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rts : 버츠

[쇼우리츠] 햄스터 03

2017. 5. 21.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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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굣길에 리츠는 이제 곧 시험기간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며 걱정을 했다. 너 같은 모범생도 시험기간에 걱정을 하는구나? 하고 묻자, 학생들이라면 모두가 걱정을 하지 않냐면서 새삼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성적이 어느 정도냐면서 초능력을 알려주는 보답으로 내가 공부라도 가르쳐줄까? 하고 웃으면서 묻는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니 나는 물론 좋다며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을 했다.


그럼 바로 갈까? 어디에서 하지? 하고 함께 잠시 고민을 하며 하굣길을 나설 때에 교문 앞에 서 있는 웬 거지 같은 여자를 발견했다. 전단지 따위를 나누어 주는 아줌마 인가보다 하고 지나치려 할 때에 그 여자는 갑자기 덥석 내 팔을 잡는 것이었다.


"쇼우...! 드디어 만났구나...! 잘 지냈니?"


누구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며 한참 쳐다보았고, 내 옆에 있는 리츠도 이상한 눈으로 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누구..."

"엄마란다...! 시간이 너무 흘렀니? 엄마가 많이 변했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주름살과 잡티 투성이의 늙은 피부와 더러운 거적 같은 옷 틈새로 엄마의 기운이 슬그머니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심정은 정말이지 더럽고 치욕스러운 것이었다. 


"어... 엄마?"


당황해서 입 틈새로 신음처럼 뱉은 소리에 리츠는 나와 눈앞의 허름한 꼴을 한 엄마를 번갈아 보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강 눈치를 챘는지 먼저 가볼게 내일 봐. 하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멀리 걸어가는 리츠를 보고서 엄마는 나에게 호소하듯이 너무 배가 고프다며 밥을 사달라고 했다. 알겠다는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나를 잡아끌고는 대충 눈에 보이는 어느 허름한 분식집으로 들어가서는 최대한 빨리 나오는 음식을 달라며 허겁지겁 주문을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엄마의 호들갑스러운 태도가 유난스러웠는지 정말로 앉자마자 바로 내어준 싸구려 분식들은 절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음식들을 보자마자 수저나 젓가락도 사용하지 않고서 양손으로 허겁지겁 집어서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걸신들린 듯이 먹는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에 쓰는 말이었다. 분식집의 주인들과 옆에 앉은 다른 손님들이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눈길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한참을 게걸스럽게 주워 먹던 엄마는 그 와중에 앞에 앉은 나는 조금 신경이 쓰였는지 멀뚱히 눈을 뜨고 쳐다보는 나를 보고서 내 앞에도 음식이 담긴 싸구려 플라스틱 접시를 조금 밀어 주었다.


"쇼우도 먹으렴.."

"됐어요."


이런 걸 먹는 순간 식중독으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실제 엄마가 입에 정신없이 쑤셔 넣는 그 음식들은 너무 마른 표면을 하고 있었고, 재료조차 신선해 보이지 않아서 집에서 세리자와가 가끔 해주는 계란 프라이가 훨씬 낫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내가 느끼는 그런 것들 따위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했는지 그 음식들을 정신없이 다 비운 엄마는 그제야 자신이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앞에 두고서 너무 급하고 추하게 음식을 먹었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뒤늦게 얼굴을 붉혔다.


"잘 지내셨어요?"


덤덤하게 묻는 내 첫마디에 엄마는 슬그머니 내 표정을 잠깐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뭐..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여전해요. 오초도 여전하고요.. 엄마가 키우던 고양이도 아직 집에서 돌아다니고 있어요"

"...쇼우.."

"네"

".....엄마가 원망스럽니?"

"......"


선뜻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 내가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싫어서 집을 나갈 거였으면 고양이와 함께 나도 데리고 갔어야 옳지 않나 하고 생각했었지만, 다음의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절대로 엄마를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

 

"... 저.. 혹시... 미안한데... 돈 좀 있니? 엄마 좀 줄 수 없어...?"


그 말에 나는 왜인지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내 주머니에 있는 용돈을 전부 꺼내서(그래봤자 오만 원 안팎 되는 돈이었지만) 테이블에 놓고는 엄마에게 말했다.


".. 아버지에게 돌아오세요"


내 말에 엄마는 생각하는 듯한 잠깐의 침묵도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가 테이블에 놓은 돈을 집어서 눈으로 대충 돈을 센 다음,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는 나에게 다시 물었다.


"저.. 혹시 더 없니?"

".... 학교에 많은 돈을 들고 다니진 않아서요"


헤어지면서 엄마는 수 차례 나에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찝찝하고 답답한 이 짜증 나는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애꿎은 길가의 돌멩이만 발로 툭툭 찼다. 분명히 아버지는 미친 듯이 일만 하는 데다가 초능력으로 세계정복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말만 지껄이는 씨발놈이지만 나와 고양이를 모두 버리고 간 엄마도 다르지 않다. 그 주제에 낯짝도 뻔뻔하게 그 몰골로 버린 아들까지 찾아와? 게다가 그 얼마 안 되는 돈을 받으려 요구까지 해? 차라리 엄마가 자상하고 돈 많은 다른 남자를 만나서 우리 모두를 잊고 평생 내 앞에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으며 살고 있었다면 차라리 내 맘이 편했을까?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초라한 몰골로 와서 우리 함께 살자, 같이 가자 하고 그 꼬질꼬질한 손을 내밀었다면 내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내 앞에서 울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했다면?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면? 차라리 나에게 아버지를 속 시원하게 욕하기라도 했다면? '내가 집을 나간 이유는'으로 시작하는 30분짜리 구차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았다면? 아... 아니다.. 다 아니다. 그 어떤 경우였어도 나는 내 눈앞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앞에 그런 추한 몰골로 나의 엄마라는 이름을 대며 초라하게 등장 한 것 자체만으로도 내 마음에 옮길 수 없는 돌이라도 들어앉은 듯이 답답해서... 집으로 급하게 달음박질쳤다.


벌컥 열리는 문소리를 듣고서 나를 바라보는 노란 눈을 가진 고양이. 어항에서 우글우글하게 모여있는 햄스터. 투명한 어항. 뚜껑을 열자 밥을 준거라고 생각했는지 위를 바라보는 13쌍의 검은 눈, 작은 손, 그리고 그들 중 누가 좋을까 잠시 고민하는 나.


그리고 이내 누구여도 상관없다는 듯이 어항에서 잡히는 대로 집어서는 고양이 앞에 세 마리를 툭 툭 던져놓았다. 떨어져서 작은 경련을 일으키는 햄스터들과 움직이는 작은 생명체에 호기심과 손톱을 세우며 다가가는 고양이를 관찰하다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침대에 풀썩 눕는다. 


엄마가 사랑하는 나와 고양이는 엄마와는 다르게 불행하지 않다. 

엄마는 나와 고양이를 두고 가면서 본인의 모든 운 마저 모두 내려놓고 갔기 때문이다.











-

리츠는 고맙게도 나에게 전에 만났던 엄마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궁금하겠지만 차마 물을 수 없어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옆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리츠를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기"

"응"

"궁금하지 않아?"

"뭐가?"

"전에 만났던.. 우리 엄마"

"글쎄"


리츠는 펜을 내려놓고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네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

"근데 지금 네가 짓는 표정을 보니까.. 너 나에게 털어놓고 싶구나?"

리츠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자 몰랐던 나의 답답함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런 내 상황을 누군가 들어주고 내 이런 상황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해주기를 어렴풋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은근히 겁이 많았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겁이 많아질 것이다.


"... 분명히 그렇지만 네가 나에게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솔직히 무서워"


학교에서의 내 이미지는 돈 많은 어느 집의 부잣집 아들이었고 리츠 역시 나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 확실 했기 때문에.


"내가 왜 너에게 실망을 해? 그럴 일 없어. 너도 나의 이상하고 바보 같은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준다며 나를 도와주고 있잖아"


그 말을 듣자 누구도 들어준 적 없는 내 고민을 조금은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환상이 들었다. 내가 리츠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없고, 리츠도 내 고민을 해결해 줄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우리의 관계이기에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엄마가 집을 나간 일도, 쭉 잊고 살았는데 갑자기 그런 몰골로 학교에 찾아온 것도,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달라고 이야기했다는 것도... 더불어 어릴 적 기억의 엄마는 은은한 기품이 있었기에 절대 어제 본 것 같은 추한 몰골의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돈을 달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하지도 않았다는 것까지. 


내 말을 듣고 리츠는 별로 동요하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고마웠다.


"아버지가 왜? 어머니는 왜 아버지와는 살 수 없다고 하신거야?"

"우리 아버지는 초능력자라고 했었지? 본인이 초능력자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어. 실제로 지금도 그런 쪽에서 일하면서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기도 하고. 더불어 타인의 초능력의 잠재력에 대해서도 연구도 많이 하고 있.."

"초능력의 잠재력?"


아..


"초능력 개발? 뭐야? 연구하고 계신 거야? 그래서 성과는 .. 있으신 거야?"

"아니.. 어.. 그니까.."

"왜 말 안 했어? 아버지가 그런 쪽으로 연구하고 있다는 말은 안 했잖아! 내가 간절한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말 안 했어?"


리츠는 거의 울듯한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말했다.


"아니.. 리츠, 들어봐. 그게 아니라"

"나도... 나도 데려가 주면 안 될까? 나도.. 초능력자가.. 되고 싶은데.."

"하.. 하지만 성과는... 아직.."

"그래도..! 혹시나 내가 처음으로 초능력에 각성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잖아! 너도 말했잖아! 우리 형이 초능력자인 만큼 나에게도 잠재력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아니.. 그니까.."

"쇼우 제발...  부탁할게.. 응?"


리츠는 내 가슴팍에 제 얼굴을 묻고 제발.. 제발 부탁이야 쇼우 제발.. 제발 부탁이야.. 하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 리츠는 아버지의 병동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집착 후에 병동을 찾아오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초능력이라는 미지의 힘에 대한 집착의 정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1%의 가능성에 다가간다는 그 두근거림이 그를 더욱 증폭시킨 것이다. 리츠를 만나게 되면 리츠의 첫 마디는 항상 아버지께 물어봤어?로 시작해서 계속해서 자신을 아버지에게 데려가 주기를 희망했다. 절대로 들어줘서는 안되는 그 부탁이 부담으로 다가왔던 나는 리츠를 만나고 싶은 만큼 리츠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만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리츠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도 커져가고 있었다.


"리츠, 들어봐. 내가 아버지께 물어보긴 했어. 하지만 아직 많이 불안정하다고 하셔. 그러니까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야"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리츠의 손을 잡고 말했다.


"불안정? 어떤 식으로? 시간? 얼마나? 난 초능력자인 가족이 있잖아. 그니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를 수도 있잖아? 너도 그랬잖아. 괜찮을 거라고 했잖아. 나에게 잠재되어 있을 거라고 했잖아"

"...리츠"

"응"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내 말에 리츠는 상처받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잠시의 침묵 후에 말했다.


"...고집?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이제야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누구나 이런 상황이 오면 그렇지 않겠어? 아, 알겠다. 그런 것도 너 같이 잘난 집안의 사람들은 모르는 이야기지?"

"그런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에 대한 상황을 알고 있는 네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해?"

"네 상황? 어떤 상황을 말하는거야? 학교의 선생님들도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잘난 너희 집안?"

"....리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마. 내 상황 잘 알잖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지 말라니. 너야말로 내가 얼마나 원하는지 알고 있잖아. 그걸 지금 고집이라고 말하는 거야?"

"리츠, 너 지금 상태 이상해. 다음에.. "

"... 뭐야,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너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근데 너는 아니잖아"

"리츠"

"응"

"...나에게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주면 안 될까?"

"무슨 사정? 말해봐"


이미 리츠는 나의 입장에 서서 이해할 눈빛이 아니었다. 물론 막무가내로 원하는 리츠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사정만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곳이 어떤 곳인 줄 알아? 내가 어릴 적에 본 그곳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좀비들이 서식하는 듯한 이상한 병동 같았단 말이야. 그런 곳에 가서 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데 그런 곳에 널 데려가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말문이 막혀 침묵을 지키자 리츠는 나에게 말했다.


"됐어. 돌아가. 오늘은 너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혼자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와서 문을 열자 세리자와가 쇼우군! 돌아왔구나! 하고 두 팔을 벌리며 격하게 환영을 했다. 평소에도 싫었지만 오늘따라 더욱 귀찮게 느껴져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없어"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학교의 일을 묻는 세리자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쭉 걸어들어간 거실에는 언제 왔는지 시마자키가 소파에 드러누워서는 특유의 빈정대는 말투로, 도련님 오셨네? 하고는 입꼬리를 실실 거리며 웃었다. 시마자키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좋지 않은 느낌에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시마자키는 소파에 눕혔던 몸을 일으키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도련님! 나 얼마 전에 지나가다가 사모님 만났는데"

".... 아 그러셔? 앞도 못 보는 새끼가 잘도 보네"

"안 보이니까 더 잘 아는 거지. 나 만나기 전에 사모님은 도련님 만나고 오는 길인 것 같던데"

"... "

"어쩐지, 사모님이 날 보자마자 너무나 화들짝 놀라시더라고. 사모님 많이 힘드신 것 같으시던데.. 도련님이 눈물의 위로라도 해드렸어?"


살살 긁는 시마자키의 이런 뱀 같은 말투를 듣고 있으면 아, 내가 첫 번째로 사람을 죽여서 뉴스에 난다면 그 대상은 저 새끼가 되겠구나.. 하고 새삼 생각하게 될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도저히 모르겠는데? 그냥 본론만 이야기하지?"

"본론? 없는데. 하하, 도련님 화날 때 말투가 묘하게 바뀌는 게 재밌어서 그래"

"재밌어?"


시마자키는 시력이 없는 만큼 혀도 없었으면 훨씬 좋았을 뻔했다. 주먹을 쥔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아플 정도로 주먹을 꽈악 움켜쥐자 눈치챈 세리자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쇼우군 그만하고 이리 와, 하고는 나와 시마자키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조금은 식혀주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그저 나 혼자 시마자키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것일 뿐이지만.


분이 덜 풀려 보이는 나에게 세리자와는 따뜻하게 데운 녹차를 한잔 내밀고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서는 그저 웃어 보이는 세리자와에게 괜한 투정을 부렸다.


"미친 새끼. 시마자키 저 새끼는 우리 집에 왜 온 거야? 저딴 개소리 지껄이러 온 거면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해. 재수 없게. 한 번만 더 저딴 소리 하면 혀를 뽑아버리겠다고 해"

"시마자키는 누구 나한테 그렇지 뭐. 우리한테도 똑같아. 사장님께 앞에서만 조용히 있지. 쇼우도 나중에 차기 사장이 되면 아마.."

"그만. 듣기 싫어. 나 지금 기분 안 좋은 거 안 보여? 차기 사장 이야기 좀 안 할 수 없어? 난 아버지를 따를 생각 따윈 눈꼽만큼도 없단 말이야! 세리자와는 가끔 마치 내 부모라도 된 듯이 구는데, 착각하지 마. 아버지의 비즈니스 와이프라고 조롱당하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방금 말은 좀 심했나? 하는 생각에 뱉어 놓고 나도 모르게 세리자와의 눈치를 살피다가, 작은 목소리로, 방금 말은 미안. 내가 요즘 좀..... 하고 말했다.


"... 쇼우. 그 여자를 만났다는 게 진짜야?"

"그 여자라니? 그 여자가 누구야?"

"아까 시마자키가 그랬잖아. 만났다고"

".. 설마 엄마를 말하는 거야?"

"..역시 그래서 이상해졌구나 왜 만났어? 혹시 그립다거나 그런 거야?"

"이상해졌다니.. 엄마가 학교 앞에 찾아와서 만나게 된 거야."

"찾아왔다고? 그 여자는 이상한 사람이야. 사장님의 그 크신 포부조차 이해 못하고..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복받은 자리라는 것도 모르고.. 그 자리를 그렇게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그러니까 그 자리를 그렇게 쉽게 박차고 나가는 거야"

"세리자와. 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시마자키에게 듣기로 쇼우 너에게 용돈까지 구걸해서 갔다며? 역시 쇼우는 착하구나.. 불쌍한 사람에게 적선도 할 줄 알고.. 역시 좋은 사장이 될 수 있겠어.. 사장님이 나를 구해주셨듯이 쇼우도 아마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마음씨 따스한 사장이 될 수 있을 거야. 쇼우가 말한 대로 나는 쇼우의 부모가 될 수는 없지만 이미 나에게 있어서 쇼우는 내가 키워야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이니 나도 사랑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쇼우도 그런 여자 따위 생각도 하지 말고.. 시마자키가 그 여자를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던 전혀 화날 필요 없어. 그 여자는 이미 부모의 자격을 박탈당한 거야" 


세리자와의 말은 틀린 말은 없다. 실제로 내가 왜 시마자키의 같잖은 도발에 이렇게 열받아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납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리자와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면서, 쇼우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받으면서 살아야 해... 하며 두 눈 가득히 알 수 없는 눈물을 가득 보이며 눈시울을 붉히었다.  나는 이상하게 소름이 돋아 그가 잡고 있는 손을 빼내려 했지만 세리자와의 커다란 손은 내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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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와의 사이가 서먹해진 것에 대해서 나는 그 어떤 해결책도 마련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리츠가 고집을 꺾고 나를 이해해주는 것이었던 반면, 리츠는 내가 자신을 꼭 아버지의 병동에 데려가 주길 바랐던 것이다. 리츠는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으니 나 하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내기엔 아무런 영향이 없었겠지만 리츠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나는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리츠와 보냈기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지나가는 리츠를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엔 없었다.


물론, 다가갈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결론을 지을 수 있을 만한 대책도 없이 무작정 다가가서 이야기하기엔 너무나도 터무니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근처만 맴돌다가 한숨을 쉬고 집에 돌아오는 것을 반복할 수 밖엔 없었다. 리츠가 문자로 '오늘 학교 끝나고 옥상에서 잠깐 보자'라고 문자를 보내오기 전까지.


그 문자를 발견하고 나서 왜인지 모를 두려움과 함께 파란 하늘이 휑하게 뚫린 옥상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새삼스럽게 옥상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며 평소에는 있지도 않은 고소공포증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어서 스멀스멀 구역질이 올라왔다. 리츠는 이미 옥상에 와서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옥상 문의 소음을 신호로 듣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죄지은 듯이 리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리츠의 시선에서 도망쳐 고개를 푹 숙였을 뿐이다. 리츠는 내 앞에 겁 없이 저벅저벅 다가와서는 내 턱을 치켜들어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왜 피해? 똑바로 봐야지 스즈키"


하고 평소보다 당돌하게 나를 유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순간의 리츠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내 눈빛을 느꼈는지 리츠는 조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조금은 슬픈 듯이 말했다.


"스즈키, 나는 화해를 하고 싶어서 너를 이곳으로 부른 거야. 그런데 지금 너의 그런 태도는 나와 이야기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으로 느껴지네"

"아.. 아냐...! 그런 게 아니라..."

"... 내가 지나치게 너에게 선택을 강요했다면 미안해"

"아... 아니 나야말로..."

"아버지에게 그런 문제로 부탁하기가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그런 건 됐고 혹시 가능하다면 단순한 호기심으로 견학 정도는 하고 싶은데 그것도 불가능할까? 뭐.. 지금 당장 대답하기 곤란하다면 다음에 대답해줘도 괜찮아"


리츠는 자상한 말투로 말하고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우물쭈물하는 나의 손을 잡고서 내려가자! 하고 평소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맞잡은 손이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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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는 무슨 일이 있는지 온종일 시끌시끌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아닌 기자들의 다급한 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리는 걸 보아하니 요 근래 일들이 많이 터졌는가 보다. 다른 부대 대장들의 말을 들어보니, 한 달 전부터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터졌다고 한다. 평소에도 이 정도의 사건들은 일어나기 마련인데, 뉴스에서 이렇게 부각시켜서 터트리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일이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찬찬히 짚어 보니, 최근 사기꾼들과 요시와라를 판치고 있는 범죄자들에 대한 의문과 의혹의 자료가 모아져서 고발을 목적으로 하는 익명의 동영상이 인터넷을 떠돌면서, 우리 조직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뉴스의 화면에는 우리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며, 시민들은 도대체 그 머저리 집단은 하는 일이 뭐냐며 성내고 있었다. 공공연하게 거리를 활개 하는 범죄조직들이 여럿 있지 않습니까? 그런 집단 하나 제압을 못 하는 새끼들에게 저희가 세금을 내야 된다는 것이 억울하다 이겁니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서 인터뷰를 하는 시민이 잔뜩 화가 난 듯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통계를 보니 최근 일어나는 범죄들의 치솟는 숫자들과 피해 입은 사람들의 잇따른 피해들이 수치화되어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서 경찰의 우두머리인 마츠다이라 선생님과 곤도 이사오에 대한 책임감의 지수가 높아지면서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히지카타의 결혼과 맞물려 나도 마찬가지고 대원들도 마찬가지고, 히지카타도 그렇고 곤도씨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약간은, 아주 약간은 느슨해져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이 이렇게 커다랗게 터질 정도로는 아니었을 텐데....

물론 갑자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원래 이런 뉴스에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히지카타나 곤도씨 같은 경우는 분명 조금씩 올라오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도 이렇게 커다랗게 몰려들어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으리라. 이미 곳곳에서는 소규모의 대모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뉴스를 멍하니 보고 있을 적에 히지카타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소고 오늘 마츠다이라 선생님과 곤도씨와 함께 회의 있어. 3시까지 뒷문으로 들어와... 조금 상황이 좋지 않다]
[아.. 나도 지금 뉴스 보고 있었어]
[여튼... 조금 있다가 봐]

히지카타는 머리 아프다는 듯이 이야기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만난 마츠다이라 선생님과 히지카타, 그리고 곤도씨는 모두 심각한 얼굴이었다. 들어오는 나를 보고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어서 와 앉게, 하고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한숨과 함께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대충은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 지금 우리 조직을 향하고 있는 화살이 조금 거세. 그냥 묵인하고만 있기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을 만큼 상황이 안 좋아. 너희도 생각이 많겠지만……. 뭐…. 우리가 돌려서 말할 사이도 아니고...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겠다. 내가 어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는 대략 2가지 정도 있는 것 같아. 뭐 더 많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선 내 머리 안에 있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이 여론을 잠재우는 방법들이다. 둘 다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만."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며 당당하게 말하고서도 마음이 편치 않은지 다시금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첫 번째, 이건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쉬운 방법이다. 현재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알 정도의 흉악범을 잡아넣는 것.. 이 정도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일을 못했던 게 아니라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이건…. 뭐 너희들도 당연히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절대로 쉽지 않다는 것도...  그렇기에 실현 가능성이 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우린 지금까지 결코 놀았던 적이 없어. 심지어 우린 요시와라의 거대 조직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은밀하게 지속적인 만남까지 가져가면서도 사소한 증거 하나 찾기가 힘들어서 눈앞에 두고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지. 표면적으로만 사이좋게 지내자면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실제로 우리가 이 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건 아니었잖냐. 그렇게 눈을 번뜩이며 찾아도 지금까지 미꾸라지처럼 도망가는 이 녀석들을 잡지 못했다는 거야…….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그런 작은 사건의 범인들이야 잡을 수 있겠지만 말이야."

마츠다이라 선생님의 말씀은 사실이다. 물론 나는 땡땡이도 치고 놀러 간 적도 많지만, 그래도 범죄자들을 잡는 데에는 꽤 열심히 일했었고... 내가 아닌 곤도씨와 히지카타는 항상 정말로 이 일에 몸 바쳐 일했다. 그 잠깐의 느슨함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그러한 사실은 선생님이 더욱 잘 알고 계실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서도 선생님은 담뱃재를 톡톡 털어내면서 잠시 고민하듯이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묘하게 뜸을 들인다. 선생님의 그런 모습에 나와 히지카타, 그리고 곤도씨까지 모두 가볍지 않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었다.

".... 그리고 두 번째 방법은……. "
"……."
"……. 나는 정말…. 내가 지금 말하는 방법을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만큼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고…."
"……."
"……. 지금 모인 우리 넷, 그니까 현재 우리 조직에서 가장 유명하고, 이름만 들어도 모두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사람 중 한 명이 이 사건의 모든 일을 책임지고 사퇴하는 것이다."
"... 네? 지금 사퇴라고 하셨...."

내 귀를 의심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내 반응에 히지카타는 조용히 하라는 의미로 내 팔을 꼬옥 잡았다.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그런 나의 반응을 잠깐 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현재 성나있는 민심들도 언론들도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겠지. 사퇴한 그 한 명이야 당연히 힘들겠지만…."

그리고는 또다시 담배 한 모금.

"아, 오키타 너는 빠져라"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숨을 죽이고 쳐다보는 나를 보며 말했다.

"너 같이 어린애가 뭘 알아서 뒤집어쓰며, 책임질 직급도 약간 어중간해. 오키타는 빼고 둘 중 한 명으로... 혹시나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말해도 좋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거야..... 이렇게 어려운 것을 선택하게 만들어서 정말로 미안하다. 그럼……. 선택은 맡길게. 그럼…. 난 먼저…."

그 말을 하고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우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서 자리를 떴다. 아마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과 더불어 가정을 꾸리고 있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의 충돌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게 된 것에 대한 이기적인 자신의 태도에 더욱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선택을 강요당한 히지카타와 곤도씨는 자리를 뜨는 마츠다이라 선생님의 등을 흐릿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남아버린 우리 셋. 나는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둘을 쳐다보았다. 이 선택의 답은 나도 알고 있다. 마츠다이라 선생님은 둘 중의 한 명이라고 하셨지만, 자신의 딸과 결혼한 히지카타에게 그만두라고 할 리는 없다. 곤도씨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뜻인 것이다. 나조차 눈치챈 이 사실을 곤도씨가 모를 리가 없었다. 곤도씨도 히지카타도 한참 말이 없이 있었고, 그 답답한 침묵을 깨고서 곤도씨는 우리를 보며 환하게 웃으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자, 이만 해산할까?"










-
히지카타는 그날 이후로 내가 본 적 없는 최악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곤도씨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평소처럼 웃으면서 모두를 대했지만, 혼자서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힘들 것인지, 그리고 그에게 그런 선택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히지카타 역시도 얼마나 힘들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누나가 떠나고 난 이후부터 쭉 함께 했었던 곤도씨는 내가 히지카타와는 약간의 다른 마음으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 공간에서 사라지는 것은 나 역시도 몸서리치게 싫었다. 게다가 그냥 떠나는 것도 아니고 이 모든 시민의 항의와 언론의 화살을 받아내는 화살받이로써 묻히게 될 것을 히지카타도 나도 잘 알고 있기에…. 그렇기에 더욱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히지카타가 이대로 내 옆에 사라진다는 것은 곤도씨가 사라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절대로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곤도씨가 사라지는 것도 싫지만, 히지카타가 내 옆에서 사라지는 것은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지만, 혹여나 히지카타가 곤도씨와 함께 나가겠다는 말을 하면 어쩌나 하고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쿠리코 때문에라도 히지카타는 마츠다이라 선생님 옆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나를 안심시키면서, 정말 싫은 그 여자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조금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소고, 오늘 바빠?"
"아니 왜?"
"같이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오랜만에"
"둘이?"
"응. 둘이"
"... 곤도 씨는?"
"... 바쁘신가 봐"

히지카타는 곤도씨를 묻는 나의 시선을 피해서 대답을 했다. 오래간만에 둘이 먹는 술이라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히지카타가 너무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소처럼 심한 장난을 치거나 막말을 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일을 마치고 사복으로 갈아입고서 히지카타가 가자며 안내한 곳은 조용한 선술집이었다. 너무도 작은 술집이라서 손님도 별로 없는 그런 소박한 곳이었다.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거 시킬게"

히지카타는 조금은 힘없이 메뉴판을 펼치며 말했다.

".. 누가 뭐래? 맨날 네가 나한테 선심 쓰듯이 먹고 싶은 거 시켜! 하고 말했던 것뿐이잖아"
"... 그러네. 그랬었지...."

히지카타는 내 말에 희미하게 웃어 보이면서 메뉴판을 훑더니, 대충 나베 하나를 골라서 주문을 하고는 술을 시켰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서는 나에게도 한 잔 주고, 본인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답지 않게, 천천히 마시라고 말하고는 본인 입에 한 번에 툭 털어 넣었다. 어두운 녹빛을 띄는 머리칼이 뒤로 찰랑이며 살짝 넘어가는 것을 보니, 다시 한번 아…. 존나 잘생겼네…. 하고 감탄하고 싶지 않아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히지카타가 무섭게 술을 들이켜자 반대로 나는 한잔 정도를 띄엄띄엄 끊어 마시면서 들이키는 히지카타의 눈치를 보며 마주 앉아 있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히지카타가 5잔 정도 술을 연달아 마신 후에야 주문한 탕이 나왔다. 그 이후에도 한참을 술만을 시키며 술만 들이키는 히지카타를 보다 못해, 한마디 했다.

"야 히지카타. 너 원래 이렇게 술을 무식하게 마시는 사람이었어? 안주 나왔으니까 좀 먹으면서...."
"... 소고 네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 뭐래, 걱정해줘도 지랄이야."

어이없다는 듯이 내뱉으면서도 나는 히지카타의 말에 괜스레 얼굴이 달아오르고, 술에 잔뜩 취해 살짝 풀려버린 히지카타의 눈빛이 조금 섹시해 보이기도 해서, 나를 보는 히지카타의 시선을 피했다. 또다시 서너 잔을 들이키던 히지카타는 혼잣말을 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음... 그니까... 어떻게 생각해보며언...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생각하고.. 있어어.."
"..뭐가?"
"나나 곤도씨 중의 선택이잖아아. 일단 너는.... 남게 되었고..."
"..뭐야, 그게 다행이야?"
"그러엄! 나나 곤도씨는 다른 곳에서도 분명....! 할 수 있느은.. 사람들이잖아! 근데 너 같은 꼴통 새끼느은 어디가서 적응하기도 힘들고.. 그냥... 지금 이 곳에서어 너 받아주는 대원님들께! 감사하면서 일해 이 짜식아아"
"...."
"물론!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너의 윗사람으로 온다며언... 지금처럼 네가 편하게 맞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닐수도 있겠지마안! 분명 시간이 지나면 네가 그 사람들을 이겨먹고오... 올라갈 수, 있을 거야"
"... 너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진심이야"

지금 이 새끼는 너무 취해서 이상한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가득 품으면서 히지카타에게 물었다.

"... 너 지금 .... 그만둘 것처럼 이야기한다?"
"...곤도씨가 나간다면... 미안해서 내가아.. 어떻게 있겠어.."
"...그럼...나는?"
"너느은! 남아있으라니까"
"...아니.. 야 히지카타, 너 쿠리코도 그렇고.. 마츠다이라 선생님도 그렇고..."
"알아알아, 쿠리코는 물로온... 말리겠지.. 응.. 분명히 말릴거고.. 마츠다이러 선생님도.... 내가 타깃이 아니었다면서 잡으실거고..."
"아니, 그럴 것이라는 걸 그렇게 잘 알면서...."
"... 너도 알다시피 곤도씨와 나는 오래지냈잖냐... 나의, 내 모드은! 정신적인 기둥이야. 그런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면서..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이런 자리에 어떻게.... 앉아 있겠니"

처음 보는 히지카타의 술 주정..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 히지카타는 이렇게 혼자서 극도의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술 자리 테이블에 잔뜩 취해서 엎드린 채로 자꾸만 어떻게 해.. 내가 어떻게 그래... 하고 답지 않게 웅얼웅얼 거리는 히지카타를 한참 보다가 지금의 히지카타를 내가 직접 쿠리코에게 데려다주기는 싫어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히지카타가 많이 취했으니 데려가라고 짧은 통화를 한 후 홀로 술집을 빠져나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간 집에는 카무이가 안테나처럼 쫑긋 솟은 바보 털을 세우고서, 힘없이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웃으며 늦었네? 하고 말했다. 아,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카무이에게 그대로, 야 우리... 할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바로 오케이를 할 줄 알았던 이 녀석은 어쩐 일인지 거절했다. 그리고는 내 옆에서 나를 끌어안으면서, 음…. 그냥 이렇게 조금 더 있다가 하는 것으로 하자고 명랑한 말투로 말했다. 이 녀석의 체온 역시 나쁘지 않았으므로 나 역시 무거운 머리를 이 녀석에게 살짝 기대고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카무이도 나를 따라서 커다란 한숨을 내쉰다.

"뭐야, 따라 하지 마"
"따라 한 거 아닌데"
"갑자기 왜 한숨을 쉬어 네가? 어울리지도 않게"

카무이는 소리를 내어서 웃었다. 우리가 서로 끌어안다시피 한 자세를 하고 보는 TV에서는 또다시 우리 집단에 대한 이슈가 방송되고 있었다. 국민의 세금, 모두 이런 썩어빠진 그룹에 들어가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고 시민들의 데모 현장과 함께 시민들의 거센 인터뷰가 나오고 밉상을 한 아나운서는 더욱더 한숨을 내쉬며 정말이지 큰일입니다….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다시 또 머리가 지끈 하고 아파져서 TV를 껐다. 카무이는 나에게 너희 쪽 이야기지? 하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고 싶지도 않아서 몰라. 아 모르겠다…. 하고 눈을 감았다. 카무이는 가만히 있다가, 조금 피곤한 듯한 나를 보고 아까 그 사람, 누나의 남자친구였잖아. 방금 TV에 나왔던 사람. 잘 지내? 하고 물었다. 나는 무미건조한 말투로, 어떤 년이랑 결혼해서 혼자 잘 지낸다. 씨발놈이. 하고 탄식하듯 말했다. 그리고 나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친구의 일을 도와준다고 했지? 그 친구는 무슨 일을 해?"
"응? 아.. 음.. 어.. 그니까.. 정보상..이라고 해야 하나...?"
"정보...상?"
"어.. 뭐..."
"....정보상이라... 뭐 좋은 정보 있으면 좀 알려줘봐. 예를 들어서 범죄자에 대한 정보라던가....."
"범죄자?"
"뭐, 당연히 없겠지만"

그리고 나는 곧바로 이 새끼에게 범죄자의 정보에 대해서 달라고 하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작게 웃었다.

"갑자기 범죄자는 왜?"
"나 경찰이잖아. 범죄자를 쫓는 건 당연한 일이지"
"흠.. 뭐.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대도 안 해. 그냥 말한 거야.... 나도 답답해서"
"만약 내가 그런 정보를 주면 나에게 뭘 해줄 거야?"
"... 쓸데없이 기대 주지 마"
"왜? 혹시 모르는 건데"
"네가 말하는 혹시..라는 건 별로 신뢰가 안가"
"아냐 정말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거 고급 정보라서 보통은 돈 주고도 많이 거래하고 그렇다고"
"돈을 달라 이거야? 음.. 얼마 정도 하는데?"

나는 곧바로 머릿속으로 현재 내 통장에 대략 얼마 정도가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줄게!"

카무이는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이 더욱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계속 생각하긴 했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저 녀석이 주는 범죄자의 정보라고 해봤자 애꿎은 좀도둑이나 가벼운 죄를 지은 날강도 정도 될 것이고.... 한숨을 다시금 푹 내쉬었다. 핸드폰에는 히지카타를 데리고 간 쿠리코가, [연락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나 히지카타씨가 뭔가 폐를 끼치진 않았을지 모르겠네요] 하고 마치 저가 보호자인 마냥 나에게 문자를 보내왔다. 씨발년.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닫자 나에게 기대고 있던 카무이가 누구야? 하고 물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있어. 내가 완전 싫어하는 년이야. 하고 대답했다. 카무이는 웃으면서 꼭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이지.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 말이야.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카무이는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다. 분명 착한 녀석은 아니지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모습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카구라가 찾아왔다. 전에 만났던 지하에 있는 그 어둑어둑한 카페에서 주스 한 잔을 시켜놓고서 요란하고 음란하기까지 하게 쪽쪽 소리 내며 붉은색 빨대를 빨아대면서 무엇이 좋은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평소엔 동그랗게 뜨고 있는 눈을 가늘게 휘며 눈웃음을 지었다.

"왜 왔어?"
"그야, 오빠가 보고 싶으니까 왔다해"
"그렇구나"
"오빠오빠, 나 케익도 먹고 싶은데 시켜도 되냐해?"
"먹어"
"움... 어쩌지.. 저기에 진열되어 있는 모든 맛이 다 먹고 싶은데.."
"... 다 먹어"

카구라는 신난 듯이 벌떡 일어나서는 별로 맛없어 보이는 케익이 가득 있는 쇼케이스로 달려가서는 여기에 있는 거 한 조각씩 전부 주세요! 하고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주문을 했다. 카구라는 꽤나 신나 보였지만 나를 포함해 이 카페에 있는 모두는 그다지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암울했고, 암울이라는 것을 뛰어넘어 조금은 음침했다. 그런 것들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무시하고서 찬찬히 자리로 돌아와서 소파에 풀썩 앉으면서 물었다.

"오빠, 근데 그거 알고 있냐해?"
"응?"
"경찰 내부가 요즘 시끄럽잖아"
"당연히 알지. 뉴스에서 그렇게 떠들어대는데 모를 수가 있나"
"하하, 오빠는 조금 즐거운 눈으로 보고 있을 수도 있겠네?"
"내가 왜?"
"사이가 좋진 않을 거 아니냐 해"
"뭐.. 관심이 없어서"
카구라는 무심하게 말하는 내 앞에서 웃으면서, 요즘 자신과 연이 닿아있는 그 경찰 놈들이 엄청 힘들어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글쎄 말이야.. 뭐든지 척척해내는 긴쨩도 그들의 고민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거 있지? 하여간 긴쨩은 오지랖이 너무 넓다 해, 그러면서 본인도 어찌해야 할지 모르면서 나와 신파치에게 범죄자나 사냥하러 가 볼까? 하고 실없는 소릴 하기도 하고 말이야,.... 아, 근데 오빠, 오빠는 이 곳, 요시와라에서 범죄 지수가 꽤나 높은.. 사람이냐 해?"
"...음.. 글쎄? 왜? 나를 사냥하러 오게?"

카구라는 내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곧 주문한 케이크가 나오자 한입 크게 포크로 찍어서 입안에 밀어 넣으며 음, 맛있다 하고는 다시 또 키득키득 웃는다. 기분 나쁜 그 키득거림을 들으면 그 누구라도 순식간에 최악의 기분이 될 것이다. 우물거리며 다소 얄밉게 케익을 먹는 카구라를 보다가 말했다.

"왜 그딴 식으로 웃는지 말해볼래?"
".. 그야...! 조금 고민하고 있어서.. 난 오빠가 잘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도 하고.. 긴쨩이 잘 되는 것도 진심으로 바라고 있기도 하고.. 내 경찰 친구들이 잘 되는 걸 바라고 있기도 하고...."
"..."
"음... 하지만 역시 오빠가 제일 잘 되는 게 더 보고 싶다 해! 그러니까 혹시나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나에게 얼마든지 부탁해도 좋다 해!"
"... 됐고. 오늘처럼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마"
"역시 오빠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거냐해? 나는 오빠를 여기에 오면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서 하루 종일...."

아... 머리 아파.

"그만, 그런 거 아니고 내가 오늘 바빠서 그래"
"역시 그렇지?"

카구라는 내 말에 다시금 활짝 웃으면서 놀랐다며 배시시 웃어 보인다. 짜증나지만 역시 나는 앞에 있는 내 친동생에게까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엔 조금은 자상한 가족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마녀에게는 내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조금 서툴렀던 것도 있다. 웃을 때에는 처음에 만났던 이상한 누나가 언뜻 언뜻 떠오르기도 하고, 오빠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거냐 해? 하고 눈을 치켜뜨며 물어올 때는 이상하게 오키타의 누나가 떠오르기도 하는 그 오묘함 속에서 이상한 긴장감과 적지 않은 갈등을 하고 있었는지도.

"나는 오빠랑 같이 살고 싶은데.. 오빠랑 같이 있다는 그 친구는 도대체 누굴까...?"

카구라는 새빨간 빨대에 다시 입술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자꾸 그렇게 묻지 마. 그렇게 물어도 난 대답하지 않을거야. 내가 너에게 그 긴쨩이라는 사람이 누구냐며 너에게 꼬치꼬치 캐묻으면 좋겠니?"
"어..! 난 조금은 좋을 것 같기도.. 아! 오빠는 긴쨩이 보고 싶냐해? 그렇다면 내가 소개해 줄 수도 있다해!"
"범죄자를 사냥하겠다는 사람 앞에 나를 팔아넘기려는 거구나"
"에이.. 그런 걸 두려워하는 게 아닌 거 다 안다해"

카구라는 싱긋 웃어 보였다.

"카구라.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지. 실컷 널 거둬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은인이자 연인 아니야?"
"은인은 맞지만 연인은 아니다 해. 오해다 해!"
"어쨌든. 카구라. 우린 여기까지의 선을 지키며 이렇게 어쩌다 한 번씩 만나는 남매로 지내자. 이 이상으로 깊은 가족애를 느끼지 않았으면 해"

내 말에 카구라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어쩌다 한번..은 싫다해.. 자주 보는 남매가 되고 싶다해.. "

하고 파란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 주위의 경찰들이 필요하냐해? 그게 오빠의 앞길에 필요하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오빠를 위하는 것으로 생각을 바꿔볼 수도 있다해. 하고 다시금 활짝 웃어 보였다.

"어떻게 믿니 너를"
"....어떻게 믿냐니? 고아원에서 나를 잃어버려서 힘들었던 고통만큼 나를 믿어주면 된다해"

카구라는 활짝 웃어 보이고, 그 말에 나도 활짝 웃어 보였다. 삐그덕 대는 나뭇 바닥을 천천히 밟으며 카페에서 일하던 알바생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는 고개를 천천히 숙여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단장. 부단장이 찾으십니다. 그 말에 나는 카구라에게 일이 있으니 먼저 가보겠다고 했다. 그리곤 덧붙여서 말했다.

그래 너를 충분히 믿을 테니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나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나의 말에 카구라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히 나는 거절하지 않아! 하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다. 마지막 남은 케이크를 포크로 푹 찍어선 제 입안에 넣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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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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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서 하루 종일 머리만 붙잡고 있었다. 옆에 이 새끼는 없었다. 어제 술 마시다가 갑자기 술을 따라준다면서 비우는 족족 빙글빙글 웃으면서 술잔을 채워주던 그 새끼의 웃는 눈꼬리가 급 떠오르면서 혹시나 내가 실수를 하지는 않았는지 계속 곱씹어도 술에 취해서 잃은 기억은 도대체 뇌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 절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출근했는지도 모르고 정신을 차리자 내가 출근해 있었다. 머리를 붙잡고 한숨에 가까운 신음을 뱉으며 책상에 엎드려 있자 우리 부대 대원들이 대장 어제 또 과음이십니까? 하고는 저들끼리 키득키득 웃어댄다. 닥쳐.. 나 힘드니까 가서 약이나 사 오든가.. 하고 힘겹게 말했는데 떠들썩하게 웃고 떠드는 저놈들에게는 들리지 않는지 우르르 나가버렸다. 저런 새끼들을 지금 부하라고 데리고 있네.. 한숨을 푹 쉴 때에 얼굴 옆에 탁 소리를 내며 놓이는 약병. 누구냐? 존나 사랑한다. 하고 말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내려다보는 주인공은 제발 다른 새끼였길 바라고 바라는 히지카타였다. 3초 정도 얼어있다가 다시 푹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먹어. 도대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술을 같이 먹어주는 위인은 누구냐?"

"... 남이 어디서 술을 처먹든지 말든지."

"그래. 상관없지. 근데 업무에 지장이 되잖아."

"... 하이고.. 네에.. 어련하시겠습니까"

"소고. 오늘 저녁에 같이 밥 먹을까?"

"... 저녁?"


고개를 슬쩍 들고 바라보았다가, 평소보다 조금 자상하게 웃어 보이는 히지카타의 미소에 나는 보기 싫은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곤 조금 생각하는 듯이 잠시의 시간을 둔 후에 다시 말했다.


"저녁이라니.. 유부남은 바쁜 거 아냐?"

"하하, 바쁘지"

"... 나 같은 것을 위해서 귀한 저녁시간을 할애해도 되냐고"

"사실 쿠리코가 너를 데리고 오래. 집으로.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하던데"


그럼 그렇지.


"됐어"

"너 별일 없으면 가자. 우리 집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잖아?"

"내가 너희 집에 가야 하는 이유는 뭔데?"

"... 그렇게 물으면 딱히 없지만.. 그래도.."

"내가 쿠리코가 부르면 가야 되는 사람인가?"

"왜 이렇게 꼬였어? 그냥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건데"


히지카타는 정말 인내심이 좋았다. 내가 까칠하게 굴어도 마지막까지 자상한 말투로 나를 달래주었다. 끝까지 싫다고 하려다가, 갑자기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서 가겠다고 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갈게"


히지카타는 내 말에 웃으면서 그래. 오늘 끝나고 같이 가자 하고 말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히지카타는 나를 잘 알면서도 때로는 나를 정말 모르는 인간이었다. 아니면, 설마 내가 바뀌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가?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닌데.





"히지카타씨! 오키타씨! 어서와요!"

함께 방문한 히지카타의 집. 이 여자는 히지카타와 함께 온 나를 보고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사실은 히지카타의 손을 잡고 싶었다는 거 나도 안다. 불편하다는 듯이 손을 빼며 안으로 들어가자 쿠리코는 히지카타보다는 나를 더 신경 쓰면서 내 뒤를 따라들어왔다. 분명 이런 것도 히지카타가 내가 오기 전에 나를 대하는 방법을 조금은 조언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신혼집은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였다. 히지카타와 쿠리코가 함께 쓰는 2인용 침대가 있는 커다란 방과 작은방이 하나 있는,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촉촉한 느낌이 들었다.


"좋네요"


내가 무뚝뚝하게 형식적인 말을 하자, 히지카타는 뒤에서 내가 사 왔다면서 작은 인테리어 소품을 쿠리코에게 건네주었다. 저런 것을 구입한 적이 없지만 히지카타는 누군가의 집에 처음 갈 때는 무어라도 사 가는 게 예의라면서 본인이 구입하고서는 쿠리코에게는 내가 준 것이라며 말했다.


"와아.. 이런 것까지..! 전 오키타씨가 이런 것까지 준비해 오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감사해요!"


진심으로 감동한 표정으로 나에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히지카타는 이런 자신의 아내의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에 나를 팔아서 쿠리코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거 제가 산 거 아닌데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히지카타는 내 입을 확 틀어막으며, 이 녀석이 괜히 부끄러워서 자꾸 다른 이야기하려 든다니까? 하고는 쿠리코에게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안방이랑, 작은 방이랑 다 구경해도 괜찮아요?"

"당연하죠! 이쪽으로 오세요!"


쿠리코는 나를 자신들의 침대가 있는 안방으로 안내했다. 


"뭐 별것은 없는데.. 밖에서 보시는 게 다예요! 제가 집을 정성껏 꾸민다거나 하진 못해서..."


밖에서 언뜻 보는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함께 눕는 더블침대.. 그리고 이들의 모든 옷을 가지고 있을 옷장, 쿠리코의 꽃잎 향이 나는 화장대, 햇빛을 막아주는 고급 커튼 등등.. 뭐야 이상해. 한참 묘한 기분으로 그들의 침실을 왔다 갔다 하다가 침대 좋네요? 하고 잠깐 앉아보는 척을 하며 쿠리코가 다른 곳을 볼 때에 침대의 보이지 않는 아래쪽에 준비해 놓은 소형 도청기를 슬쩍 설치했다. 이것을 계획하고 실행할 적의 나는 이 세상의 재미있는 모든 것을 찾은 것 마냥 즐거워했지만, 후에 이 어처구니없는 장난을 실행한 것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나를 죄여올 것을 이때에는 알지 못했다.


여튼, 그렇게 나의 목적을 실행 한 후 쿠리코가 차려주는 밥을 기분 좋게 히지카타와 쿠리코와 함께 먹었다. 맛은 있었다. 먹는 나의 안색을 계속해서 살피며, 오키타씨 입맛엔 맞으세요? 하고 친절하게 물어봐 주는 것까지. 아이고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한참 밥을 먹던 중, 쿠리코는 히지카타 옆에 바짝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오키타씨는 지금 어디에서 생활하세요? 아직도 둔영에 계세요?"

"... 아뇨. 따로 살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역시 대장급이라서 상관없나 봐요. 그럼 혹시 연애는 하세요?"

".. 아뇨"

"혹시 생각 있어요? 제가 아는 동생 중에 진짜 괜찮은 애 있는데 잘 어울릴 거 같아서요"

"없어요"

"얼굴도 진짜 작구, 엄청 예쁘고 성격도 밝은 애라서 보는 내내 오키타씨 생각나더라니까요?"

"싫어요"

"아니 정말로.."

"쿠리코씨. 전 히지카타의 부탁으로 조용히 밥 먹으러 온 거예요. 필요 이상의 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


조금 쏘아붙이는 투의 내 말에 쿠리코는 얌전히 꼬리를 내리고는 그 이후로는 조용히 밥만 먹었다. 히지카타는 나와 쿠리코의 눈치를 보듯이 슬쩍 살피다가 조금 분위기를 전환할 생각이었는지 나에게 뭐 내일의 스케줄이라던가를 이야기하면서 쿠리코에게 다음 주엔 조금 한가할 것 같은데 셋이 외식할까? 하고 부드럽게 웃어 보인다. 쿠리코는 제 잘난 남편이 웃으면서 이야기해주니 마냥 좋아서는 금세 시무룩했던 기운이 얼굴에서 싹 가시더니 좋아요! 하고는 활짝 웃어 보였다.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고는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서 괜히 짜증 나는 기분을 표출하고 싶어서, 제 입맛하고는 별로 맞지 않네요. 게다가 전 조용히 밥 먹는 게 좋아서.. 하고는 괜스레 투덜투덜 거렸다. 둔영에서는 모두가 내 성질을 받아는 사람들 뿐이었으니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누구 하나 태클 거는 사람이 없었고 히지카타 역시 나의 투덜거림에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아무렇지 않았다. 게다가 항상 나를 향해 병신처럼 웃기만 하는 쿠리코 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의 쿠리코는 조금 달랐다. 그런 나의 시건방진 비아냥거림에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예의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아요. 오키타씨가 제 남동생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한대 쥐어박아줬을 거예요"


당황한 히지카타와 나. 나도 이 순간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잊었다. 말문이 막혔다는 말이 잘 맞을 것이다. 멍하니 있는 나와 내 눈치를 살피듯 슬쩍 쳐다보는 히지카타. 그리고 나는 그대로 일어나서는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집의 문을 부서져라 세게 닫고서는 나가버렸다. 히지카타가 뛰어나와서 나를 잡을 법도 한데 뒤돌아본 문에서 히지카타는 나와보지도 않았다. 굳게 닫힌 문은 말없이 얌전하게, 나와 그 빌어먹을 부부들 사이를 반듯하게 막아주고 있는 것이다. 큰 걸음으로 한걸음 한 걸음씩 걷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도망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걸음을 돌려서 그들의 집으로 문을 벌컥 열고는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그 부부들은 나오려 했었는지 바로 문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돌아온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다시 돌아온 나를 보고는 아, 오키타 왔구나. 잠시... 하고 곤란한 듯이 내 팔을 잡으려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내 몸에 손대기도 전에 내 몸을 홱 돌려 빼며 히지카타가 아닌 그 뒤의 쿠리코를 향해서 말했다.


"당신이 뭔데 나에게 예의라는 둥, 남동생이라면~ 하는 가정을 하는 거야? 히지카타가 나의 상관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당신에게까지 그런 취급 당할 이유 없다고 생각해. 어떤 식으로든 나와 당신을 연관 짓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히지카타는 열받아서 소리치는 나를 붙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받은 열을 채 식히지 못하고 씩씩 거리는 나를 보고는 아무 말없이 나를 보다가 말했다.


"소고, 오늘 와줘서 고마웠어. 내일 보자."


나는 히지카타가 나를 따라 나왔기 때문에 나에게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쿠리코가 그런 의도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하던가, 자신이 대신 미안하다며 나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했을 히지카타가 뻔뻔하게 내 앞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내일 보자 라니. 너 화났냐? 지금 네가 화내는 거야? 네가 뭔데 지금 나에게 화를 내?



물론 나도 아무렇지 않게 뒤돌아서서 집으로 가는 길로 향했다. 히지카타 앞에서 더 이상 열받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저 히지카타도 그렇고 쿠리코도 그렇고 둘다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을 지울수가 없어서 한참을 씩씩대다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의 침실에 몰래 설치해 놓은 도청기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한 번 들어보았다. 작동은 잘 되고 있었다. 처음엔 약간의 잡음이 살짝 들리다가 이내 제대로 그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고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그 애가 조금 예민한 구석이 있어. 내가 너무 받아주기만 했던 것도 있고....]

[오키타씨는 나에게 어떤 감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전부터 항상 저에겐 저런 말투예요. 맘에 들지 않는 드는 식의 말투...]

[너에게만 그런 게 아니야. 그 애는 누구에게나 그래. 나도 그렇고.. 그나마 고분고분한 건 곤도씨 정도? 그니까 조금만 이해하자.. 응?]

[....]

[소고에겐 내가 주의 줄게]

[그럼 대신 자주 데려오지 마세요]

[.. 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약속해야 해요? 흥. 그럼 저에게 뽀뽀해주세요]

[알았어.. 그니까 이만 화 풀자 응?]


그리고 그 이후엔 까르륵 웃는 쿠리코의 목소리와 히지카타의 목소리, 그리고 옷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전에도 그렇고 지금 이 순간에도 히지카타가 쿠리코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말뿐이고 형식적이기만 한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나긋나긋하게 들리는 이 음성들은 정말로 히지카타가 쿠리코를 사랑하는 듯이 달콤하게 말하고 있었다. 히지카타씨 히지카타씨.. 토시로씨.. 하고 부르는 쿠리코의 음성에, 그리고 히지카타가 쿠리코의 이름을 부르는 그 자상한 목소리에 미칠듯한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니야! 내가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어.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아니.. 그럴 수도 있을까?...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지금 지나치게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거다. 나는 듣고 있던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귀에서 뽑아서 내려놓고 창밖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를 자주 보기 싫다는 쿠리코의 말에 그래, 그렇게 할게라고 말할 수 있어? 네가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어? 네가 나를 감히 저 여자의 한 마디에 그렇게 할 수 있냐는 말이야.


내가 이런 더러운 기분을 히지카타와 쿠리코 때문에 느끼고 있다는 게 너무 화가 치밀어서 집에 들어와서는 멍한 기분으로 소파에 쓰러져 있었다. 밤이었으니 어두웠지만 괜히 창밖에 화려하게 빛나는 야경조차 보고 싶지 않아서 커튼까지 다 쳐버렸다. 나를 찝찝하게 보냈으니 분명 연락이라도 해야 할 히지카타는 여전히 나에게 문자도 전화도 없이 나를 방치해 두고 있다. 참다가 참다가 전화를 했다. 처음의 전화도, 두 번째 전화도 받지 않아서 도청장치 이어폰을 끼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소고 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계속 전화 오는 걸 보면..]

[.. 나오라고 하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이 저녁에.. 아까도 왔다가 갔으면서..  싫어요! 가지 마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닐 거야. 본인도 지금 뭔가 생각을 하고서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것 같아. 핸드폰 좀 줘. 응?]

[그렇다면 이런 저녁에 전화가 올 이유가 뭐가 있어요? 급하면 문자라도 넣어 놓지 않을까요? 분명 또 투정 부리려고 전화했을 거예요]

[... 아니.. 그래도.....]

[그럼 받아봐요]


쿠리코의 투정 부리는 듯한 말투 후에 히지카타는 전화를 받았다.


[어.. 소고.. 무슨 일이야?]


떨떠름한 히지카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대로 끊어버렸다. 그러자 5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히지카타가 '소고,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어?' 하고 달래려는 듯한 말투로 문자를 보내왔지만 전화를 하면서 들은 이 부부의 대화를 통해서 히지카타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꼼짝달싹 못하게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누나도 아니고, 나도 아닌 그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 억울했다. 



"어, 와 있었네? 커튼 때문에 밖에서 보니까 불이 꺼져있어 보여서 아직도 안 온 줄 알았어"


그 녀석이 와서는 조금 기분이 좋지 않은 내 옆에 털썩 앉아서는 무엇이 좋은지 활달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커튼은 왜 쳐놨어?"

".. 그냥"

"좋다. 앞으로도 쳐놓고 있자"

".... 마음대로 해"

"오늘은 더 까칠하네?"

"늦었어. 잘 거야"


이 녀석의 대답도 듣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는 불을 신경질적으로 껐다. 어두운 거실에서 이 녀석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깔아놓은 침구에 누운 나를 보더니, 그럼 나도 자야지 뭐.. 하고는 씻는다면서 샤워를 하러 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쉽게 잠들지 않는 내 상황을 탓하며 도무지 알 수 없는 히지카타의 머릿속을 한참이나 고민할 때에, 카무이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비누 냄새를 풍기면서 내 옆의 침구에 풀썩 누웠다. 내가 잔다고 생각했는지 별말없이 핸드폰을 잠시 켜서 보다가 다시 누웠다. 그러다 문득, 히지카타는 지금 이 시간에 뭘 할까? 자고 있겠지? 오늘 내가 봤던 그 커다란 침대에서 같이... 자겠지? 같이.. 같이.. 같이... 키스할까? 아니다. 히지카타는 성욕 같은 것도 눈곱만큼도 없는 성인군자 새끼니까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설마 쿠리코와 함께 침대에서 뒹구는 그런 더러운 짓을 했을 리가 없다. 결혼을 했다고 모두가 섹스를 해? 그런 건 아니다.


"야, 자?"


내 말에 카무이는 내 쪽을 바라보며, 뭐야 아직 안 잤어? 하고 물었다.


"응. 잠이 안 와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 다른 사람들 말이야, 결혼하면 섹스할까?"

"하하, 뭔 개소리야 갑자기?"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 결혼을 한다고 전부다 섹스를 해?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나는"

"뭐.. 하기 싫으면 안 하겠지 뭐.. 그건 결혼한 두 사람들의 사정이니..."

"그렇지? 꼭 다 그런 건 아니지?"

"... 그렇겠지 뭐.."

"섹스하기 전에 키스 먼저 해?"

"하기 나름이겠지 뭐,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고.. 도대체 이런 걸 갑자기 왜 물어보는 거야?"

"섹스하면 좋을까? 좋아서 하는 거야? 자위하는 것보다 좋을까?"


내 말에 카무이는 또렷이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웃으면서, 하고 싶은 사람과 하면 분명 좋겠지. 하고 웃었다.


"하고 싶은 사람? 그럼 사랑하는 사람이야?"

"싫은 사람과 살을 맞대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할 수도 있잖아"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

"카무이, 너는 좋아하는 사람과 해봤어?"

"해봤다고는 안 했는데"

"안 해봤어? 네 말투가 해봤다는 식으로 들려서"

"안 해봤다고도 안 했어"

"뭐야 재수 없어"


내 말에 카무이는 우습다는 듯이 웃었다.


"대답하기 싫은가 보네"

"아냐 이런 거 물어보는 게 너무 웃겨서 그래. 맞아 그런 게 궁금할 시기가 있지"

"... 어른인 척 대답하는 건 뭔데? 나 너랑 동갑이거든?"

"어쨌든 질문은 네가 나에게 했잖아?"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너였으니까 너에게 물어본 거야.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물어봤을걸?"

"아하, 그러시구나"

"응. 그래서 말인데"

"응?"


나는 그 녀석의 눈앞 가까이에 바짝 다가가서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그 녀석의 입에 가볍게 입을 한번 맞추고 말했다.


"나랑 한번 해볼래?"

".... 응?"


약간 당황한 듯한 이 녀석의 행동이 더 재밌었던 것도 맞다.


"물론, 네 의사는 나와 관계없어"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어두워서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잠에 취했는지,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입에 닿는 이 녀석의 입술이 부드러워서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 맞다 전에 내가 이 녀석에게 염산을 뿌렸던 적도 있었지.. 하고 갑자기 과거의 일이 생각나면서 조금 울적해지기도 했다. 이 녀석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이 집의 시끌벅적했던 추억의 정겨운 소음이 귀에 들리는 듯도 하였다. 카무이는 내가 반강제적으로 시도하는 키스에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그 이후에는 내가 하는 데로 놔두었다가, 그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키스를 시도해왔다. 끈적한 혓바닥을 한참을 서로가 맞대고 휘저었다. 미지근하고 미끄덩한 이상한 감촉이 왜인지 나를 조금씩 흥분시키는 듯도 했다. 카무이가 내가 입고 있는 옷에 손을 대자 나도 질세라 이 녀석의 옷의 단추를 풀었다. 위에 올라타서 왜인지 급하게 이 녀석의 목을 핥으면서 탄탄한 가슴과 배를 손댈 때에 이 녀석은 왜인지 웃었다. 그리고는,


"너, 생각보다 훨씬 귀여운 면이 있다"


하고 웃겨 죽겠다는 듯이 말하고는 그와 동시에 홱 하고 이 녀석과 나의 위치가 바뀐다. 


"뭐야? 놔. 주도하는 건 나야"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그리고는 내 위에 올라타서는 목덜미를 핥아온다. 닿는 이 녀석의 머리카락이 간질간질해서 기분이 좋았다. 귀와 목을 살살 핥아오다가, 나도 모르게 뱉은 신음에 나를 빤히 보았다. 그 눈길이 새삼스럽게 너무 당혹스러워서, 급하게 입을 틀어막자 막고 있던 손을 억지로 자신의 깍지 껴 부드럽게 잡으며, 왜? 더 크게 내도 좋은데. 하고 말하며 하던 행동을 계속했다. 나도 저항을 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복잡했던 머리가 새하얗게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점점 내려가서는, 가슴 부근을 혀로 핥다가 나에게 물었다.


"하아.. 오키타, 근데.. 계속해도 괜찮아?"

".... 싫다고 하면.. 하아.. 안 할 것처럼 이야기하네?"

"왜 그렇게 생각해?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야"


의외의 대답을 던지고는 정말로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을 것처럼 서로 윗옷을 벗고서 급하게 핥아대던 그 행동을 멈추고, 얌전히 내 위에 올라타서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자"

"좋다는 거야?"

"계속하자"


그러자 다시 내 몸에 입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만졌다. 분명히 내가 온전한 맨정신이었다면 계속하자고 말할 리도 없을뿐더러 말했다고 하더라도 그만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지금의 나는 맨 정신이 아니었다. 술을 마신 것보다 훨씬 더 좋지 않은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투른지 능숙한지 파악도 되지 않는 이 녀석의 애무가 싫지 않았다. 되려 좋았다... 



".....으읏..... 하, 아아,,ㅅ.... 아... 아"


거의 비명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내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고 그와 동반해서 카무이가 나의 몸에 접합시키고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 부분에서도 질척이는 기분 나쁜 소리가 끊임없이 들린다. 뜨거운 그 부분은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지만 조금 멍한 상태여서 그런지 지금 나에게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처음에 그 녀석이 자신의 것을 꺼내어 내 엉덩이에 가져다 댈 때는 조금은, 아주 약간은 무섭기도 했었지만 흉폭한 그 부분과는 다르게 나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생각보다 부드러웠으므로..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 그냥 가만히 누워 있는 게 편하네 하고 꽤나 수동적인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낮은 신음을 토하고서 내 배에 정액을 뚝뚝 떨어트리던 이 녀석은 나를 보더니 이렇게 물었다.


"... 싫어?"


내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을까? 대답을 하려는 찰나, 카무이는 나의 것을 손으로 잡고선 혀로 부드럽게 감쌌다.


"...아니.. 괜찮....앗.... 야.. 그런거 아니... 아아..ㅅ..."


따뜻한 입안. 그 미지근한 온도에 내 몸 안의 모든 열이 아랫배로 끓어 뭉치고, 이 녀석이 입안에 담고 있는 내 몸의 일부에 모든 신경이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일시적으로 머리가 띠잉 하고 울린다. 아, 아아아.. 조.. 좋아.. 나도 모르게 작게 내뱉은 작은 한마디, 포자가 톡 하고 터지듯 흩뿌린 하얀 정액.. 나를 핥던 그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하얀 액체를 입 근처에 살짝 묻히고는 잔뜩 상기되어 숨을 고르는 내 얼굴을 보며 씨익 웃는다. 내가 미쳤을까.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일이 끝나고 난 뒤에도 카무이는 나를 끌어안고서 목덜미에, 어깨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이 새끼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나 일단 나는 너무나 지쳐있었고 몇 번이나 그만해, 하지마 하고 밀쳐내었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어서 내버려 두었다. 이런 게 섹스구나. 하고 알게 되자 더욱더, 히지카타는 그 여자와 잤을까? 정말로 했을까? 이렇게? 하는 의구심이 갑작스럽게 몰아쳐 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온갖 매체들을 통해 알고 있는 섹스라는 개념보다, 실제로 경험해 본 것은 더욱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물론 히지카타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동시에, 나 지금 이 새끼랑 뭐 한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하는..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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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투명인간처럼 다니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귀는 있었기에 아이들의 말소리는 조금 듣고 있었다. 내 앞에 앉는 여자아이들의 시끄러운 수다는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들의 고민은 항상 연애 이야기였다. 고백을 할지 말지 고민이라는 이야기만 수백 번 들었다. 오늘 그 애랑 눈이 마주쳤는데 웃어주더라, 웃어준 거 보면 그래도 나를 조금은 좋아하는 게 아닐까? 카게야마군은 누구한테나 그렇게 웃어주던데? 아냐아냐, 혹시 몰라!... 얼마 전에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 줬더니 고맙다고 했단 말이야! 에이, 그거 누구한테나 그러는 거 아냐? 카게야마군이라면.. 잘은 모르겠지만 나한테 웃으면서 말해줬단 말이야!
 
그녀들이 말하는 카게야마 리츠는 옆 반의 조용한 학생부였다. 여자들이 이렇게 떠들썩하는 게 이해가 될 정도로 깔끔한 미소년 타입의 학생이었다. 복도를 오가다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을 뿐, 직접적으로 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분명 모두에게 호감을 주는 타입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나도 그런 '모두'라는 그룹에 평범하게 속해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자상하면서도 그 이상은 다가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확실하게 치고 있어서 모두가 섣불리 다가가지는 못했다.

등교를 할 때에 한 번씩 마주친 적이 있다. 학생부인 그가 아침에 선생님을 도와서 서 있는 날이면 반의 여자아이들은 모두 바짝 긴장해서는 조금 상기된 표정을 하고 교실에 뛰어 들어와서 엄청난 일이라도 생긴 듯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어떡해 어떡해 오늘 나 어때? 상태 별로지 않아? 카게야마군이 날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흠 내가 보기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저 상태일 텐데.. 뭐, 여튼 좋겠다, 잘생긴 새끼는 저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한 학급 여자아이들의 이야기 소재를 간단히 바꿔버리는구나.

다음날은 일부러 지각을 했다. 전날 여자아이들의 시끄러운 수다를 듣고서 그날도 카게야마 리츠가 지각을 잡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각을 하면 그래도 그가 내 이름을 물어봐 주지 않을까? 그럼 서로 한마디라도 나누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각을 했는데, 그는 내 얼굴을 보고는 홱 지나쳤다.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나는 그냥 통과였다.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나는 그에게 조금 화난 듯이 다가가서 말했다.

"저기, 나도 지각인데"
"...스즈키 쇼우지? 이름은 알고 있어. 다음부터 지각하지 마"

냉정하지만 조금은 친절했다. 그는 나에게 그렇게 딱 한마디 하고는 뒤돌아서 갔다. 선생님이 지각한 사람들에게 주는 벌을 나는 받지 않았다. 나 혼자서 교실로 돌아오면서 우리 반의 호들갑 떠는 여자애들처럼 나 역시 조금 들떠서는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하고 기분 좋은 얼떨떨함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학생부에게도 선생님들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 깨닫고 이내 시무룩해져서는 조용히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오기가 발동한 나는 내 존재감을 각인시켜주고 싶었는지 그가 교문 앞에 설 때마다 지각을 했다. 그래도 그는 항상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음부터 지각하지 마. 표정도 늘 똑같았다. 조금은 기분이 좋지는 않은? 여유를 띄고 있는 기분 나쁠 정도로 은은한 미소가.


"쇼우군, 학교는 어때?"

세리자와는 돌아와서 가방을 내려놓는 나에게 물었다.

"음.. 학교.. 뭐... 똑같지 뭐"
"다행이다. 혹시나 또 싸우고 오거나 할까 봐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적당히 친해야 싸울 일도 있다는 걸 전직 히키코모리인 세리자와는 당연하게도 모르고 있다.

"네가 왜?"
"사장님이 걱정하시잖아"
"그 새끼가 걱정은 무슨"
"아버지에게 그런 말버릇을 쓰는 게 아냐! 게다가 사장님이 얼마나 걱정하시는데"

세리자와는 내 앞에 와서는 친구는 누가 있는지, 뭐 관심 있는 여자아이는 없는지 등등 이상한 이야기를 물었다.

"친구가 되고 싶은 녀석은 있어"
"정말? 어떤 아이야?"
"음.. 조금 냉정해 보이는..."
"쇼우군의 마음에 들었다면 분명히 좋은 아이겠지. 궁금하다"
"..."
"그래서, 말은 해봤니?"
"아니 ..말도 못해봤어"
"그럼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면 되겠네"
"너 같은 히키코모리에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사장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것처럼.."

세리자와는 또다시 나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서, 마치 종교에 미쳐버린 지독한 신자처럼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장님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내 방에 전혀 겁 없이 방 문을 열고 들어오셨었어.. 그리고는 혼란스러워하는 나에게 이제 안심하라며.. 밖엔 비가 온다면서 우산을 내미시고는..... 아무도 믿지 못해서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하게 해주셨지.. 그때 봤던 사장님은 마치.....

"내 방에서 나가"

나는 그 덩치를 낑낑대며 밖으로 밀어내고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하굣길에 그를 기다렸다. 리츠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절대 세리자와가 말을 걸어보라고 조언한 것을 들은 것은 아니다. 세리자와가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할 계획이었다. 학생회 회의를 마치고 나서 정문을 나서는 그 녀석을 간신히 용기를 내어 붙잡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에 나도 모르게 완전히 쫄아버린 찌질이처럼, 저기.. 하고 말을 걸었다.
 
"그... 그니까 너랑 이야기를 좀 하고 싶어. 시간 좀 내 줄 수 있을까?"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생각보다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았다. 내가 느끼기로는 나의 이상한 행동들(허구한 날 지각에 잡혀서 풀려난다거나 하는) 때문에 리츠 본인도 내가 자신에게 언젠가는 이렇게 다가올 거라 예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카페에서 시킨 음료가 앞에 놓이고, 앞의 이 녀석이 잠자코 내 말을 기다리는 그 순간이 왜 이렇게 떨렸는지 모른다. 이상하게 초조해져서 실수로 주문해버린 맛없어 보이는 뜨거운 음료 컵을 만지작 만지작거리다가, 괜히 뒷머리를 쓰다듬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니까 별 건 아니고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해. 들어줄게"
"음... 그니까.. 그냥 너랑 조금 치.. 친하게..."
"... 친하게?"
"... 어... 밥도 같이 먹고.. 사이좋게.. 지.. 지내고 싶은..."
"내가 너랑?"
"..... 응... 아, 조.. .조금 뜬금없지? 하하..."
"왜?"

어째서 자신이 나와 그렇게 지내야 하냐는 질문엔 마땅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참 고민을 하다가 정신이 나갔는지 이상한 대답을 했다.

"나 초능력자거든"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내 앞에 이 성실한 학생부 학생은 분명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 그니까 방금 말은.."
"..... 저.... 정말?" 

"...응?"

"정말 초능력자야?"


방금 전까지 조금 까칠한 모습을 하고서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로 앉아 있던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내 말에 급 화색을 띠며 나에게 적극적으로 물었다. 정말이야? 초능력자? 그럼 숟가락을 구부릴 수 있어? 한 개 말고 여러 개도 구부릴 수 있어? 물건을 띄울 수도 있어? 철봉을 구부린다거나 강아지를 띄우거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허공으로 띄울 수 있어? 늘 냉정한 이미지의 이 녀석이 이렇게 눈을 빛내면서 질문을 하는 건 학교에서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정말이야? 보여줄 수 있을까?.. 신기하다..! 우리 형도 초능력자야! 초능력자가 또 있었다니.. 너 신기하다.. 나도 초능력에 관심이 많아. 나도 가르쳐 주면 안 될까?"

초능력을 가르친다니. 아버지가 데려갔었던 그 이상한 병동 같은 곳이 잠깐 떠오르긴 했지만 이렇게 기대에 찬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알겠다고 대답해버렸다. 진짜지? 고마워! 하고 내 손을 덥석 잡고서는 감격에 가득 차서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도 늘어놓았다. 내 앞에서 활달해진 그의 태도에 나도 기분이 좋아서 잠자코 들었다.

"초능력자인 우리 형은.. 본인의 힘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자신이 초능력자라는 것을 싫어해. 쓸모없다고 하고.. 하지만 그런 힘이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거야...! 나는 지금까지 쭉 형을 존경하고 동경하고 있어. 저기, 스즈키, 나.. 나도... 될 수 있을까? 형과 같은 초능력자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될 수 있어. 내가 있잖아"

나는 웃으면서 내 앞에 있는 숟가락을 시험 삼아 휘어 보였다. 광택을 내며 얌전히 놓여있던 숟가락이 힘없이 허공에서 휘는 것을 보며 그는 나를 더욱 빛내며 쳐다보았다. 리츠가 말하는 리츠의 형과 같이 나 또한 아버지가 집착하는 초능력이라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지만 관심 있는 상대의 환심을 이렇게 간단히 산 것에 대해서는 편리하다고 생각하였다.

"초능력자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약간의 영향은 받고 있을 거야. 게다가 네 형이 초능력자라면 너도 약간은 쓸 수 있지 않을까? 잠재되어 있을지도 몰라"
"... 정말 그럴까?"
"뭐.. 유전적인 영향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우리 아버지도 초능력자야. 나도 어릴 적부터 쓸 수 있었고.. 엄마는 초능력자가 아니었지만"
"그럼 나도 초능력자가 될 수 있을지 너희 아버지에게도 한 번 물어봐 주면 안 될까? 혹시 모르잖아! 너희 아버지는 알고 계실 수도"
"... 아버지? 아.. 뭐.. 그래 물어볼게"

그 이후로 내가 원하는 대로 리츠와 나는 친하게 지냈다. 반은 달랐지만 밥도 같이 먹고,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도 함께 했다. 주 대화는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계속 지켜봐도 안타깝게 그는 초능력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었다. 이런 말을 할 타이밍도 놓쳤을뿐더러, 괜히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한 희망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리츠는 초능력에 대한 자신의 소견이 아니면 형 이야기를 주로 했고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거나 세리자와를 삼촌이라고 칭하면서 세리자와 이야기만을 조금 하는 편이었다.


리츠의 형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리츠의 이야기만으로 나는 그의 형에게 약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리츠가 형의 이야기를 할 때는 세리자와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할 때에 느껴지는 약간의 병적인 신앙심이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봤을 때 리츠가 이런 성격일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지 못했다. 항상 꺅꺅거리는 여자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보는 그의 이미지는 냉정하고 침착한 이미지였기에 이런 그의 모습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모습을 알고 있는 게 나뿐일 거라고 생각하면 마냥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네 형은 어디 학교에 다녀?"
"우리 옆 학교 있잖아. 작은.. 그곳에 다녀"
".. 응? 그 학교는..."
"응 너도 아는구나?"

리츠는 별생각 없는지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지금껏 리츠의 이야기를 들은 나로서는 리츠의 형은 리츠와 닮아서 얼굴도 잘생기고(물론 리츠는 자신과 형은 전혀 닮지 않았고, 형은 앳된 외모에 자신보다 순한 인상이라고 말했었지만) 리츠와 비슷하게 조금은 냉랭한 분위기를 풍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도 잘하는 데다가 초능력도 쓰는, 그래서 초능력 같은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며 비웃는 엄청난 포스의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형이 다니고 있다는 그 학교는 성적이 최하위권의 학생들만이 들어가기로 유명한 학교였다. 그래서 학부모들이 모두가 기피하는 학교. 뭐, 나 역시 정말로 성적만을 두고 말한다면 리츠의 형과 함께 그 학교에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리츠에게 혹시나 형의 사진이 있냐고 물었다. 리츠는 웃으면서 사진은 많지만 모두 집에 있다고 말했다. 리츠에게 너의 형이 궁금하다고 말하자, 다시 웃으면서 형은 정말 멋있는 사람이야 하고 다시금 형의 대단함에 대해서 열거하는 것이었다. 우리 형은 어릴적 나를 지켜주기도 했고.. 화가 났을 때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만 나에 한정해서는 정말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야. 나는 우리 형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어...! 나는 세리자와와 겹쳐 보이는 리츠를 잠시 못마땅한듯이 바라보다가, 그렇구나 다음에 리츠의 형을 꼭 한번 보고 싶네. 하고 비꼬듯이 말했다. 비꼬는 듯한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리츠는 웃으면서 너도 아마 우리 형을 보면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버릴껄? 하고 웃었을 뿐이다.











-
저녁식사는 아버지와 세리자와, 그리고 다른 오초 멤버들과 함께 했다. 엄청 어릴 적 외에는 딱히 와본 적이 없지만 여전히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세리자와가 나에게도 같이 가자면서 잡아끌었기도 했고, 리츠의 질문이 나도 조금은 궁금해서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용한 집에서 둘이 이야기를 별로 해본 적도 없어서 여럿이서 그나마 조금씩 이야기가 오갈 때에 슬쩍 끼어들어서 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식사에 참석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많지 않았다. 본인이 먹을 음식은 세리자와가 알아서 주문을 했고 오초에서 그나마 말이 많은 시마자키나 하토리가 간간이 저들끼리 이야기를 했다.

"그나저나 쇼우군은 여기에 웬일이래? 원래 절대 안 오잖아?"

숨을 죽이고 있는 나에게 시마자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 너무 어릴 적에 와서 여기가 이렇게 비싼 식당인지 몰랐어. 친구들 통해서 들으니까 되게 비싼 곳이더라. 그래서 오랜만에 이런 비싼 곳에서 밥이나 먹을까 해서. 집에서 대충 해 먹는 건 항상 비슷하잖아"
"이런 식당을 아는 친구가 있단 말이야?"

시마자키는 눈이 안 보이는 녀석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목소리 톤 만으로도 내 감정을 귀신같이 잘 체크했다. 시마자키는 약간 당황했을 내 표정을 예상한 듯이 웃다가 다시 말했다.

"비싼 거 먹으려고 이런 곳에 왔다는 핑계는 좀 흔하네. 차라리 어린애답게 오늘은 아빠랑 같이 밥 먹고 싶었어요! 이런 거 하지그래?"
"... 그 입 좀 닥칠래?"

내 말에 시마자키는 뭐가 우스운지 키득키득 웃었다. 시마자키는 항상 말을 저런 식으로 조금 짜증을 유발하는 말투다. 재수 없는 새끼.
곧 고급스러운 하얀 접시에 담겨 두껍게 썰려 몇 조각 담기지도 않은 회가 몇 접시 등장했다. 웨이터들은 항상 한 손엔 위생상태를 증명해 보이듯이 새하얀 천을 받들고서 마치 식탁에 소리라도 나게 접시를 두면 큰일이라도 나듯이 조심스레 접시를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 식당은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에 10팀도 받지 않는 고급 레스토랑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 점이 커다란 장점이었다.

"세리자와가 맛있는 거 안 해주나 봐? 우리한텐 매일같이 와서 오늘 아침은 이거 해줬네 저거 해줬네, 하면서 자랑스러워하면서 이야기하던데"
"... 아, 뭐... 맛있지. 계란 프라이가 맛없는 거 봤어?"

내 말에 오초 모두 소리를 죽여서 웃어댔다. 옆에서 아버지도 조금 우습다는 듯이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버지의 표정을 잠시 살피던 나는 아버지에게 묻는 게 아닌 척, 오초에게 물었다.

"근데, 나 좀 궁금한 거 있는데 초능력 실험 말이야. 혹시.. 성공 한 적 있어...?"
"이야, 이제야 조금 사장님의 뒤를 이을 생각이 들었구나 쇼우!"

내 질문에 가장 감격을 하며 좋아하는 사람은 세리자와였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했다. 물론 우리와 함께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지. 전 세계를 통틀어도 초능력 실험에서 성공한 곳은 우리 '손톱'밖에 없다고! 전에 왔던 본부에서 계속에서 초능력자들을 만들어내고 있어. 다음에 또 보러 올래? 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좋아졌어! 세리자와가 나에게 장황한 설명을 하는 동안 나는 슬쩍 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아버지도 나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관심이 생겼는지 의문이구나"
"... 관심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궁금해서..."

그리고 대화는 끝이었다.
어쨌든 나는 아버지가 인간의 후천적인 초능력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리츠도 아버지의 병동에 가면 초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전에 그곳에서 봤던 그 이상한 광경들은 도대체 뭐였는데?










-
"성공한 사례가 있데. 후천적인 초능력 개발에 대한..! 어때 굉장하지?"

요즘 들어 계속 나와 다니면서 초능력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큰 기대에 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따라 리츠는 약간 풀이 죽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의 고민 끝에 리츠에게 조금이라도 활력을 불어넣어 줄 생각으로 어제 들은 내용에 대해서 일부러 더 활기차게 말했다.

".. 정말이야?"
"그럼!"
"어딘데? 그곳이"
"..."

그것까지는 말할 수가 없었다. 오초가 칭한 그 '본부'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아직 나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했을뿐더러, 거기에 있던 이상해 보이는 상태의 사람들 때문에 초능력을 어떻게 발현시키는 지도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잠시의 침묵 후에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거기까지는 모르지만 곧 알 수 있을 거야. 게다가 별것 아닌 곳에서 발현했다니까 생각보다 간단할지도 몰라. 초능력의 발현 말이야. 게다가 너 같은 경우는 초능력자인 형도 있으니 더 쉬울 거야"
"정말 쉬울까?"

"... 그..그럼 당연하지!"

"그래... 그럼 우리 뭐라도 해볼까?"
"..? 뭘 해보고 싶은데?"
"예를 들면..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키스라던가"
"...응?"
"왜 기적처럼 일어나는 거 있잖아. 그런 거... 일어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순진하다 너"
"가끔은 가장 순진한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잖아"

키스? 리츠가 초능력을 가지기 위해서 뭐라도 해보고 싶어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어도 난 전부터 줄곧 리츠와 키스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리츠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해 올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로써는 잘됐다 싶은 마음만이 훨씬 컸던 것이다. 해볼까? 하고 조심스럽게 떠보는 말을 꺼낼까 말까 하며 답지 않게 고민하는 나, 그리고 안전을 위해 세워져 있는 철조망 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리츠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한참 말이 없었다.

"리츠, 초능력을 가지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
"음... 글쎄.. 하고 싶은 건... 딱히..."
"그런 것도 없는데 왜 초능력이 있었으면 하는 거야?"
"..."
"내가 봤을 때 이미 너는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이잖아"
"스즈키 너, 사람들이 왜 꽃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해?"
"예쁘니까?"
"왜 예쁜데?"
"음.. 어려운데.. 그냥 봤을 때 예쁘니까..."
"그런 이유야 나도"

리츠는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야 나도. 하고 조금 씁쓸하게 웃어 보이던 리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나에게 가만히 다가와서는 입을 맞추었다. 바로 입술을 떼었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은 당황스러움 밖에는 없었지만 직후 얼굴에 잔뜩 몰리는 열이 지금 내 얼굴이 얼마나 가관인지를 알려주었다.

"아. 역시 이래도 아무 효과는 없네."

놀라움에 당황하는 나와는 다르게 한숨을 내쉬며 실망부터 하는 리츠를 보면서 나는 돌아가려는 리츠의 어깨를 잡고서 말했다.

"그건 키스가 아니니까"

나는 계속하자는 듯이 말했고 리츠도 싫지 않다는 듯이 나에게 다가왔다. 서서히 포개지는 우리 둘의 입술, 그리고 눈을 감는 찰나에 보이는 떨리는 리츠의 속눈썹과 검은 눈동자가... 장밋빛 태양의 빛이 침투해 빨간 빛이 파도처럼 울렁이는 그 눈동자가 너무나 예뻐서. 잔잔히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바람도, 서투르게 서로의 입안을 데우는 우리도.
내가 초능력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리츠와 가깝게 지낼 일은 없었을거라고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다시금 초능력이 있는 나의 천부적인 속성에 감사할 수밖에..

자연스럽게 혀로 핥고 서로를 침범해가는 우리는 조금 이상하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내가 이상해져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때의 나는 정말로 순수하게 리츠의 모든 것을 빨아먹고 싶어했다. 하지만 리츠는 나의 초능력을 가지고 싶어하는 만큼 나를 빨아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나도 리츠도 서로 좋아했다. 나는 리츠의 이런 면을 자세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관계였다는 것을 왜 이 때는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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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를 껴안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내 옷에 묻은 희미한 체취가 푹신한 침대와 더불어 나를 기쁘게 하였다. 리츠 냄새는 참 좋다. 재수 없는 시마자키가 뿌리는 스킨 향 향수처럼 독하지도 인위적이지도 않고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미네기시에게서 나는 소독약 냄새처럼 화학적이지도 않고.. 시바타에게 나는 땀 냄새처럼 지독하지도 않고 세리자와에게서 나는 아저씨 냄새처럼 거부감이 드는 것도 아니다. 같이 있으면 한없이 기분이 좋아지는... 그래서 나도 모르게 편하다, 하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창문 틀에 앉아서 마치 본인이 이 커다란 집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여유 있게 혼자서 돌아다니던 고양이는 이곳저곳을 배회하다가 마지막 지점으로 내 방을 선택했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조용히 내 방에 들어와서는 동그란 솜뭉치 같은 발로 펄쩍 뛰어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내 옆으로 폴짝 뛰어올라왔다. 따뜻한 곳을 찾아왔는지 내 옆에 와서는 배를 깔고 앉아서는 꼬리로 나를 가볍게 톡톡 건들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 좋다는 듯이 눈을 감는다. 그러고 보니 전에 리츠와 이야기하다가 내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고 하자 의외라면서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 응? 고양이..... 이름..?"
"...?"

내 반응에 리츠도 함께 당황해했다.

"뭐야? 설마 이름이 없는 거야? 그럼 도대체 뭐라고 불러?"
"음..... 딱히 부를 일이.."
"보통은 키우려고 데려오자마자 이름부터 생각하지 않아?"

그러고 보니 엄마는 그 고양이를 뭐라고 불렀던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 그냥 고양이라고 불러 나는"
"그럼 이름이 고양이인 거네? 특이하다 마치 사람의 이름이 사람인 것과 똑같은 거잖아?"

리츠는 뭐가 웃긴지 우스워했고 나는 이상하게 멍한 기분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나도 함께 웃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웃고 있는 리츠와 함께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어 보이기만 하였다.

벌떡 일어서서는 13마리가 담겨있는 햄스터 어항에 가서 한참 들여다보았다. 귀여운 햄스터들은 여전히 보드라운 허연 등을 동그랗게 말고서 조금씩 숨을 뱉으며 자고 있었다.
이 녀석들에게도 이름이 필요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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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기분이 좋았다. 기껏 찾아낸 그 녀석을 찾았고, 다시 오겠다는 말까지 들었기에 내가 취하려는 것을 거의 다 손에 넣은 포만감에 한껏 여유가 있었다. 오키타가 급하게 뛰어나가고 나서 슬슬 하루사메로 갔을 때 아부토는 나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왜 이렇게 들떠있어?"

"내가?"

"그래 보이는데? 뭐, 아니면 말고. 혹시 사고라도 친 건가 해서 물어보는 거야. 밤사이 조용한 걸 보니 별일은 없었던 것 같지만"

"넌 내 걱정 밖엔 안 하는구나?"

"그니까 좀 덜어주라 제발"

"어머? 7번대 꼬맹이는 또 지각이신가 봐"

카다는 나와 아부토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어서는 우리를 쳐다보곤 웃으며 말했다. 카다와 나는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묘한 심리로 우린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희미하지만 보다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현재 조직 안에서 날뛰고 싶지는 않기에 가급적이면 카다와 마주치는 것을 꺼리는 나와 달리 카다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조금씩 나를 자극하려 다가왔다. 기세등등한 살의라기보다는 재밌게 가지고 놀 장난감을 찾은 듯한 객끼였다. 카다를 보고 얌전히 인사를 하는 아부토의 태도도 나를 조금은 열받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녀가 스스로 자멸해서 누구보다 추악하게 망가지는 것이지만, 그럴 일이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조금은 짜증 나는 점이지만.

무시하고 지나가는 나를 보고는 카다는 조금 마음에 안 드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저런 노망난 노처녀와 놀아줄 정도로 착실하고 한가한 꼬맹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내 손에 피를 묻히기에도 부끄러운 육신이기에 집착하며 쫓고 싶지도 않은 그런 애매한 여자였다.

꼭 내 손으로 치지 않아도 이 여자를 치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재밌고 쉬운 것은 하루사메의 법을 어기게 만들어서 이 범죄조직의 배반자로 만들어 모두에게 쫓기게 하는 것, 조금 어려운 다른 방법은 공권력을 이용해서 이 여자를 잡아넣는 것이었는데, 이 방법의 경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공권력과 접촉하려면 우리도 적당히 사려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방법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루사메는 모두가 적당한 범죄를 가지고 있기에 그런 일에 대해서 서로를 딱히 협박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게 어찌 보면 관례 같은 법이었지만 사실 모두가 뒤에서는 다른 이들의 범죄를 증명할 자료를 숨겨가지고 있었다. 그 자료가 있어야 서로가 안심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 역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부토가 혹시 모르니 이런 자료는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좋다며,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있었다. 나에게 어때? 든든하지? 하고 나에게 씨익 웃어 보이던 얼굴이 갑자기 다시 떠오른다.




무시하는 나와 달리 붙잡힌 아부토는 카다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둘이 속닥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부토는 그런 카다와의 대화를 신경 쓰는 것도, 자신의 일도 바빴기 때문에 나에게 평소처럼 집요하게 신경을 쏟을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묘하게 들떠서 평소라면 예민하게 행동했을 사건도 웃으면서 넘겼다. 아부토가 바쁘지 않았다면 나의 이상한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알지 못했다. 이번에 나의 감은 정확하다.


이번에도 몰래 빠져나와서 그 녀석이 있을 집으로 향하던 도중, 어느 허름한 술집도 아닌 어떤 편의점 앞의 탁자에 홀로 앉아서 술을 마시는 익숙한 제복의 그 녀석을 발견했다.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인가 해서 주위를 지켜보아도 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누구와 있다는 것이 딱히 나와 상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술 먹는 거야?"

다가가서 묻자 이미 술을 거하게 마신 후여서 그런지 풀린 눈으로 조금 놀란 듯이 나를 보고는 뭐야, 너였냐.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먹을 거면 나 부르지"

하고 이야기를 하며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 널 왜 불러?"

"같이 먹으면 좋잖아"

"혼자 먹고 싶은 날이야. 꺼져"

"아 그래? 그럼 혼자 마셔. 나 앞에서 가만히 있을게"

술을 한잔 따라 주면서 말했다. 풀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행동이 우스웠다.

"뭐래 미친놈이"

한 입에 술잔을 털어 넣으면서도 딱히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도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그저 다 비운 술잔에 말없이 조용히 술만 따라주었다. 그렇게 있기를 두어 시간 후, 결국 취해서 싸구려 탁자에 쓰러진 이 녀석을 엎고 가야 했다.

"야 정신 차려봐"

술기운에 정신이 없는지 내 목을 꽈악 끌어안으면서 그 와중에 빨리 가.. 하고는 작은 욕설과 함께 중얼거렸다.

비워낸 술잔에 계속해서 술을 따른 것은 나였으니 이렇게 취해서 딱히 짜증이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너 진짜 짜증 나는 새끼야.."

"한두 번 듣는 소리도 아니고 뭐, 익숙하네"
 
"... 물론 내가아... 너에게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마안,... 네가 그렇게 사라질 줄은 잘 몰랐거드은......."

"......응?"

"아..., 몰라, 너 역시 진짜 싫어"

"..나?"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이 새끼야"

"... 나를 찾았었어?"

"항상 옆에 있었으니까..... 조금... 아 몰라, 열받게 이딴 거 물어보지 마"

"...."

"뭐해애  빨리 가아!! 나 집 가서 잘 거야!"

꽉 끌어안은 목을 보채며 조여왔기 때문에 알겠다고 말하며 걸음을 마저 옮겼지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식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생각 외로 이 녀석은 나를 조금은 기대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구심과 동시에 어릴 적 같이 보던 벽에 붙은 야광 별들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 기다렸을까?

아침에 나간 그대로 펼쳐져 있는 침구에 이 녀석을 눕혀놓고서 한참 옆에 앉아서는 쳐다보기만 했다. 이 기분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옆에 누워서 한참 머릿속의 정황을 정리하다가, 혹시 이 녀석은 내가 자신을 이상한 방식으로나마 사랑한다고 믿었을까? 그래서 기다렸을까? 혹시 나를 사랑하고 있었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에 어린애처럼 콩닥이며 설레기도 했다.










-
나이가 많은 사람, 혹은 약간의 신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전부 귀신같아서 아무리 감이 좋은 나라고 한들 피하려고 노력해도 피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원장을 요시와라를 나가자마자 그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지나가는 그 골목의 정면에서 딱 마주쳐버렸으니...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어릴 적 봤던 그 인상의 원장은 변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조금 하얗게 변하고 얼굴에 주름이 약간 늘었을 뿐. 세월이 아무리 지났다지만,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봤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생각에 시선을 돌리며 피하려는 나를 알아보고서는 잽싸게 내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잘 살고 있었구나. 연락이 아예 끊겨서 걱정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주먹에 쥐고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 이 원장 앞에서 나는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었다. 아부토가 옆에 있었다면 조금 허세를 부렸을지도 모르나, 마침 아부토도 없고 다른 부하도 없는 이런 기막힌 타이밍..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이 원장 앞에 가서 못 이기는 척 나름 건방지게 삐딱한 목례를 했다. 차분하게 묵직한 그 분위기도 여전했고 그 위압감도 여전했다. 이런 하찮은 여자 따위 내가 지금까지 잡아먹은 다른 어느 사람들과도 다르지 않겠지만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만으로 내가 감히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나를 압도하는.. 불편한 사람이다.

"바쁜 것 같지는 않은데 잠깐 이야기라도 하지 않을래? 이름은 아직도 카무이를 쓰는 거니?"

고개를 끄덕이자 반갑네 하고 중얼거리고는 살짝 웃어 보였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차라도 한 잔 마시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순순히 뒤따랐다.

원장이 안내한 카페는 낮이지만 어둡고 낡은 목제로 지어서 걸을 때마다 둔탁한 나무의 마찰음이 기분 나쁘지 않게 울리는 곳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할 골목에 위치한, 간판도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소박한 모습이 꼭 원장과 함께 있었던 고아원과 많이 닮아서 이 사람은 이런 곳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마지막에 갔던 가족들과는 어떻게 지내니?"
".... 지금은 따로 지내고 있어요"
"그렇구나"

점원이 커피 두 잔을 내려다 놓으려 오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점원이 자리를 뜨자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커피 맛이 괜찮더라. 네가 어릴 적 모습밖엔 생각이 안 나서 그런 것인지... 이렇게 너와 커피 같은 것을 마실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사실 너를 다시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
"..."
"아까 우산을 쓰고 있던데. 이유라도 있는 거야?"
"... 햇빛을 싫어해서요"
".. 그렇다면 더욱 이곳에 오길 잘했네. 햇빛도 없고"

그리고 원장은 손목에 찬 싸구려 손목시계를 몇 번이나 자꾸 확인했다.

"..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그럼 저도 이만.."
"일? 아니야.. 실은.. 널 만나서 카페로 오는 도중에 네 동생을 불렀어"
"동생이요?"
"카구라.. 생각나지?"
 "아...."

동생?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 모양이구나. 실종되어서 죽은 줄만 알았는데.. 살아있었어...! 얼마 전에 고아원을 찾아왔었단다. 어떻게 알았는지 네가 요시와라의 부근에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던데? 카구라는 너를 찾고 있었어"

사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서 누구인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침묵이 너무 놀란 탓에 나오지 않는 듯이 보였는지 원장은 뿌듯해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둘을 만나게 하는 매개체가 내가 되어서 정말 기쁘구나."
"아..... 네... 저도 만나고 싶었어요."
"카구라가 오면 내가 자리를 비켜줄게. 둘이 이야기 나누렴. 종종 연락도 하고.. 뭐.. 고아원에 있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으니 강요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희들이 어디에 가서든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커다란 바람이란다"

원장은 어째서인지 어울리지 않게 주름진 눈에 눈물까지 방울방울 맺혀 자기 혼자만의 감정에 취해서는 눈물을 보였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원장은 내가 떠나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를 궁금해했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 듣고 싶어 했지만 나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원장도 그 이후부턴 거의 묻지 않았다. 내가 여러 번 입양된 만큼 사람들의 눈에 내가 첫인상은 꽤나 좋은 편인 것 같다며 칭찬을 하기도 하고 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며 내가 느끼기에 조금 가식적으로 와 닿는 입발린 소리도 했다. 그런 이상한 이야기를 하며 15분 정도가 지났을 때에 뛰어왔는지 헥헥대는 숨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문소리만 들어도 요란스러운 어떤 여자아이가 조용한 카페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려보며 사람을 찾는 듯이 왔다 갔다 하다가 발걸음이 멎은 곳은 나와 원장의 테이블이었다. 그리고는 처음 들어올 때 왈가닥한 모습이 조금 진정되었는지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나와 원장을 보고는 갑자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이내 엉엉 울면서 정말 오빠가 맞아? 오빠가 맞는 거야? 하고는 소리 내어서 계속 울었다.

원장은 이 여자아이가 오자 눈물을 닦으라며 조금 달래주고는 둘이 이야기를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원장이 자리를 뜨고 나서도 내 앞에 앉아선 계속 말없이 훌쩍이던 카구라는 이내 진정되었는지 눈물을 닦고선 입을 열었다.

"오빠, 나 기억하냐 해?"
"당연하지"
"다행이다.. 내가 오빠를 혹시나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많이 불안했었다 해.. 다행이다... 다행이야..."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어. 반가워. 어떻게 살고 있어?"

어릴 적의 감정은 둘째치고, 동생이 반가웠던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물보다 진한 게 피라고, 내가 봐도 나와 비슷한 산호색 머리카락 색이라던가 파란 눈동자가 이상하게 나를 동요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상한 동료의식 이상의 감정을 작게나마 느꼈다.

"나는 해결사 사무실이라는 곳에 있다 해.. 이곳에서 해결사라는 긴쨩을 우연히 만났고 지금도 계속 일하고 있어"
"그 이상한 말투는 뭐니?"
"... 전에 중국 쪽 사람들하고 일했던 적도 있거든 그때 배운 말투가..."
"됐고, 그나저나 대단하더라. 내가 요시와라에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고 말이야"
"해결사 사무실을 무시하지 마라 해! 인상착의뿐으로 알아낸 것이지만.. 뭐 오빠인 줄 알고 찾았지만 아니었던 경우도 많았다해.. 비슷해서 가보면 오빠가 아니었거든"
"... 흐음"
"오빠, 어떻게 살고 있었냐 해?"
"..."
"요시와라에서 일하고 있는 거냐 해?"
"..."
"이름은 그대로 카무이라는 이름을 쓰는 건 맞냐 해?"
"..."
"근데 왜, 오빠 너의 정보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는 거냐 해?"
"..."
"역시, 떳떳한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보네"
"하하, 너야말로 사람 뒷 조사하는 일을 하는 거면 떳떳하고 당당한 건 아니지 않니?"
".. 우리는 나쁜 일로는 절대로 사람의 뒷조사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해! 게다가 긴쨩은 나를 구해준 은인이다 해!!"
"긴쨩?"
"응! 오빠! 이제 우리 드디어 만났으니까.. 같이 살 수 있다 해! 긴쨩도 오빠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나를 보면서 오빠를 궁금해했다 해! 꼭 만나고 싶다고 했어! 같이 살자!"
"내가 너랑? 왜?"

내 대답에 생기가 잔뜩 넘쳐서 말하던 카구라는 갑자기 표정이 확 굳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어릴 적부터.. 오빠와 내가 고아원이 아닌 밖에서 함께 사는 게 내 꿈이었다 해.. 그리고 그건 아직도 유효한 내 꿈이다 해!"
"네 꿈과 내 꿈은 다른 거잖아. 난 어릴 적부터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구나?"

확실히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생각 한 것은 어릴 적에 카구라는 내가 이런 말을 했을 때에 곧바로 울음을 터트릴 얼굴을 했지만, 지금 눈앞의 카구라는 새삼 냉정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시피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옅은 여유마저 느껴지는 그 표정을 보니 아부토가 저런 표정의 나를 보면 이렇게 한대 날려버리고 싶은 감정을 느끼고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눈 앞에 철부지가 이렇게 변한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나를 찾은 적도 없고, 이렇게 만난 내가 반갑지도 않고, 나와 연락도 하고 싶지 않은 거냐 해?"
"그건 아니야. 너무 반갑고 기뻐. 종종 연락하자"
"어떻게 지내고 있어?"
"친구랑 같이 살고 있어"
"그럼... 나 오빠랑 같이 살면 안 되냐 해...?"
"당연히 곤란하지. 이러다가 네가 내 친구를 죽여버릴지도 모르잖아"

실제로 카구라는 겉 보기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 순진하지 않은 분위기가 있었다. 커다란 파란 눈으로 같이 살고 있다는 그 남자에게 어떻게 자신을 데려가라고 마법을 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남자도 아마 감당 안 되는 이 왈가닥 여자아이 한 명에게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오빠, 알고 있어? 조심하도록 해. 나, 경찰하고 연이 닿아있다 해"
"우연이네? 나도야"
"... 에이... 뭐야 조금은 협박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것도 끄떡없다니"

카구라는 조금 미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만나자마자 멱살이 잡히는 바보 오빠는 아니니까"
"흠 내 기억이 잘못된 걸까.. 내 기억에 오빠는 항상 바보였는데"
"난 바빠서 가볼게. 잘 있다는 걸 봐서 이 오빠는 정말로 기뻐"
"나는 뭔가 슬픈데..... 오빠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해?"
"요시와라로 와. 너무 자주 오지는 말고. 난 바쁘니까. 그럼 먼저 간다"

먼저 일어나 걸어가는 내 뒤에 대고 카구라는 작게 말했다. 역시.. 오빠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그런 오빠가 너무 좋아...

너무 비슷하기에 우리는 조금 떨어지는 게 좋다. 카구라는 마녀를 화형 시키는 제도가 지금도 남아있었다면 가장 먼저 처형당 해야 할 마녀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뛰어난 마녀라서 처형단을 데리고 놀며 산 채로 집어삼켜도 아무도 마녀라고 생각지 못하는 그런 어마어마한..  그러니 저런 마녀는 되도록이면 조금 멀리 두고서 다른 사람의 손가락뼈를 오독오독 소리 내며 씹을 때에 노리는 것이 좋다. 그것이 마녀를 사냥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겠지만.


 







-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는 이미 너무 오래되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지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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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아쿠] 선택의 대가

2017. 3. 12. 21:13











묵직한 어둠이 반짝이는 별과 함께 내려 앉았다. 포트마피아의 밤은 여전히 시끄럽다. 옆방에선 간부인 나카하라와 코요가 와인을 한 잔씩 하고 있는지 나카하라의 술기운 도는 목소리와 고급 와인잔이 작게 챙,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이 울린다. 조용히 웃는 코요의 웃음소리와 더불어 나카하라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보아, 둘이 이야기하는 소재가 또다시 다자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자이 그 새끼는요 제가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죽여버릴 거예요..!

굳게 닫힌 나무 문을 열어젖히려 손잡이에 손을 대었다가 간부들의 대화에 급하지도 않은 보고를 위해 그들의 틈에 끼어드는 것은 조금 무례하게 느껴질까 싶어 서성이며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대화 소재가 다자이 였기에 돌아갈 수 없었다.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에 관한 이야기라면 무조건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들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드는지는 모르나, 다자이라는 이름 한 단어만으로 그의 모든 신경이 그 대화로 쏠리는 것은 그의 안에 다자이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문 너머에서의 대화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주의를 집중한 아쿠타가와가 듣기엔 충분했다. 누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다자이 그 새끼에게 놀아나는 것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고요, 제가 잡았다고 생각하면 그 새끼는 제 머리 꼭대기에 있다니까요? 다음에 만나면 진짜로 죽여버릴 거예요. 후후.. 여전히 사이가 좋구나? 흥, 이게 좋은 걸로 보이십니까? 아 참, 그리고 오늘 있었던 임무 말이에요. 보스는 그 임무가 그렇게 탐탁지는 않았던 모양이에요.. 그들의 대화가 다른 소재로 넘어갔을 때서야 아쿠타가와는 보고를 내일 아침에 하자고 결론짓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다자이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와 파트너를 맺었었던 나카하라에게 인호에게 느끼는 질투와는 조금 다른..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질투라고도 할 수 있고 열등감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상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그 마음을 감히 질투라고도, 열등감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미묘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코 질투...는 아니었다. 다자이에게 저렇게 함부로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감히 견습생 주제가 간부급에게 질투라거나 열등감같이 추잡한 감정을 느끼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카하라가 다자이에게 놀아나며 다자이에 한해서는 물렁해 보일지 몰라도 어찌 되었든 간부라는 직책의 사람이기에 아랫사람에게는 가차없고 냉철한 성격이었다. 아쿠타가와는 그런 나카하라에게 항상 조금은 겁을 먹고 있다. 전에 자신의 상사로 있었던 다자이와도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다자이를 향하고 있는 그의 여러 가지 뒤섞인 감정은 모두 인호에게 향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약하고 잘나지도 않은 그런 녀석에게 자신에겐 그렇게 가차없던 다자이가 주는 그 다정한 시선을 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치욕이 곁들어, 볼 때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린다. 어째서 다자이는 탐정단의 그 호랑이 녀석에게는 우수하다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에 대해서는 항상 날카로운 말들만 던지시는가... 실제로 인호와 싸워본 적도 있었지만 결코 그 녀석에 비해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화가 치미는 것이었다. 차라리 나카하라처럼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의 차이가 있었다면 의외로 쿨하게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다자이라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포트마피아로 잡아 왔을 때도 그랬다. 그 여유 있는 표정과 흥얼거리는 콧노래.. 다른 이들이 그곳에 감금되었을 때는 제아무리 자존심 세고 잘난 사람이라고 한들 이빨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다른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떨곤 했다. 하지만 그는 곧 닥쳐올 시커먼 죽음이 눈앞에까지 왔을 터인데도 웃어 보이는 여유 만만한 표정과 그 눈빛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사실은 오래간만에 재회한 부하인 자신에게 조금 더 따뜻한 말을 바랐기에 더욱 억울하고 답답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아쿠타가와의 마음을 다자이는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으리라. 일부러 내뱉듯이 꽂아 넣는 그의 비수는 맞을 때마다 너무도 무겁게, 그 어떤 공격보다 그를 휘청이게 하는 것이었다. 화가 나서 주먹을 휘둘러댔지만 다자이라면 자신이 던진 비수에 맞고 움찔하는 그의 몸부림이었다는 것조차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소생에게는 잔인하신 것입니까?

그는 조용한 방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노트를 펼쳤다. 그 노트는 어찌나 많이 봤는지 이미 너덜너덜했고, 안엔 서투른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인호에 대해 알아본 정보와 자신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치밀하게 비교하고 있었다. 그가 모은 정보는 이미 거의 완성되어 있었으며 바로 전날 분석을 끝냈다. 그와 인호는 별 차이는 없었다. 강한 것도 아쿠타가와 본인 쪽이 더 강했고 눈에 또렷이 보이는 차이라면 한 가지였다. 인호는 포트마피아가 아닌 것. 그리고 자신은 아직 포트마피아에 속해 있는, 모두가 말하는 악당 집단의 수족이라는 것이었다.

다자이 역시 몸담고 있던 포트마피아를 떠나지 않았는가.

사람은 누구나 변하지 않으면서도 변하는 생물이다. 다자이 역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자신의 악한 본성을 억누른 채로 탐정단에서 서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역시 못할 이유란 없다. 다자이씨는 이 포트마피아 족속들을 다 싫어하는 거야...! 보스도, 나카하라씨도, 나도, 코요씨도 모두...! 이 살인 집단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비린 시뻘건 피 냄새를 극하게 증오하고 있는 것이리라. 아쿠타가와 자신에게도 이미 쩔을 대로 쩔어서 씻어도 씻어도 씻겨나가지 않을 악취가 베여있었지만 그것은 다자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인호와 자신의 그 확고한 차이점에 대해서 확신하고 인정하며 아쿠타가와는 인호에 대한 자료를 모으면서부터 어렴풋이 짐작하며 고민했던 문제의 고민을 끝냈다. 포트마피아를 나가자..! 물론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모하고 성공 할 거라는 보장도 없으며, 최악의 경우에 받는 고문이나 사형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서라도 그는 다자이에게 상냥한 한마디를 꼭 듣고 싶었을 뿐이다. 표현이 서투른 자신이기에 상사로 있었던 그에게 항상 멋대로 날뛰며 제대로 말해 본 적도 없지만 이제 동등한, 인호와 동등한 입장에 서서 그에게 꼭.. 인정받고 싶다.. 그것만이 현재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과거에 그와 두터운 친분을 쌓아가고 있던 오다사쿠라는 그 말단의 죽음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그 영향으로 다자이 역시 지금의 아쿠타가와처럼 변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현재 죄목이 겹쳐있는 아쿠타가와는 이런 상황에 자신이 도망치게 된다면 이 조직의 전체가 자신을 잡으려 혈안이 될 것을 안다. 만약 이곳에서 나가서 도망치다가 다자이를 만나지도 못하고 잡혀 사형당하면 어떻게 하지..? 그것은 최악이다. 아쿠타가와는 고개를 흔들며 방을 왔다 갔다 하다가, 다음 날 저녁, 용기를 내어 간부인 나카하라를 찾아가기로 했다.




나카하라는 보스와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본인이 아끼는 와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벽에 가만히 진열되어 있는 와인. 주로 핏빛을 말갛게 띄운 와인이 전시되어 있는 그 진열장은 얼마나 열심히 관리를 했는지 먼지 하나가 없이 깔끔했다. 나카하라는 말버릇과 행동, 습관 모두 조금 과격한 편이었지만 좋아하는 다른 것들은 주로 얌전하고 기품이 느껴지는 것들을 좋아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와인의 연도를 확인하는 그의 뒤에 서서는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나카하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는 어, 아쿠타가와구나. 하고 말하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야, 보고인가? 해"
"... 임무는 완수했습니다. 잡은 포로들은 어제 지하의 감옥에 가두어 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보통이라면 나가보겠다며 인사를 하고 나가야 할 그가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자 이상하게 생각한 나카하라는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뭐야? 끝이 아닌가?"
"... 저. 드릴 말씀이..."
"원래 나에게 할 말이 그렇게 많았던가?"
".. 아닙니다. 하지만.."
"해봐"

나카하라는 조금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 소생은 포트마피아를 나가려 합니다"

한참 와인병을 익숙하게 살펴보던 그는 놀란 듯이 아쿠타가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직후 조용히 변하는 그 표정은 도무지 읽을 수 없었기에 아쿠타가와는 눈을 잠시 마주쳤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 그걸 나에게 말하는 이유가 뭔가? 잡아달라는 건가? 아니면 죽여달라는 건가?"
"... 아닙니다."
"말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은데 계속해보게"
"이런 말을.. 나카하라씨에게 해도 될지 사실 감이 오지 않습니다만 사실 ...소생은 다자이씨를 존경..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자이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지금까지 줄 곳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최근 몇 번 다자이씨를 마주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흐음. 뭘 깨달았는데?"
"다자이씨가 저를 그렇게나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유, 아니, 싫어하시는 이유...는 역시 제가 포트마피아 안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새 깨닫게 되었습니다.."
".. 그런가? 그래서 포트마피아를 나가겠다? 그렇게나 다자이를 생각하고 있었나? 하여간 다자이 그 새끼는 진작에 죽여버렸어야 했어. 그 새끼 때문에 조직을 배신하고 나간다는 사람도 나오고 말이야"
"...... 소생은 죽음이 두렵지는 않습니다만.. 다자이씨와 만나서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정말이지 개 죽음이 될 것 같아 너무 두렵습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여기에서 도망친다면.. 아마도 소생을 잡으라고 명령을 하게 되실 분은 나카하라씨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소생에게 약간의 시간이라도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나카하라는 그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피식 웃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지 박장대소를 하며 웃어댔다. 아하하하 아쿠타가와, 자네 원래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었나? 아하하하하 그는 무엇이 우스운지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그의 앞에 저벅저벅 걸어왔다. 당연하겠지만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다. 나카하라는 다가와서는 아쿠타가와의 멱살을 움켜쥐고 말했다.

"자네, 잘 알고 있구만.. 그 말을 나에게 꺼낸 순간부터 이미 자네는 배신자야.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을 생각해서, 내 특별히 조금은 사정을 봐주도록 하지. 이틀 주겠네. 이틀 후에 나에게 잡혔을 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참 궁금하구만. 그럼, 빨리 내 앞에서 꺼지는 게 좋지 않을까?"

밀치듯이 과격하게 그의 옷자락을 놓은 나카하라는 그를 향해서 여유 있게 웃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그때 나에게 잡히면 꼭 다자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알려주게나"

웃으며 스르르 변하는 표정을 보며 아쿠타가와는 그 말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려서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려던 말은 이미 뱉었다..! 나카하라에게 포트마피아를 떠나겠다고 통보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간도 벌었다. 하지만 역시 저렇게 말해놓고도 뒤에서 곧바로 자신을 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포트마피아의 간부가 아닌가? 게다가 이 조직의 최고의 체술을 구사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변덕이란 알 수가 없다고, 갑작스러운 찰나에 마음이 변해 자신을 잽싸게 쫓아올지도 모른다.. 달아나는 그의 발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꾸만 힘이 풀려오며 꼬이기 시작했다. 아쿠타가와씨 저기 다음 임무가.. 하고 아래의 부하들이 성급하게 나가는 아쿠타가와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것조차도 두려웠다. 이들에게도 이미 자신이 조직을 배반한 배신자라는 게 다 퍼졌는지도 모른다. 이... 이거 놔! 그는 자신을 붙잡는 부하들의 팔을 마치 미친 사람처럼 성급하게 뿌리치고는, 지나가는 조직의 말단들이 인사를 해오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두 시간 후, 발신자가 표시되지 않은 번호로 나카하라에게 연락을 받았다.

[아쿠타가와, 다자이는 잘 찾고 있나? 네 직속 후배인 히구치는 오늘 처형 예정이지만.. 혹시 이틀 후에 같이 집행당하고 싶다면 그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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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점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조직 안에 있을 때는 정보를 조사하는 조직원들이 많았기에 찾아내기도 쉬웠지만 이젠 뭐든지 본인이 혼자 해가야 하는 것이다. 전에 조직에 있을 적에 알고 있었던 탐정단의 거점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 보아도 이미 거점을 옮긴 그들의 전 사무실은 휑하니 쓸모없는 이면지들을 휘날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갑자기 느껴지는 후회, 탐정단이 존재하는 거점이라도 알아낸 다음에 통보를 할 걸 그랬나..? 그래봤자 이미 늦었다. 이미 마피아를 배신하겠다고 통보했고, 죄 없는 직속 후배는 자신의 아래에서 자신을 막지 못한 죄를 물으며 고문을 당하다 결국 자신과 함께 처형 당할 것이다. 항상 다자이가 말했던 그의 최고의 단점. 자넨 너무 극단적이고 공격적이며 성급하네. 그것이 지금에서야 커다랗게 그에게 사무치는 것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이틀.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무엇이라도 해보아야 한다. 문득 떠오르는 장소, 예전에 다자이가 친구라 칭했던 오다사쿠라는 말단과 함께 자주 갔었던 그 술집에 찾아가 보았다. 오래된 술집은 앞에 뽀얀 먼지가 쌓인 네온사인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다행히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미 낡을 대로 낡은 그 술집은 운영은 하고 있었지만 단골로 자주 오는 손님 몇 명이 올 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충 한 잔을 시키고 기다렸지만 역시나 다자이는 오지 않았다. 주인에게 조심스레 묻자, 인상이 좋아 보이는 주인은 몇 년 전에 오시고는 그 이후로는 전혀 오시지 않으시던데요? 하고 웃으며 답했다. 아직도 강에 뛰어내리는 것을 특기로 삼고 있지는 않을지, 해서 강 근처를 서성여 보기도 했다. 하지만 강 근처에는 하하호호 웃으며 운동을 하는 가족단위의 사람들만이 돌아다니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 씨발 세상 참 한가하고 평화롭네? 답답하고 막막했다. 도대체 어디에 가서 그를 찾아야 하는지 전혀 감도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의 이능력은 이럴 때엔 전혀 필요도 없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다자이가 조롱하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머리 좀 커진 모양이야? 지금이니까 말하지만 자네를 교육하는 데엔 애 좀 먹었지 알아듣기는 지지리도 못하지, 독단 선공만 해대지, 덤으로 그 고물딱지 같은 능력 말이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존경이라는 단어와는 다른 느낌인 것 같았다. 그는 다자이가 자신과 동등한 누군가를 바라봐 주고, 친근하게 대해준다는 것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증오를 느껴왔던 것이었다. 전에 알고 있었던 다자이의 친구인 오다사쿠도 그러했고, 지금의 인호도 마찬가지였다. 포트마피아를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에 나카하라가 비웃듯이 자네 그렇게나 다자이를 생각하고 있었나? 하고 말했던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니 아니, 분명히 그럴 리는 없지만.. 다자이는 분명 매력적인 사람이다. 우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가 교육할 적에 힘들었다고 말한 것만큼 아쿠타가와 역시 그를 알 수 없었기에 방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이 일방적인 그리움은.. 어떻게 정리해야 좋을지 모르는 퍼즐 조각처럼 정리되지 않는 것이었다.

새벽까지 하염없이 반짝이는 거리를 떠돌던 아쿠타가와는 잘 곳을 찾다가 차가운 밤의 이슬을 피하기 위해 노숙자들이 우글거리는 쾌쾌한 다리 아래의 한 틈에 끼어들어서는 몸을 웅크리고서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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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없이 하루를 쓰고 이제 남은 하루.

눈을 뜨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다자이가 서 있다. 아쿠타가와? 이런 곳에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하고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다란 손을 내밀어오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을 꿈꾸며 찌르는 햇살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을 같이 지세웠던 노숙자들이 자리를 옮겨 텅 비어 있는 휑한 강변만이 드넓게 펼쳐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그런 기가 막힌 우연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다자이를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고 죽어버릴 것이다.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아쿠타가와는 다자이를 만나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하면 포트마피아에게서 자신을 지켜줄지도 모른다는 옅은 기대를 서서히 품고 있었다. 다자이는 위기에 처한 자신을 모르는 척하지 못할 것이라는 그 이상한 확신..! 포트마피아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보고 웃으면서 포트마피아에서 나올 정도로 굳은 의지를 품었느냐며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면서 웃어주는 모습을 본다면.. 정말이지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이 기쁠 것 같았다. 아니면..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동반자살..! 서로 목을 졸라도 좋고 함께 너무 파랗다 못해 속이 검은, 물의 온도마저 살이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강에 뛰어들어도 좋다. 죽기 직전까지 서로를 꼬옥 끌어안고서 서서히 숨이 멎어가는 것.. 태양의 옅은 빛이 비치는 그곳에서 서로를 바라보면 그 무엇보다 낭만적일 것이다. 아니면, 함께 손을 잡고 가장 높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 올라가는 것도 좋다. 손을 잡고 함께 탄 엘리베이터에서 마지막까지 조용한 적막과 함께 고요히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고요한 소음만이 잔잔하게 울릴 것이고, 맞잡은 손의 온도는 가장 높은 온도일 것이다. 건물의 꼭대기에서 마지막 도시의 풍경을 함께 천천히 감상한 다음, 입이라도 맞춘 후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다면...! 흘러내리는 자신과 그의 뇌수를 마지막까지 지켜보며, 서서히 눈을 감더라도 그 붉은 선혈과 그의 적갈색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보며 서서히 사라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죽음이 아닌가....


입을 맞춘다... 라...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다가도 잠깐 상상했던 그 염상이 너무나도 강하게 남아버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었다. 그 정리되지 않은 그리움. 그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었는가?






이미 위험인물로 수배 중인 그는 경찰서의 도움 같은 것은 절대로 받을 수가 없는 위험인물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기에 제대로 무엇 하나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의 반나절이 지나가자 포트마피아의 말단들이 그를 찾아내어 포위했다. 포트마피아 내부에서 그를 잡아오라는 지령이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단들만을 보냈다는 것은.. 나카하라 본인이 직접 움직이는 시간은 아마도 반나절 이후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명령을 내린 것은 아마 보스의 눈치를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말단 놈들은 자신이 움찔하기만 해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 꼴사나운 태도들을 보였다. 그런 그 말단들을 뒤로하며 다시 또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다자이를 찾아 나섰다.

몇 시간이 남지 않자 그는 완전히 초조함에 먹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혹시나 우연이라도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에 지나가는 아무나를 붙잡고는 혹시..! 다자이 씨를 아시나요? 다자이 오사무라고.. 긴 베이지색코트를 입고 다니는..!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구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두들 그런 그의 행동에 놀라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거나 경찰에 신고해서 경찰에 포위당하기 일쑤였다. 베이지 색상의 코트를 입은 사람이라면 아무나 붙잡고 다자이인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애타게 찾는 다자이는 그의 눈앞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아, 틀렸어. 이대로는 안돼..! 시간을 더 벌어야 했다. 나카하라는 분명히 무서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지만 맞붙었을 때 운이 좋다면 도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은 무모할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며 그는 서둘러 주위를 정신없이 헤매기 시작했다.


자정이 되기까지 2시간이 남았다. 새까만 밤 하늘이 무심하기만 하였다. 결국.. 이렇게까지 포트마피아를 탈출했는데도, 하늘은 다자이와 만나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숨을까? 어디로? 그래봤자 포트마피아는 금방 찾아낼 것이었다. 혹시 발신기나 추적장치가 붙어 있을까 무서워 모든 옷을 다 털고 뒤져보기도 했지만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포트마피아의 검은 눈동자는 항상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예리한 바늘로, 단번에 노리는 먹잇감의 숨통을 끊었다. 항상 실행해왔던 그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 이제 끝났구나.. 하루 종일 경찰에 둘러싸이고, 포트마피아의 말단들에게 둘러 쌓이기를 반복한 그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터덜터덜 걸어 눈앞에 바로 보이는 공원의 벤치에 털썩 앉았다. 거친 숨과 함께 다자이씨.. 다자이씨.. 하고 신음처럼 다자이의 이름만을 반복해서 부를 뿐이었다.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 중에 다자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나타나지 않을 것이지만..

얼마 후, 저벅저벅하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었다. 시간을 보자 11시 49분. 벤치에 앉은 그의 뒤에서 어깨를 탁하고 잡는 그 손에 살기가 어려있는 것을 느끼자 돌아볼 필요도 없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나카하라였다.

"... 꼴이 말이 아니군그래. 그래서 다자이를 만났나?"
"... 만나지 못했습니다"
"역시"
".... 나카하라씨......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면...."

"..."

"이대로는.. 안됩니다... 저 다자이씨를 꼭 만나야....."


나카하라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다 죽어가는 병자처럼 더듬더듬 말하는 그를 보며 담배를 하나 꺼내어 불을 붙였다. 그런 나카하라를 바라보며 아쿠타가와는 다시 물었다.


"....혼자 오셨습니까?"

애써 여유 있는 척을 해보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서서히 잠식한다는 그 쎄한 느낌은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면 뭐 도망이라도 치게? 그런데 어쩌나. 혼자가 아닌데"

나카하라는 무엇이 우스운지 쿡쿡 웃었다.

"나도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 남은 몇 십분은 쉬고 있으라고"

나카하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벤치를 뒤로 한 후에 공원의 어둑하게 으슥한 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쿠타가와가 자신을 버려두고 가는 나카하라를 보고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뒤쪽에서 갑자기 나카하라가 아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츄우야~ 여기 있지? 담배 피우는 거야?"

벤치의 뒤에서 들리는 그 익숙한 음성. 그건 그가 그동안 애타게 찾아 헤매던 다자이였다. 벤치의 등받이 때문인지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듯했다. 일부러 불러준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본 그는 그 모습으로 만으로도 얼어버렸다.

맨날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그 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에게 항상 엄하고 심한 말만 하던 다자이는 나카하라 앞에서는 있는 대로 흐물흐물해져서는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츄야 무슨 일 없었어? 와인 마실 때 다음엔 나도 불러야 해! 취하고 나서 전화하는 것도 좋지만 말이야~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다자이와, 좀 닥쳐봐 하고 무심하게 담배를 피우는 나카하라..

그런 그 둘을 바라보는 아쿠타가와는 그 모습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그나저나 네놈,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츄야가 있는 곳은 내가 항상 알고 있다구"
"잘 왔어. 너 만나고 싶다는 새끼가 있어서"
"누구? 설마 자살할 생각이 있는 미인을 알아봐 준다더니 알아봐 준 거야? 이제 미인은 됐는데"

다자이는 나카하라의 허리를 감으면서 가만히 있으라는 나카하라의 저항에도 계속 장난으로 받아들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렇게 웃는 다자이를 아쿠타가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저렇게 웃어주기도 하는구나.. 하고 넋을 잃은 듯이 바라보는 그의 앞으로 나카하라는 다자이를 끌고 왔다. 벤치에 있는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나카하라의 옆에서 츄야~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이대로 자살하러 가는 거야? 강? 아니면 산? 하고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끌려오는 그는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아쿠타가와와 눈이 마주치자 방금 전 실없는 바보 같은 표정에서 곧 서서히 표정이 굳어졌다.

"... 아쿠타가와?"
"아... 다... 다자이... 씨...!"
"... 뭐야? 츄야. 왜.. 아쿠타가와를.."
"오늘 연행해 가야 할 포트마피아의 배신자야."
"흐음.. 그렇게 되었어?"
"꼭 너와 이야기는 하고 나서 끌려가고 싶다길래. 하, 난 정말 마음이 넓다니까"

나카하라는 아쿠타가와에게 웃으면서 자신은 담배를 피우고 올테니 둘이 이야기를 나누라고 말했다. 다자이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쿠타가와에게 자신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 내키지 않는 표정은 나카하라와의 시간을 방해했다는 귀찮음에 빨리 말하고 끝내라는 암묵적인 공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아쿠타가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잡은 모든 방향은 틀어져 있었으며 이미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포트마피아를 나왔습니다. 이제 저도 이런.... 뒷 세계 조직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려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저도 인호처럼 되고 싶어서.. 다자이씨에게 조금이라도 눈길을 받고 싶어서.....라고 말을 하려고 준비를 했었지만 다자이가 마음이 향해 있었던 것은 나카하라였다는 것을 알아버리자 이 모든 것이 소용이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무심했던 것은 자신이 포트마피아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조직을 배반했고, 자신을 잡으러 온 조직의 자객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끼고서 여유 있게 나타났다. 아쿠타가와는 자신의 앞에서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을 보이는 다자이에게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저... 다자이.. 씨... 어떻게 했으면.. 소생을.. 조금은 마음에 들어 하셨겠습니까..."
".. 마음에 들었겠냐고? 흠... 글쎄...."

다자이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성의 없게 대답했다.

"..... 포트마피아를 나오면... 다자이씨가 저를 조금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해서..."
".. 내가? 나 때문에 나온 거야?"
"... 저, 다자이씨를 줄곧 사..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저의 상사로 계실 적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은 봐주실까 생각도 많이 했고.. 잘 모르셨겠지만...."

떨면서 말하는 그의 앞에서 다자이는 그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고, 당황하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로 서서 벤치에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따스한 눈빛은 아니었다. 전에 교육을 받을 때에 주먹을 날리며 총을 쏘던 때와 같이 얼어붙은 시선이었다. 일방적인 선택의 대가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다. 그렇다. 다자이는 한 번도 그에게 포트마피아의 일원이기에 싫다고 말한 적은 없었으며, 이런 커다란 선택을 하면 조금은 너를 좋아해 주겠다는 언지를 준 적도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다자이는 그가 어떤 행동을 어떻게 했던지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쿠타가와가 얻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행동과 노력을 통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화는 끝났나?"

나카하라는 그 둘에게 천천히 다가와서는 말했다. 다자이는 옆에 온 그를 보며 헤벌레 웃으면서, 응 끝났어~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가자 아쿠타가와"

나카하라가 전화기를 들자 거대한 수송차량이 다 때려 부술 기세로 빠르게 달려와서 대기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찾던 다자이가 아무 표정 없이 팔짱을 끼고서 잡혀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며 이제 죽음이고 뭐고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힘이 쭉 빠진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정신만이 아득하게 외칠뿐이다. 왜 애초에 얻을 수 없는 사람의 밑에 소생을 두시어 저를 이렇게 나락으로 끌어내리셨습니까. 그리고 감히 질투조차 용납되지 않는 거대한 상대를 그의 애인으로 두시어 비참하게 하십니까. 차라리 마지막까지 만나지 못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저를 데려가시지, 어째서 더 절망적으로 그가 사랑할 때에 어떤 표정을 짓는지까지 보여주시고 소생을 끌어내리십니까.

 덜컹거리는 수송 차량에서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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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미야. 츄야. 저 상태의 아쿠타가와를 왜 나에게 데려온 거야?"
"내가 데려왔다니? 말은 바로시지, 네가 온 거잖아"
"너와 아쿠타가와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쿠타가와까지 만날 생각은 없었어."
"뭐.. 불쌍하잖아. 사랑하는 너 새끼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목숨도 아깝지 않으시다면서 죽을 각오까지 하고 포트마피아에서 나간다는데. 너를 보지 못하고 죽으면 개죽음이 될 것 같다잖냐"
"말해주지 그랬어? 마피아인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고"
"마음은 넓지만... 알다시피 그렇게 자상하진 않아서"

다자이는 피식 웃고는 나카하라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알고 있었구나? 아쿠타가와 그 녀석.. 나 엄청 쫓아다녔어. 네가 준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나 찾는 답시고 정신 잃은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거 보고 정말이지 눈물 없인 바라볼 수가 없더라. 아하, 그러셔? 나도 봤어 아주 가슴이 미어지던데 그래?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앞에 나타나주지 그랬어? 맘에도 없는 소리 하네? 그랬으면 츄야가 바로 낚아채갔을 거잖아. 다자이는 씨익 웃었다. 나카하라는 기분이 좋지 않다면서 다자이의 팔을 툭 쳐냈고 다자이는 웃으면서 뭐야아, 원하는 데로 한 건데 왜 그래? 하고는 다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쇼우리츠] 햄스터 01

2017. 2. 27. 00:3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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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버지의 말다툼 소리는 어릴 적부터 지겹게 들었다. 상냥한 엄마는 내 앞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고, 낮에는 애써 웃으면서 아버지를 대했지만 내가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문을 닫고 들어간 안방에서는 둘의 답 없는 말다툼 소리가 하루 종일 들리었다. 엄마는 내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지만 고요한 밤의 소리는 꽤나 명확하게 들렸기 때문에 잠들기 직전까지 둘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에 들었다. 엄마는 왜 사람들에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하냐면서 따지고 들었고 아버지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엄마는 나를 신경 써서인지 낮춘 목소리로 소리를 뱉고 있었고 아버지는 덤덤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툼 소리는 무서우리만치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항상 조용한 밤을 꿈꾸었던 나였지만 항상 소음이 있던 밤이 조용해지자 째깍째깍하고 울리는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며 무언가 없어진 듯한 휑한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엄마는 나에게 인사도 없이(자고 있을 때에 들어와서 인사를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간단한 짐을 들고선 집을 나갔다. 아버지는 그런 것 따위는 크게 신경 쓸 일 아니라는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깔끔한 옷차림으로 밖을 나설 뿐이었고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사라져버린 그 소음에 대해서 그 누구도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다. 누구라도 이렇게 만들어진 잔잔한 공기를 반가워할리 없다. 


집에는 엄마가 불쌍하다며 데리고 왔던 고양이 한 마리만이 자신의 털을 두어 번 핥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본인이 키우려 데려온 고양이마저 신경 쓰지 못했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는지 그대로 뒤돌아보지도 않고서 집을 떠난 것이다. 늘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씨 따스한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으면서 정작 본인은 키우려 데려온 동물과 더불어 자식새끼마저 내던지고 도주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엄청난 허무함과 박탈감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나를 떠난 엄마를 마냥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긴 머리카락이 잘 어울리고 목소리도 사근사근하고... 아버지와 다르게 나에게 항상 다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엄마가 돌아왔을 때에 나를 보고 쇼우는 훌륭하게 자랐구나! 하고 칭찬을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씨 따뜻한 아이로 자라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는 햄스터를 사기로 했다. 무작정 나가서 찾은 애완동물 숍에 가서는 무작정 햄스터 15마리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는 어항 중에 가장 큰 투명한 어항, 그리고 장난감처럼 작은 햄스터 먹이, 햄스터들이 놀기 위해서는 쳇바퀴 도 필요하다며 추천하길래 그것도 여러 개를 함께 샀다. 자고 있는지 몸을 동그랗게 웅크린 햄스터들의 작은 등은 찹쌀떡처럼 부드러워 보여서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집에 있는 고양이도 똑같이 사랑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노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그 고양이에게 한 마리 던져주었다. 내가 던져준 햄스터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금세 잊고 있던 야생의 발톱을 세우는 이 녀석을 보니 엄마 역시 아무도 모르게 숨겨왔던 야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고양이가 입 주위를 시뻘겋게 물들이며 햄스터를 발톱으로, 이빨로 물어뜯어 차가운 고깃덩어리로 온도를 낮추는 광경을 구경했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의 고양이는 쥐를 먹어본 적이 없는지 사냥은 했지만 시식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뻘건 생물을 앞에 두고 재미없다는 듯이 제 발톱에 묻은 더러운 피를 혀로 할짝할짝 핥으며 도도하게 꼬리를 세우고는 다른 장소로 자리를 옮겨갈 뿐이다. 나는 한참을 관찰하다가 죽어버린 햄스터의 작은 손을 슬쩍 잡아선 창문을 열고 던져서 버렸다.











-

시간이 흐르며 나는 엄마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목소리가 어땠는지, 점점 잊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 당연한 일인 듯이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야 많았지만 엄마가 00있을 때에나 간단한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누었던 사이였던 우리였기 때문에 딱히 대화를 할 필요도 없었고 아버지는 계속 바빴다. 조금 안쓰러웠는지 자신의 부하 몇 명을 나에게 보내주며 나를 돌보게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의 관심이 꽤나 고파서 잘 따랐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조금씩 변하는 그들을 보며 내가 바라는 관심의 정도와, 돈을 조건으로 주는 이들의 관심은 형태가 달라도 너무나 다른 것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초능력이라는 특수한 능력을 굉장히 사랑했던 아버지는 내가 본인과 똑같다고 믿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같이 갈 곳이 있다며 따라나선 곳은 조금은 신나게 뒤를 따른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초능력 발전소였다. 병동 같은.. 아니 병동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그 이상한 곳은 돈 많은 아버지의 건물이니 굉장히 크고 깔끔했지만 안에 있는 환자 비스무레한 사람들의 상태는 굉장히 이상했다.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좀비같이 축 늘어진 데다 초점이 사라져 있었고, 누워있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사람들을 보자 실험의 흔적이 훤히 보이는 역겨움이 공기에 세세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이 곳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를 이 평범한 재능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괴로워하면서도 그 특수능력을 굉장히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이미 그 재능이 있는 나로서는 분명히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지기에 지루하게 쳐다보게 되었지만 아버지가 이런 것으로 사람들을 이용하고 버릴 것이라는 것은 감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집회는 나가지 않았으니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최 측근들인 '오초' 정도였다. 그들과는 그래도 꽤 친하게 지냈다. 그들 중 세리자와는 다른 이들로부터 사장의 비즈니스 와이프가 아니냐며 놀림을 당하고 있었는데 내 앞에서는 절대로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룰이었는지 나는 그가 그렇게 놀림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한참 동안이나 몰랐다. 한참 후, 내가 있을 때 눈치 없이 '야, 비즈니스 와이프!' 하고 하토리가 세리자와를 불렀을 때 알게 되었다. 물론, 나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동의했다. 뒤에서는 아직도 그렇게 불리고 있었을 것이지만 내 앞에서 그 말을 꺼낸 이후로는 다시는 내 앞에서 세리자와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들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세리자와는 그렇게 불릴 법도 했던 게,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그만큼 잘 대해주었다. 나를 학교에 입학시켜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했던 것도 세리자와였다. 내가 혼자서 밥을 챙겨 먹지 못하는 사람도 아닌 데다 정식으로 요리를 해주는 사람을 부르면 되는 간단한 문제를 갑자기 자기 혼자서 나에게 밥을 해준다며 한 번씩 오다가, 점점 횟수가 잦아지더니 이제 대다수의 시간을 우리 집에서 함께 했다.


"쇼우군 일어나! 학교 가야지!"


본인도 사회생활을 못해서 방에 틀어박혀 있었던 주제에 말은 잘했다. 나이를 먹으면 꼰대가 되는 것은 다들 똑같나 보다. 세리자와가 웃으면서 차려준 아침식사는 거창하게 차린 것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주었다. 오늘은 바싹 구운 토스트와 부서져서 지저분하게 접시에 담긴 계란 프라이였다. 계란 프라이의 모양이 지저분해도 일단 계란 프라이였으니 맛은 있었다.


"... 세리자와,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으.. 응 뭔데?"

"혹시 아버지에게도 요리해준 적 있어?"

"아니 없는데?"

"그래? 의외네. 다른 사람들이 와이프라고 부르는 이유가 뭔가 있겠지 싶었는데"

"하하... 쇼우군.. 그건 다른 애들이 말실수한 거야 그런 거 아냐.. 하하.. 그리고 사장님은 아침은 안 드시잖아. 나머지는 주로 밖에서 드시니까.. 사장님은 오늘 아침에도 엄청 일찍 나가셨어. 어제 늦게까지 힘드셨을 텐데... 나도 열심히 해서 사장님처럼 되어서 사장님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리고 싶어."

"....... 이 정도면 종교네 종교"

"응?"

"아냐"


세리자와는 내가 봐도 많이 변했다. 사회에 나설 수 있도록 그를 인도해준 사람이 아버지였으니 이렇게 고맙게 생각할 법도 하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처음에 아버지가 세리자와를 데리고 왔을 때의 첫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에 그는 아버지의 뒤를 바짝 쫓아오며 손에는 빗물에 젖은 우산을 꼬옥 쥐고서 마치 감옥에 10년쯤 갇혀있다가 나온 범죄자처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잔뜩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방 구석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가 이렇게 나에게 말도 걸어주고, 자신의 주장도 이야기할 정도로 사회성이 좋아진 것에 대해서 아버지의 영향이 상당히 크게 끼쳤던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영향을 받고, 그 영향으로 나도 변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막연한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교가 귀찮게 느껴졌지만 별말 없이 따른 것이었다.



학교는 쵸미시에 있는 어느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초등학교는 엄마가 있을 적에 잠깐 다녔었는데, 3학년 때에 반에 있는 어떤 아이와 별것도 아닌 이야기로 심하게 다투다가 서로 코피를 흘렸다. 어린아이들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주먹을 휘두르면서 싸우기도 한다는 게 아버지의 이상스러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됐었는지, 아니면 내가 피를 흘리면서 온 것이 패배자처럼 하찮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흰 티셔츠에 후두둑 묻어 있는 핏자국과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을 인상을 잔뜩 찡그린 얼굴로 한참 쳐다보고서 다음날부터 학교에 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이후로는 학교에 간 적이 없지만 어떻게 했는지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졸업장은 나왔다. 그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학교의 기억이 많지는 않았기 때문에 고등학교는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조금은 품었다. 그리고 항상 품는 막연한 기대는 역시 잘못되어 있었다. 그 학교는 모두가 거지새끼 같았다. 우선 이상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소리를 높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시끄러웠고, 장난이랍시고 하찮은 지우개를 훔쳐서 달아나는 것도, 그것을 되찾으려 필사적으로 쫓는 것도, 숙제를 해오지 않아서 급하게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달라며 구걸을 하는 것도... 모두 다 꼴불견이었다. 


내가 있는 반의 반장으로 보이는 어떤 여자애는 나에게, 스즈키... 쇼우 군 이지?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걸 한 번도 못 들어봤어. 부 활동 같은 건 하고 있니? 하고 가식적으로 웃으며 묻기도 했는데, 그런 대답할 가치 없는 질문 역시 무시했다. 그 이후로 다른 아이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이 정도였다. 세리자와와는 다른 형태로 구석에 처박힌 곰팡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얼마 후,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학교의 규율을 전혀 지키지 않아도 나를 건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미 아버지가 누군가를 시켜서 행한 권력 탓에 선생님들도 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혼내지 않고, 그렇다고 예뻐하지도 않았다. 보통 이런 곳에 찾아와서 아버지의 말을 전하는 것은 주로 시마자키였다. 그리고 분명 시마자키는 특유의 껄렁껄렁하고 재수 없는 말투로 협박에 가까운 부탁 아닌 부탁을 했을 것이다. 그의 태도에 선생님들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선생님들은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딱히 아이들과 말을 하지 않는 나였기 때문에 나도 조용히 숨을 죽이고 시간만을 지키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것 역시 묘한 기분이었다. 싸구려 집단 안에 속해 있는 투명인간.


그날도 돌아와서 고양이에게 햄스터 한 마리를 던져주었다.

고양이는 여전히 입가에 피를 묻히며 물어뜯고,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햄스터가 발톱 아래 깔려서 바둥대는 것까지 전과 비교했을 때에 다른 모습은 없었다.


고양이는 얌전히 죽은 햄스터를 물고 내 방 앞에 살포시 놓았다. 지난번에 만졌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피투성이 햄스터의 작은 손은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만지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별일이 없으면 3일에 한번 오는 청소하는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메세지를 남긴다.


[고양이가 햄스터를 물어 죽였어요. 바로 와서 치워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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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결혼을 하고 싶은가? 아니, 어째서 다른 여자가 아닌, 지금 사귀고 있는 이 여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싶은가? 수많은 고민들 중 그것부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퍼펙트 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여자친구의 장점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굳이 결혼하고 싶은 이유를 말해야 한다면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라는 답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내 능력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어떻게 하면 나와의 결혼에 대해서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줄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정말이지 온종일 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여자친구가 허락하더라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이라던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상황들이 내 발목을 잡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힘들었다. 혼자서 이렇게 큰 고민을 앓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것이었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만난 친한 형님의 말로는 결혼이 뭐 별거냐며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자신과 결혼을 할 사람은 운명처럼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내가 이 사람과 결혼을 하겠구나!' 하고 알아본다던데 그런 식으로 결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의 대부분은 슬슬 결혼을 할 때가 됐고, 마침 이 시기에 옆에 있는 '좋은' ('좋은'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사람과 하는 거라면서 얼굴이 예쁘다거나, 뭐 설렌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크게 상관이 없는 문제라며 나에게도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얼굴은 늙으면 다 똑같고, 설레는 마음도 얼마나 가겠냐는 것이 그 형님의 주장이었는데 그것은 나도 공감을 하고 있는 부분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미 결혼을 한 이 형님이야 당연히 결혼이 별거냐면서 쉽게 이야기를 하겠지만 이 형님도 처음에 프러포즈를 할 때엔 나와 같이 덜덜 떨었을 것이고, 지금의 형수님께 프러포즈를 하려고 고민하던 당시에는 그 무엇보다도 커다란 별일이었을 것이다. 큰 도움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더욱 생각할수록 불안해서 미치겠고, 미치겠기에 더 생각하게 되는 이런 악순환에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 같았다. 


곧 만나기로 했는데 장난치듯이 한 번 떠볼까? 참, 만약에 프러포즈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꽃다발은 사야겠지? 얼마나 사야 하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나? 들고 가기 힘들 텐데.. 반지도 살까? 부담스러워한다거나 그러진 않겠지? 아니, 이런 방식은 조금 구식인가?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고민을 하루 종일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을 하다가 겨우겨우 잠드는 것이 최근의 일상이었다.



오늘 만나면 말해야지, 아니다 내일 하자.. 아무래도 준비가 부족하니까 일주일 후에... 앗 벌써 일주일이 지나버렸어? 그럼 이틀 정도 조금 더 생각을 해보고.... 자신감을 상실해서는 자꾸 날짜만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주말, 여자친구는 평소의 주말 때처럼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했다. 그 말에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릴 겸 나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조금 더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면 내 결심이 조금은 더 확고해지고 조금은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몇 번 갔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낯설다거나 어색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여자친구를 반기는 아이들이 나에게 왜 이렇게 안 왔었냐며 투정 섞인 애교를 부리면서 앞으로는 더 자주 오라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선 이제 자주 오겠다며 이야기를 했다. 


별난 중학생 녀석들에 비하면 이 녀석들은 지나치게 평범한 것 같았다. 하얀 도화지 같은 순수함이 내 마음을 밝게 만들고, 부담 같은 것도 없이 편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내가 이 아이들을 편하게 생각한 만큼 아이들도 나를 좋아했다. 우선 이곳은 봉사활동을 오는 남자도 많지 않았고, 말을 재미있게 해서 인지 아니면 나의 철없는 부분에 동질감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친구에게 하듯이 나에게도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자 모브가 떠올랐다. 아, 갑자기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래, 모브 동생 녀석..... 공부도 잘하고 잘났다 이 새끼야. 잘난 건 알겠는데, 뭐? 조언이나 충고 같은 거 들을 이유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 뒷골땡겨.. 기껏 생각해서 연락했더니... 역시 그 새끼는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싸가지없고 재수 없는 녀석이었다. 역시 잘난 새끼들은 다 그 모양 그 꼴이다. 

그래도 나는 한번 더 이야기를 해 볼 생각으로.. 혹시나.. 혹시 몰라서 다시 스즈키라는 녀석에게 전화를 했는데 이미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문만이 울렸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레 그와의 연락을 포기하게 되었다.


떠오른 김에 돌려줘야 할 것도 있고 해서 모브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을 할때애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려다 그만 옆에 있는 양동이에 핸드폰을 빠트려 버렸다. 아, 뒷골땡겨..




고장 나버린 핸드폰. 조금은 울적해하는 나를 풀어주려 여자친구는 옆에서 어차피 핸드폰도 새로 바꿀 때가 되지 않았냐면서 핸드폰이라도 구경하고 가지 않겠냐고 애교 섞인 말로 물었다. 핸드폰이야 정말 바꿀 때가 되긴 했지만 내가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바꾸는 것과 강제로 바꾸는 것은 명백하게 다르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옆에서 나를 위로하려 이 말 저 말 하는 걸 보며 이만 기분을 풀어야겠다 싶어, 이 기회에 가장 좋은 걸로 바꿔야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근처의 핸드폰 대리점에 들어가서는 반짝반짝한 신형 핸드폰을 구경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삼일 후, 나는 여자친구에게 드디어 프러포즈를 했다. 친구들이 말했던 것처럼 화려하다거나, 인터넷이나 라디오 사연에 채택될 만큼의 거창한 프러포즈는 아니었지만 나는 나와 어울리는 소소한 방식으로 지금까지 가본 적 없는 고급 와인바에서 확 트인 야경과 함께 꽃다발과 반지를 주면서 결혼해달라고 청혼을 했다. 유창하게 말도 잘하는데 이상하게 그 상황에서는 입이 얼어붙은 듯이 꼼짝을 안 하고, 갑자기 손을 무릎에 놓아야 할지 테이블에 얹어야 할지, 어디에 두어야 할지도 몰라 안절부절하며 꼴이 엉망진창이었지만 여자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불안해하는 내 손을 잡아주면서 '나도 레이겐씨와 결혼하고 싶어' 하고 웃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집에 돌아와서 프러포즈 하기 전에 샀던 최신 핸드폰을 열었다. 전 핸드폰이 먹통 상태가 되어 모든 데이터를 흔적도 찾아 볼 수 없다고 해서 또다시 절망하긴 했지만, 프러포즈를 성공한 지금은 아무 감각도 없이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에 꿈속을 걷는 것처럼 머엉하기만 하였다. 이제 막 개통이 되었는지 여자친구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잘 들어갔어? 핸드폰 개통하고 내가 처음 보내는 문자 맞지? 우리 새롭게 시작하자!]


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보자마자 몰아치는 행복함이라는 것에 파묻혀 침대에 털썩 누워서는 베개를 와락 끌어안았다. 실감이 나면서도 실감 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이 척척 풀렸다. 상견례를 했을 때도 여자친구의 부모님은 예상외로 나를 굉장히 좋게 생각하셨고 나의 부모님 역시 말할 것도 없이 여자친구를 좋아했다. 그렇게 양가의 허락도 다 얻은 우리는 천천히 날을 잡고 결혼을 준비하자고 하며 손을 꼭 맞잡았다. 소소한 행복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행복감에 만취해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혼은 1년 후에 하기로 했는데, 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결코 많지 않은 시간이었다. 우선 여자친구의 학교와 내 직장의 거리를 둘 다 만족시킬 신혼집을 찾아야 했고, 결혼식장도 최대한 예쁘고 깔끔한 곳으로 찾으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다. 신혼여행, 청첩장, 결혼식에 입을 드레스와 턱시도, 등등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자질구레한 모든 일들이 너무 많아서 하루 종일 알아보고 비교하고 상담하고를 반복했다. 그런 과정에서 여자친구와 가끔 부딪치는 일은 있었지만 결혼 준비 중에 일어나는 일이니 좋게 생각하자고 이야기하며 풀어나갔다. 드디어 나에게도 생기는 가정의 무게가 서서히 묵직하게 느껴지면서 이제 나도 조금은 철이 드는 건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봉사활동도 항상 함께 갔다. 전에는 여자친구가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제는 함께 만나는 아이들이 되었기에 같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D가 고민이 있다는데.. 이런 부분이 조금 불안한가 봐~ 우리가 도와주자. 하는 식의 대화를 할 때가 많았다. 이렇게 공감대가 형성된 우리는 틈만 나면 애정 어린 걱정을 섞어 봉사활동에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다. 더 이상 여자친구는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모브에 대해서 물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나 역시 새롭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아이들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시간이 스쳐지나가 결혼식을 세 달 정도 앞두고서야 이제 조금 하나씩 정리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슬슬 지인들에게 주소를 물어 청첩장을 보내고, 가까운 곳에 있는 지인들에게는 직접 만나서 청첩장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시골에 계신 할머님에게 직접 청첩장을 전해드릴 생각으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원래는 여자친구도 함께할 예정이었지만 그날 갑작스럽게 학교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오래간만에 찾아뵌 할머님은 드디어 결혼을 하냐며, 두 손을 꼭 잡으시면서 혹시 나 살아있을 때 결혼하는 거 못 보고 죽으면 어쩌나 진심으로 노심초사했다는 둥, 손주는 볼 수 있냐는 둥 전형적인 할머니들의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으셨고 나는 적당히 받아주며 차 한 잔을 얻어 마시고는 자리를 떴다.


할머님이 이야기하시는 손주, 결혼 등등의 걱정 소리를 잔뜩 듣자니 다시 조금은 실감이 나기도 하고, 다시 느껴지는 책임감에 걱정 섞인 허탈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여자친구 때문에 담배도 줄이고 있었지만 휑하고 허전한 속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담배를 한 대만 필 요량으로 편의점에 들어갔다.


마일드세븐 하나 주세요.


하고 지갑을 꺼내려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을 때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내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들었다. 뭔가 해서 뒤를 돌아보자,


어? 정말 맞았네? 레이겐 스승님?!


하고 반가움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활짝 웃는 학생. 아.. 이름이 뭐였더라...


스승님! 저 기억하시죠? 오랜만이에요. 카게야마군의 친구 하나자와 테루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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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살 좋게 웃으면서, 오랜만인데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사주세요! 하고 잡아끄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카페에 들어와서는 얼떨결에 주문도하고 계산도 마쳤다. 달달한 커피에 조각 케이크까지 뻔뻔하게 주문하고서 웃으면서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스승님! 하고 눈웃음을 짓는데, 전에 모브가 하나자와는 잘생겨서 지나가는 여학생들도 모두 설레는 눈동자로 서성이며 쳐다보고, 부모님도 저렇게 잘생긴 친구가 있었냐고 물었다는 편지의 문장이 떠오르면서 잘 생기긴 했네..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그나저나 엄청난 우연이네?

아, 저는 이 근처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요. 오늘은 가족모임이라서 왔어요. 스승님은 이 근처에 살고 계신 거예요?

아니, 나도 청첩장 주러 우연히 왔어.

청첩장? 결혼하세요?


하나자와는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응, 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리고 내 나이가 몇인데~ 할 때 됐지 뭐.


말하고 나니 뭔가 부끄럽기도 하고 놀라 하는 이 녀석의 눈빛에 민망하기도 해서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랐어요... 어쨌든 축하드려요!

고마워. 올 수 있음 너도 올래? 멀어서 오긴 힘들겠지만.. 와서 밥이나 먹고 가


말을 꺼내놓고 초대를 안 하기도 뭐 해서 형식 상으로 하얀 청첩장을 내밀었다. 하나자와는 감사합니다 하고 청첩장을 받아들고는 물었다.


카게야마군도 가죠?

응?


하나자와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조금은 당황해서 우물쭈물거리다가 말했다.


모브.. 는 요즘 연락을 통 안 해서..

스승님도 연락을 안 하시는 거예요?

아무래도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나저나 넌 어떻게 지냈니?


모브의 이야기를 내가 하기에는 조금 거북한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아서 황급하게 화제를 돌려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은 그의 근황을 물었다.


저야 뭐.. 학교 가서 공부하고.. 그냥 그렇게 지내죠 뭐.


하나자와는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이어 말했다.


역시 스승님도 어쩔 수 없으셨나 보네요..  하긴 뭐.. 당연하겠죠...

응? ... 아. 으응...


무엇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이 녀석이 하는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곧바로, 내가 알고있는 모브가 아니라 이 녀석에게 모브 녀석의 근황을 듣고 싶어서 슬쩍 물었다. 


넌 모브랑 자주 만나니? 모브 녀석은 어떻게 지내?

저도 못 만난 지 꽤 됐어요. 저를 만나고 싶지 않은가 봐요. 연락을 해도 답도 없고.. 찾아가도 못 만났어요. 그렇게 텀 두고 몇 번 찾아가고, 연락하고 하다가 이제 저도 그만뒀어요. 뭐.. 사람이 너무 슬프면 위로도 받고 싶지 않을 거고.. 관련된 모든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거든요... 저랑 동생 군이랑 스승님이랑 에쿠보군까지 모여서 여러 가지 일이 많이 있었잖아요...

에쿠보?

? 왜요?

에쿠보가 살아있니?

...네?...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하나자와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내 말에 짓는 황당한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동생 군의 일기를 받아서 본지 벌써 1년 즈음이 지났다. 꽤 지난 시간이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선 더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 아니다. 모브는 다른 사람 만나는 걸 서툴러 하니까.. 너무 상처받지 마..

상처 안 받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자와는 그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이 마지막에 만났을 때에 카게야마군은 어땠어요? 저는 못 봤지만 주변 사람들 말로는 조금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던데.. 어땠나요?

마지막?

그날.. 본 게 마지막 아니에요?

그날? 나 이사했던 날?

... 뭐야 지금 장난치시는 거예요?

아니, 나 지금 정말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날이 언젠데? 


내 말에 하나자와는 조금의 뜸을 들이면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을 하듯이 천천히 입을 열고 말했다.


...장례식이요..

..장례식이라니?


내 물음에 다시 하나자와는 다시금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르시는 거예요? 설마?

장례식이라니. 좀 정확히 말해봐.



...카게야마군의 동생군이요...... 죽었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죽어? 하고 내가 반문하기까지는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였다.


하나자와는 충격받은 나의 표정을 보고서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모르셨구나.. 저도 카게야마군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에요. 그래도 스승님은 알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는 저희 학교 애들이 수군대는 말을 우연히 듣고 알았어요. 시오중에서 전학 갔던 그 유명한 애 있잖아 카게야마 리츠인가? 그 애... 죽었데.. 하고 이야기하더라고요. 시오중에 어떤 여자애 한 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어서 그렇지 않아도 다들 미세하게 떨고 있는 시점에서 전학 간 카게야마군의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까지 겹치다 보니 시오중의 분위기가 말도 아니었데요. 게다가 몰랐는데 그 실종된 여자애랑 동생 군이 꽤나 가까운 사이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자살이 아니냐, 혹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게 아니냐, 하는 소문이 많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고... 사고사래요.. 제가 알았을 때 장례식은 이미 끝나서 참석을 못했어요. 카게야마도 연락을 받지 않아서 뭘 물어볼 여유도 없었고요... 


얼빠진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헤어졌다. 헤어질 때에 하나자와는 나에게, 카게야마군은 스승님의 연락이라면 기다릴지도 모르는데... 한번 해보세요. 괜찮아 보여야 할 텐데 말이에요. 하고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조미료시의 뉴스를 하루 종일 찾아보았다. 8~9달 전의 기사에 기이한 자연재해사고라고 쓰여있는 기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 동생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현장에서 발견한 학생은 3명, 1명은 사망, 1명은 중상, 1명은 가벼운 경상을 입었다고 쓰여있었다. 그리고 중상을 입은 학생은 결국 뇌사상태에 빠져 S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쓰여 있었다.


죽어? 갑자기? 사고? 무슨 사고? 

한참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모브의 연락처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핸드폰이 리셋된 이후로 모브의 번호는 이미 내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았고, 모브에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물론 무섭다. 나 역시 편지를 받으면서 모브의 동생만큼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모브가 무서웠다. 하지만 이런 소식을 듣고도 모르는 척을 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큰 소식이었고, 모브가 얼마나 그 동생을 아끼고 좋아했는지를 알고 있는 나의 입장에서 이런 큰 일을 모르는 척을 하기엔 스승이기 전에 인간으로써 너무도 무책임한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아직 내가 보관하고 있는 동생 군의 일기장을 보면서 이제는 주인이 없는 유품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내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뒤에 연차를 쓰고 동생 군의 일기장을 챙겨서는 조미료시에 직접 찾아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재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그 학생을 찾아 S 병원을 찾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입원해 있었다. 그 병원에 뇌사상태인 학생은 그 학생 밖엔 없어서 찾기는 쉬웠다.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지 이름을 몰라도 그 뇌사상태의 환자..라고까지만 말해도 안내해주었다. 간호사의 말로는 내일이면 해외로 옮겨서 진료를 한다고 했다면서 내일 오셨으면 헛걸음할뻔하셨네요 하고 호실을 안내해주었다. 그 학생은 예상대로 스즈키라는 학생이 맞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고 유리창 너머로만 환자를 볼 수 있었는데, 동생의 일기와 모브의 편시에 쓰인 것과 동일하게 주황빛을 띄고 있는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그가 모브의 동생을 도왔던 그 학생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누워 있는 모습은 차분하지만 이 병실에 누워 있기 전에는 꽤나 활발하고 건방진 녀석이었을 것이라는 이미지가 바로 느껴졌다.. 그리고 드는 생각. 자연재해 같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구나.



하나자와의 말로는 모브를 만날 수가 없다고 했기에 나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혹여나 만나지 못하면 모브의 집 우체통에 일기장이라도 넣어두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모브의 집을 찾아갔다. ..사실 만나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이 나에게 조금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져버린 것에 대한 아련함 때문인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주변이 꽤나 바뀌었는데도 모브의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집은 불이 다 꺼져있었고 항상 정돈이 되어 있던 작고 좁은 정원은 다 말라비틀어져 수척한 모습을 띄고 있었다. 눈에 띄게 보이는 우중충한 분위기가 모브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 역시 눈시울이 조금은 뜨거워 오는 것이었다. 조심스레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도 없는지 바람소리와 함께 유난히 시끄러운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번 더 누르려 손가락을 초인종에 가져다 댔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모브가 헤어졌을 때 당시와 별로 다를 것 없이 내 앞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저.. 모브..

어쩐 일이세요?

.........


모브의 새삼 덤덤한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대답을 못 했다. 모브는 나를 반가워하지도 않고, 갑자기 나타난 나의 등장에 놀라지도 않고서 말했다.


저 지금 짐 놓고 놀이공원 갈 건데.

...놀이공원?

같이 가실래요? 싫어하려나

아냐, 가자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이라는 것이 조금 뜬금없고, 이런 우중충한 날씨에 웬 놀이공원인가 싶었지만 군말 없이 모브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모브는 가는 버스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턱을 괴고는 창문을 바라보면서 혼자 피식피식 웃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하나자와가 '주변 사람들 말로는 조금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던데...'하고 끝을 흐리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갑자기 음음~ 하고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뜬금없이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내가 혹시나 해서 저.. 모브.. 하고 말을 걸면 그때에만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나에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도착한 놀이공원은 사람도 없는 한적한 놀이공원이었다. 스릴 있는 놀이기구도 없어서 주말이면 몇몇 어린아이들과 동반한 부모님 정도만 오는 그런 곳이었다. 시설이 그렇게 좋지 않은 만큼 입장권 역시 비싸진 않았다. 내가 사주겠다면서 입장권을 구입하자 모브는 가만히 날 쳐다보다가 솜사탕을 사야겠다면서 혼자 쪼르르 가서는 커다란 분홍빛 솜사탕을 사서 들고 왔다. 


놀이기구.. 탈 거니?

아뇨


모브는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고는 놀이공원의 한쪽 벤치에 앉아서는 솜사탕을 뜯어 먹었다. 나는 모브의 눈치를 보면서 옆에 목석처럼 굳어서는 앉아 있었다. 


저.. 모브.. 

... 잘 지냈니?

..소식 대충 들었다..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

네가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

힘들었겠구나...... 그 시기에 함께 있어주지 못 해서.... 내가... 뭐라고 해야 할지....

스승님


모브는 덤덤한 목소리였다.


무시하셨잖아요.

...응?


무시라니.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편지도 안 받으셨잖아요. 근데 뭐..., 괜찮아요.


모브는 다시 솜사탕을 한 움큼 뜯어서 입안에 넣었다. 그 상황에서 '핸드폰이 고장 나버려서... 아마 그 시기에 네가 연락을 한 것 같다, 게다가 내가 요즘 결혼 때문에 조금 바빠서......' 하고 받은 연락이 없다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너무나도 구차했다. 죄인이라도 된 마냥 입을 다물고 신발 끝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날씨는 더 어둑어둑해지면서 곧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컴컴해졌다. 당연히 놀이공원에는 나와 모브 외에 표정없이 돌아다니는 경비원, 기계적으로 돌아다니는 몇몇의 환경미화원 외에는 없었다. 오래된 탓에 녹슬어버린 곳곳의 장비들탓에 마치 폐쇄된 공간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놀이기구에서 나오는 발랄한 음악소리도 그 순간엔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아, 구름 되게 많다, 비 오려나봐요 얼른 먹어야겠다 솜사탕은 비가 오면 녹아버리니까


모브는 그렇게 혼자 말하고는 솜사탕을 마구 뜯어서 제 입안에 넣었다. 나에게 드실래요? 하고 한번 묻고는, 안 드실 거죠? 하고 저 혼자 답하고는 꾸역꾸역 다 먹어치웠다. 하나자와의 말대로 모브는 정말로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어떤 부분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다행이다


모브는 뜬금없이 날 보고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스승님이 혹시나 저에게 제령을 하자고 하면 어쩌나 조금 고민했어요. 

무슨 소리야... 이제 그런 거 안 해.

이제 돌아갈래요. 솜사탕도 다 먹었으니까요. 


모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벤치에서 일어섰다. 모브는 정말로 뭔가 모르게 이상했다.


저.. 모브.. 이거 일기장 말인데.. 돌려주려고.. 유품이잖아..


나는 돌아가는 길에 타이밍을 봐서 모브에게 일기장을 건네었다. 혹시나 모브가 이 유품을 보고 발작적으로 커다랗게 소리를 지르면서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모브는 그 일기장을 보더니 나를 다시 쳐다보고는 웃으면서 일기장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말했다.


유품이라뇨?

이거 네 동생 거잖아?


모브가 덤덤하게 네 하고 대답을 하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안 보이세요?


모브는 뜬금없이 나에게 물었다. 뭐가? 하고 묻기도 전에 모브는 내 대답을 가로채듯이 말했다.


됐어요.


모브는 일기장을 받아들고는 가방에 넣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도 한마디도 없었다. 집 앞에 와서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다면서 나에게 잘 지내세요 하고 건조한 인사를 건네고는 집 문을 닫고는 휑하니 들어가 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모브의 집 앞에서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겨우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열어본 핸드폰에는 여자친구에게 내일 봉사활동 일정에 대한 문자가 와 있었다. 그래, 내일 9시 반에 복지관에서 보자 하고 답장을 하고는 복잡해진 심정을 잡으려 눈을 감았다. 


하늘엔 솜사탕 같은 구름이 잔뜩 햇빛을 가리고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내 위를 막아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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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서 혹시 몰라 책상 서랍을 뒤져보니 내가 읽지 않은 모브의 편지 두어 통이 있었다. 아마 결혼 준비 탓에 내가 인식도 못하고는 서랍에 마구 쑤셔 넣은 것이 분명했다. 읽지 않은 그 편지들 중 마지막 편지를 뜯어서 살펴보았다. 눈에 띄는 부분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스승님, 리츠의 옆에는 정말 이상한 친구가 있었어요.. 아마 저에게서 도망치듯이 행동했던 것도 아마 이 녀석이 리츠를 살살 꼬드긴 것이 분명해요. 제가 전에 말했던 그.. 스즈키라는 친구예요. 정말 웃기는 놈이에요. 제 앞에서 리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 있죠? 리츠 역시 그런 그의 행동에 당황했을 거예요... 저 역시 너무 화가 났어요.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리츠는 인기가 많아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내 옆에 있는 것을 리츠는 좋아할 거라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거죠.

스승님은 전에 저에게 사람에겐 초능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하셨었지만 가끔은 필요하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스즈키라는 녀석은 이곳도 저곳도 아닌 기괴한 경계선에서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형태로 멍하니 흐름을 타고 갈 거예요.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눈을 뜨더라도 행복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리츠는 제 옆에서 평생 행복할 거예요. 그렇죠? 제 옆에서 존재하는 현재를 가장 행복해하겠죠? 

엄마와 아빠는 저를 볼때마다 항상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울어요. 시게는 전혀 실감을 하지 못하는구나.. 어쩌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니? 그런 모습이 더 슬프다.. 하고요. 엄마는 제가 너무 큰 슬픔에 현실을 인식을 하지 못하는 거래요. 하지만 저는 슬프지 않은걸요. 울어야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음... 아! 딱 한가지 조금 아쉬운 건 있어요. 리츠가 에쿠보처럼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서서히 잃어가는 것 같아요. 그건 조금... 슬퍼요.]





....


동생 녀석이 모브를 무서워 한 것은 괜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나와 모브가 만났던 그 순간에도 동생은 쭉 옆에서 영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이상할 정도로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평생 모브의 옆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면.. 영체로써 살아있을 때의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편지의 이상한 구절을 읽고 나서, 그동안에 모브에게 받은 모든 편지를 다 모은 다음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품에 있는 라이터를 조심스레 켜서는 편지에 불을 붙였다.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어서 잘 붙지는 않았다. 한참을 바람과의 싸움 끝에 불을 붙이고 새빨간 혓바닥이 그 편지들을 개걸스럽게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빳빳했던 종이들이 까부러치듯이 불이 닿자마자 말려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씁쓸하기도 하고,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다. 탁탁 소리를 내며 그렇게 타오르다가, 까만 잿가루로 변해버린 편지 쪼가리들은 멀리서 부는 바람을 타고 저 먼 구름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저 먼 곳의 뭉게구름은 생김새는 비슷해도 결코 솜사탕처럼 달콤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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