있는데 알아서 잘 해결해줄 거고... 뭐.. 그놈도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여자친구는 오늘도 A반의 어떤 학생이 고민이 있고, D반의 어떤 학생은 집안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 걱정이고, 봉사활동에서 만난 어떤 어린 애기는 곧 입양을 갈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 학생 이야기를 이어서 했다. 나도 그 말에 추임새적으로 그렇구나~ 잘 됐네~ 그래~ 이 정도의 기계적인 반응을 보였다. 듣기 싫은 것은 아니다. 분명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는 가지각색이고 재미있었다. 자주 이야기하는 학생은 이름도 에피소드도 많이 들어서 가끔은 나도 그 학생은 잘 있어? 하고 물어볼 때도 있을 정도였다. 오늘은 간만에 라멘을 먹고 싶다기에 근처의 작은 라멘집에 들어가서 주문을 한 후에 시답잖은 회사 이야기, 여자친구의 이어지는 학생 이야기를 나눌 때에 우리의 틈을 비집으며 핸드폰이 울렸다. 그 방해자는 모브였다. 울리는 핸드폰에 모브라고 뜬 이름을 보고 나는 액정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렇게 연락을 하자고 난리를 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화를 한 것이다.. 건방진 자식. 전화를 받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내가 지금 중학생 녀석과 무슨 기싸움이냐 싶어서 조금 뜸을 들인 후에 전화를 받았다.

어, 모브 웬일이냐
[스승님]

모브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목소리는 왜 그래?
[저.. 저 지금 너무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무슨 일이야?
[그.. 그러니까요... 그.. 그게.. 그니까요.. 그.... 그... 게]
진정해,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볼래?
....

바짝 얼었는지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모브! 혹시 끊은 건 아니지? 너 왜 그래?

모브에게 조금은 서운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심하게 불안정적인 녀석의 상태를 보자 왜인지 나에게도 불안함이 덮쳐와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모브에게 말했다.

모브, 우선 진정하고 머리를 좀 식혀.. 말을 못하겠니? 지금 어디야? 내가 한번 찾아갈까? 내가 사정상 당장은 안되고... 다음 주나.. 다다음주... 정도.... 아 아니 이번 달에는 조금 힘들지도..... 음 어쨌든 나 시간 될 때 한 번 갈까? 만날래?
[.... 아뇨, 오지 마세요]
이런 말엔 대답하는 걸 보니 조금은 진정했구나?
[....]
말로 하기 힘들면 편지로 하렴. 너무 급해서 나에게 전화한 거잖아? 그렇지? 에쿠보는 옆에 있니?

내가 말하자 한참 동안 모브는 말이 없다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신을 진정시켜줄 목소리를 찾아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원래 먼저 전화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거나 하는 깡은 없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나에게 화가 난 상태라고는 해도 변하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끊겨버린 전화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여자친구는 옆에서 나에게, 당신 그 제자 만나러 갈 생각 같은 거 없지? 하고 물었다. 아, 아냐! 있어! 요즘 내가 진짜 바쁘다니까?! 하고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조금 귀찮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굳이 내가 직접 나서서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고... 아니, 저렇게 상태가 불안정해 보이는데 에쿠보는 옆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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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얼마 전에 전화를 말도 없이 끊어버린 것은 죄송해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서 끊어버렸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저 조금 건방졌던 것 같네요. 죄송해요.

스승님 전 요즘에 그저 너무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아마 스승님이 옆에 계셨다면.. 조금은 제가 나아졌을까요..? 저 어떻게 하면 좋죠? 이번은 제 감이 정말로 좋지 않아요. 이번은 조금.. 다른 때와도 조금 다르구요.. 저는 리츠와 만나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날 이후로 리츠를 한 번도 볼 수가 없었어요. 정말이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바람처럼 제 앞에서 자취를 감춘 거예요. 엄마는 자꾸 오늘 아침에도 엄마는 만났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하는 무신경한 말만 반복하고요. 이상하지 않아요? 너무 이상하잖아요. 너무 이상해서 저는 학생회에 찾아가기로 했어요.

돌아오는 수요일 아침에 등교를 1시간 반이나 일찍 했어요. 수요일 아침은 분명히 학생회의 모임이 정기적으로 이뤄지는 날이기 때문에 학생회실에 가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그전에도 갔었지만 이미 모임이 끝난 후라서 번번이 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일부러 학생회실 앞에서 끝나길 기다리기까지 했어요. 한참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문을 열고 나온 도쿠가와 부회장에게 리츠를 만나러 왔어요! 하고 우물쭈물 거리다가 작게 말했어요. 제 말에 도쿠가와 부회장은 완전하게 어이없는 표정으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전학 갔잖아? 장난하는 거야? 하고 말했어요. 전학이라니. 저는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소식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처음엔 부회장이 장난을 치는 건가 했는데, 저와 도쿠가와 부회장의 대화를 듣고 다른 학생회들도 리츠? 아 그러고 보니 리츠는 잘 지내나? 하고는 웃으면서 저에게 안부를 묻는 거예요. 아니,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제가 지금 알았다는 게 정말 우습지 않아요?


저는 그날 하루 종일 학교에서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멍하니 있었어요. 체육시간에는 아프다고 말하고는 양호실에 계속 누워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괜찮냐고 물으셨지만 저는 괜찮지 않다고 했어요. 실제로 저는 갑자기 온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리츠와 이곳에 왔을 때의 학교는 참 조용했는데.. 오늘은 무척이나 시끄러워요. 제가 전에 항상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요. 리츠와 함께 있었던 그 침대에 다시 몸을 눕히자 그 온기가 다시금 저를 감싸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어요. 그저 오늘 아침에 들은 이 황당한 말들이 모두의 거짓말이기를 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구요. 하지만 그렇게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이라는 거잖아요. 슬프게도 말이에요.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에게 물어봤어요. 엄마는 저의 말에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아.. 리츠가 말 안 했니? 자신이 말하겠다고 나에게도 시게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했는데.. 하고는 의아해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어서 말했어요.

리츠가 더 좋은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해서.. 확실히 지금 다니는 중학교는 물론 좋은 학교지만 리츠의 수준에는 조금 맞질 않나 봐.
...네?
시게, 미리 말하지 못 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도 리츠도 시게가 알면 조금 상처받지 않을까 해서 말 못했어. 리츠도 그래서 본인이 너에게 좋게 잘 말해주겠다고 했는데.. 적응하느라 바쁜 걸까? 음.. 그니까 그 학교는 ...

하고 말 끝을 얼버무리기에 조용히 방으로 돌아왔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았어요. 분명 그 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이 갈 수 있어서 저는 갈 수가 없는 학교였겠죠.

그날 저녁, 저 빼고 모두가 잠들어서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3시 23분. 저는 리츠의 방으로 조용히 들어가 봤어요. 아직도 그 안에는 제가 좋아하는 리츠의 냄새가 잔뜩 있어요. 저는 리츠의 침대의 시트를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참을 수 없는 그리움에 그대로 쓰러져서 울었어요. 계속, 계속 울었어요. 저는 모르겠어요. 리츠가 저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누구 한 명이 우리의 관계를 명확하게 단정 지은 적은 없지만, 저희 둘의 마음을 서로가 어렴풋하게 깨달은 그 시점부터 저희는 이미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자 연인이 된 거 아닌가요? 스승님이 보낸 그 편지의 내용이 옳은 말이었다고 하더라도, 설령 정말로 우리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그렇게 가차 없이 저와의 관계를 끊어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리츠에게 우리의 관계는 가벼웠던 것일까요? 아니겠죠.. 분명 다른 말 못할 고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뺨에 뜨거운 눈물을 잔뜩 쏟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리츠의 방의 물건들이 전부다 쏟아져서 엉망이 되어 있었어요. 활짝 열려버린 창문, 나부끼는 커튼, 바닥을 뒹구는 연필, 볼펜, 왜 있는지 모르는 여러 개의 숟가락들, 쓰러져 버린 의자, 엄마가 어릴 때 사줬던 봉재 인형, 때가 지나서 걸어두었던 옷, 항상 같이 가지고 놀던 게임기, 활짝 펼쳐져 나뒹구는 책들, 넓게 펼쳐져 바닥에 널브러진 이불, 베게.....

조금 소리가 컸는지 엄마가 자다가 깨버렸나 봐요. 닫고 있는 리츠의 방문 앞에서 시게니? 리츠의 방에서 뭐 하는 거야? 안 자는 거니? 하고 졸음이 묻은 목소리로 물었어요. 저는 조그맣게 찾는 물건이 좀 있어서요 곧잘게요. 하고 대답했어요. 평소라면 더 잔소리를 했을 법도 한데 엄마는 피곤했는지, 아니면 낮의 리츠의 소식을 듣고 충격받았을 저를 조금은 배려해주는 것인지 별말 없이 어서 자라는 말만 하고 들어가셨어요.

엉망이 된 그곳은 마치 쓰레기장 같았어요. 항상 깔끔한 리츠의 공간이었는데 말이에요.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제 머리카락을 살짝 흔들어요. 그리고 저는 엉망이 된 이곳을 청소하려고 하나씩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들었어요. 그리고 펼쳐진 책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리츠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음...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저는요... 음..





저는 엄마에게 물어서 리츠가 전학을 갔다는 학교를 물어봤어요. 그 학교는 저희 집과는 거리가 꽤나 있는 곳으로 학교가 기숙사로 운영되고 있는 학교였어요. 육체개조부와 뇌감전파부에 물어보니까 다들 그 학교에 대해서 엄청난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감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갈 생각도 못하는 곳이지 뭐.. 하고 이야기하면서 동생이 전학 갔다던데 그쪽으로 간 거야? 하고 물어봤어요. 그러면서 역시 급이 다르네~ 하고는 웃더라고요. 자랑스러운 동생이야 카게야마! 하고 제 어깨를 두드려줬어요. 물론! 대단하고 자랑스럽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죠. 내 동생.. 리츠.

리츠와 통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리츠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 직접 전화를 해봤어요. 이상하게 전화를 여러 번 해도 거의 통화 중이고, 연결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서 정말 힘들었어요. 이런 학교는 연락조차도 힘든가 봐요. 결국 전화를 받아든 어떤 여자는 굉장히 까칠한 말투로 네 전화받았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카게야마 시..시게오 라고 합니다. 저...
학생? 무슨 일이지? 우리 학교 학생이니?
아.. 아뇨.. 저.. 동생을... 동생을 찾고 있는데요..
동생?
네, 카게야마 리츠라고 얼마 전에 그 학교에 전학을 갔는데요...
...이상하네? 무슨 일이니? 찾는다니?
저.. 통 연락이 되질 않아서 그러는데... 혹시 연락을 할 수 있을까... 해서요.
직접적인 연결은 금지되어 있어. 카게야마 리츠의 형이라고 했지? 연락 왔다고 전해줄게. 됐니?
음... 아... 네.. 꼬... 꼭 좀 연락 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래, 그렇게 할게
저.. 시오중의 카게야마 시게오.. 그러니까 형이라고 전해주세요
그래 알았어.
저기! 저, 제..제가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세요.
알았으니까...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으니 제발 연락 좀.. 연락 좀 달라고 꼭... 꼭 좀 전해주세요!
그.. 그래.. 알았으니..
스.. 스즈키라는 친구도 만났다고도 전해주세요!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꼬... 꼭 연락 달라고 전해주세요!

그 여자는 갑자기 어이없다는 듯이 헛 웃음을 짓더니 작게 옆의 동료에게 '뭐야, 이상한 사람이 전화를 했어' 하고 말하고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어요. 물론 리츠는 지금까지 연락이 없어요. 아마 전화를 받은 이 까칠한 여자분께서 제 말을 전해주지 않았나 봐요. 어째서 제가 그렇게 간절히 부탁을 했는데도 한마디도 전해주지 않았을까요? 리츠에게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조금이라도 말했다면 리츠는 연락을 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 했을 텐데 말이에요.










모브의 편지와 함께 이번에는 제 동생의 일기장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 앞에 작은 쪽지로 [스승님, 저 이거.. 한번 봐주시겠어요? 저.. 이거 조금... 어렵기도 하고...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한번 봐주세요. 대신 더럽혀서도 안되고, 구겨서도 안돼요 얌전히 보시고 저에게 깨끗한 상태로 다시 돌려주셔야 해요]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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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출장을 다녀왔다.

다녀온 사이에 책상에 놓여있는 몇 통의 모브의 편지를 보고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커다란 짐가방과 함께 돌아온 나를 보고는 수고했다는 짤막한 인사 다음으로 내 등짝을 후려치면서, 이놈 새끼야 너 저 제자라는 저 애기한테 사기라도 친 거야? 그게 아니면 무슨 편지가 저렇게 자주 와? 답장도 안 하는데? 하고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았다. 덧붙여서 편지를 뜯어볼까 고민까지도 했다고 하시면서 다시 한번 등짝을 연속으로 때리셨는데 부정할 틈도, 말릴 틈도 없이 정신없이 등짝을 맞았다. 그저 이럴 때에는 아아, 아니야 아니야, 하고 말하면서 몇 대 맞아주고서 어머니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엄마, 그런 거 아니고.. 그저 저 녀석이 이 스승님께 상담할게 있다며 잔뜩 보내는 거야. 나 그런 거 절대 아니야! 너 까짓 놈이 상담은 무슨. 어머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차시면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셨다.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내는 어머니에게 어째서 아들을 믿지 못하느냐며 한 소리를 하면서, 출장 다녀온 사람에게 하는 첫 마디가 고작 이거냐며 툴툴대자 그제야, 정말로 그런 거 아니지? 하고는 마지못해 의심의 눈빛을 조금은 거두는듯했다.

그래도 나의 격렬한 부정에 조금은 안심을 하셨는지 어머니는 저녁을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고서는 어서 먹으라며 자상하게 말했다. 아까는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우리 아들 수고 많았어. 많이 먹어. 하고 등을 다독거리면서 반찬을 손수 올려주신다. 어머니도 이제 확실히 나이가 드셨는지 조금은 감정적으로 변하신 듯하다.


저녁 식사 후에 과일을 먹으면서 출장 때 있었던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다가 늦게서야 침대에 누워서는 날짜를 확인해 가면서 모브의 편지를 하나하나 읽었다. 잠들기 전에 가볍게 읽을 마음으로 편지를 뜯은 것인데,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온 편지까지 다 읽고 나서 내 머리를 후려치듯이 떠오른 단어는 '근친'이라는 단어.

별다른 생각 없이 멍해졌다. 그리고서 머릿속에 한편의 영화처럼 영등등사무실을 운영할 때 알고 있는 모브와 모브의 동생 녀석의 이미지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에이.. 설마, 하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편지를 그대로 덮었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덥석 집어서는 반복해서 천천히 읽었다. 조금 애매하게 쓴 부분도 많았지만 이건 틀림없는...

 

모브는 동생의 말이라면 순진하게 그래, 그래, 하고 따라주는 녀석이었다. 동생이 모두가 말하는 악행, 예를 들자면 폭력이라던가 도둑질이라던가 하는 악행이 아닌 이상 그의 행동이 모두 옳다고 믿고 있을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입 버릇처럼 리츠는 정말 굉장해! 나는 리츠가 정말 부러워! 하고 말했고, 나에게 전에 보내왔었던 편지에도 그 동생의 이야기에 대해서라면 존경과 동경에 가까운.. 아니 조금 더 이상할 정도의 모호한 감정들이 많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동생이 눈에 보이는 나쁜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형,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믿어줘, 하고 말한다면 모브는 곧바로 그래! 리츠가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지! 하고 웃으면서 믿어버릴 정도로 동생에 대한 애정이 큰 녀석이었다.

모브는 그런 가족 간의 행위가 옳은지 어떤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똑똑한 그 동생이 그런 행위가 어떤지 모를 리가 없다. 모브는 지금 헷갈리고 있고, 그 동생이란 녀석의 호기심 섞인 장난에 반강제적으로 받아주다가 정말로 그 동생을 그런 감정으로 착각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다시 생각했다. 모브가 사실을 적어서 보냈을 리가 없다고 나는 믿기로 했다.






[모브 미안해. 긴 출장이 있어서 집에 이제야 왔다. 그래서 편지들도 이제야 봤어. 어머니가 네가 이렇게 편지를 자주 보내니까 수상하게 생각하시더라. 덕분에 또 엄청나게 잔소리 들었지 뭐냐. 하하..

근데 모브, 궁금한 게 있는데 이 편지 무슨 상황이니? 모브의 상상... 이니? 상상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상상은 조금 이상한데 말이야.. 게다가 너 츠보미를 좋아하고 있지 않았니?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 거지?

네가 동생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네 동생 역시 너를 잘 따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하지만 음... 뭐랄까... 뛰어난 네 동생이라도 전부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넌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다고 밖엔... 이 편지에 쓴 거, 사실이 아니지? 그렇지? 꿈이라도 꿨니?

모브. 너는 네 주관이 조금 더 필요해. 무조건 동생이 하는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고는 생각해선 안돼. 설마 혹시나, 아니겠지만 혹시나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라면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네가 있는 곳까지 가서 네 동생 녀석을 붙잡고 어떻게 된 거냐며 멱살이라도 잡고 물어봐야 될 것 같다.

너는 때로는 너무 물들기 쉬운 타입이라는 게 걱정되는 부분이야. 우선, 가족끼리는 그런... 짓은.. 상상으로도 하는 게 아니야. 만약 사실이라면.. 부모님이 알게 되신다면 아마 엄청난 충격을 받으실 거야... 남자끼리의 그런... 그래 그건 취향 문제라고 치고 넘어간다고 치더라도 가족끼리의 그런 행위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문제란다. 그런 건...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되는.... 더러운 거야. 사실이 아닐 거라고 믿기 때문에 더 강한 표현을 쓰는 것을 이해해줘. 하지만 그만큼 잘못된 행위라는 것을 인색해두길 바라는 마음이야.
오랜만에 답장하는 건데 좋지 않은 소리만 하게 되네. 미안해. 하지만 이런 내용이 편지로 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어..

뭐.. 이런 이야기는 이쯤하고.. 요즘 츠보미와는 어떻니? 츠보미는 잘 지내고 있니? 츠보미와의 일에 대해선 언급이 없네? 츠보미 일에 대해서 상담한다면 이 스승님이 더 자세히 상담해 줄 수도 있는 데 말야.]


내용이 내용인 만큼 모브의 반응이 불안해서 그랬는지 나 답지 않게 일부러 편지지도 여자친구에게 쓰려고 샀었던 상큼한 분홍색에다가 썼다.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서도 몇 번이나 모브의 편지를 다시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분명히 모브는 스승님! 무슨 소리예요! 하고 그런 게 아니라~ 하고 해명해 올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분명히 믿고 있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무어라고 이야기를 해올지, 괜한 걱정에 가득 찬 나의 오지랖이라는 것을 스스로 계속 되뇌이면서.
 



다음의 편지는 보자마자 답장을 써서 보냈는지 곧바로 답장이 왔다. 유난히 빨리 왔다는 것이 조금 수상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내용도 내용인 만큼 모브 본인도 분명 나에게 해명하는 것이 급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봉투를 뜯어서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편지를 떨어트렸다.

[당신, 리츠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렇게 잘난 척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

모브답지 않게 거칠고 커다란 글씨로 스여 있는 저 짧은 문장을 보고서 지나치게 놀랐던 것은 사실이다. 톱 스타들이 스토커에게 편지를 받으면 이런 심정인 것일까 하고 무심코 생각해버릴 정도로 놀랐다. 그리고 떨어트린 그 편지를 얼른 주워다가 접어서 방 한쪽 구석에다가 숨겼다. 왜 인지는 모른다. 그냥 뭔가 저주가 섞인 말 같기도 한 것이 이유를 모르게 섬뜩했다. 내일은 찢어서 불태워버려야지.


모브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날 하루 종일 초조하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한참 생각했다.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 날 전화를 걸어보았다. 일부러 수업시간을 피해서 전화를 걸어도 좀처럼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안 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어서 초조함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하지만 조금 웃긴점은 모브에게 여러번 전화를 걸면서도 나는 모브가 받지 않는 것에 대해서 조금은 안심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내가 고민이 있다는 것을 느낀 여자친구는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제자와의 작...지만 조금 심각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자 또다시 상담을 해준다며 털어놓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털어놓을 일이 따로 있지, 내 제자가 친동생과의 진지하고 심각한 사랑 때문에 고민이 많나봐 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저 작은 문제니 스스로 해결하겠다며 손을 저었다.

그렇게 1주하고도 몇일이 지났을 때에 전화도 받지 않던 이 이상한 녀석에게 또다시 편지가 왔다.

이제 나는 녀석의 편지가 무서웠다. 그래서 한참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는 생각하다가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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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어쩌죠? 스승님의 편지를 리츠가 봐버렸어요.. 스승님의 편지를 읽고 나서 제가 엄청나게 화가 났던 건 사실이에요. 지금도 화가 나있고요. 그래서 그 편지를 버리려고 잔뜩 구겨서 책상 위에 던져놓았는데.. 제가 부 활동이 끝나고 왔을 때에 리츠가 그 편지를 읽고 있었어요. 리츠는 제 책상 앞에 서서 들어온 저를 보고는 덤덤하게 구겨진 편지를 내려놓으면서, 레이겐씨에게 우리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던 거야? 하고 침착하게 물어봤어요. 저는 들고 있는 가방을 그대로 떨어트리고는 부들부들 떨었어요. 정말 너무 놀라서 현기증이 일 정도로 놀랐어요. 리츠는 덜덜 떨면서 대답을 못하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예쁜 편지지인데 이렇게 구겨져 있길래 형이 또 러브레터를 가장한 협박편지라도 받은 건가 해서 봤는데.. 레이겐씨의 편지였네? 생각도 못했어.

아.. 아니 그.. 그니까...

근데 이걸 보니까.... 형, 레이겐씨 말대로 우리 좀 이상해. 역시 그만하자.


리츠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저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저는 그런 리츠의 말과 생각보다 덤덤한 리츠의 말투와 행동에 제가 정말로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리츠의 차가움은 이런 면이었던 것 같아요.


어째서 그런 내용을 편지로 써서 보낸 거예요? 정말로 우리가 더러워요? 정말로? 제가 모든 이야기를 스승님께 털어놓았던 것은 스승님이라면 저를 모두 이해해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어요. 다른 모두가 손가락질을 해도 스승님이라면, 모브 요즘 고민이 많구나? 너무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고 말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에 저에게 좀 더 감정을 표현해도 좋다고 이야기해주셨던 적도 있었던 것 같아서.... 그래서 에쿠보에게조차 알리고 싶지 않았던 그런 이야기를 스승님께는 털어놓았던 거였구요.

전에 말했던 적도 있지만 저는 스승님의 이야기가 100퍼센트 모두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맞는 이야기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저에게 스승님의 말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는 관심 없어요. 리츠가 저에게 그만두자는 통보를 입 밖으로 내뱉은 이상, 리츠가 어떤 것을 느꼈기에 그런 결론에 도달했느냐에 대한 것이 저에게 가장 큰 고통이고, 풀어야 할 문제거든요.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리츠에게 들어야 하죠? 저희는 달콤한 이야기만 나누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째서 스승님의 그런 말 때문에 리츠에게 그런 통보를 들어야 하며, 이렇게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해야 하냔 말이에요.

저는 리츠에게 그런 건 말도 안 된다면서 싫다고 했어요. 제가 거의 처음으로 리츠에게 강하게 감정을 어필한 것 같아요. 스승님과는 더 이상 연락도 하지 않겠다고, 이 이상으로 더 이상 우리에 대해서 알리지 않겠다고, 내가 리츠와의 일을 스승님께 털어놓은 것은 정말로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쁜 의도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라면서 다가가서 설득했어요. 덧붙여서 스승님의 말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전에 심하게 다투었던 적도 있었고.. 내가 스승님의 이 편지에 답장으로는 우리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한마디를 적어서 보냈다고. 정말로 미안하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리츠는 딱히 다른 말은 없이 저를 한참 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리츠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이 있었어요. 그리고는 저녁 즈음에 약속이 있다면서 나갔어요. 그리고 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어요.
 

저는 계속 기다렸어요. 엄마와 아빠는 리츠는 알아서 들어올 거라고 기다리지 말라고 연락을 했다면서 저에게 이만 자라고 했지만.. 저에게 연락을 한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그것 자체가 저에게는 기다리라는 무언의 신호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속 기다렸어요. 하지만 작은 시곗바늘이 몇 번이나 다른 숫자로 옮겨가도 리츠는 오지 않았어요. 결국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어버렸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리츠의 방에 가보아도 리츠는 없었어요. 엄마의 말로는 일찍 학교에 갔데요. 조금 실망한 채로 식탁에 앉았어요. 왜 이렇게 불안한지는 몰라도 저는 지금 당장, 빨리 리츠를 다시 만나고 싶었거든요.

입맛이 없었던 저는 엄마가 차려준 아침을 깨작거리면서 뒤적였어요. 엄마는 또 시게! 맛있게 먹어야지 그게 뭐니? 오늘 리츠는 서둘러서 나가서 밥도 못 먹고 나갔는데 괜찮으려나.. 하고 중얼거렸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떠올랐는지 저에게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고 보니 리츠의 친구가 집에 온 것은 정말 처음이었어.
리츠의 친구요? 혹시 금발머리의 여자아이예요?
응? 아니, 남자애였어. 내가 얼마 전 집에 잠깐 들려서 뭐 가져갈게 있어서 들렸었는데 왔더구나. 리츠가 그런 친구와 어울릴 줄은 몰랐어. 조금은 의외였다고 해야 하나..

엄마가 이렇게 말했을 때까지만 해도 저는 그저 학교의 평범한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생각보다 껄렁껄렁해 보이는 친구던데? 하지만 인사하는 걸 보면 꽤나 싹싹한 구석도 있는 것 같고 말투에 자신감이 잔뜩 묻어있는 아이더라. 그래서 친구가 된 걸까?
저희 학교 학생인가요?
리츠에게 너희 학교는~ 하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 아닌 것 같았어. 게다가 사복 차림이었고.. 꽤 친해 보이던데? 시게는 들어본 적 없니?
.... 나에게는 그런 친구 이야기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하하, 안 할 수도 있지 뭐. 시게의 친구를 리츠가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잖아?

엄마의 말에 저는 입을 다물었어요. 그러고 보니 제 주위의 뇌감전파부나 스승님, 육체개조부, 에쿠보, 등등 모두 리츠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리츠의 주변인이라고는 저희 학교 학생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카무로 회장과 도쿠가와 부회장 외엔 아는 게 없어요.. 엄마에게 혹시나 그 친구의 이름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분명 들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제가 리츠를 드디어 마주치게 된 날은 리츠에게 우리의 사이를 계속 이어가자면서 설득을 한 날 이후 5일이 지나고 나서였어요. 5일 동안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상상이나 되세요? 같은 집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어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리츠를 만날 수 없었거든요. 어느 때는 늦게 와서 일찍 나갔다고 했고, 어느 때는 친구의 집에서 자고 온다고 했다며 엄마가 전해줬었거든요. 게다가 전화를 걸어도 리츠의 핸드폰은 항상 꺼져 있었어요.

리츠는 저를 보자마자 움찔하고 눈에 보이게 놀라 했어요. 왜 이렇게 놀라? 하고 제가 묻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고 했어요.

핸드폰은?
..고장 나버렸어.
요즘 바빠?
조금.. 하.. 학생회 일이...
그렇구나. 무슨 일이 얼마나 바쁜지는 모르겠지만 리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
저.. 리츠, 궁금한 게 있어.
응?
집에 데려왔다는 친구가 누구야? 우리 학교의 학생도 아니었다고 한거 같던데
...누구?
엄마가 이야기해줬어. 집에 네 친구가 온 적은 처음이라면서. 조금은 껄렁껄렁해 보이는..
모.. 모르겠는데? 기억이 안 나.
그래?
형. 나 지금 바빠서.. 가봐야겠어... 다음에 이야기하자.

리츠는 제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달려나갔어요. 정말로 바쁜가 봐요.

이상하게 저는 그 친구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기억을 할 정도의 친구를 리츠가 기억을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지금 리츠는 저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겠죠. 어째서 저에게 그 친구의 존재를 감추려 할까요? 이상해요.

하지만 어쨌든 리츠의 주변 인물이라면 저와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강한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하굣길의 교문 앞에서 하나자와군 정도? 아니, 그 이상의 강력한 초능력자를 마주쳤어요. 어두운 주황빛의 머리카락에 청록색 눈동자가 신비한 느낌을 주는 그런 아이였어요. 조금 까칠해 보이기도 하는 그런.. 그쪽도 저를 알아봤는지 저를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저에게 다가와서는 말을 걸었어요. 초능력자? 하고요. 저의 소심한 성격과는 완전하게 다른 외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를 조금 살펴보더니 다시 물었어요.

혹시, 카게야마 리츠를 알아? 이 녀석이 연락한다더니 연락이 없네.

그 말에 저는 곧바로 알았어요.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이 있는, 리츠가 숨기고자 하는 그 친구가 이 녀석이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저는 이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꽤나 강력한 초능력의 힘에서 왜인지 모를 패배감과 질투를 느꼈어요. 리츠가 초능력에 대해서 동경심을 품던 마음은 나에게만 국한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다른 초능력자에게도 동일하게 향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

리츠는 내 동생이야.

하고 제가 말하자 저를 다시 보더니,

정말? 리츠의 형이었구나. 잘 됐네. 리츠의 친구인 스즈키 쇼우야 잘 부탁해.

하고는 멋대로 제 손을 덥석 잡고는 악수를 했어요.

저.. 리츠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음.. 어쩌다가? 잘 기억이 안 나네. 리츠가 형 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었는데.. 카게야마.. 시게오? 맞지?
...아.. 응..
흠.. 뭐,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다. 혹시 리츠를 만난다면 나에게 연락 좀 달라고 전해줘.

그는 저에게 조금은 굳은 얼굴로 조금은 경계심을 보이며 말하고는 홱 뒤돌아서서 갔어요.

스즈키 쇼우, 저는 그 이름을 아주 선명하게 기억했습니다.


그날도 리츠는 엄마에게 친구의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했데요. 엄마는 그저 별 관심 없이, 친구와 요즘 친한가 봐 하고는 별 관심 없어했고요. 저는 엄마의 말을 들으면서 손톱을 물어뜯었어요. 지금 제 손끝에서는 맑은 핏물이 맺혀 있어요. 피비린내를 조금씩 맛보면서 저는 한참 리츠와의 입맞춤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리츠의 손가락 끝의 감촉을 생각했습니다. 다시 만나면 이렇게 핥아줘야겠다, 하고 생각했어요.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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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자와군을 만났어요. 하나자와군은 학교 앞까지 일부러 찾아와서는 상담할게 있다고 말했어요. 대충 들어보니 역시 초능력 사용에 대한 가벼운 문제에 대한 고민이었고, 사실 제가 대답해줄 수 없는 문제였어요. 하나자와군도 저에게 답을 듣기 위해서 왔다기보다는 그저 같이 초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동지로써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구요. 

저희 학교의 여자애들은 저를 찾아온 하나자와군을 보고는 누구냐며 수군 수군대고, 다들 곁눈질을 하면서 지나가거나 대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는 지켜보곤 했어요. 그런 시선들이 너무 당연해서 의식하지 않는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그런 여자들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저를 보면서 자상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저였다면 그런 시선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 했을 거예요. 스승님도 아시다시피 하나자와군은 굉장히 잘생겼잖아요? 전에 저희 엄마도 지나가다가 하나자와군과 있는 저를 보고는 그날 저녁에 다시 물어봤었어요. 아까 같이 있던 친구는 누구니? 굉장히 잘생겼던데. 너에게 그렇게 잘생긴 친구도 있었니? 하고요.


요즘 저는 하나자와군을 조금은 피하고 있었어요. 전에 제가 말했듯이 저는 하나자와군이 부러웠거든요. 인기도, 재능도, 심하게 대해버렸던 저에게 자상할 수 있는 인품까지. 제가 하나자와군의 옆에 있으면 그나마도 작은 제가 더욱 작은 인간이 되어버리는 끔찍한 기분이에요. 그래서 하나자와군의 눈도 쳐다보지 못한 채로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는 먼저 가보겠다고 했어요. 하나자와군은 그런 저를 보고는 카게야마군, 혹시.. 돈이 없는 거야?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하고 말하면서 저를 달래려고 했지만 그런 말조차 저는 기분이 나쁜 거예요! 물론.. 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요... 어쨌든, 하나자와군에게 저는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그런 게 아니고 정말로 바쁜 일이 있으니 다음에 보자고 말하면서 뒤돌아 왔어요.

에쿠보는 그런 저를 뒤따라오면서, 뭐야, 딱히 별일 없잖아? 하고 물었어요. 저는 에쿠보의 말에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어요. 하나자와군 하고 같이 있으면.. 뭐랄까.. 하나자와 군이 싫은 건 아니지만.... 뭐랄까... 음... 아니 오늘은... 하고 말을 망설이자 에쿠보는 저를 보곤 말했어요. 뭐야, 열등감이냐? 그런 걸로 치자면 리츠와도 비슷하잖아? 리츠에게도 느끼고 있는 거야? 열등감? 하고 웃겨 죽겠다는 얼굴을 했어요.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리츠는.. 리츠는 달라

뭐가 달라? 아, 하나자와에 비하면 빈약한 초능력?

그런 거 아니야! 그... 뭐랄까.. 아무튼... 리츠는... 달라

시게오 너 의외다. 은근히 초능력을 가진 그릇을 두고서 차별하는구나? 뭐 나쁘다고 하는 건 아냐, 차별이 가끔은 필요하기도 하지만...

에쿠보. 조용히 해줄래?


제가 말하자 에쿠보는 그 이후로는 별말없이 제 곁을 조용히 따라왔어요.


스승님! 리츠와 하나자와군은 다르다구요. 리츠는 항상 완벽한 것이 당연한 존재예요. 저는 언젠가 리츠가 초능력을 쓸 수 있을 거라고도 믿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리츠가 초능력이 생겼다는 말을 했을 때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었고요. 게다가 걱정했던 것을 비웃듯이 초능력이 생겼음에도 여전히 저에게 좋은 동생으로 남아있잖아요. 무엇에도 자만하지 않는 그 겸손함이 항상 저를 설레게 만들었거든요. 리츠에게 제가 열등감같이 더러운 감정을 느낀다니... 에쿠보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항상 이상한 소리만 한다구요...!


그래서 제가 가다가 에쿠보를 홱 돌아보면서 말했어요.


에쿠보, 앞으론 이렇게 착 달라붙어서 나를 따라다니지 마 








스승님, 저는 밤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밤이 되면 조용하고, 시원하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깊은 저녁이면 제 방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오는 저만의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의 결정체...! 

제가 그랬던 것처럼 몰래 다가와서는 자는 척하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그러다가 내가 했던 행동과 똑같이 제 입술을 한번 슬쩍 만져보기도 하고요. 아, 손끝마저 따스하구나. 하고 저는 다시 한번 느꼈어요. 가까이 다가오는 가벼운 숨결에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아요. 만약, 자객이었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자객인 거죠. 눈치가 없는 저라도 그 의도를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돼요. 왜냐하면 저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감은 눈을 슬그머니 떴어요. 제 시선을 보고 움찔 놀라 했고요. 침착한 쪽은 저였어요. 저, 역시 조금은 변했죠? 먼저 입술을 맞대었던 것은 저였거든요. 저는 짧게 대었다가 떼었지만 그다음에 제 뒷목을 잡아끌었던 것은 리츠였어요. 입안은 참 따뜻해요. 이상하게 미끌미끌 한 것이 내 기분마저 이상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어요. 리츠가 그만하고 떨어지려는 걸 제가 저지하고서는 계속 접촉해 있었었거든요. 느꼈을 거예요. 아, 형도 계속 나와 이렇게 나누고 싶은 거구나. 하고요. 그리고 안심했을 거예요. 저희 둘의 맞닿은 혀가 너무 달콤했어요. 제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하고 녹아내리는 것이 마치 물 표면에 떨어져 내리는 눈꽃송이처럼, 아니, 놀이공원에 파는 커다란 분홍색 솜사탕처럼 예쁘고 달콤하고 환상적이었어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후 하고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이 가볍고 부드럽게  폭신폭신하기도 한 그런...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벅찬 감정을 주는 것이었어요.


제 파자마를 말아올리고는 손을 집어넣는 바람에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계속 키득키득 웃어댔어요. 리츠는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자신의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고요. 그리곤 제 귀에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말하자면 우리 둘의 비밀이야.

신난다, 리츠와 둘만의 비밀이라니!

쉿 조용히 해. 엄마가 깨겠어,


하고 말한 뒤에 그 촉촉한 입술을 다시 제 입술에, 그리고 그 따뜻한 손을 다시 제 몸에..!


스승님 그거 아세요? 입을 맞추고 난 다음의 입술은 빛이 없는 밤이라도, 불이 꺼진 어두운 집안이라도 투명하게 촉촉한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요. 희미한 불빛에 빛나는 눈동자는 달빛의 조각을 하나 떼어둔 것 같이 아름답습니다.


다행히 에쿠보는 보이지 않았어요. 아마 다른 곳을 돌아다니고 있나 봐요.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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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감전파부에서 오늘은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어요. 상영 중인 영화를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은 아니었구요. 토메 선배가 자신의 집에 커다란 TV가 있다며 저희를 집으로 초대했어요. 모두들 음료며 과자를 사들고는 신나서 뛰어갔고요. 친구의 집이라니.. 저도 눈에 띄게 내색을 하지는 못했지만 처음이라서 너무 신나버렸어요.


토메선배는 외계인과의 교신이라던가, 텔레파시라던가 남들과는 다른 조금 이상한 면이 있는 선배지만, 선배의 집은 생각보다 평범했어요. 저희 집하고 비슷한 크기의 주택이지만 아들 둘이 있는 집과는 다르게 인테리어에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거든요.

토메 선배가 빌려온 영화 비디오는 제목이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는 영화였어요. 정말이지 부원들이 전부 남자인 뇌감전파부와 저를 모아놓고서 멜로 영화라니, 모두가 센스가 없다며 항의했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하자 모두 입을 다물고 영화에 집중했어요. 


물론 초반이 지루하다고 느낀 부원 2명은 앉아서 졸기 시작했구요, 토메 선배는 교회에라도 앉아있는 듯이 두 손을 모으고서, 꼭 보고 싶었지만 혼자 보긴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면서 감동에 벅차올라 있었어요. 저는 별생각 없이 보고 있었고요. 재미가 없는 것도,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닌 잔잔한 영화였어요. 영화의 중반에서 헤어졌던 남자와 여자가 드디어 만나게 되어 반가움에 벅차올라 긴 시간 동안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왔어요. 토메선배는 그 장면을 보자 제 팔을 잡으면서, 모브! 이 장면이야 이 장면! 완전 하이라이트라구! 너무 아름답고 로맨틱하지 않아? 하고 마치 본인이 영화에서 막 입맞춤을 끝낸 여자처럼 뺨을 양손으로 잡고 어쩔 줄 몰라 했어요. 저 역시 곧바로 리츠가 생각나서 얼굴을 뜨거워졌어요. 혀끝의 그 미끄러운 감촉이 곧바로 생각나버렸거든요. 

옆에서 이누카와가 영화가 끝난 후에 황홀해하는 토메선배에게 말했어요.


부장, 너무 그렇게 황홀해하지만은 마세요. 제 친구가 키스를 해봤다는데요 생각보다 그렇게 좋지만은 않데요. 게다가 막 입에서 이상한 냄새도 나고....

에엣?! 말도 안 돼! 종소리가 들린다고 했다고! 남자들은 로맨틱한 감정이 없어서 말이야. 뭘 하겠어 너희들?!


그 말을 듣다가 제가 웃다가 말했어요.


하하, 그렇지 않던데요? 전 기분 좋은 치약 냄새가 났었는데.. 종소리라는 것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히 좋은....

응? 모브 너도 그런 이야기하는 거 듣고 그러는구나? 좀 안 어울린다야. 역시 그 수상한 알바하는 곳의 레이겐씨가 이야기해주신 거야?

아.. 아뇨 스승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신 적은 없는데..

그럼?

아.. 그게...

그러고 보니 치약 냄새....는 


제가 대답을 못하자 갑자기 같이 있던 모두가 저를 홱 돌아보면서 정적이 흘렀어요. 뭐야? 설마 모브 너 키키...키..키스라도 해본 거야? 하고 다들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얼굴을 하고서 저를 바라봤어요. 하지만 이건 저와 리츠의 비밀이기 때문에 저는, 아니에요. 그냥 TV라던가...에서 본... 거예요. 하고 대답했어요. 제 대답에 다들 엄청나게 맥빠진 표정으로 뭐야, 깜짝 놀랐잖아! 하고 버럭 했어요.


하지만 토메 선배의 말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요. 종소리가 울린다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전혀 과장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누카와가 말한 그 친구는 종소리 같은 것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사람과 입맞춤을 하지 않은 거죠. 정말로 좋은 사람과 했다면 분명히 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절대로 과장된 것이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될 거예요.




얼마 전은 모의고사 날이었어요. 채점 결과는 당연히.. 높진 않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올랐어요. 이런 날은 기분이 별로예요. 모두 다 기운이 쭉 빠져있거든요. 활기차게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메자토도 그날은 조용할 정도라니까요? 그날은 제가 주번이라서 교실 뒷정리를 하고 가야 했어요. 같이 주번을 하는 친구는 몸이 아프다며 오늘만은 혼자 해주면 안 되겠냐며 죽는 소리를 하며 말했어요. 혼자 하면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지만 아프다는 애를 붙잡는 것은 안되잖아요? 어서 집에 가보라고 했어요. 내일은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고 말했구요.


집 가는 길에 학교 안에서 리츠를 만났어요. 리츠는 역시나 시험을 잘 봤겠죠? 리츠는 딱히 기운이 없지도 않았고 평소와 같았어요. 학생회 완장을 차고 있었구요. 아직 집에 돌아가는 게 아니었는지 가방을 들고 있지는 않았어요. 


리츠, 시험은 잘 봤어?

나야 뭐, 형은?

난....하하 조금 오른 정도...라고 해야 하나...

집에 가는 거야?

응! 리츠는 안가? 가방은?

나는 학생회에서 잠깐 학교 단속 문제로 둘러보라고 해서 보다 가려고

아 그럼 지금 못 가겠구나? 그럼 나도 도와줄게!

그래? 그럼 나야 고맙지


일찍 끝난 덕에 학교는 텅 비어 있었어요. 일찍 끝나는 날엔 불량학생들이 학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과학실에서 이상한 약물을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빈 교실에서 소지품을 훔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번갈아가면서 한 명씩 학교의 특정 장소를 한 번 둘러보고, 그다음 수위 아저씨가 한 번더 둘러본 이후에 문단속을 하게 되어 있데요.


모두 그런 소식을 알았나 봐요. 리츠와 걷는 학교의 복도에는 그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넓은 학교엔 타박타박 하는 저희 발걸음 소리만이 조금 작게 울리고 있었거든요. 


리츠, 학교엔 우리밖에 없나 봐

그러게. 아무도 없는 것 같네

그... 아무도 없으면....

응?

손.. 

손?

손잡으면...


제가 좀 우물쭈물하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뭐야, 하고 작게 웃으면서 제 손을 살짝 잡아줬어요. 그래서 제가 보다가 말했어요. 그 학생회 완장도 내가 차보고 싶어! 하고요. 사실 이 말을 할까 말까 계속 망설였거든요.. 뭔가 좀 너무 찌질해보이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히 리츠는 제가 말하자 바로 빼내서는 제 팔에 채워줬어요. 


나는 리츠가 이걸 찼을 때가 가장 멋있었어. 아 물론 평소에도 엄청 멋있지만..

뭐야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이거 잠깐이지만 내가 차고 있으니까 뭔가 내가 리츠가 된 거 같아. 시험 보면 당연하다는 듯이 맨날 1등에 인기도 많고, 나 같은 얼간이 짓도 하지 않는...

형이 얼간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텅 빈 학교의 고래 내장 속 같은 긴 복도를 지나다니다가 우리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양호실이었어요. 이곳에선 가출한 학생들이 숨어 있다가 자고 가기도 한데요. 꼼꼼히 살펴봤는데 역시 양호실도 텅 비어있었어요. 새하얀 커튼과 새하얀 침대가 얌전히 있었구요. 

저는 이 양호실과 친해요. 육체개조부의 활동 때문에 자주 누워있었거든요. 제가 침대에 걸터앉아서는 말했어요.


리츠, 여기 잠깐 앉아. 잠깐 쉬었다가 가자.

수위 아저씨가 기다리실걸? 어서 나가야 해

어? 지금 학생부의 말에 거역하는 거야?


제가 농담 식의 말투로 카무로 회장 흉내를 내면서 말했어요.


이 완장 보이지? 나 학생회야


리츠는 어이없다는 식으로 웃었어요


어때? 나 똑같지?

전혀. 회장이 그렇게 무른 말투로 말한단 말이야?

에이..


리츠는 제 옆에 앉았어요. 


리츠도 양호실 자주 왔었어?

뭐 전해주러 가끔

그렇구나 난 자주 왔는데

운동을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는 건 좋지 않아

응! 하지만 선생님도 친절하시고 여기 누워서 깰 때 운동장에서 와아아 하고 들리는 애들 소리도 좋아


제가 침대에 앉은 채로 뒤로 털썩 누워서는 말했어요.


리츠도 내 옆에 누워봐! 아.. 오늘은 모두 집에가서 조용하네


제 말에 리츠도 누워서는 그러게, 조용하네. 하고 작게 말했어요.

옆에 누워서 보는 리츠는 더 잘생겼어요. 천장을 보고 있는 리츠에게 저를 봐달라는 뜻으로 볼을 한번 콕 찔렀어요.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리츠의 손을 다시금 꼭 깍지 껴서 잡고는 말했어요.


뽀뽀. 하고 싶어


저와 리츠는 그대로 입술을 가만히 맞대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어요. 학교 안도, 학교 바깥도, 엄청나게 조용했거든요. 조용히 부는 바람조차 우리의 비밀스러운 행각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듯 멈춰버렸어요. 그리고 저는 리츠의 입안에서 녹는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립니다. 정말로 달콤하게 말이죠. 

양호실에 베여있는 소독약 냄새와 새하얗게 바스락대는 침대 시트가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리츠와 저는 학교의 모든 공간,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쫓겨와서는 이 자리에 와서야 비로소 완성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허겁지겁 서로를 핥고, 혹여나 놓칠까 무서워서는 깍지 낀 손을 더욱 꼬옥 움켜잡는 것이에요. 


침대에 파묻혀 벅차오르는 희열, 무서운 공포감, 두려움, 그리고 함께 있다는 안정적인 평화로움을 한 몸에 느끼면서 가만히 눈을 감아요. 


스승님,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나를 사랑스럽게 만져주고 있다는 것이 정말로 제가 대단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착각이 일어버린다니까요.. 사실은 별것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더욱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은 거예요.












05










여자친구는 정말 밝은 성격이었다. 감정 표현이 아주 확실해서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바로바로 말해주는 타입의 여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말빨로는 져본 적이 없는 내가 처음으로 기가 눌려서 말문이 막혀버릴 정도로 말도 잘하는 데다가, 가끔 욱하는 성질이 나오게 되면 무서워서 내가 눈치를 봐야 할 때도 많았다. 한마디로 나는 이 여자에게 완전히 잡혀버린 것이다. 뭐..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런 약한 여자 한 명을 이기려고 애쓰려는 것 자체도 웃길뿐더러, 여자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다는 어머니의 말처럼 여자친구는 항상 옳은 말을 나에게 해주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사랑에 빠졌던 것은 강한 이 여자의 뒷면에 상당히 크게 자리한 은근한 감성의 여린 마음을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그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나는 여리면서도 강한 그 모습을 사랑했다.


여자친구는 나와는 조금 달랐다. 가끔은 주말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돌봐주는 봉사활동을 나가기도 하고 미술 선생님이라는 직업 특성상 그림을 잘 그려서 재능 기부랍시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불우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나 혼자 살기만이 바쁜 (사실은 게으른) 나에게 이런 모습이 조금 신기해 보였고, 모브와 있을 때 300엔이라는 동전을 쥐여주면서 일을 시켰던 때가 생각나면서 조금은 과거의 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선생님이라서 그런지 여자친구는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모브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나에게, 그 애기가(여자친구는 모브가 편지를 쓰는 것 자체가 너무 귀엽다면서 애기라고 불렀다) 선생님도 아닌 스승이라고 부르고, 손편지까지 써주면서 지금까지 계속 찾아주는 것 자체를 고마워하라면서, 더 자상하게 해주라며 나를 가끔 꾸짖었다. 성장기의 아이에게 스승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데! 그 애기가 작은 손으로 스승님~ 하면서 편지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귀엽고 안쓰럽고 잘해주고 싶고 그렇지 않아? 아.. 무.. 물론 그... 그렇지.. 근데 이 정도면 엄청나게 잘해주는 거 아닌가?



얼마 전엔 모브에게 문자가 왔다. 스승님 저예요 시게오에요 하고. 반가운 마음에 문자로 어! 모브 잘 지내니? 보고 싶다! 하고 재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서 보냈다만 그 문자에 답장은 없었다. 아직 핸드폰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모브의 편지는 좋게 말하면 신기하고, 나쁘게 말하면 이상했다. 고민이 너무너무 많아서 나에게 고민 상담을 한다기보다는 며칠 동안 겪은 일을 즉석에서 조금씩 조금씩 쓰거나, 기억에 남는 사건을 나누었던 대화까지 세심하게 기록해서는 나에게 전해주는 식이었다. 그래서 보다 보면 오늘은요~ 오늘은요~ 하는 것이 몇 번이나 나오기도 했다.

이번에 받은 모브의 편지는 2주의 간격을 두고 왔다. 첫 번째 편지를 받고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에 한 통이 또 온 것이었다. 두 번째 편지에도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 해서 답장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포 이면지의 하얀 표면 위에, 어이 모브 잘 지내냐? 난 잘 지낸다, 하고 한 줄을 쓰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모브가 도대체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동생 녀석이 초능력이 생겼다는 두 번째 편지에 대해서, 이야 동생도 초능력이 생겼구나, 역시 모브의 동생이네! 굉장해! 괜한 걱정 마라. 너의 동생은 너에겐 친절하니까 분명 괜찮을 거다~ 하고 성의 없는 문장 한 글자를 찌끄려놓고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앞 전에 모브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여자친구가 다른 학생들을 상담해 주는 모습을 보고서 그 모습을 모방해서 편지를 썼었다. 여자친구는 자기가 대신 써줄 수도 있다며 편지를 보여달라고 한 적도 있었지만 이 편지에 잔뜩 쓰여 있는 초능력자와 초능력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모브나, 그걸 받아주고 있는 나나 정신병 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보여주진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미안하지만 이건 모브와 나의 강력한 유대라서 보여줄 수는 없어! 내 말에 여자친구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네네 레이겐 스승님 어련하시겠습니까~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웃었다. 다행히도 끈질기게 보여달라고 하진 않았다.

모브와 모브의 동생 이야기는 여자친구에게 한 번 꺼낸 적이 있었다. 엄청나게 우수한 동생과 엄청나게 별 볼일 없는 형. 평소의 나에게 하는 행실이 자상하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형에게는 자상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여자친구는 웃으면서, 그거 그냥 단순하게 레이겐씨를 싫어한 게 아닐까? 하고 웃었다.

맞아.. 그 동생 녀석 나 엄청 싫어했어.. 단순히 그런 거였구나.
왜인지 모르게 레이겐씨는 그런 우수한 아이들이 싫어할 거 같은 타입이야.
하아... 나는 어린 엘리트들에게도 경멸 받는 타입이구나...
하하 장난이야, 근데 그렇게 우수한데도 형에게 잘하는 거 보면 역시 가정교육이 잘 되어있는 거 아닐까? 부모님이 딱히 성적 만을 가지고 둘을 비교하지 않고 형을 더 치켜세워주면서 키운다거나...
흠.. 편지 보면 그렇지도 않던걸? 실제로 어머니는 둘을 자주 비교하는 것 같았고... 뭐, 형 쪽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지만 동생 쪽이 그런 것을 보고도 우월감을 가지지 않았다는 건 나도 좀 신기해.
대단하네, 그런 경우 거의 없는데 말야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와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음에 써줘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뒷부분은 이렇게 썼다.

[네 동생은 여러 가지 분야로 정말로 대단하지만 초능력의 사용법에서는 네가 더 위일 테니 네가 초능력에 대해서 잘 말해주렴! 내가 전에 가르쳐 줬던 대로 말이야. 아, 아직 모르는척하고 있다고 했지? 그래도 곧 알려주지 않겠니? 그럴 때에 네가 잘 알려줘라 넌 그 녀석의 형이잖아!
그리고 얼마 전에 문자 했었는데 너, 내 문자에 답장도 안 하더라? 뭐 이번 한 번은 내가 봐줄게. 나도 요즘 바빠서 이번엔 길게 편지를 쓸 여유가 별로 없어. 다음번에 길게 써줄게.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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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잘 지내시죠?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은 스승님의 문자를 다음날 봐버려서 그랬어요. 아직 핸드폰을 제 마음대로 다룰 수 없거든요. 하지만 이걸로 저희 둘은 비긴 거예요. 스승님도 답장을 엄청나게 오랫동안 보내지 않으셨잖아요.


스승님, 전에 이야기했던 리츠를 좋아했던 여자 말이에요. 정말 사귀고 있었던 게 맞았나 봐요. 리츠는 뚜렷하게 이렇다 저렇다 하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 둘이 집에 같이 가는 것을 몇 번 봤어요. 이상하게 저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보면 몸을 숨기곤 했지만요. 하지만 리츠가 정말 좋아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여자애는 리츠에게 잔뜩 엉겨 붙어서는 리츠군~ 나 오늘 말이야~ 이러면서 혀 짧은 소리로 이야기를 해대곤 하는데 리츠는 별 반응이 없었거든요. 그런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자니, 갑자기 리츠가 엄청나게 멀게 느껴졌어요.

그래도 요즘 조금 좋아진 점이라면 요즘엔 집에 일찍 일찍 와요. 그래도 저와 대화를 많이 하지는 않지만요..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렇겠죠?


오늘은 비가 많이 내려요. 리츠는 오늘 학생회 회의가 있어서 늦는 날이구요. 비가 오는 날은 운동장을 뛸 수 없기에 실내에서 근육 트레이닝을 마치고서 아침에 챙겨간 검은색 우산을 쓰고 집으로 왔어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산을 쓰고 있어도 옷이 잔뜩 젖을 정도에요. 바람도 엄청나게 세게 물었거든요.


리츠와 사귀는 그 여자애는 항상 리츠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던데 그날은 기다리지 않았나 봐요. 회의가 일찍 끝났는지 리츠가 평소보다 일찍 집에 왔거든요. 하지만 비를 잔뜩 맞은 채로 홀딱 젖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제가 기다렸다가 우산을 같이 쓰고 오는 건데... 리츠의 모습을 보고 놀란 제가 수건을 가지고 달려가서, 얼굴을 닦아주면서 미안해.. 내가 기다려줄걸.. 미안해... 미안해 리츠... 하고 말했어요. 그러자 리츠는 제가 들고 있던 수건을 잡고는 아냐, 형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하고 오랜만에 전처럼 자상하게 말하고는 조금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갔어요. 요즘 알 수 없이 서먹한 관계의 우리였지만 그렇게 자상하게 한마디 해주는 것을 듣자마자 마음이 따스했어요.

리츠는 다음날 아침 심한 감기에 걸려버렸어요. 엄마는 리츠가 아픈 것을 보고는 학교에 바로 전화를 해서 하루 쉬겠다고 전화를 걸고 아침 일찍 약을 사러 갔다 온다면서 나갔어요. 저는 학교에 갈 준비를 다 마치 고서, 침대에서 땀에 젖어서는 앓아누워 있는 리츠를 한참 쳐다보다가 학교에 나섰어요. 쉽사리 그칠 비가 아니었는지 비는 계속 오고 있었고요. 하늘도 바닥도, 빗물도 전부다 맑은 검정색으로 번져서 저까지 우울해지는 것이었어요. 축축한 공기가 잔뜩 뺨을 스치고 지나가서 기분이 별로인데다가 비의 마찰 소리를 극대화하는 자동차 경적소리, 물소리 등등이 저를 한층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고요. 빗방울이 거세서 소나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쏴아아 하고 내렸어요. 하지만 소나기는 아니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내렸거든요.

학교에서 저는 하루 종일 수업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요. 원래도 집중력이 좋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리츠 생각밖에 나지 않았어요. 집에 혼자 있으려나.. 약 먹고 잘 자고 있으려나.. 혹시 비가 와서 추우면 어쩌지.. 엄마도 아빠도 다 출근을 했을 텐데... 하고 한참 멍하니 검은 칠판을 쳐다보다가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갔어요. 선생님께는 몸이 좋지 않아서 조퇴를 해야겠다고 가서 말했어요. 평소 말도 없고 조용해서 땡땡이를 칠 깡도 없이 보였는지 다른 아이들이 조퇴 이야기를 했다면 절대 안 된다며 꼬치꼬치 캐묻었을 텐데 저에겐 별말은 없었어요. 그저 어디가 아프냐며 걱정하는 눈길로 저를 쳐다보면서, 어서 병원이라도 가보렴! 하고는 되려 저를 걱정해 주셨어요. 그렇게 순조롭게 학교에서 빠져나온 저는 곧바로 집으로 달려갔어요.

집 문을 벌컥 열자 리츠는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학교에 있어야 할 제가 숨이 턱까지 차서는 집으로 달려온 것에 대해서 의아한 얼굴로 보고 있었어요.

저... 리츠, 몸은 괜찮아?
.... 뭐 약을 먹으니까 좋아졌어. 형은 왜 온 거야? 왜 그렇게 뛰어왔어?
네가 걱정돼서
응?
네가 걱정돼서 왔어

전에 제가 이야기 한 적 있었나요? 어릴 적 제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 해서 리츠가 다쳤었던 이야기.. 저는 그래서인지 리츠가 다치는 것도 아픈 것도 무서워요. 아파서 누워 있는 모습만 보면 다 제 탓인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제가 너무 아파요. 게다가 요즘 조금 서먹했기 때문에 제가 더 조급하고 불안했었나 봐요.

내가 뭐 애기도 아니고. 단순한 감기야 감기. 형은 학교에서 조퇴까지 하고 온 거야?

하고 웃었어요.

아... 뭐..
기왕 조퇴까지 한 거 형도 푹 쉬어. 난 좀 더 자려고.

리츠는 그 말을 하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어요. 저는 한참 소파에 앉아 있다가 리츠의 방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어요. 리츠는 곤히 잠들어서 새액새액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고요.
리츠의 깔끔하게 정돈된 방엔 익숙한 리츠냄새가 있어요. 저는 그 향을 무척 좋아합니다. 침대 옆에 앉아서 리츠가 자는 모습을 보면 어릴 때 다쳤던 모습과 자꾸만 모습이 겹쳐져서 혹시나 나를 떠나버리지 않을까 무서워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는 리츠가 잠들어 있을 때 리츠의 체온이 느껴지는 목이나 뺨에 손을 살짝 얹어보기도 해요. 혹시나 차갑진 않을까 하고요.

그리고 리츠의 핸드폰이 울렸어요. 분명 친구들인가 봐요. 열어보니까 사귄다고 생각한 그 예쁜 여자애가 문자를 보냈더라구요. 하지만 사귀고 있지는 않았나 봐요. 리츠는 아직도 번호를 저장해두지 않았거든요.

[리츠, 아프다며? 많이 아파? 너무 걱정돼서... 게다가 어제 그만하자니 그건 무슨 소리야?]
[웃기지도 않아 정말]
[나와 사귀고 싶다고 한건 분명 너였다고?]
[오늘 집으로 찾아갈게. 만나자]

저는 그 문자를 보고 답장을 했어요.

[미안한데요 리츠는 자고 있어요.]
[어?! 리츠의 형이신가요?]
[네. 자고 있으니까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저 학교가 끝난 후에 집으로 찾아갈게요. 저 리츠가 너무 걱정돼서..]
[오지 말아주세요. 저 이번엔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답장이 없었어요. 스승님 저 못된 사람인가요? 저 역시 인기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네요...


저는 리츠의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어요. 뭐랄까 마음이 편했어요. 리츠의 숨소리를 듣는 것이 좋고요. 침대 시트로 은은하게 전해지는 체온도 좋았고요.. 리츠가 제 옆에 있다는 기척 자체가 좋았어요.
리츠는 잠에서 깨서 혹시나 환영인지 아닌지 확인하듯이, 침대에 기대 있는 제 어깨를 살며시 잡았어요. 제가 돌아보면서 리츠, 일어났구나! 하고 말했더니 살짝 웃었어요. 그리고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왜 여기에 있어?
네가 걱정돼서..

리츠는 그런 저를 보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말했어요.

형은 나를 지나치게 걱정한다니까...
그야 당연하지..! 리츠는 내 동생이고...
형, 나 할 말이 있어

그니까.. 나.. 초능력이 생겼어
그렇구나! 축하해
형은 알고 있었지?
에쿠보가.. 아, 아니 어쩌다 보니 짐작만.. 조금...
그래? 왜 아는 척하지 않았어?
네가 말해주길 기다렸어. 축하해. 리츠는 역시 뭐든지 해내는구나. 나는 그래서 리츠가 정말 부러워
나는 형이 부러운데

리츠는 말을 정말 예쁘게 한다니까요? 이런 제가 어떤 면이 부럽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리츠가 정말로 고맙게 느껴져요. 리츠가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저는 정말로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커다란 존재가 되어버린 듯한 착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정말로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렇게 완벽한 사람이 나를 부럽다고 해주다니.. 나는 얼마나 이 사람보다 완벽한 걸까...! 하는 그런 생각. 잠시나마 신이라도 된 기분... 아, 이런 거 에쿠보에게 말하면 엄청 좋아했겠네요. 에쿠보는 이런 기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저에게 신이 되어보자고 속삭이는 건가 봐요.


스승님 그거 아세요? 손으로 살아 있는 사람의 피부를 만지면 그 체온 때문에 따뜻하잖아요. 하지만 입술과 입술이 닿으면 따뜻함을 넘어서 뜨겁다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손으로 입술을 만졌을 때와는 조금 달라요. 물론 손으로 만졌을 때도 부드럽지만요...  혹시 살아 있는 꽃잎을 한 장 뜯어서 만져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 감촉과 굉장히 비슷해요. 촉촉한듯하면서도 부드럽잖아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아, 내 입술에 한 번 닿아보고 싶다 하고 새하얘진 머릿속에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가볍게 제 이마를 스치는 머리카락도 부드럽고요, 뜨거운 뺨의 맞닿는 솜털의 간지러움도 너무너무 기분 좋아요.

엄마가 돌아오기 전, 아픈 리츠가 약에 취해 잠든 9시 47분, 그 여자아이는 정말로 찾아왔어요. 저.. 리츠의 친구인데요.. 하는 작은 유령 같은 목소리로 어두운 하늘과 검은 빗방울과 두텁게 닫힌 문 앞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을 생각만 했어요. 대답도 하지 않고요. 저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안에 있는 거 다 알아요! 하는 가냘픈 목소리에도요. 달칵달칵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 초인종 버튼을 눌러대는 것 같았지만 미리 초인종은 꺼뒀었어요. 리츠가 깰까 봐서요. 거칠게 눌러대는 작은 소음과 함께 저는 이 밖의 예쁜 여자애가  더 이상 예쁜 여자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가끔 나타나서 심술을 부리는 악령과 다를 바 없다고 느꼈거든요. 이런 쓸데없는 고집까지 완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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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출장을 가셨어요. 그래서 집에 엄마와 저희밖엔 없어요. 하지만 엄마도 요즘 일이 바쁘셔서 많이 돌아다니고 계시구요. 그래서 엄마를 마주 볼 수 있는 날이 별로 없어요. 저녁밥도 아침에 엄마가 차려주고 간 것을 데워서 먹거나 외식을 하라며 두고 간 돈으로 저희 둘이 나가서 사 먹거나 하고 있어요. 오늘은 제가 스승님과 갔었던 라면집이 생각나서 거기에 다녀왔어요! 여전히 맛있어요. 스승님도 가끔 생각 나시죠?

에쿠보는 제 옆에서 떠다니다가, 그 라면집에 간 것을 보고는 여기, 레이겐이랑 왔었던 곳이지? 하고 물었어요. 에쿠보도 기억하고 있나 봐요.
리츠가 능력이 있어서 에쿠보를 볼 수 있다고는 해도 에쿠보와 리츠는 별로 말이 없었어요. 셋이 있을 때는 저만 에쿠보와 이런 식으로 잔잔한 대화를 했고, 리츠는 별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에쿠보를 직접 소개해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츠, 이거... 보이지? 에쿠보라고 해.
응 풍선 같다고 생각했어
악령이라서 위험하지만 내가 우리 집안 식구들이나, 친구들에게 허튼 짓은 하지 말라고 해뒀어. 그래도 나름 착한 애야. 에쿠보는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전부터 널 알고 있었어. 가끔은 도움도 주니까.. 리츠도 친하게 지내.
그렇구나. 그래 친하게 지낼게

조금 어색해 보이지만 문제는 없어 보여요. 에쿠보는 은근히 붙임성이 좋잖아요.

며칠이 지났지만 리츠와 에쿠보는 친하게 지내고 있진 않아요. 제 앞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을 보지 못했거든요. 뭐.. 딱히 상관은 없지만요. 근데요 스승님,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에쿠보를 약간 신경 쓰고 있어요. 이상하게 요즘, 에쿠보의 시선이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거든요. 아무 생각 없던 그 눈빛에 대해서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에쿠보는 날 따라다니면서 나의 사소한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구나. 하고 의식되어버린 거예요. 물론 에쿠보가 저를 항상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혹시 모르죠. 눈에 보이지 않게 모습을 감추고서 저를 지켜볼지도. 여튼, 이상하죠? 


어째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하고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드디어 생각해 냈어요. 저에게, 에쿠보에게조차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생겨버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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